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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설교(76)
안식일에라도......
본문 : 눅 14:1-6 (신 119)
<예수님 당시 사회, 종교적 배경 이해>....
복음서를 이해하려면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처한 역사적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모세에 의해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은 BC 1,400년경
가나안 땅에 정착합니다.
그 후 사사시대를 거쳐
다윗 시대에 가장 강성한 왕국을
이룹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솔로몬이 죽은 뒤
왕국은 남북으로 갈라집니다(BC 933년).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10지파를 연합하여 세운 나라입니다.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합니다.
남유다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타락한 북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시리아왕 사르곤 2세에게
멸망당하였습니다.
앗시리아는 적극적인 혼혈정책을 사용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 10지파의 후예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남유다도 BC 586년
바빌로니아왕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수도 예루살렘을 점령당하면서
멸망하였습니다.
왕족들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다니엘).
그 후 BC 538년 페르시아가
바벨로니아를 점령하고 .....
고레스 왕에 의해 유대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BC 539-336).
학개, 에스라, 스룹바벨, 느헤미아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귀국 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러나 독립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식민지배하에 있었습니다.
BC 4세기에는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 군대의 통치 하에
들어갔으며(BC 336-165).....
잠시 독립선언을 하는 시기가
마카비 때(BC 165-63)가 있었지만.....
다시 로마의 식민지배로
이어졌습니다(BC 63).
로마 지배 하에서 벗어나기 위한
거국적인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
로마제국의 티투스 황제에 의해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전파되고 말았습니다
(통곡의 벽, 마사다에서의 최후의 항전)......
이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면서 1948년 팔레스틴에 정부를
다시 세우기까지 무려 1813년 동안이나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사는
유랑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예수님 시대로 돌아가
그 시대의 종교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 셀롯파의
4개의 종파가 있었습니다.
이 그룹들을 세상과의 관계로 생각해보자면,
첫째, 세상과 상관없이 율법을 준수한 바리새파
로마의 압제에 놓이면서
이전의 "하시딤"(하나님의 충성된 자들)에서
발전하여 바리새인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정치적인 일들보다는
종교적인 일에 전념해 온 집단으로 ...
최고 관심사와 기쁨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데 있었습니다.
바리새파들은 '분리된 자'의 뜻으로 ....
그 자신들을 이교도나 세리,
세속적인 정치인들과 분리했고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했습니다.
외세의 종교와 문화로부터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운동에서 시작.....
그 기준이 얼마나 엄격한지
성전의 문을 여닫는 것도
노동이라 하여 그들의 손으로 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열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 표준으로 판단할 때
그들은 모범적인 유대인들이었습니다(빌3:5-6).
당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랍비도 바리새인 전통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되었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거부하게 됩니다.
과유불금이라고 그들의 행동이 지나쳐
오히려 형식주의와 외식에 빠지는
모순을 가져오게 되어
예수님의 비판을 받게 됩니다.
둘째, 세상과 타협한 사두개파 ...
바벨론 포로 귀환이후
지나치게 성전의 권력과
부가 고위 사제직 그룹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이들은 무역과 토지 거래 등을 통해
부를 확대해 나가면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당시 그리스 정부에 긴밀히 협력하였고
헬라 문화를 수용하고 지지했습니다.
이러한 성전 중심의 신흥 귀족 계급을
일컬어 사두개파라 불렀습니다.
'사두개'라는 이름은
아마도 다윗 왕 시대에 대제사장으로 오른
'사독'(삼하 20:25, 왕상 2:35)과 연관된 것으로써,
자신들이야말로 사독의 진정한 후계자들이라는
정당성을 담으려 하였습니다
(스 7:2, 겔 40:45f., 43:19 등).
이들은 동족들을 업신여겼으며
세상과 적당히 타협했기에
존경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이후
그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셋째, 세상과 아예 분리된 엣세네파 ...
엣세네파는 쿰란공동체로 알려진
동굴에서 세상과 떨어져 금욕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거하던 동굴에서
사해 사본 발견, 세례 요한도?).
넷째, 세상을 (무력으로) 변혁시켜보고자 한 셀롯파.....
셀롯파들은 테러와 폭력으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려는 열심당원들이었습니다
(마사다의 최후 항쟁, 960명
– 포로가 되느니 죽는편이 낫다고 결정하여,
먼저 자기 가족을 죽이고,
열 명씩 모여 제비를 뽑아
9명을 죽이고,
맨 마지막 남은 한 사람만 자결하였다고 함,
숨어있던 2명의 여인과 5명의
어린아이만이 살아남아 증언).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셀롯인 시몬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지도자의 초대를 받은 예수님>.....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기사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1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간단한 음식을 먹는데
보통 ‘떡’을 먹었습니다.
아마도 ‘떡’을 먹으러 오시라고
초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그 바리새인의 의도가 엿보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지도자의 내심을 알고 계셨지만....
예수님은 항상 당당하셨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기득권 세력 앞에서,
권력을 가진 자 앞에서 주눅 들기 십상이지만 ....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들 앞에 당당히 나가셨습니다.
이것이 선지자들의 공통적인 모습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음모
- 수종병 걸린 환자의 등장>....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뜻하지 아니한
한 사람을 만납니다.
2절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야! 나쁜 사람들. 떡 먹으러 오라 해놓고는...
수종병 든 한 사람이
바로 그 집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병은 근육조직에서 비정상적으로
물이 흐르는, 또는 근육이나 피부조직이
부어오르거나 확장되어 물이 고이는,
그래서 물을 빼내야 하는 질병입니다.
평소 유대인들은 이 병에 걸린 사람을
죄의 값을 받는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여
가까이 오는 것조차 꺼려하였습니다.).
그러니 평소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 집은 얼씬도 못할 곳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지도자이면
아마 최고 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원쯤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 높으신 양반의 집에
왜 하필 수종병 들린 사람이
얼씬거리고 있었을까 ?....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치밀한 계획(음모)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1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선수를 치시는 예수님>
이들의 계획을 모를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먼저 선수를 치십니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갑자기 기회를 잃어버린 바리새인들은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4절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먼저 선수를 쳐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치 아니하냐?”고 물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는데.....,
자기들이 물을 질문을 예수님이
먼저 하신 것입니다.
자기들이 오히려 시험을 당하는 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 대꾸했다가....
오히려 일을 그르칠까 싶어
묵비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현대의 법도 자기에게 불리한 때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를 주지 않습니까? ....
역시 만만치 않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묵비권’에도
흔들리지 않고 당신의 하고자
하시는 일을 당당히 하십니다.
4절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그 사람이 무서워 가까이 오지 못하자
“데려다가” 그들의 보는 앞에서
고쳐 보내셨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심>............
그리고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당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확보하셨습니다.
5절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예수님께서 이와 비슷한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 공관복음서에서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는 기사
(마12:9-13, 막3:1-6, 눅6:6-11)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불쌍히 보시고
고쳐주시려고 하시자 바리새인들이
곁에서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송사하기 위해,
법정에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마12:10절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 사람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대답하셨습니다.
<마 12장 11절-12절 읽어라>
1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절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그렇습니다.
사실 바리새인의 법에서도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안식일 법의 적용을 보류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구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한 경우에는
예외가 인정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종병 환자나....,
한편 손 마른 사람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분명히 병자의 생명이
위급한 상태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생명에 위협을 줄 정도로
중병도 아니며.....
다음날까지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시급한 병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마치 오늘 아니면
못 고칠 것처럼 급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우물에 빠진 아들이나
소에 비유하여 사랑의 행위(치료의 행위)를
시급하게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요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에서
38년 동안 앓고 있던 환자를
고치신 적도 있습니다.
그때도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비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
38년이나 묶은 병이
당장 급사할 병과는
다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고치지 않으면
당장 죽는 급한 병도 아닌데 .....
굳이 안식일에 고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당히 명령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예수님은 위험을 무릅쓰고
안식일에라도 사랑을 시급하게 행하셨습니다.
사랑을 베푸는 일,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안식일에라도 행해야 할 시급한 일입니다.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내일은 없습니다.
지금 해야 합니다.
<안식일의 바른 의미>.....
또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도(비난을 감수해 가면서)
치유활동을 계속하신 데에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셨던 것이었을까 ?
아마도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안식일 계명은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모든 계명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유대인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가장 쉽게
보여 줄 수 있는 외적인 표시오.....
앞으로 다가올 영광의
안식을 미리 맛볼 수 있는
쉼의 자리였습니다.
그러기에 이 안식일 계명은
다른 계명보다 더욱 엄격히
지켜야 할 당위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본래적 의미인....
인간을 자유케 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역할을 망각하고.......
이의 외적(형식적) 준수에만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약자를 억압하는
도구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사랑을 베풀고 병자를 고쳐줌으로서
안식일이 지향하는 참다운 뜻,
곧 인간의 구원을 가르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 그 정신을
망각한 채 형식만 남는 것을
가장 싫어하셨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
자유케 하려는 안식일이.....
도리어 사람을 얽어매고 정죄하고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참 안식일의 정신을
일깨워주기 위해,
일부러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입니다.
<구약의 법 정신>....
구약의 법 정신은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와 자비를 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안식일 법도 이 법 정신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이란 종, 나그네,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 등 연약한 자들에 대한 ....
하나님의 사랑의 관심을 표명하고
실천하는 날입니다(참조: 출23:1-12).
예수님의 안식일 치유행위도
‘생명을 구하는 일’이 안식일에
허용되었다면 .....
원칙적으로 그 법 정신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
(사랑을 행하는 일)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인간의 치유 행위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라는 것을
보여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안식은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안하고 무조건
쉬는 것이 안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사랑을 베푸는 것이
진정한 안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에
바리새인들은 아무 답변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6절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 비유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고통과 죽음의 위기에 처한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보여 주시려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든 것이
형식화되고 습관화되는 것을
경계하시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안식일은 바로
영혼구원의 날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주일로 지킵니다.
우리는 주일에 예배와 봉사를
목적하여 모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결코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율법화되고
형식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쉬는 날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영혼 구원하는 일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날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온 성도님들이 !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안식일의 참 정신을 깨닫고.....
주일에 모여 단순히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주일성수 했다고 자부하지 말고.....
서로 돕고 사랑하는 날로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