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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3월 건국대 명예교수 김건고문과의 인터뷰
■ 먼저 고향(故鄕)과 가족(家族)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수원(水原)이 나의 고향(故鄕)입니다. 부친(父親)은 석자(錫字) 형자(亨字)이시고 조부(祖父)는 황자(晃字) 규자(奎字) 이십니다.
내가 세살 때부터 10년(十年) 동안 조부(祖父) 밑에서 성장(成長)하면서 소학교 4년(小學校 四年) 까지 다니었으니 우리 가운(家運)의 일면(一面)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조부(祖父)로 부터입니다. 우리의 가문(家門)은 남못지 않았으나 언급(言及)할 필요가 없고 직접(直接) 내 생애(生涯)와의 관계(關係)는 조부(祖父)이십니다. 조부(祖父)는 부유(富裕)하고 덕망(德望)이 높으신 분이고 학식(學識)이 높고 신앙심(信仰心)을 가진 분으로서 지사(志士)이었습니다. 그 지사(志士)의 성격(性格)이 한말풍운(韓末風雲)에 뛰어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최후(最後)에는 일인(日人)의 주목(注目)을 받아 조부(祖父)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기면 해방(解放)할 때까지는 가옥생활(假獄生活)로 마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유(所有)의 재산(財産)은 남김없이 학교재단(學校財團)에 기증(寄贈)하시었고 또는 여러 가지 교회(敎會)와 사회사업(社會事業)에 썼으며 종말(終末)에는 빈사(貧士)로서 세상을 마치었습니다.
그러한 결과 부친(父親)은 내가 세살 때 만주(滿洲)로 들어가 조부(祖父)의 뜻을 따라 살으셨는데 내가 부친(父親)을 다시 만난 것이 32년(三二年)만에 서울에서입니다. 부친(父親)뿐만 아니라 고씨 가문(高氏 家門)의 많은 친척(親戚)들도 수년(數年)동안에 거의 다 상봉(相逢)하게 되어 지금은 고아(孤兒)아닌 고아(孤兒)의 신세를 겨우 면한 셈입니다.
■ 십삼세(十三歲)에 입산(入山) 하였다는데 입산(入山)의 동기(動機)는 무엇인지요?
1948년(一九四八年) 13세(一三歲)나는 해입니다. 해방(解放)이 되었다고 흥분(興奮)에 휩싸여 돌아가나 나는 어쩐지 외로운 신세를 금할 수 없어 골똘이 생각한 나머지 아무와도 의논 없이 산(山)으로 찾아 들어간 곳이 태학산 해선암(泰鶴山 海仙庵)이었습니다. 머리를 밀고 자진(自進)하여 사미(沙彌)가 된 셈입니다.
■ 그러면 거기서부터 선도(仙道)를 수련(修煉)하였는가요?
아닙니다. 해선암(泰鶴山)에서 약(約) 반년(半年)이 지났을 때 주지(主持) 스님의 심부름으로 광덕사(廣德寺)로 가는 길에서 우연히 도사(道士) 한 분을 만난 것이 선도(仙道)로 들어간 동기(動機)가 된 것입니다. 사실(事實)은 무엇을 배우러 갔는지도 모르고 또는 그 배우고 있는 것이 선도(仙道)인 줄도 모르고 시작(始作)한 셈입니다. 그야말로 지극히 우연의 인연(因緣)이라고나 할까요.
■ 그러면 그 도사(道士)를 만나 그를 따르게 되던 장면(場面)의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내가 비록 절에서 사미(沙彌)가 되어 삭발한 중이라 할지라도 아직 나이 어린 터라 산중(山中)에서 홀로 길을 걸어가면서도 장난기로 풀잎을 뜯으며 돌을 던지면서 마냥 한가히 걸어가고 있었지요. 그리고 때로는 조그마한 돌을 위로 던지고는 손바닥으로 쳐보는 놀음을 몇 번인가 하고 있었는데 길옆에 앉아 쉬고 있던 어떤 노인, 아니 그 후에 알았지만 한 오 십세 가량 된다고 생각되는 허술한 사람이 갑자기 껄껄 웃으면서 나를 향해
"동자(童子)야"
하고 불렀습니다. 그때 나는 깜짝 놀라 그 노인(老人)을 바라보면서 우뚝 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노인이 느닷없이 하는 말이
"그렇게 손으로 돌을 치면 손이 아프지 않으냐, 손으로 돌을 쳐서 돌을 부수어버리는 법을 배우지 않겠느냐"
하신다. 나는 얼떨결에 역시 장난소리로
"배워 주세요."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별난 사람 다 보겠네 하고 생각하면서 어린 사람 데리고 장난삼아 하는 소리거니 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은 정색(正色)을 하고
"배워 주지"
하면서,
"그러면 이 쪽박을 가지고 저기로 가서 물을 좀 떠오너라."한다. 물을 떠가지고 오니 노인이 그 자리에 없다 이상히 생각하고 두리번거리다가 바라보니 높은 바위 위에 앉아 있다. 한참 올라가 물을 드리니 한 모금 마시고는 태연히 하는 말이
"돌은 이렇게 깨는 거야"
하면서 오른손을 번쩍 들더니 새끼손가락만 뻗치고 주먹을 쥔 채로 옆에 놓인 주먹만한 돌을 그 새끼손가락 밑으로 툭 쳐서 깨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때 몸이 오싹해짐을 금치 못했다. 나는 겁이 났다 이 노인(老人)은 결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지금 여우나 귀신에게 홀린 것이 분명하다. 하여간 어서 속히 여기서 빠져나가 도망을 치는 것이 상책이다. 이런 생각으로 두리번두리번 달아날 궁리를 하면서 힐끗 그 노인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정말 사람인가 귀신인가 하고, 그러나 그 노인은 태연하다. 빙그레 웃고 있을 뿐이다. 머리는 흰털이 별로 없으나 자라대로 길게 드리워 있고 얼굴은 붉고 눈은 빛난다. 무슨 도사(道士) 같기도 하지만 깊은 산중(山中)이라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범벅이 되어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동자(童子)는 어느 절에 있지?"
한다.
"해선암(泰鶴山)입니다"
"어디를 가는 길이냐?"
"스님의 편지를 가지고 광덕사(廣德寺)로 갑니다."
"그 편지를 이리 내놓아라"
하기에 편지를 내놓았더니 슬쩍 보고는 찢어 버리고 만다.
"너 불경(佛經)을 배웠느냐?"
"천수경(千手經)을 배웠습니다."
했더니 그 천수경(千手經)을 외워 보라하기에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너 똑똑하구나, 그런데 너 왜 중이 되려고 하느냐, 무슨 사정이 있었느냐?"
하고 모든 사유를 자세히 묻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거 잘못 걸렸다. 하면서도 저분이 만일 도사(道士)라면 하는 생각에서 차츰 묻는 말에 대답을 다했다. 이름, 생년월일(生年月日), 그리고 가정(家庭)형편 그리고 내가 날 때에 아버지가 꾸었다는 태몽(胎夢)까지 이야기 했다. 이 노인(老人)이 만일 어떤 도사(道士)일 것 같으면 가슴에 달을 품어보고 나를 났다는 아버지의 말이 무슨 좋은 징조가 된다고 생각할 지도 몰라 그 이야기까지 하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일을 당했던 것이다. 그 노인(老人)은 나에게 명령을 했다 자기를 따라 오라는 것이다. 참으로 뜻밖이다. 내 이야기를 듣고 무슨 좋은 말이나 해주고 가라고 할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자기를 따라 산중(山中)으로 더 들어가자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나는 돌아서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노인(老人)은 막았다.
그 도사(道士)가 어떤 분인지 또는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 길이 없이 무조건 모험적으로 따라갔을 뿐이고 따라가 보니 인(人)적(蹟)이 없는 심심산골 상상봉(上上峰) 바위틈에 앉아 있으라고 한다. 칠흙같은 밤이라 산등과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산짐승과 괴이한 울음소리 뿐 무섭고 떨려 잠시를 참을 수 없어 따라 들어간 것이 후회막급뿐이라. 날만 새면 불문곡직하고 도망칠 생각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날이 밝으니 식사(食事)라는 것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픈 생각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한번 한 말은 걷을 수 없는 법이야. 네가 아까 손으로 돌을 깨는 법을 배워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내가 배워주마고 대답했으니 우리는 지금부터 선생과 제자야. 내가 시키는대로 해야하느니라."
하면서 따라 나서라고 명령을 하였다.
그때 나는 별 수 없이 따라가기를 결심했다. 어차피 출가입산(出家入山)한 신세니 이 괴상하지만 무슨 도사(道士)위풍이 잇는 선생(先生)이니 따라가 볼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차하면 달아나고 말면 그뿐이 아니겠는가하고 결심했다. 후일의 이야기지만 달아나려고 몇 번이나 시도(試圖)하였지만 결국 그 도사(道士)앞에서 만(滿) 십오년간(十五年間)을 수도(修道)하고야 말았으며 지금도 그분을 이따금 뵈옵고 지시(指示)를 받는 터입니다.
■ 그래 그 도사(道士)는 누구며 그 도사를 따라 어디로 가셨는가요.
얼마 지난 후에 차츰 알게 되었지만 그분의 성함은 이송운(李松雲)이시고 법명(法名)은 청운(靑雲)이란 것을 알았고 입산수도(入山修道)하시는 분들 사이에는 선인(仙人)처럼 모시는 유명(有明)한 분인 것을 차츰 알게 되었습니다.
그를 따라 들어간 곳이 속리산(俗離山)입니다. 첩첩 산중(山中)이라 인적부도처(人迹不到處)로서 어느 상봉(上峯)밑인데 사람이 기거(起居)할만한 동굴(洞窟)도 아니고 어떤 바위틈 한 두 사람 들어앉을 정도밖에 아니되는데 낙엽(落葉)같은 것이 많이 깔려 있는 것을 보든지 선생(先生)이 서슴지 않고 찾아가는 것을 보니 자기는 여러 번 찾아가 기거(起居)하던 곳으로 보이는데 한 가지 기이한 일은 처음 그곳으로 들어갈 때의 정경이 가관이었지요. 도사(道士)가 허리에 두르고 잇던 광목필 사절(四切) 넓이만한 허리띠가 두세 발이나 길었는데 그것을 자기허리와 내 허리에 매고 도사(道士) 앞에 가니 나는 끌려가다시피 한 일이다.
상당히 먼 거리를 그 모양으로 끌려간 것이다.
■ 그러면 그 속리산중(俗離山中)에서 선도수련(仙道修煉)이 시작(始作)되었다면 그 수련(修煉)의 과정(過程)을 말씀해 주세요.
처음에 말씀드렸지만 그 도사(道士)가 어떤 분인지 또는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길이 없이 무조건 모험적으로 따라갔을 뿐이고 따라가보니 인적(人蹟)이 없는 심심산골 상상봉(上上峰) 바위틈에 앉아 있으라고 한다. 칠흙같은 밤이라 산등과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산짐승과 괴이한 울음소리 뿐 무섭고 떨려 잠시를 참을 수 없어 따라 들어간 것이 후회막급뿐이라 날만 새면 불문곡직하고 도망칠 생각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날이 밝으니 식사(食事)라는 것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고보니 배가 고픈 생각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실망(失望)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말로만 들어오던 생식(生食)이라는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추후에 알고 보니 그것은 솔잎가루, 풀뿌리가루, 칡뿌리가루, 보리가루, 콩가루, 쌀가루 등속인데 그날 처음으로 내 앞에 내놓은 것은 아마 솔잎가루나 무슨 풀뿌리가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가루를 한 잎 넣고 물을 마시니 목에 넘어갈 리 만무합니다. 먹을 수 없다고 하니 도사(道士)의 말이
"앞으로 먹을 것은 이런 것밖에 없으니 우선 이런 것을 먹는 훈련부터 해야한다. 못 먹겠으면 물이나 마시고 그만두어라. 몇일 굶으면 이것도 맛있게 먹을 터이니....."
그때 나는 절망(絶望)했습니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이 한 이틀 꼬박 굶었다. 굶다보니 별 수 없이 먹어보기 시작하여 그런대로 그것으로 연명이 되었으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탈출(脫出)을 기도했다. 약(約) 보름이 되었다고 생각되는 때, 그리고 또 6일이 지난 후, 그리고 또 열흘이 지난 후, 삼차(三次)에 걸쳐 탈출(脫出)을 시도(試圖)해 봤으나 번번히 실패(失敗)했습니다. 도사(道士)가 없는 틈을 타서 상당히 먼거리까지 하산한 줄 알았으나 먼저 와서 길을 막아서서 빙그레 웃으면서
"소용없는 생각 말어. 못가게 되어 있는거야. 어서 올라가자."
나는 하산(下山)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념이 결심으로 변해 도사(道士)의 말을 따라 보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소위 생식(生食)으로도 살아갈 수 있고 또는 능히 먹을 수도 있다는 자신을 얻기까지는 약(約) 7개월이 걸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 손으로 여러 가지 생식(生食)의 자료를 구하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여 식사(食事)를 자급(自給)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만 일년 동안 생식훈련(生食訓練)으로 세월을 보낸 셈이지요. 생식(生食)이 가능(可能)해지니 도사(道士)는 나를 데리고 소백산맥(小白山脈)과 태백산맥(太白山脈)의 일대(一帶)를 왕래(往來)한 모양인데 추후에 알고 보니 속리산(俗離山)을 비롯하여 강원도(江原道) 태백산(太白山)까지 태산준령을 모조리 답파한 것입니다. 이산에서 몇일 저산에서 몇 달 혹은 동굴(洞窟) 혹은 바위틈에서 바람과 비와 눈과 싸우며 원시적(原始的)인 수련생활(修煉生活)을 했지요.
■ 그런데 몇 가지 물어볼 말이 있는데 우선 식사(食事)는 생식(生食)이라지만 의복(衣服) 은 무엇으로, 그리고 수도(修道)는 어떻게 했습니까?
당연한 물음입니다. 의복이랄 것도 못됩니다만 짐승의 가죽으로 하내의(下內衣) 같이 만들어 입은 것뿐입니다. 그리고도 풍한서습(風寒暑濕)을 막을 수 있는 체력(體力)이 되었다는 사실(事實)은 나도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오로지 정신력이 앞서 있었던 것과 사부님의 엄한 수련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修道)는 무엇을 어떻게 하였느냐는 물으심에는 나도 그것이 의문이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일년(一年)이 넘도록 하는 일이 너무 단조로워서 도사(道士)에게 여러 번 질문을 했지만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이 간단했습니다.
"생식(生食)에 자신(自信)이 생겼나? 여기 정좌(定座)하고 눈감과 가만히 앉아 있는거야. 아무 생각 말고, 마음이 완전(完全)히 비워져야 다른 무엇이 들어갈 거 아니야. 잡념이 시시각각으로 마음에 떠오르면 아직 멀었어. 부모생각, 세상생각, 허연 밥생각, 뜻뜻한 이불생각, 돈생각, 집생각, 그런 거 마음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는거야. 공부는 그런 거 없이하는 공부가 첫째야. 道는 무슨 道던지 허심(虛心)과 공심(空心)에서 출발(出發)하는 거야. 그리고 네 생각 네 판단 네 고집같은 네 모든 것도 다 없어져야 해. 그런 후에야 하늘의 法이 네게 들어오게 되는 法이거든. 아무소리 말고 눈감고 고요히 앉아 있어.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모든 것을 가르쳐 줄 터이니까."
이렇게 되고 보니 그대로 할 수밖에 없어 몸과 마음의 기초훈련(基礎訓鍊)이 나는 일년(一年)이라는 고행(苦行)으로 겨우 이루어졌다고 보나 추후에 알고 보니 그 기초적 훈련(基礎的 訓練)은 일생(一生)을 통(通)하여 계속(繼續)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런데 그때의 나의 생각은 참으로 복잡했습니다.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겠기에 이러한 고된 기초훈련(基礎訓鍊)을 시키고 잇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마 나의 수도생활(修道生活)이 결국 입산(入山)한 시간만 계산해도 15년(一五年)이니 과연 내가 수련(修練)한 선도(仙道)가 그렇게 힘드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일심정력(一心精力)을 경주(傾注)하지 못한 것인지 의문이 갈 때도 없지 않았습니다.
■ 그러면 일년 후(一年 後)부터 수도(修道)한 경과(經過)를 말씀해 주십시오.
일년(一年)을 그렇게 지내고 1949년일(一九四九年) 초하(初夏)부터 선도수련(仙道修練)의 첫 단계(段階)에 들어간 셈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앞으로 수련(修練)할 어떤 단계(段階)의 첫 단계(段階)인지도 모르고 시작한 셈입니다. 오직 시키는 대로 실천(實踐)했을 따름이었지요. 지금 내가 나의 수련(修練)한 모든 단계(段階)와 내용(內容)을 빠짐없이 틀림없이 기억(記憶)하는 것은 하나의 원리(原理) 하나의 동작(動作)을 수십번 수백번(數十番 數百番) 되풀이하면서 완전(完全)히 체득(體得)하기 열흘이고 한달이고 또는 일년을 걸려서도 내 것이 되지 않고서는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처음에 수련(修練)한 것이 중기단법(中氣丹法)입니다.
모든 단법(丹法)의 형태(形態)와 내용(內容)을 별조(別條)로 서술(敍述)되어 있음으로 지금은 그 내용(內容)이 무엇이라는 개념(槪念)만을 한마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사(道士)의 말씀을 그대로 옮기면 이 중기단법(中氣丹法)을 시키면서 그 취지(趣旨)를 이렇게 간단히 말씀하시고 그리고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이 중기단법(中氣丹法)은.
"네 마음으로 네 육신을 움직일 수 있는 수련(修練)이다.
이 수련(修練)의 원리(原理)는 중기(中氣)에 있다.
우주(宇宙)의 일기(一氣)는 음양합실(陰陽合實)의 중기(中氣)로 만물(萬物)이 생성변화(生成變化)하고 인간(人間)의 일기(一氣)는 음양합실(陰陽合實)의 중기(中氣)로 심신(心身)이 생성변화(生成變化)한다.
인체(人體)의 중기단법(中氣丹法)은 하도(河圖)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중앙(中央, 五와 十)의 토기(土氣)에서 비롯하여 오행상생(五行相生)의 원리(原理)로 생성작용(生成作用)이 전개된다.
비위(脾胃)가 곧 중앙토(中央土)로서 음양(陰陽)이 합실(合實)하면 보급(補給)과 단합(團合)과 보전(保全)의 삼작용(三作用)이 활발(活潑)하여진다.
이 중앙 토기(中央 土氣)를 결실(結實)하기 위하여는 하단전(下丹田)을 중심(中心)으로 마음을 집중(集中)하여 고요히 심호흡(深呼吸)을 하면 氣는 음양조리(陰陽調理)의 상(象)인바 이것이 중기(中氣)를 양(養)하는 기초(基礎)가 되는 형태(形態)인 것이다.
포일(包一守中)이란 일기(一氣)를 포(包)하고 중기(中氣)를 수호(守護)함이 선도(仙道)로 들어가는 자세(姿勢)가 된다.
이러한 수련(修練)은 축시(丑時) 초(初)부터 오시이전(午時以前)에 매일(每日) 계속(繼續)하라."
이러한 뜻으로 해석(解釋)된다. 그때 내 나이가 14세(十四歲)라 어려운 말은 들었어도 그때는 그래도 이해(理解)할 수 없었으나 수십년(數十年) 수련(修煉)하는 동안 초련시(初煉時)의 그 원리(原理)가 단리(丹理)를 역리(易理)로 해설(解說)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오십종목(五十種目)의 중기단법(中氣丹法)을 한 가지만 열중하고 그 동작(動作)을 시범(示範)하고는 그대로 해보라는 것이다. 그 뜻을 생각하며 그 동작(動作)을 열번 백번 되풀이 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그 동작(動作)이 완성(完成)되었다는 것이 인정(認定)될 때 그 다음 동작(動作)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오십단법(五十丹法)은 십종(十種)의 본법(本法)이 있고 십종(十種)의 본법(本法)에는 각각오종(各各五種)의 별법(別法)이 있어 합(合)하여 오십단법이 있는 것입니다.
■ 얼마동안 五十丹法을 완성했는지요. 그리고 다음의 수련과정(修煉課程)은?
만 일년(滿 一年)이 걸렸지요. 다음해인 1950년 봄에 비로소 건곤단법(乾坤丹法)의 수련(修練)이 시작되었으니까요.
그런데 한 차원 높은 건곤단법(乾坤丹法)을 시작해보니 그야말로 오십종목의 중기단법(中氣丹法)은 수련(修練)의 기초(基礎)에 불과(不過)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그러한 기초(基礎)가 없이는 신묘(神妙)하기 이를데 없는 건곤단법(乾坤丹法)을 수련(修練)할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이와 같이 말로 설명(說明)해서는 아무 효과(?果)가 없고 이해(理解)가 못되지만 스스로 체험체득(體驗體得)하면 그 원리(原理)가 내 마음 내 몸에서 일어나고 작용(作用)되는데서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건곤단법(乾坤丹法)은 그 행공종목(行功種目)이 불과(不過) 나의 사부(師父)이신 청운도사(靑雲道士)는 언제나 간단한 몇 마디 설명(說明)을 주시고는 단법(丹法)의 실천(實踐)으로 나 스스로 자각(自覺)케 하였고 나는 나의 자각증험(自覺證驗)으로 그 원리(原理)의 진실성(眞實性)을 알게 되어 신념(信念)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 신념은 天下(천하)가 다 움직여도 변동(變動)할 수 없는 태산(泰山)같은 신념(信念)이 된 것입니다.
원기(元氣)의 축적(蓄積)을 바로 처리(處理)하지 못하면 곤란(困難)한 지경(地境)에 이릅니다. 수련자(修練者)들은 그 처리(處理)의 방법(方法)을 사범(師範)에게 배우지 않으면 큰 손해를 받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이십삼법에 불과(不過)하나 그 法을 수련(修練)하는데는 滿一年이라는 세월(歲月)이 소요(所要)되었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입산(入山)하여 고행일년(苦行一年) 기초적 행공(基礎的 行功)인 오십단법수련의 일년을 지나서 건곤단법수련(乾坤丹法修練)에 일년이 또 걸렸으니 수도(修道)라는 것이 얼마나 고행(苦行)인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도심지에 앉아 하루 한 두시간에 수련으로 도력을 얻도록 하겠다는 나의 시도(試圖)는 사실상(事實上) 힘드는 일인줄 알지만 절대불가능(絶對不可能)한 일이 아니니 도장(道場)을 열라는 사부(師父)님의 지시(指示)를 믿고 시작(始作)한 일이요, 또한 가능성(可能性)을 발견(發見)한 것이 나의 신념(信念)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 시작한 건곤단법(乾坤丹法)의 행공(行功)은 보통상식(普通常識)으로는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현상(現象)이 비로소 일어납니다.
그 원리(原理)부터 동양적 철학(東洋的 哲學)의 골자가 들어 있지요. 동양적 철리(東洋的 哲理)를 인정(認定)하지 않고서는 이해(理解)가 되지 못하며 그 원리(原理)를 인정(認定)하고 실천(實踐)해보지 않고서는 그 신비(神秘)로운 체험(體驗)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서양인(西洋人)으로서 동양의학(東洋醫學)을 연구(硏究)하는 의사(醫師)가 동양적 철학(東洋的 哲學)인 일기 십이경락 삼백육십오 경혈(一氣 十二經絡 三百六十五 經穴)이라는 원리(原理)를 인정(認定)하지 않고는 침(鍼)이나 뜸이나 약(藥)을 쓸 수 없으며 따라서 인정(認定)하고 쓴다면 그 효과(效果)를 보게 되는 사실(事實)과 흡사합니다. 이십세기 후반에 들어가면서 갑자기 서의(西醫)들이 동의(東醫)에 대한 큰 관심(關心)을 갖는 현상(現象)은 동방철학(東方哲學)의 氣와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의 원리(原理)를 인정(認定)하고 덤벼든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단리(丹理)를 기초(基礎)로 한 동양철학(東洋哲學)을 우리의 심리(心理)와 생리(生理)로 그 합리성(合理性)을 실증(實證)하는 첫 단계(段階)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론(理論)은 추상적(抽象的)이나 그 이론(理論)을 실천(實踐)해 보면 그 이론(理論)이 합리적(合理的)이라는 것을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現象)에서 실증(實證)되고 입증(立證)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부(師父)이신 청운도사(靑雲道士)는 언제나 간단한 몇 마디 설명(說明)을 주시고는 단법(丹法)의 실천(實踐)으로 나 스스로 자각(自覺)케 하였고 나는 나의 자각증험(自覺證驗)으로 그 원리(原理)의 진실성(眞實性)을 알게 되어 신념(信念)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 신념은 천하(天下)가 다 움직여도 변동(變動)할 수 없는 태산(泰山)같은 신념(信念)이 된 것입니다.
천지인건곤(天地人乾坤)의 氣는 우주(宇宙)에 미만(彌滿)하여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작용(作用)을 한다. 인간(人間)도 그 동일(同一)한 원리 중(原理 中)에서 생존(生存)한다.
건곤행공(乾坤行功)은 우주적 입장(宇宙的 立場)에서 우주생성(宇宙生成)의 원리(原理)를 내 한 몸 안에서 작용(作用)을 시키는 방법(方法)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 그 뜻을 잘 알겠습니다. 그 말을 하시니 달마선사(達磨禪師)의 말이 생각납니다. 아시겠 지만 부 입도다도 요이언지 불출이종 일시이입 이시행입(夫 入道多道 要而言之 不出二 種 一是理入 二是行入)이라고 했는데 道에 들어가는 방법(方法)이 많으나 결국 두 종류 (種類)밖에 없는데 하나는 이론(理論)으로 이해(理解)하는 방법(方法)이요. 하나는 행동 (行動)으로 체득(體得)하는 방법(方法)이라는 뜻인데 선도(仙道)에 들어가는 길은 결국 이입(理入)이 아니고 행입(行入)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즉 행입(行入)하면서 이입(理入)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분명히 그렇습니다. 언제나 설명(說明)보다는 행동(行動)을 지시(指示)하시고 그 수련(修練) 방법(方法)의 결과(結果)를 나 스스로 체험(體驗)케 한 후에 그 원리(原理)를 한두마디씩 설명(說明)해준 것으로 차츰 그 원리(原理)를 이해(理解)한 것입니다. 다름 아닌 행입(行入)입니다. 더욱이 건곤단법(乾坤丹法)의 행공에서부터 더욱 그러했지요. 그것은 설명(說明)해 주었던 기이(奇異)한 현상(現象)이 내 몸에 나타나게 된 까닭입니다.
건(乾)의 본법(本法)에 십종(十種)의 별법(別法)이 있고 곤(坤)의 본법(本法)에 십이종(十二種)의 별법(別法)이 있고 최후(最後)에는 총결산(總決算)으로 좌사법(座思法)이 하나 있어 모두 二十三의 행공(行功)으로서 건곤단법(乾坤丹法)이 이루어집니다.
이 건곤단법 행공(乾坤丹法 行功)에는 초상식적(超常識的)인 현상(現象)이 비로소 작용(作用)됩니다. 하나는 전신적 기공호흡(全身的 氣孔呼吸)이라는 것이요, 하나는 임독맥(任督脈)의 유통(流通) 이라는 작용(作用)의 현상(現象)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입산수련(入山修練)의 결과(結果)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일념수련(一念)修練)에 전력(全力)을 기울인 탓으로 원기단법 중도(元氣丹法 中途)에서부터 하복부 단전(下腹部 丹田)을 중심(中心)으로 원기(元氣)가 축적(蓄積)되는 현상(現象)을 느끼기 시작하여 후끈하는 열기(熱氣)의 뭉텅이가 솟구쳐 올랐습니다. 이것을 도태(道胎)라고도 합니다만 이 현상(現象)은 선도수련(仙道修練)의 초입(初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원기(元氣)의 축적(蓄積)을 바로 처리(處理)하지 못하면 곤란(困難)한 지경(地境)에 이릅니다. 수련자(修練者)들은 그 처리(處理)의 방법(方法)을 사범(師範)에게 배우지 않으면 큰 손해를 받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 축적(蓄積)되어 오는 막대(莫大)한 힘(氣)을 먼저 등 뒤의 독맥(督脈)으로 올려 돌리어 두부(頭部) 귀 뒤로하여 머리까지 올렸다가 다시 전면(前面) 가슴의 임독(任督)으로 돌리어 하복부(下腹部)까지 끌어내리는 운기(運氣)의 방법(方法)을 연마(硏磨)해야합니다. 이러한 운기(運氣)가 완전(完全)히 이루어진 때는 중기단법(中氣丹法)을 지나 건곤단법(乾坤丹法)의 곤법(坤法)의 신법시(申法時)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기공호흡법(氣孔呼吸法)은 앞으로 수련(修練)할 진기단법(眞氣丹法)과 그리고 더 나아가 삼합단법(三合丹法)을 하게 될 때 비로소 체득(體得)하게 됩니다.
건곤단법(乾坤丹法)의 중요(重要)한 수련(修練)은 임독(任督)의 유통(流通)으로써 매일 한번씩 유통(流通)되도록 명령(命令)을 받아 그대로 실시(實施)했지요. 그때의 유의할 점은 단전호흡(丹田呼吸)인데 입식(入息, 들이킨 숨)한 氣를 下丹田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丹田에 모인 뜨거운 기운과 더불어 고요히 항문쪽으로 나리고 다시 뒤로 돌려 등을 타고 올리어 먼저 말한대로 귀 뒤까지 올린 후에는 다시 귀 뒤를 돌아 목과 가슴, 배로 내려 그 氣가 下丹田에 이를 때 비로소 입식(入息)했던 숨을 출식(出息)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호흡(呼吸)은 숨으로 하나 그 임독맥(任督脈)의 유통(流通)은 마음을 머금어 생각으로 돌리는 것인데 숙달이 되면 그 뜨거운 氣의 힘이 생리적(生理的)으로 현실적(現實的)으로 완연히 유통(流通)되는 것을 진기단법(眞氣丹法)에서 감각(感覺)케 되는 것입니다.
건곤단법 이십삼동작(乾坤丹法 二十三動作)은 동작(動作)의 法을 따라 하되 언제나 호흡(呼吸)은 잘 조절(調節)하면서 해야하니 이것이 곧 조식(調息)입니다. 출입식(出入息)을 하되 입식(入息)하여 단전(丹田)에 氣를 머물고 다시 출식(出息)하고 氣를 머물러 출입식(出入息)과 중지(中止)의 시간(時間)을 일정(一定)하게 똑같이 조절(調節)하면서 이십삼동작(二十三動作)을 한가지씩 하는 것입니다.
수련시간(修練時間)은 축시(丑時)로부터 오시(午時)까지가 가장 효과적(效果的)입니다.
■ 그러면 입산(入山)한지 일년(一年)후에 중기단법(中氣丹法)을 시작하여 일년(一年)이 걸 려 마차고 다시 일년(一年)을 걸려 건곤단법(乾坤丹法)을 마친 셈입니다. 그러면 다음 원기단법(元氣丹法)의 수련(修練)도 일년(一年)이 걸리었는가요?
그렇게 되었지요. 중기단법(中氣丹法)이 오십동작(五十動作)이요, 건곤단법(乾坤丹法)이 이십삼동작(二十三動作)인데 원기단법(元氣丹法)은 삼백육십오동작(三百六十五動作)입니다. 보통 사람은 그 동작(動作)의 이름만 외워 보려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원리(原理)를 알고 수련(修練)을 하면 자연(自然)히 알게 마련이지요. 나는 그 三百六十五動作을 수련(修練)할 때 한번에 십이 동작(動作)씩 했는데 그 동작(動作)이 원숙해지고 그 원리(原理)가 해득(解得)되면 다음 이십동작을 수련(修練)하게 되어 그 모든 동작(動作)을 수백번 수천번(數百番 數千番) 되풀이한 셈입니다.
원기단법(元氣丹法)의 그 원기(元氣)란 모든 기(氣, 기운)가 합실(合實)한 기운을 말하는 것이니 이 원기(元氣)를 네 몸에 지니어
"네 몸을 네 마음대로 동작(動作)할 수 있도록 수련(修練)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이 마음을 따른다는 말은 매우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원기단법(元氣丹法)에서는 입식(入息)의 시간은 점점 길어집니다. 긴 시간(時間)으로 입식(入息)하되 하단전(下丹田)에 氣를 축적하여 하단전(下丹田)에서 氣를 돌돌 말아 뭉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氣를 십이경락(十二經絡)에 골고루 유통(流通)시키는데 하단전(下丹田)의 氣를 항문 뒤로 내려 보내어 양쪽 발끝까지 보냈다가 다시 돌려 독맥(督脈)을 타고 올라가 어깨부분에서 양손 끝까지 동시에 보냈다가 다시 어깨부분까지 돌아와 머리 위로 올려가지고 이번에는 그 기(氣, 숨)를 출식(出息)시키는 것입니다.
그밖에도 더 자세한 통기(通氣)의 동작(動作)이 있으나 자세한 것은 별책(別冊)에 서술(敍述)되어 있습니다만 사부(師父)의 말씀이
"지금까지의 수련(修練)으로 겨우 정각도(正覺道) 선도(仙道)의 제 일단계를 마친 셈이다. 정각도(正覺道)란 천지인(天地人)의 무상법(蕪像法)이니 먼저 이 수련(修練)으로 너는 너의 몸을 잊으라."
그리고 다음 단법(丹法)을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 원기단법(元氣丹法)은 중요(重要)한 기초(基礎)입니다. 건곤단법(乾坤丹法)에서 행공(行功)으로 얻어 축기(蓄氣)로 십이경락(十二經絡)에 임독맥(任督脈)을 더한 십사경락(十四經絡)의 유통(流通)으로 전신말초(全身末梢)까지 한 몸에 천도성신(天道性身)을 천도(天道)에 맞추는 수행(修行)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원기(元氣)가 몸에 충일(充溢)하고 유통(流通)하면 중기단법(中氣丹法)이 완성(完成)되는 때부터라도 몸의 고장은 자연(自然)히 소멸(消滅)되어 건전(健全)한 신체(身體)가 될 뿐 아니라 점차 초인간적(超人間的)인 기력(氣力)이 솟구치게 마련입니다.
■ 그러니 입산(入山)하여 일년(一年)은 준비기간(準備期間)이었고 그 후 삼년(三年)은 세가 지 단법(丹法)을 수련(修練)한 셈입니다. 그러면 다음의 수련(修練)은?
그렇습니다. 원기단법(元氣丹法)을 마치고 그해 가을에는 자리를 옮기어 여러 곳으로 찾아갔지요. 소백산맥(小白山脈) 여러 곳 박달산 등 깊은 산중(山中)으로 들어가 여전히 동굴(洞窟)이나 암석(巖石)밑에서 고행(苦行)을 계속(繼續)하며 수련(修練)에 전념(全念)하였지요. 1952년(一九五二年) 가을 사부(師父)께서는
"너는 지금 나이는 어리나 도입(道入)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을 닦았다. 욕심덩어리였던 육신(肉身)을 네 정신(精神)이 끌고 갈 수 있는 수련(修練)이 되었으니 이제부터 道(仙道)에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진기단법(眞氣丹法)이라는 法을 수련(修練)하게 되었다."
하셨습니다.
그 요지(要旨)만 한마디로 요약(要約)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진기단법(眞氣丹法)은 운기조식(運氣調息)이 기본(基本)이 되어 있습니다.
동양(東洋)의 형이상학적 철리(形而上學的 哲理)에는 하늘(天)에는 오운(五運, 五氣와 同)이 있고 땅[地]에는 육기(六氣)가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리하여 소우주(小宇宙)인 人體(인체)에도 오장육부(五臟六腑)라고 보는 것이지요.
가르침을 받은 원리(原理)를 요약(要約)해보면,
첫째, 오운(五運, 五氣)의 槪念인데,
五行은 자연(自然, 天) 자체(自體)가 지니고 있는 기본요소(基本要素)이요. 오운(五運)은 그 오행(五行)이 실현(實現)되는 자율현상(自律現象)의 변화법칙(變化法則)과 상(像)을 말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오운(五運)의 변화(變化), 오운(五運)의 대화작용(對化作用) 등 황제내경(潢帝內徑)에도 있는 어려운 이야기를 듣고 되풀이 하는 가운데 차츰 그 원리(原理)를 짐작하게 된 것이나 그 원리(原理)를 알아서 수도(修道)하므로서 득도(得道)한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육기(六氣)란 우리가 살고 잇는 지상(地上)의 운동과정(運動過程)에서 오행(五行)의 질(質)에 변화(變化)를 일으켜서 운행지기(運行之氣)가 하나 더 불어나게 됨으로서 육종(六種)의 기(氣)가 된 것인데 이것을 육기(六氣)라 하는데 이 원리(原理)는 앞으로 주역(周易)의 원리(原理)로 해설(解說)될 것입니다. 육기(六氣)의 육위(六位), 변화(變化), 작용(作用)등의 복잡한 원리(原理)는 지금 말로는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이러한 설명(說明)을 들으면서 진기단법(眞氣丹法)을 수련(修練)하였던 것입니다.
"천지(天地)의 조화(造化)는 무궁무진(無窮無盡)하나 그 변화(變化)의 법칙(法則)은 정해 있는대로 운행(運行)되는 것이다. 그것이 다름 아닌 천도(天道)다. 이 지구(地球) 위에서 이 오운육기(五運六氣)의 상생변화(相生變化)의 법칙(法則)을 네 한 몸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수련(修練)이 된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증거(證據)가 다름 아닌 네 하단전(下丹田)에 축적(蓄積)된 기(氣)가 능히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을 통하여 전신(全身)에 유통(流通)하고 있는 현상(現象)이다. 이것이 곧 네 몸에서 일어나는 천지(天地)의 개벽(開闢)인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이 원리(原理)를 마음에 두고 역시 축시(丑時)로부터 오시(午時)까지 시시(時時)로 먼저 수련(修練)하였던 원기단법(元氣丹法)의 입식(入息), 출식(出息)의 호흡(呼吸)을 하면서 시시(時時)로 임독(任督)의 유통(流通)을 시도(試圖)하라.
고요히 아홉 번쯤 입출식(入出息)의 원기행공(元氣行功)을 한 후에 임독맥(任督脈)을 유통(流通)시키고 그것이 숙달(熟達)되면 다음은 여덟번 입출식(入出息)을 한 후에 임독(任督)을 유통(流通)시키고 또 그것이 숙달(熟達)되면 일곱 번 후에 그리고 여섯 번 후에 이같이 하여 최후(最後)에는 단한번의 입출식(入出息)으로 능히 임독(任督)을 전신(全身)에 유통(流通)시킬 수 있도록 수련(修練)하라. 그리고 수련시(修練時)는 네 눈은 반개(그 전까지는 모든 수련은 눈을 완전히 감고 수련하였다)하고 시선을 한 곳에 집중(集中)할 것이며 네 정신(情神)도 한 곳에 집중(集中)하고 행공할 것이다."
하는 주의(注意)를 시키며 수련(修練)을 시켰습니다.
수련(修練)의 종목(種目)은 입단(立丹), 좌단(座丹), 와단(臥丹), 전단(?丹), 공단(功丹) 등 다섯 동작(動作)의 행공(行功)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항상 하셨지요.
" 道란 천지(天地)의 실체(實體)와 생성(生成)의 원리(原理)다. 그러나 인간(人間)의 실체(實體)와 생성(生成)의 원리(原理)도 된다. 그러므로 인간(人間)은 그 원리(原理)에 따라가야 한다. 道는 사람들이 따라가야 할 것이다.
그러하나 사람들은 그 길을 잘못 알기도 하고 그 길을 알면서도 따르지 않는 자도 있어 천지(天地)의 원리(原理)를 어기고 정명(定命)을 다하지 못하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道를 알고 道를 따르면 천지(天地)의 理와 합실(合實)이 되고 천지(天地)의 아들이 되고 천지(天地)의 주인이 된다.
사람들이 이 도리(道理, 이름하여 後世에 仙道라 하나 이는 天地人의 참 道일 따름이다)를 가르치려하나 따르지 않음으로 道를 깨닫고 닦은 이들도 할 수 없이 스스로 물러가 입산(入山)하고 말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앞으로 영리하게 되면 동서인(東西人)을 막론(莫論)하고 이 도(道)를 따르게 될 줄 안다. 이도(道)는 한가지에 치우친 종교(宗敎)나 철학(哲學)이나 도덕(道德)같은 것이 아니라 누구나 천명(天命)을 다 하고저 하는 사람은 알고 닦아 심신(心身)의 천명(天命)을 다할 수 있는 생명(生命)의 道인 것이다. 말하자면 이 道는 우리 배달민족(民族)이 발전(發展)시킨 고대(古代)로부터 나려온 예지(叡智)의 산물(産物)인 단리(丹理)의 연단법(煉丹法)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道를 수련(修練)하여 후세(後世)에 전함으로서 이道를 닦아주신 선조(先祖)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큰 뜻을 가져야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이 해이하여지지 않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항상 외우고 있으면 정신(精神)이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어떤 신주(神呪)같은 것이 아니오 스스로 조선(祖先)의 은덕(恩德)을 추모하여 염원(念願)하는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
하고 설명하신 후에
"영법(泳法, 영원불변의 법)을 교시(敎示)하시옵고 진원(眞源)으로 가 옵신 선령(先靈)님이시여 저를 대도(大道)로 유도(誘導)하시와 체지체능(體知體能)하여 조화(造化)된 선경(仙境)에서 선령(仙靈)님과 일심동체(一心同體)로 동거동락(同居同樂)케 하여 주시옵기를 정심(正心)과 진심(眞心)으로 바라옵니다."
하는 염원(念願)을 수시로 외일 것을 말씀하시며 이것을 심축문(心祝文)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잡념(雜念)이 들 때마다 너는
"정심시각도행(正心視覺道行)이라는 여섯 자를 마음속으로 암송(暗誦)하라고 하셨는데 그 뜻은 정심, 정시, 정각, 정도, 정해(定心, 正視, 正覺, 正道, 正行)이라는 의미(意味)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修道(수도)의 깊이는 점점 심오(深奧)하여져서 진기단법(眞氣丹法)의 수련(修練)은 만 이년(滿 二年)이라는 세월(歲月)의 고행(苦行)이었습니다. 아마 보통 사람은 그 고행(苦行)은 단 하루도 견디어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견디어낸 것은 다름아닌 수련(修練)의 힘과 정신(精神)에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지요.
■ 고행(苦行)의 정경(情景)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진기단법(眞氣丹法)의 수련(修 練)에 이년 간(二年 間)의 고행 후(苦行 後)에?
그러니까 1954년 초춘(初春) 내 나이 19세였습니다. 입산(入山)한지 만 6년이 되었지요. 속으로 보면 수도자(修道者)일지는 모르나 겉으로 보면 인간(人間)의 탈은 썼어도 하나의 야생동물(野生動物)로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이었을 것입니다.
다음 수련(修練)은 삼합단법(三合丹法)입니다. 주(主)로 강원도(江原道) 치악산(雉岳山)을 중심(中心)으로 거처(居處)하면서 도법(道法)의 극치를 향(向)하여 정진(精進)하였는데 이때부터는 수련을 시켜놓고는 사부(師父)께서는 어디론가 떠나갔었다가 돌아와서 나의 수련(修練)의 심도(深度)를 관찰(觀察)하시고 다시 교시(敎示)를 하고 떠나가실 때가 많았습니다. 스스로 수련할 수 있는 능력(能力)을 인정(認定)하신 모양입니다.
삼합단법(三合丹法)이야말로 이론(理論)으로는 불가해(不可解)의 경지(境地)입니다. 말씀드려도 백분(百分)의 일도 납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름 아닌 기공호흡(氣孔呼吸)입니다. 이것의 원리(原理)를 삼합단법(三合丹法)이라 하는데 삼합(三合)이란 천지인 삼자(天地人 三者)의 氣가 합실(合實)되는 경지(境地)로서 비구(鼻口)로의 출입식(出入息)을 일시중단(一時中斷)하고 전신의 기공(氣孔)으로서의 기통(氣通)을 말하는 것이지죠. 납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안될 것입니다. 폐장(肺臟)이 퇴화(退化)했거나 폐(肺)가 없는 하등생물(下等生物)은 피부로 통기(通氣)한다고 하는 말은 있으나 폐(肺)가 있는 인간(人間)이 호흡(呼吸)을 중지하고 피부로 호흡(呼吸)을 한다면 누가 곧이 듣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그것을 수련(修練)한 것입니다. 이 수련(修練)을 할 때는 몸에는 한 조각의 의복도 걸쳐서는 아니됩니다. 그때 짐승의 가죽으로 대충 가리었던 아랫도리까지 홀랑 벗고 일년(一年)이라는 세월의 고행수련(苦行修練)을 했으니 비바람치고 눈서리 쌓이는 심산암하(深山岩下)에서 가랑잎을 깔고 앉아 명상(瞑想)에 잠겨 있는 나의 모습을 생각해보시면 아마 다소의 동정(同情)이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도(道)를 닦아 도(道)를 전(傳)해 보려는 일념(一念)에서 참고 견디어낸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수련(修練)으로 얻은 모든 단법(丹法)으로 전신(全身)의 기(氣)를 몸에 지니고 한번 입식(入息)을 한 후에는 네 기공(氣孔, 피부의)을 통(通)하여 천지(天地)의 원기(元氣)가 자연히 네 몸에 들어오고 나가고 할 수 있는 경지(境地)에 있으며 또 수련(修練)을 쌓으면 네 스스로 그 행공(行功)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되는 것이다. 수련(修練)을 끊임없이 실시(實施)하라."
하고 사부님은 홀연히 떠나시고 홀연히 나타나시어 나의 수련(修練) 과정(過程)을 지켜 보시었습니다.
그리하여 만 일년반(滿一年半)인 1955년(一九五五年) 가을철이 되어서야 나로서는 거의 완성(完成)되었다고 자신(自信)을 갖게 되었지요.
이 기공호흡(氣孔呼吸)이 완성(完成)되면 음양오운육기(陰陽五運六氣)의 원리(原理)가 자유(自由)로이 운용(運用)되어 물과 불이 몸에 접근(接近)되지 못하는 현상(現象)을 체득(體得)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奇蹟)은 원리(原理)가 없어도 불가능(不可能)하고 수련(修練)이 없어도 불가능(不可能)하다. 그 道는 선생이 말씀한대로 이입(理入)이 아니라 행입(行入)의 경지(境地)라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생이 원하신다면 제가 언제나 그런 기적(奇蹟)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적 실험(奇蹟的 實驗)은 국내외에서 여러차례 시범(示範)한 일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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