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사랑하고 다시 사랑합시다>
5구역에 살고 있고, 대건회에서 봉사하고 있는 유현진 아가다입니다. 특별할 것도 없고 나이 든 제가 이 자리에 올라온 것은 수녀님과 임원진들의 요청에 순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은 저이지만 다음은 여러분 중의 누군가의 차례가 될 것입니다.
이 시간에 어떤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 드릴까 여러 날 고민하다가 나 자신에게 해 주고 싶은 말,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씀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 앞에서 드릴 말씀의 주제는 “계속 사랑하고 다시 사랑합시다.”입니다.
저는 1943년생이며 올해 82세입니다.
이 자리에는 저보다 인생 선배이신 30년대에 분도 계시지만, 그분들을 포함하여 우리 세대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저는 일제 강점기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 태어나, 세 살 때 해방을, 여덟 살 때 육이오 전쟁을 맞았습니다. 미처 남쪽으로 피난을 못 갔던 우리 가족은 서울 한복판에서 콩 볶듯 들리는 총 소리와, 비행기 공습에 떨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후로 4,19, 5,16, 10,26, 12,12, 5,18, 6,29 등을 겪었고 비상계엄 상황도 여러 번 경험 했습니다. 서울대학교 근처에 살았던 저는 데모하는 학생들의 함성과 바람결에 풍겨오는 최루탄 가스 냄새를 자주 맡았습니다. 길에는 전경 버스들이 줄을 지어 서 있고, 젊은이들의 가방을 검색하는 사복 경찰들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생인 자식들의 귀가가 늦어지면 그들이 무사히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안절부절 마음을 놓지 못했었습니다.
내 생애에 이런 일을 또 경험하게 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살았었는데 12,3 비상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치 못했고, 그 후로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졌습니다. 수명이 단축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이제 새 정부가 탄생하였으니 앞으로는 제발 이런 일 없이 맘 편하게 남은 생 살아가게 잘 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시대 상황은 우여곡절, 파란만장 하였지만 눈부시게 경제 성장을 하여 1953년에 167불이던 1인당 국민 소득이 35,000불까지 늘어났습니다. 젊은 시절 경제 성장의 역군으로서 밤을 낮으로 삼고, 피땀 흘려 일하셨던 형제님들, 한 푼 두 푼 아껴 가며 살림을 장만하고 집도 늘려가며, 높은 교육열로 아들 딸 열심히 가르쳐서 오늘날 국가와 사회 곳곳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동량으로 키워내신 우리 자매님들이 이뤄낸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모두의 헌신과 수고 덕분에 오늘날 수세식 변기가 있고, 수도꼭지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는 욕실이 있는 집에서 살고 있고, 집 집마다 자가용 한 대씩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을의 한두 집에만 갖고 있던 전화기를 요즘은 애나 어른이나 휴대전화기를 지니고 다닙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주름진 얼굴과 흰 머리, 등 굽은 노인이 되어 자식들이 나간 빈 둥지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는 노인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정해도 대한민국에서는 65세 이상을 노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고령 사회를 넘어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고령사회다, 초고령 사회다’ 하는 말을 들을 때면 우리가 국가와 사회에 짐이 되고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예전의 어른들은 젊은이들로부터 존경받는 존재였습니다. 연륜에서 오는 삶의 경험과 지혜를 어른에게서 묻고 배우려 했습니다. 저의 친정아버지에게는 박사와 교수 등 잘나고 똑똑한 조카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들이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면 우리 아버지를 찾아뵙고 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또 시어머님은 무학이신 분이었는데 시골에 사는 일가친척들이 어려움이 있으며 올라와서 하소연을 하며 어머니께서 판단을 내려주시길 청했습니다. 일가친척이 아니어도 동네에 어른이 계시면 명절 때 찾아뵙고 세배를 하곤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자식이나 젊은이 앞에서 자기의 살아온 경험을 이야기하면 ‘라때는 그만 하세요.’라고 눈치를 줍니다. ‘라때’라는 말은 ‘내가 전에는’이라는 말이랍니다. 할머니가 손주 양육에 한마디 코치를 하면 애 엄마가 손사래를 치면서 맘 카페 올라온 정보를 더 신뢰합니다. 앞으로는 부모님보다 인공지능 AI에게 물어보는 일이 더 많아질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쏜살같았다면 지금은 빛의 속도로 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이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면서 생활이 편리해져 가고 있지만 노인들은 점점 더 소외되고 있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정보에 뒤지고 기계 다루는데도 서툽니다. 우리 중에서 상대적으로 젊은 70대분들을 제외하곤 폰뱅킹을 할 줄도, 온라인 쇼핑도 할 줄 모르는 분이 대다수입니다. 저의 남편은 송금을 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구리역에 있는 은행을 찾아가서 창구에서 이체를 합니다. 앞으로는 종이 통장도 없어진다니 큰일입니다.
최근에 들어서는 인공지능을 알아야 한다고도 하고, 쳇 GPT라는 것을 가르치는 곳도 있는 모양이지만 알려고 해도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몰라서 답답하다고, 디지털 문맹이라고 기죽지 마시기 바랍니다. 할 수 없는 것은 하지 못하는 채로 내버려 두고, 우리에게도 잘하는 것이 있으니 우리의 몫을 다 하며 살면 됩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고 남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분들이 이곳에도 많이 계십니다. 자식을 위해서, 사제 수도자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세계평화를 위해서, 병들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가장 많이 기도하는 이들이 노인들입니다.
눈과 귀가 밝지 못해 안 보이고 안 들리지만, 마음으로 보고, 듣고, 공감해주는 능력이 우리들에게는 있습니다. 이웃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좋은 일에는 환호하며 같이 기뻐해 줄줄 압니다.
들에 핀 야생화나 작은 새와도 교감을 하고,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할 줄 압니다. 젊어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입니다. 이 나이가 제일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게 되는 것은 나이 든 사람만의 내적인 평화와 자유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라고도 하셨습니다.
성서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께서 주신 이 계명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늘 사랑하며 살고 싶지만 의지대로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그런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시면서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수많은 신앙 선조들의 순교 위에 세워진 우리 교회에서 순교는 최상의 희생이며 승리의 월계관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그런 순교를 할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형제를 위하여 나의 생활 방식, 내 생각과 나의 취향, 나의 시간을 바치는 것도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은 수없이 반복해서 살아야 하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끝까지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한 번으로 끝나는 순교 못지않게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결혼하여 대가족에 살면서 일과 사람들에게 부대끼며 살고 있었을 때 가장 많이 기억했던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말씀을 기억하며 살면 삶에 의미가 부여되고 새로운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랬다 하더라도 나약한 인간이기에 실패할 때가 많았습니다.
‘다시 시작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저는 정말 좋아합니다. 줄넘기를 하면서 줄이 발에 걸려 중단되면 줄을 돌려 다시 시작하는 아이들과 높이뛰기 선수인 우상혁 선수가 막대에 걸려 성공하지 못할 때 다시 도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하는 사람만이 마침내 성공할 것입니다.
일치의 영성인 포콜라레 운동의 창시자 끼아라루빅은 자신을 따르는 회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수를 놓다가 실이 끊어지면 매듭을 지어 다시 계속해서 놓는 것과 같다. 자수의 뒷면은 수많은 매듭으로 지저분하겠지만 앞면에는 아름다운 수의 모양이 드러나 있을 것이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뒷면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완성한 앞면을 보실 것이다.’
제가 어머님과 함께 살았던 31년의 세월은 다시 시작하고 또다시 시작한 날들이었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저보다 훨씬 더 기도도 많이 하시고, 삶이 아름다우신 분들이니 지금까지 살아오신 대로 계속 사랑하시고, 실패하셨을 때는 다시 사랑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에게 해 준 것이 예수님께 해드린 것’이라 하셨으니 늙었다고, 몸이 아프다고, 사랑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웃은 누구일까요?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를 스쳐 가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입니다. 부모 형제 배우자가 이웃이고, 엘리베이터나 길에서 만나는 사람 역시 이웃입니다. 지금은 우리 옆에 앞뒤로 앉아 있는 형제자매가 이웃입니다.
올림픽을 앞둔 어느 시점에 태릉선수촌에서 열심히 훈련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TV에서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며 온 힘을 다해 연습하는 선수들을 보면서 ‘나는 복음 말씀을 살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바로 이틀 전 책을 읽다가 이런 글을 발견했습니다. 이 구절을 여러분께 소개하며 저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사랑하지 않을 이유를 찾지 마라. 누구든지 네 곁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 예쁜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 성인 같은 사람이나 죄인, 동족이나 외국인, 사제나 평신도 등 모두가 내 이웃이다. 삶의 현 순간, 네 곁을 지나가는 사람을 사랑해 보라. 그러면 마음속에서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힘은 네 삶을 맛나게 해 줄 것이며, 수많은 너의 의문에 답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