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5장 1-17절
찬송가 394장 이 세상의 친구들
암몬을 향한 심판 예언(1~7)
에스겔 25장부터 32장까지는 이스라엘을 둘러싼 이방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유다와 이스라엘을 둘러싼 다른 나라들의 죄를 묵과하지 않고,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여 죄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5장은 유다의 동편에 위치했던 암몬부터 시계 방향으로 모압, 에돔, 블레셋에 대한 심판 예언이 드러나 있습니다.
암몬은 요단강 동편 지역에 위치했고, 그 민족의 근원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이어서, 이스라엘의 형제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사 시대부터 오랫동안 이스라엘과 대립해왔습니다(삿 10장; 삼상 11장; 삼하 10장). 이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리된 시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북쪽 영토 중 일부를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시키기도 하고(렘 49:1), 바벨론과 함께 남유다의 여호야김을 치는 일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왕하 24:2). 유다가 멸망한 이후에도, 암몬의 왕 바알리스는 총독 그달리야를 암살하고자 이스마엘을 보내기도 했습니다(렘 40:14).
암몬이 이처럼 수백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도발했던 목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불행하게 만들고 괴롭히는 데 있었습니다.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그들은 여러 일들을 모의하고, 실행해 왔습니다. 유다가 망하고, 성전이 더럽혀지며,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것이 암몬이 지은 죄의 핵심입니다(6).
(6)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며 마음을 다하여 멸시하며 즐거워하였나니
주의 백성에게 지은 이 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서 물으시는데, 친히 암몬을 멸망시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핍진한 형편 가운데서 서로 먹고살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십분 이해할 수 있지만, 나에게 별다른 실익이 없음에도 오직 이웃의 불행으로 여러 일들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뼛속까지 악하기 그지없는 그런 사람들의 삶의 결말이 오늘 암몬의 결말과 같을 것입니다. 실제로 암몬은 그들이 살았던 도시의 이름만 남아있을 뿐, 민족 자체가 아예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따라서 신앙을 가진 우리는 암몬의 경우를 반면교사 삼아 내 안에 어긋난 욕망을 말씀으로 다스리면서,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해주시기까지 견딜 필요가 있습니다.
모압을 향한 심판 예언(8~11)
모압도 암몬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이었지만 늘 형제였던 이스라엘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유다보다 먼저 바벨론의 통치권 아래에 들어갔던 모압은,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배반하자 바벨론을 도와 유다를 침공하기도 했고(왕하 24:2), 유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면서도, 멸망의 겉면만 지켜보며 “모든 이방과 다름이 없다”(8)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8)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모압과 세일이 이르기를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다름이 없다 하도다
하나님의 백성 유다를 향한 조롱은 곧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자기 자식을 혼내는 힘쎈 부모 옆에서, 옆집 아이가 자기 아이를 조롱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조롱 받으신 하나님은 이에 대한 심판으로 모압의 대표적인 세 도시인 벳여시못, 바알므온, 기랴다임을 동방 사람에게 넘겨줄 것이라 말씀합니다(10). 모압은 유다가 멸망하기도 훨씬 전에 바벨론에 패배한 처지였으면서, 유다의 멸망을 지켜보며 승자 편에서 패배자를 욕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이 성경에만 나와 있는 이야기이겠습니까? 곤고한 상황에 놓인 주변 사람들, 불행 당한 타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내면이 모압과 같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아픔을 나의 것으로 여기고 보듬어 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힘이 없지만 내 옆의 승자 옆에 빌붙어 그의 힘을 나의 것으로 여기고 나보다 없이 사는 이들을 짓밟을 권리를 하나님이 주신 적 없습니다. 사람을 승자와 패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등 세상에서 통용될 만한 기준을 가져와서 우리의 기준으로 삼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지만 이처럼 아파하는 이웃을 보듬어 안지 못하는 일은 더더욱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닙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나는 세상 가운데서 어려운 처지에 놓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갔습니까? 그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습니까? 그저 남들이 가진 세상 논리에 공명하여 일방적으로 그들을 판단해온 적은 없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늘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 두신 이웃들에게 신실한 삶을 이어가는 교우님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한편으로, 모압의 조롱을 받았던 유다를 떠올려봅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면서도 백성답게 구별된 삶을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주변 나라들 사이에서 외교적인 외줄 타기에 골몰했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며, 평화와 안녕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제사장 나라로서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책임과 삶의 무게를 인식하지 않은 결과로 받은 조롱이었습니다.
이 조롱이 우리의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만 쫓으며, 그것을 가치 기준과 삶의 방향으로 삼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 길이 비록 좁다고 하여도 사람을 의지하며, 눈에 보이는 힘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늘 믿음의 길을 만드시고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입니다. 아무쪼록 모압의 조롱이 오늘 우리의 것이 되지 않도록 말씀 앞에 진중히 서는 오늘 이 아침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에돔을 향한 심판 예언(12~14)
유다의 남동쪽에 위치했던 에돔은 역사적으로 늘 이스라엘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에돔을 복속시킨 후에 수비대를 두는 한편(삼하 8:13-14), 홍해로 가는 무역로와 광산을 확보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분열된 후에도 유다가 영향력을 지속하여 행사했지만 에돔은 힘을 비축하는 대로 유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습니다.
특히 BC 586년 유다가 멸망할 때, 에돔은 방비할 여력이 없었던 유다의 남쪽 지역을 습격했습니다(시 137:7 참고). 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침공을 피해 도망가는 유다 백성들을 습격하고, 원수에게 넘기기까지 했습니다(옵 10-14). 그 결과 에돔은 남쪽 경계인 데만에서부터 북쪽 경계인 드단까지 전 국토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13).
(13~14)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내 손을 에돔 위에 펴서 사람과 짐승을 그 가운데에서 끊어 데만에서부터 황폐하게 하리니 드단까지 칼에 엎드러지리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손으로 내 원수를 에돔에게 갚으리니 그들이 내 진노와 분노를 따라 에돔에 행한즉 내가 원수를 갚음인 줄을 에돔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절에 읽은 대로 “이스라엘의 손”에 의한 원수 갚음은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역사적으로 BC 164년의 마카비와 BC 120년의 힐카누스의 정복을 꼽을 수 있습니다. 에돔은 앞에서 언급된 암몬과 모압보다 혈연으로는 이스라엘과 훨씬 더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암몬과 모압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이라면, 에돔은 이삭의 아들 에서의 후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유다가 약해지기를 기다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저열한 일을, 에돔이 저지른 것입니다. 형제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오히려 남보다 더 못한 관계를 만들어서는 곤란합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를 부를 때,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이룬다는 의미로 지체라는 말도 쓰지만, 통상 형제, 자매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함께 모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한 새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형제의 어려울 때, 나는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떻게 행동합니까? 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형제인 우리가 어떤 마음과 행동으로 삶을 이어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혈육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마음이 나뉘어 싸울 때, 부모로서 마음이 얼마나 아픕니까? 이를 기억하고, 나와 가까운 형제들, 교회의 지체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는 교우님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블레셋을 향한 심판 예언(15~17)
15절부터 17절은 블레셋을 향한 심판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블레셋은 해양 민족으로, 사사 시대부터 왕정 초기까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블레셋의 계속된 위협은 결국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는 단초가 되었고, 사울을 거쳐 다윗 때에 블레셋이 정복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분열되고 영향력이 축소되면서 블레셋은 그 힘을 점점 키워갔고, 여호람(대하 21:16-17), 아하스(대하 28:18), 히스기야(왕하 18:8)의 통치 때에는 그 갈등이 심각했습니다. 그들은 에돔이 유다에게 한 것처럼 유다를 괴롭혔는데, “미워하여 멸시하는 마음으로 원수를 갚았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15).
(15)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블레셋 사람이 옛날부터 미워하여 멸시하는 마음으로 원수를 갚아 진멸하고자 하였도다
오랜 원한으로 복수심에 불타, 도에 지나치게 보복했다는 것이 하나님이 지적하시는 블레셋의 죄였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원한”이라는 히브리어 “에이바”라는 단어는 창세기에서, 여인과 뱀의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인류에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도록 만들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죽음을 가져다 준 결정적인 존재가 사탄, 곧 뱀이며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사람이 여인입니다. 이 둘 사이는 회복될 수 없는 깊은 원한이 있습니다. 이 둘 사이를 표현할 때 쓰인 단어가 블레셋과 유다와의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블레셋이 유다에게 갖고 있었던 미움과 증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원한에 사무쳐 가혹하게 원수를 갚은 블레셋을 하나님이 가만두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에게 행했던 보복을 그대로 갚아주실 것인데, 사람이나 나라를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갚아줄 것이라 말씀합니다(17).
(17) 분노의 책벌로 내 원수를 그들에게 크게 갚으리라 내가 그들에게 원수를 갚은즉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원수를 크게 갚으신 결과, 그들은 마카비 시대 이후에는 살았던 도시 이름만 남기고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지난 1학기 수요성경공부 시간을 통해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생사를 걸고 전쟁해왔던 역사를 어느 정도 살폈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 어떤 감정을 갖고 서로를 대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보다 가까이 사는 사람들 중에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블레셋처럼 자기의 원한을 봇물 터지듯 쏟아부어서는 곤란합니다. 늘 갈등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네 개의 나라들에 대한 심판 예언을 보면서,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여러 관계들이 떠오릅니다. 부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삶을 이어가시기를 부탁드리며, 살아갈 은혜를 오늘도 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세상을 운행하시며, 죄에 대한 심판을 미루시지 않는,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임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의 삶의 방식을 나의 것으로 답습하지 않으며, 할 수 있는 대로 이웃을 환대하고 포용하는 인생 살게 해주시옵소서. 처지가 어려운 이웃의 고난을 기회 삼아 나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고, 오랜 기간 묵혀왔던 마음의 짐들을 주님의 은혜로 털어버리게 해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 따르는 길에 방해물이 없도록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