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6장은 일꾼의 행로입니다. 바울의 자서전적입니다. 눈물겹습니다.
이를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결격사유가 없습니다.
고후7장은 근심의 문제입니다. 근심의 양면성은 하나님을 향한 근심과 세상을
향한 근심입니다. 새 언약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근심을 하게 하는데 반해
옛 언약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 세상의 사물들로 근심하게 만듭니다.
요즘 청빈이냐 청부냐 말하는 목사들을 보면 결국 관심이 거기에 있단 말이죠.
왜 목사가 돈 이야기를 자꾸 해야만 합니까? 거기에 머물러 있는 방증입니다.
죄에 대한 말을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죄의 자리에 있는 것과 같은 이칩니다.
7장의 요절은 10절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하나님을 향한 근심은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떻게 자신에게 적용할까
주야로 앉으나 서나 노심초사하게 합니다. 그 십자가의 도를 통해 중생과
회개와 죄 사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세례가 임하는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회개 중에 주께 붙잡힌 것을 내가 붙잡는 것보다 더 귀한 회개가 있을까요?
주께 자신이 완전히 사로잡혔다는 복음을 듣고 소화하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은 때릴 줄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싸매기도 하는 분이기도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리도 잘하고 싸매기도 잘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는
아버지 같은 모습이고, 고린도후서는 어머니와 같은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8장과 9장은 연보의 문제입니다. 헌금은 어떻게 하는가? 왜 내야 하는가?
연보의 유익이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지금의 헌금의 개념과 고린도후서의
헌금 곧 연보의 개념은 다릅니다. 그 당시의 연보는 구제 곧 빈부의 차이를
줄이는 헌금, 그리고 선교비 등입니다. 바울 자신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약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려 죽으시고 다시 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중보하시므로 우리가 구속함을 받아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실을 감사하며 자신과 함께 드려야만 연보답습니다.
십일조든 감사이든 선교헌금이든 자신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식을
가지면 이미 그건 기부금이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이 될 수가 없을 겁니다.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그 중의 것을 자신의 것인 양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면 하나님은 외면하실 겁니다. 사람들이야 필요한 곳이 많으니 장려를 하겠지요.
8장의 요절은 13-15절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9장의 요절은 9-11절 입니다 “기록한바 그가 흩어 가난 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연보에 대해서 더 이상의 설명을 할 필요가 없는 말씀입니다.
10장과 11장은 사이비 사역자의 문제입니다.
요절은 10장은 17-18절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11장의 요절은 2절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리고 12장과 13장은 참 사도에 대한 논쟁입니다. 고린도후서는 일꾼의 문제와
헌금문제로 구성되어 있고 마지막으로는 전서의 결과를 감싸주는 내용입니다.
사이비 사역자의 문제는 고린도후서를 통해 새 언약의 일꾼을 부각시켜야 합니다.
말세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복음의 초기 곧 초대교회와 말세가 매우 중요한 시점입니다. 원형교회의 보존입니다.
문제는 거짓 교사들은 자신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만큼 헬라철학에 의한 교육학이 인간의 마음의 땅과 뇌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계시록은 땅이 참 교회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씀합니다(계12:16) 그래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고 땅과 바다는 화 있을 지라고 말씀합니다(계12:12) 그렇지만
하늘에 속한 자가 누구인지 땅과 바다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이건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하는 영적인 맹인이니 아무리 떠들어 봐도 우이독경이 될 뿐입니다.
소를 물가까지 이끌고 갈 수는 있으나 물을 먹이지는 못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12장의 요절은 9절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리고 13장의 요절은 5절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 말씀은 고린도전후서
전체요절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믿음이 고린도교회에 없었고 지금의 교회
또한 그렇습니다. 따라서 고린도후서는 사역자의 세미나에 매우 좋은 자료일 겁니다.
첫댓글 아멘 입니다.
우리가 현재 새언약 가운데 살고, 주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 대제사장직 직분을 따라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함을 받으면서 살지만, 우리가 믿고 섬기는 삼위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분 이심을 여전히 알고 떠는것이 중요 합니다.
내안에 부활과 생명되신 그리스도는 나의 "주" 가 되신 크고 두려우신 분이십니다.
네 맞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지만 얼마나 믿음으로 주님을 대접해 드리는가 늘 긴장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