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인생이 제 궤도에 진입한 느낌이다. 몇 주 전부터 느끼고 있지만, 남은 반생을 살펴봐도 내가 갈 길은 이제 다 사라지고, 하나의 길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
존경했던 선생님도 책을 쓸 때는 항상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저 글이 이끄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자신의 길에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나 또한, 희미한 한 줄기 빛을 보고 내 길을 가려고 한다.
마흔네 살을 살았으니, 이제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다. 물리적으로 중년의 나이는 이미 맞이했지만, 심리적으로는 그 시기를 잘 따라가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 철이 드는지, 혹은 정신치료의 훈습에 관한 책을 읽어서 그런지 내 나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실, 이 글은 쓰게 된 계기는 영화 ‘로마’ 후기를 쓴 내 글을 읽으면서다. 그리고 오늘 읽은 소설가 김형경의 심리훈습 에세이 <만 가지 행동>을 읽었기 때문이다. 책에 보면 저자가 할머니들에게 유독 친근감을 느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나의 어머니가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오늘 새삼스레, 모든 것은 내가 자초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외부의 자극에 관해 반응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은 ‘로고 테라피’로 유명한 정신과 의사의 말이기도 하다. 즉 오늘 난 외부에서 어떠한 영향이 있어도, 내 감정을 감당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오래 질질 끌던 문제가 해결되는 느낌이었다.
한때 난 심하게 퇴행이 됐었는데, 이것을 외부의 작용 때문이라고 여겼었다. 가끔 제정신이 들 때는 ‘모두 내 탓이로다’ 혹은 ‘내가 의도했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인생이 꼬였다는 억울함이 있었다. 또래의 인생보다 매우 뒤처지게 돼, 항상 곤혹스러운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잘랄루딘 루미란 옛날 시인의 시를 읽게 됐다. “네가 잃어버린 것은 어떤 형태로든, 다시 네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이 글에 난 상당한 위안을 받았다.
또한, 위에 언급한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의 이야기에서 위로를 받기도 했다. 어느 나이 든 남자가 그를 찾아와 현재 자신이 매우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때 빅터 프랭클은 “만약, 당신이 겪는 고통을 돌아가신 아내가 경험한다고 생각하면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이 물음에 노인은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한 후, 그의 손을 꼭 잡고 돌아갔다.
인생은 이처럼 역설로 짜여 있고, 타인의 입장에 서 볼 때 진실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오늘 책에서 읽은 내용도 ‘타인을 존경하고 모두로부터 배우기’였다. 난 고집이 꽤 세고, 틀이 강한 사람이다. 그래서 항상 내 생각이 옳다는 주장을 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려서 극복하지 못한 나르시시즘이다. 즉 나의 내면 아이가 받은 상처인 것이다.
이제 마음의 회복력이 좋아지려는지, 저자가 말한 것을 실천으로 옮겨 볼 생각을 하게 됐다. 즉 오만한 마음을 버리고, 모두를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타인으로부터 배우기를 시도할 것이다. 내가 지향하는 바는 도전하고 모험하는 인생이다.
그리고 오늘 연구소의 비전을 바꾸었다. ‘더불어 건강한 삶을 나눕니다’는 행복연구소로 운영할 때 어울리는 문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은 심리연구소로 명칭을 변경하기도 해서, 비전을 다시 처음으로 되돌렸다. 내 첫 책 제목이기도 한 ‘성장하려는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로 바꾸었다.
나는 이제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욕구를 많이 줄였다. 예전에는 유명해져서 ‘좋은 활동’을 펼치고 싶었지만, 인생은 나를 그쪽으로 인도하지 않는 것 같다. 대신, 자그마할 수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그저 천진하고 단순하게 할 것을 요구하는 듯하다. 나는 내 운명이 이끄는 대로 길을 따라나설 것이다. 언제나 인생에 관해 “예”라고 대답하고 싶은 게 나의 바람이다.
아직 모순된 마음을 지니고 있지만, 조금씩 균형을 찾아가리라 생각한다. 나도 동양 사람이기도 하고, 중용은 고전에서도 중요시하는 내용이다. 지금은 조금 들떠 있지만, 본래의 내 모습대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김신웅 심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