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인지도 모르고 만났던 멕시코, 살리나스 대통령
1992년 가을학기 초에 서울대 이ㅈㅅ 교수한테 전화가 왔다. 내년(1993년) 3월 초에 멕시코에서 중소기업국제회의가 있는데 나더러 다녀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흔쾌히 수락하였다. 그런데 1993년 2월 중순까지도 아무 연락이 없어서 2월 25일경에 멕시코로 전화를 하였다. 당시는 국내 전화 사정이 지금 같지 않아서 국제전화 하기가 매우 불편했다. 학교 교무처에 국제전화 신청을 해야 되고 통화기록을 남기어야 했다. 절차를 밟고 멕시코 담당자에게 전화를 하니, 받자마자 반가운 인사를 하고 “너 지금 공항에 도착했느냐? 마중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혀서 . . . 아직 초청장도 못 받았다고 하니까 벌써 다 보냈는데 행사가 3월 1일 부터인데 좌우간 수속해서 빨리 오라는 것이었다. 한국 동행자를 물으니까 ‘배기낵기’도 같이 오니 함께 오라는 것 이었다. 대사관으로 문의하니 ‘배기낵기’라는 사람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어렵게 알아보니 “배기낵기”라는 사람은 ‘백낙기’ 박사이었다. 부랴부랴 항공권을 구입해서 멕시코에 도착하여 보니 백 박사는 부부 동반으로 왔는데 나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부부 동반하여 참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
그런데 학술대회를 마치고 귀국해서 어떻게 착오가 생겼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학교로 보냈다는 공문, 항공권 등을 학교에 물어보니 모르는 일이란다. 분명히 등기이었을 것이므로 등기기록을 확인해 보니 ‘모르는 글씨로(스페인어) 쓰여 있어서 도서관으로 보냈다’는데 도서관 근로학생이(?) 도서관과는 관련이 없는 문서인 줄 알고 버렸을 거라는 것이다. 기가 막혀서. . . 집행부 담당자 왈 '교수님은 다른 교수님 같지 않고 이상한 경우가 왜 그렇게 많으냐'는 것이었다. 역시 기가 막혀서. . . 따져서 무엇 하랴. 오히려 관련 계통의 담당자들이 미안한 마음은 고사하고 나의 학술활동에 대한 불만만 쏟아 놓고 있었다. ‘다른 교수님들은 이런 일이 없는데 왜 자꾸 교수님만 이런 일을 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나는 명지대 개교이래 첫 번째로, 또 미국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공채로 학교에 취임한 교수이고, 이미 해외 학술대회에 다녀오는 등 명지대의 역사에서 파격적인 활동과 기록을(?) 세우고 있는 중이었으니 당시 삼류대학이었던 교무행정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생소한 경우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멕시코시티의 국제심포지엄 행사는 사방에서 단상을 올려다볼 수 있는 우리수리한 회의장이 기억에 남는다. 전체 라틴아메리카의 중소기업 관련 학자와 정치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라틴 아메리카와 동양에서 몇 나라의 대표들을 초청하여 개최하는 매머드 국제중소기업 심포지엄이었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 2명을 초청한 것은 아마도 노태우 대통령이 1991년 9월 25~27일 멕시코에 방문하였고 정상회담을 가졌으므로 그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2명의 학자를 초청하였을 것으로 짐작하였다. 동양에서는 나와 국제경제연구원(원장 정재석)의 백낙기 박사를 초청하였고, 일본의 중소기업협회의 임원 한 사람뿐이었다. 지금 이름은 잊었는데 그도 혼자 왔고 나처럼 스페인어를 할 줄 물라서 나와는 동병상린이었다. 그 후 귀국하여 일본에 갈 기회가 있었을 때 만나서 술 한잔하면서 회포?를 풀었다.
본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나와 일본 대표를 비롯하여 몇몇 VIP를 특별히 뫼시는지 별실로 안내하였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가서 자리를 잡았다. 갑자기 창가에 플래시맨들이 빽빽이 모여들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좀 있으니까 몇 사람이 바로 우리들 앞으로 들어왔다. 악수를 나누고 서로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앉았다. 갑자기 플래시 섬광으로 대낮같이 밝아졌다. 이어서 스페인어로 인사말을 하였는데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환영인사였을 것이다. 경황 속에 차 한 잔을 하고 이동하였고 우리도 행사장으로 이동했다. 알고 보니 그가 그 유명한 살리나스 멕시코 현직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하버드 행정학 박사인데 영어로 말하지 않고 스페인어로 했다. 아마 우리가 스페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지나고 나니 세상에 이런 영광이 있을 수 있나. 아마 그 후 내가 한국에서 유명 정치인이 되었으면 당시의 사진을 분명히 소환하였을 것이다. 살리나스 대통령하고 마주 앉았는데도 나는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 . . 멕시코 말을 잘 몰라서 . . . 일본 대표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는 귀국길에 용설란이란 선인장 수액을 발효시킨 술인 데길라(Tequila)를 기념품으로 쇼핑하더군. 그 후 일본에서 그를 다시 만나 술 한 잔을 하였던 추억이 가물거린다.
< 부 록 1 >
라틴 아메리카 국제세미나:
국제경제 세계화와 중남미 중소기업
Shim Ui Sup, "The situation and strategies of the foreign direct investment of small and medium enterprises in Korea with special regard to Latin America", International Seminar of "The Role of Micro, Small and Medium Scale Enterprises in the Globalization Process of the World Economy", Sponsored by ALIDE/NAFIN, BID, BANCO MEXT, UNAM, Mexico City, Mexico, 1993. March 1-4(Travel 1993.2.28-3.6).
주제: 세계 경제의 세계화 과정에서 중소영세기업의 역할에 대한
국제 세미나
주최: 라틴 아메리카 개발금융기관협회(ALIDE)와 내쇼날 금융(NAFIN)
주관: 내쇼날 금융,
인터 아메리카 개발 은행, 무역은행,
멕시코 국립 대학교
장소/기간: 멕시코 D.F.
1993년 3월 1~4일
살리나스 대통령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Carlos Salinas de Gortari.
1948년 4월 3일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행정학 석/박사
멕시코 합중국 제60대 대통령
재임 기간 1988.12.1.~1994.11.30
살리나스 대통령의 평가와 근황을 위키피디아와 나무위키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살리나스는 국회의원을 한 적이 없어서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많은 애로사항을 겪었다. 원내 경험이 있으면 소위 관행에 익숙해지고 인맥이 형성되는 것이 바로 정권을 뒷받침하는 버팀목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회의원 경험이 없다면 그냥 의회의 공격 대상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87년 10월 5일 차기 대선 출마를 위해 장관직을 사임했다. 곧바로 경선에 뛰어들어 제도혁명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40세이었다.
재임 초 살리나스는 경제 전문가로서 국부에 가까울 정도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선거 전부터 미국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할 것을 공약했고, 이를 바탕으로 임기 말인 1994년 1월 1일 미국과 FTA를 정식으로 체결한다. NAFTA 체결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1992년 12월 미국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캐나다의 브라이언 멀로니 총리와 함께 협정에 조인하여 1994년 1월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그는 그 여세를 몰아 미국의 지원으로 초대 세계무역기구(WTO) 총장 후보로 추대되기도 했으나, 유럽의 지원을 받은 이탈리아의 레나토 루지에로에 밀려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한편 멕시코는 1994년 5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그의 NAFTA 협정 체결은 멕시코의 정국 운영을 어렵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살리나스는 이 협정이 멕시코 경제에 플러스 요소가 될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제도혁명당이라는 단 하나의 정당이 60년 이상을 장기집권하면서 그로 인한 악습들이 누적되어 왔는데, 나프타는 여기에 결정타를 가하고 만 것이다. 과반의 근소한 차이로 당선된 것이다. 턱걸이 당선만으로도 살리나스 정권은 정통성이 매우 취약했으며, 이런 상황에서 커다란 실책을 벌였으니 전국에서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살리나스 정권은 급격하게 레임덕이 걸리게 되었다. 반정부 시위 중에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의 반란으로 사회 불안이 심해졌고, 제도혁명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로 유력시되던 루이스 도날도 콜로시오가 암살되어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콜로시오의 암살에 관련된 의혹을 받았다. 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다음 대통령으로는 제도혁명당의 에르네스토 세디요가 당선되었으나, 그가 퇴임할 무렵 금융 위기가 발생, 제도혁명당은 더욱 큰 타격을 받았다. 재임 중 살리나스 대통령은 수많은 멕시코 국영 기업들을 민영화하였는데, 정경유착으로 헐값에 인수받아 억만장자가 된 사람들만이 이득을 보았다. 대표적으로 카를로스 슬림도 이때 국영기업을 인수 받아 빌게이츠와 세계 최고의 부자 1위를 다투게 되었다. 그리고 살리나스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그들과 유착되어 풍요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멕시코의 민영화의 사례는 역사상 최악의 사례로 거론된다.
그는 1994년 11월 30일, 6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일단 제도혁명당이 가까스로 정권은 연장하는 데 성공했지만, 살리나스는 집권 당시의 실책이 발목이 잡히면서, 결국 해외로 망명해야만 했다. 퇴임 다음 해 초 부정 축재 혐의로 고발되었으며, 그의 형 라울은 마약 거래 혐의로 곤란한 입장에 처했다(훗날 징역 27년형을 선고받았다). 자유무역협정 체결과 금융위기 초래로 큰 비난을 받으면서 부패 정치인이라는 낙인까지 찍힌 그는, 그 해 3월,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실질적으로 망명의 길을 택했다. 망명 후 미국과 캐나다, 쿠바, 아일랜드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2000년 11월 저서를 홍보하기 위해 멕시코로 귀국했다. 2004년 12월 멕시코 최대 마약 카르텔인 걸프 카르텔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고 소문난 막내의 엔리케 살리나가 다른 마약 카르텔에 의해 암살되었다.
후임의 세디요 정권 말기에 귀국하는데 귀국의 목적은 새로 출간한 저서를 발표하려는 차원이었다. 게다가 저서를 통해 세디요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잘했다는 뉘앙스 때문에 비아냥과 곱지 않은 여론을 피할 수 없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2000년 국민행동당의 비센테 폭스가 집권하면서, 장장 72년간 집권했던 제도혁명당 정권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2010년 살리나스는 아일랜드 더블린에 거주하고 있으며, 2012년에는 대통령 선거를 지원하기 위해 다시 멕시코로 돌아왔다. 그 후 2021년 스페인 국적을 취득하였고 최근에는 마드리드에서 거주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2024.6]
<더보기> ‘멕시코, 살리나스 대통령’, 심의섭, 곰곰이 생각하는 수상록 8,
아련한 회상, 얼결에 만난 정상들(전자책), 바로이책, 2024.7.1. : 155~181
https://youtu.be/tMqqxCuZGgE
https://youtu.be/tMqqxCuZGgE?t=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