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 수인기 5
열국천하(列國天下)
밤새 거세지거나 잦아들기를 반복하던 빗줄기가 그 세를 줄이고 비구름에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사위가 밝아져 아침이 온 것을 알았다.
“전혀 주무시지 않던데 몸이 상할까 걱정입니다.”
“나는 원래 잠을 자지 않아. 그러니까 지심이나 초초도 내게 맞추려 하지 마라.”
“하지만 자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라혼과 처음 밤을 지새운(?) 지심과 초초는 주인이 잠이 들지 않아 같이 잠을 자지 못하고 푸석한 얼굴로 차를 가져왔다.
“라혼 대가, 아침이에요!”
“포포 왔느냐?”
“예, 대가. 그런데 밤새 도둑이 들었다면서요?”
“도둑이라….”
포포의 질문을 받은 라혼은 지심에게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지심은 고개를 살짝 저어 자신이 포포에게 말하지 않다는 표시를 했다. 초초는 밤새 라혼의 집무실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방을 떠나지 않았고, 집무를 보는 건물 밖으로 나간 것은 오직 지심뿐이었다. 그런데도 포포는 밤새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라혼은 자신이 머무는 집무실이 있는 건물을 초초와 지심 외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조치했다. 시끄러운 것이 싫었고 또 지켜보는 눈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포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멀리서나마 자신의 거처를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말이 되었다. 그때 누군가 밤새 침입한 자를 가두어놓은 곳으로 빠르게 접근하는 자가 라혼의 감각에 걸렸다.
“구하기 위해 온 것인가? 입을 막기 위해 온 것인가?”
“예?”
―팍!
“어? 대가!”
포포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라혼 대가가 ‘푹!’ 꺼지듯 사라지자 크게 놀라 소리질렀고, 지심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방을 뛰쳐나갔다.
“지심, 같이 가!”
그러자 지심의 뒤를 포포가 따랐고, 방에 홀로 남겨진 초초도 잠시 머뭇거리다 방을 나섰다. 이제 라혼이 집무실로 사용하던 방에는 차갑게 식어가는 차가 담긴 다기(茶器)만 남았다.
‘번을 서는 자가 없다니 함정인가?’
귀호일호는 백호나한이 머무는 곳이 너무도 인적이 없자 함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백호나한의 수하들인 흑장(黑將)들은 모두 위병들이 사용하던 연무장에 간 사실을 떠올리며 그 생각을 머리 속에서 지웠다. 백호영이 입은 검은 갑옷 때문에 봉수성의 백성들은 그들을 흑장이라 불렀다.
“찾았습니다.”
“….”
귀호령은 혈도가 점혈된 그대로 포박되어 있었다. 복면도 벗기지 않고 제압된 귀호령의 모습을 확인한 귀호일호는 뭔가 알 수 없는 예감에 기분이 나빠졌다. 그때….
―빠각!
“!”
―퍽!
‘헉!’
―퍽!
―쿵!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로 얼굴을 가린 침입자 앞에 나타난 라혼은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팔꿈치로 오른쪽에 있는 자의 코를 깨고 전면에 있는 자의 복부에 주먹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리고 어젯밤에 침입했던 자의 상태를 살피던 자를 발로 차서 벽까지 날려보냈다. 그리고 지풍(指風)을 날려 그들의 마혈을 제압하고 은섬충(銀蟾蟲)을 꺼냈다.
“한번 사용하고자 하니 계속 쓰게 되는군. 하지만 이 방법이 훨씬 피를 덜 보는 방법이니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어떤 놈에게 쓴다?”
라혼은 홍대보의 저택에 속해 있던 하인에게 은섬충을 사용하기로 했다. 아직까지도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기운을 읽을 수 있는 라혼은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홍대보가 어떤 중요한 지위에 있다면 그는 최측근에서 그를 모셨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었다. 라혼이 꺼내놓은 은섬충이 그의 콧속으로 스며들 때쯤 지심과 포포가 도착했다.
“주인!”
“대가!”
포포는 라혼의 머무는 거처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며 은밀하게 움직였을 이들을 감지하는 라혼의 능력에 새삼 감탄했다.
“지심, 그들을 포박해서 데려와라!”
“옛!”
“대가, 그들은 누구예요?”
“그거야 심문하면 드러날 일, 그보다 아침 전이겠지? 같이 아침 식사나 하자!”
“하지만….”
“초초, 아침 식사를 준비해줘!”
“예? 예.”
포포는 그들을 심문하는 것을 보고 싶었지만 만사태평한 라혼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다. 그들의 정체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것은 나름대로 중요했다. 추측한 사실과 확실한 정보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혼 대가.”
“왜?”
“지금 절 놀리시는 거 맞죠.”
“그게 무슨 말이야?”
포포는 방금 전 사로잡은 자들을 같은 탁자에 앉혀놓고 식사를 하게 되자 라혼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사자들인 네 명의 침입자들은 더욱 황당했다. 호된 치도곤을 당하리라 각오하고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였건만 그들이 끌려와 처음 당한 일이 백호나한과 같은 상에서 밥을 먹는 일이었다. 아름다운 처자와 아옹다옹 말다툼을 벌이는 훈훈한 분위기는 오히려 불안감을 가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상대는 조정이 직접 임명한 장수인 위병대장의 목을 과감하게 참한 자였다.
“세상에 사로잡은 도둑하고, 그 도둑을 빼가려던 일당을 한 상에 놓고 밥이 넘어가요?”
“뭐가? 밥맛 없게 생기진 않았잖아? 어디 가나 흔하게 생긴 얼굴인데? 도둑놈이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괜찮아. 네 실력이면 이것들이 떼로 몰려온대도 상대할 수 있어. 무림의 여걸이 겨우 하수 넷을 무서워서(?) 밥을 먹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니?”
“누가 이 허약한 놈들이 무서워 그러는 줄 알아요?”
졸지에 ‘도둑놈’에 허약하기 그지없는 하수(下手) 취급을 받은 귀호기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차라리 당당하게(?) 고문을 당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구운 어린 돼지 요리가 참 맛있군. 고기가 아주 연해. 어서들 먹으라고. 심문을 받을 때 받더라도 먹고 받아야 되지 않겠나?”
“우릴 어쩔 셈이오?”
“묻는 것은 나지 네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뭐 먹을 때 질문받는 것을 싫어하지.”
피어(fear)가 섞인 라혼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귀호일호는 한순간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라혼의 차가운 경고에 포포마저 조잘거리던 입을 닫고 조용히 음식을 먹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이번에 차를 마시고, 차마저 다 마시자 아침 수련을 마친 잔폭광마와 모석이 함께 라혼을 찾았다. 그때까지 4인의 귀호기들은 꿰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한쪽에서 자릴 차지하고 있었다.
“손님이 있었네? 초초 낭자, 저들은 누구요?”
“저어 그게….”
잔폭광마는 초초의 설명을 듣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군 라혼과 뻘줌하게 서 있는 침입자들을 번갈아 보았다. 정례 보고를 마친 모석은 말없이 한쪽에 서 있는 네 명의 사내들을 보고 물었다.
“주군, 저들이 누구입니까?”
“한 놈은 이 집 하인 행세를 하던 놈이고, 다른 놈은 나도 모른다. 하지만 짐작 가는 바가 있지.”
“예?”
“고학에게 저들의 처우를 상의한 뒤 처리하려 생각 중이다.”
“대장, 제가 고 서생을 데려오겠습니다.”
“그러든가.”
잔폭광마는 라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야 되겠는데 가만히 있어서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채 반각이 되기도 전에 고학과 모원이 잔폭광마의 손에 이끌려 왔다. 그리고 약 한식경(30분) 동안 라혼과 독대한 고학은 본격적인 심문을 하기 시작했다.
“너희는 누구냐?”
“….”
그러나 네 명의 사내 중 누구도 입을 벌리지 않았다. 그리고 고학 또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사실 라혼은 그들이 진정 원주 호황가의 사람일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조정에 반할 생각은 없었지만 때에 따라선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라혼은 아직까지 설화의 부친인 호사천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왜 서제가에서 설화의 모친인 강무혜를 노렸는지 그리고 강무세가는 이미 조정에 반기를 들었음에도 강무혜에 대한 일을 이야기하지 않는지 모르는 것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제가의 손에 가문의 여인이 당했으니 현 조정을 성토할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무세가는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이 그것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호사천의 경우엔 아예 존재 자체가 불분명했다. 자신의 성(性)이 호(虎)임을 밝히고 이름을 숨겼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고, 호황가가 그의 존재를 일부러 숨기고 있다는 것 외엔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즉 호황이 적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호황과의 접촉은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었다. 아직 설화를 뒷받침하는 세력이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호황의 견제가 시작되면 그만큼 움직이기 힘들 것은 뻔했기 때문이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단지 7호라 불릴 뿐입니다.”
“좋다, 7호. 네가 아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라!”
“예, 저는….”
라혼은 은섬충에 당한 자를 골라 물었고, 그는 새 주인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머지 세 명은 그런 7호의 태도에 놀라 허둥댔다. 귀호령이라 불린 그였다. 그러니 귀호기의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은 물론 호영의 일까지 낱낱이 밝혀졌다.
“모석, 그들을 모두 잡아들여!”
“존명!”
“육 정위, 너도 가서 도와라!”
“옛, 대장!”
두 무장이 귀호기와 호영기를 잡아들이기 위해 떠나자 포포는 라혼 대가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간자였어요?”
“간자라고도 할 수 있겠지.”
라혼은 포포의 간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라혼은 호황의 비밀 결사인 귀호기가 간자라면 간자일 수 있다는 뜻으로 말했지만, 포포는 그가 라혼이 귀호기에 침투시켜놓은 ‘간자’로 해석했다. 그리고 포포는 그러한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라혼 대가, 저 잠시….”
“그러렴.”
라혼은 포포가 방을 나서자 지심에게 은섬충을 쓰지 않은 셋을 가두라 지시하고 초초에게 차를 부탁했다. 그리고 다시 7호에게 물었다.
“자네는 호사천이란 이름을 들어보았나?”
“예, 잘 압니다. 그는 예전에 제가 모시던 귀호기주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