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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입문
1장 계시. 신앙. 교회. 신학
계시와 신앙 신학은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과 관계된 현실에 대한 참 담론(談論)에 봉사하는 것이다. 그 담론에 봉사는 겸허하면서도 그러나 분명하게 그 뜻을 제시해야 한다. 신학은 그리스도 공동체 삶에서 재인식되고 안정된 전통 안에서 형성되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하느님의 계시와 교회의 신앙으로 출발하고 대답한다. 즉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계시와 하느님을 향하는 우리의 응답으로서 신앙은 그리스도 신학의 핵심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하느님 계시와 교회의 신앙에 관한 방법적, 조직적 반성으로서 정의할 수 있는데, 그 경향은 하느님께서 세상 역사에서 인간자신에 대해 인식하고 완성하신 것을 생각하도록 인간에게 수여하신 비 인식으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에서 성령을 통하여,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얼굴을 계시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부터 출발한다.
1.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Theology)의 복수적 의미: 신학(神學)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 말씀(logos)이며, 신학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 자기 자신(Theos)으로서 말씀이다. 이렇게 신학은 복수적 의미를 담고 있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 말씀(logos)이며, 하느님과 함께 연관된 것으로서 하느님 자신에 관한 담화(Theos)이다.
1) 신학이란 말의 역사 신학(Theologia) : The s 하느님 + logos 말, 담화. 하느님에 관한 담화(플라톤, 아리스텔레스) 고대 희랍 사상 신학이란 신들의 신비적인 이야기들이다.(플라톤, 공화국 379A) 신학이란 기상학이다. 신학은 천상적 신적 육체의 보다 과학적인 수단으로 여겨지는 기상학으로 대비된다. 신학은 신들에 관한 시이며, 신화들이다.(아리스토텔레스, 기상학2,1,2;형이상학2,4,12) 시인들이 신(神)들에 대해 말함, 시인은 신학자로 호칭. 존재하는 모든 것의 첫째 원인으로서 하느님에 관한 철학적 특성으로 확대됨. 초 세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에 의해 인용되는 삼위일체(구원경륜에 관한 교의)에 관한 교의를 가르치기 위한 공통적인 의미로 사용됨. 중세 라틴 세계에서 하느님, 창조, 구원에 관한 교의를 함께 가르침. 라틴 중세는 인식(과학)으로서 신학을 꽃피웠다. 인식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 신학은 다른 모든 인식의 최정상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신학 개념은 우리에게 관련되어 최근에 토론의 여지를 남겨두면서도 몇 세기 동안 안정되고 확산되어 왔다.
2) 신학의 세 가지 의미 신학은 하느님 말씀의 선포에 대한 형태이다. 하느님의 구원경륜을 인간이 이해하기 위해,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성서에 관한 모델을 선포한다. 이성적 해석뿐만 아니라 이야기, 기도, 시적 구성... 신학은 이성적 추리 과정의 형태를 취한다. 하느님에 관한 이성적이며 철학적인 관심들을 문제와 해석 환경으로서 탐구하는데, 진지하게 인간과 세상 그리고 역사를 취하는 생각을 어떤 모양을 가지고 토론한다. 신학은 신앙과 그 내용들을 이해하려는 원의와 신앙에 대한 반성을 추구하는 형태이다. 첫째와 둘째를 배제하지 않을 때 우리의 신앙적 반성들은 마지막 전망으로 모아진다. 신학이란 결국 우리에게 하느님과 인간과 역사에 관한 진리를 찾는 것이다. 철학 내지는 다른 종교의 인식에 있어서 하느님에 관한 담화를 신학에 있어서 하느님의 담화와를 구별하는 것은 역사 안에 관련을 맺으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기초를 두는 항구함이다.
2. 계시와 신학
1) 신학의 근본 바탕은 계시(啓示)와 신앙(信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교회의 신앙이 어떻게 성립되고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계시(revelatio= re-제거하다 + velum-장막)란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나러 오시는데 당신을 스스로 세상과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사랑이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분의 사랑에 우리 인간이 응답하는 것이 신앙이다. 계시론과 신앙론은 관념론적인 이론이 아니다. 계시-신앙론은 철학에서 존재론과 같이 신학의 중요한 근본문제이다. 계시-신앙론은 교의(敎義.dogma)와는 다른 관점에서 논의된다. 따라서 기초신학에서 다루는 계시-신앙은 일종의 선험적(a priori) 내지 초월적인(transcendental) 신학 분야이다. 계시는 단순한 지식체계의 전달이 아니라 한 주체가 다른 주체에게 인격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성서와 성전 ↓ 계시
해방신학자들은 계시의 모든 중재에 있어서 작용하는 문화적인 요인들을 강조한다.
계시의 빛 ↓ 세상 매체(성령에 의해) 대자연(제1차바티칸 공의회: 기초신학적인 공의회) 역사(제2차바티칸 공의회: 교회의 근본 쇄신과 세상에 적응) ↓ 우리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는 이성만도 성서만도 아닌 그것을 다 포함하여 인본주의자, 무신론자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다른 종교인들과도 논의해야한다.
계시론은 역사적 계시로부터 시작한다. 아브라함-예언자, 사제, 왕-예수 그리스도 초월적 고찰: 철학적 반성 역사적 고찰: 성서적 고찰 중개적 고찰: 초월적, 역사적 고찰이 어떻게 구원을 위해 사람들에게 중개 전달
2) 계시란 무엇인가? 신적 자기계시 - 자기통교(self-communication)이다. 스콜라신학 자연적 계시-세상 창조사업-초자연적 계시를 위해 일어남 초자연적 계시-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에게 절정을 이루는 ’말씀(보고-들을 수 있음)을 통한 계시-자연적 계시의 목적 계시자-하느님, 계시-예수 그리스도, 계시를 드러내시는 -성령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계시 구약성서 전체 구세사(구원경륜)-그리스도 계시의 준비 하느님의 계시는 당신의 역사와 세상의 역사가 서로 만나도록 영 안에서 당신 아들을 통해서 드러내는 아버지의 사랑이며 통교이다. 하느님의 계시는 당신 영의 내적인 역사(役事)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영은 기쁘게 봉사하시지만, 인간 구원에 대해서는 매우 강한 역할을 하신다. 하느님의 영은 계시된 사실 즉 아버지로부터 전달받은 신비를 인간이 후손들에게 보존하고 또다시 전달하도록 함께 하신다. 하느님은 아들에게 말씀하시고 자신의 이름으로 인간에게 전달 해야하는 신적 현실을 드러내신다(전승, trasmissio). 하느님은 유일하시고 절대적으로 초월적이시며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즉 대자 대비하신 아버지이시다. 이러한 모습이 성령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다. 성령은 협조자, 중재자이며, 신적 통교자이다.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형언할 수 없는 이러한 통교가 나타난다. 성령은 그렇게 신적 주체이며 또한 신적 대상이기도 하다. 성령 안에서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을 모두 받아들이는 유일한 신-인적 수락자가 된다. 하느님 계시의 신비는 신학(theologia), 구원경륜(oikonomia), 영광송(doxologia)의 세 단계로 그 내용이 드러난다. 신학은 인간의 측면에서 하느님이 드러나신다. 그래서 신학의 형식과 내용은 문화적인 특성에 따라 부정성의 모양인 부정신학(theologica apofatica, 주로 동방교부)과 긍정성의 모양인 긍정신학(theologia catafatica, 주로 서방교부)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구원경륜은 하느님의 입장에서 당신이 드러나신다. 따라서 구원경륜은 항상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원의가 드러나기 때문에 긍정성의 신학(oikonomia catafatica)으로 드러난다. 그리스도와 계시-그리스도 계시의 완성 공관복음, 요한 복음 창조: 세상 창조 안에 드러난 계시(로마1,18-23) 계시: 죽음, 부활-신적 계시에서 가장 핵심이며 그리스도가 마지막 계시이 며 계시의 결정적인 가치를 드러낸다. 종말: 미래에 완성될 계시 그리스도, 성령: 사도들 신앙: 성 바오로, 구원-성 바오로의 계시는 다마스커스 사건 체험 즉 말씀과 사건을 통해서, 사도의 복음 선포와 고통받는 삶을 통하여, 이곳에서 지금, 공동체를 위하여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행위. 계시는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현재적인 살아있는 현실이며 우리가 갈망하는 미래 은총이다. 계시와 구원. 교회-교회 안에 전달되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계시의 중개적 고찰 교회- 계시의 장소 즉 계시가 전달되는 장소. 사람은 교회의 증거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계시하시는 그리스도와 만나게 된다. 교회는 기본적인 사도적 증거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사건 자체와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진 계시를 현존시켜준다. 교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계시를 현실화시키고 "전하여"준다.(전례, 설교, 성서말씀, 주교들의 가르침, 공의회와 교황의 가르침, 전승, 교부들 저서, 신경과 참회, 신학자들의 업적) 계시전달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성사들(sacraments)은 가시적 차원에서 공적으로 말해진 것과 성취된 것으로 되어있다.(보편적 계시) 성서, 전승 그리고 약속 계시: 계시를 충분하게 나타내 주는 것은 성서와 전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신적인 현실이다. 계시 - 현실 성서 - 기록 -신적 계시와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기도, 전 례, 계명) 전승: 성서에 기록된 계시에 대한 공동체의 전통적 해석이다. 전승은 조상들을 통해서 하느님과 우리의 인격적 만남이다. 계시와 약속: 계시 - 말씀(R. Bultmann, K. Barth, J. Ratzinger) 사건(W. Pannengerg) 말씀과 사건(O. Cullmann) 계시- 신적 선택, 계약, 파견, 인간적 희망과 순명에 대한 개념 내포 -신학적 반성- 1. 그리스도교는 계시 종교이다. 그 의미를 생각해보고, 직접 계시와 간접계시를 설명해 봅시다. 2. 불교에서는 부처님 나라(佛國)에서 영원히 살아가기 위해 성불(成佛)를 목표로 깨달음의 삶을 살아야한다. 우리 그리스도교도 하느님 나라(天國)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신화(神化)를 목표 신앙인의 삶을 산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성불(成佛)과 신화(神化)가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가?
3) 계시의 목적: 하느님의 구원경륜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무한한 선의(善意) 안에서 인간들의 무능을 도우시면서 당신의 초월성과 인간 생명 사이에 다리를 놓으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시작된 섭리의 다리는 바로 하느님의 구원경륜의 신비로 나타난다. 구원경륜의 신비는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의 힘을 입으신 아버지 그리고 아들, 육화하신 말씀의 하느님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하느님과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사이의 통교가 드러난 것이다. 하느님은 세상 태초 때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위해 사랑으로 구원을 위해 준비하시고 계획하신다. 구원경륜(oikonomia)이란, 먼저 어원적으로 집(oikos)을, 잘 관리하는 규칙(nomos)을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집인 우리 세상이 모두 잘 살아서 복된 가정이 되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하느님은 당신의 집이면서 우리 인간의 삶터인 이 땅 위에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모두를 구원에로 섭리하신다. 하느님 사랑의 극치는 하느님께서 이렇게 인간을 위해 계획하신 구원의 질서 안에서 잘 나타나는 주님의 섭리이다. 교부들에게 구원경륜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역사의 특별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을 위해 드러난 신적 계시, 구원을 말한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유일한 구원적 표징을 당신 백성에게 드러내신다. 하느님 스스로는 홀로 계시지 않으시고 구원을 위해 항상 백성과 일치하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서로 기쁨으로 당신 백성을 위한 구원의 기나긴 길을 준비하셨다. 아브라함에서부터 출애굽, 그리고 많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구원과 해방을 선사하신다. 신약성서에서도 아버지는 인간에게 성령과 함께 아들을 파견하신다. 아들은 육화되어 세상에 오시고, 아버지의 구원계획에 성령의 결정적인 협동이 드러난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강생의 신비(incarnatio), 인간에게 당신 생명을 거저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 죽음(kenosis),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주신 그리스도의 부활(theosis), 발현, 승천 안에 항상 성령이 함께 하신다. 성령은 오늘도 아들에 의해 실현된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여전히 인간들 안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교회 안에서, 세상 안에서 종말에까지 실행하면서, 아들을 우선하고 동반하며, 따른다. 구원경륜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당신의 표현이다.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나와 우리를 초대하시고 당신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에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느님으로부터 나옴(Exitus a Deo)은 모든 것이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에로부터 나오는 것을 말한다. 아버지께로 되돌아감(Reditus ad Deum)은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하여 모두 아버지께 완성되어 돌아가는 것이다(에페 1, 3-14). 구원경륜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부활하신 당신 아들의 영을 우리 인간에게 선물하신 것이다. 오직 성령만이 성자 알파를 향한 구원의 오메가이신 하느님 아버지에 의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계시하신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에게 인간들을 따르게 하면서 신적 표징으로서 그리스도를 계시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으로부터 떠나시고, 오직 아들만이 힘과 지혜임을 계시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힘이요, 지혜(1 고린 1, 30)이며, 모상(이콘. 요한 14, 9; 골로 1, 15)이다. 아들은 말씀(요한 1, 1-17. 18)이며, 길(요한 14,6)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다. 성자는 인간으로서 유일한 중개자(1 디모 2, 5)이며, 유일한 사제(히브)이다. 성령과 함께 아들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으로 하늘의 통로(출입구)를 다시 열어서 우리 인간을 아버지께 다시 인도한다. 아버지는 항상 아들 안에서 성령과 함께 모두를 기다리신다. 이제 구원의 역사 안에서 유일한 신적 표지의 국면이 그들의 마지막 현실 안에서 계시되는데 먼저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신적 표지, 통달, 계획, 규정이면서, 구약과 신약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 안에서 실행된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에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를 다시 기다리며 신화(神化)를 준비한다. 신적 활동 과정은 저항할 수 없게 진행하는데, 인간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그것은 바른길이다.
4) 구원경륜과 신학 구원경륜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는 당신 표현이다.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나와 우리를 초대하시고 당신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에로 다시 돌아가신다. 구원경륜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부활하신 당신 아들의 영을 우리 인간에게 선물하신 것이다. 오직 성령만이 성자 알파를 향한 구원의 오메가이신 하느님 아버지에 의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계시하신다. 하느님께 숨겨진 신비로서의 신학(theologia)은 삼위일체적 신학으로 인간에 의해 밝혀진다. 그러나 구원경륜(oikonomia)의 신비는 :인간 역사 안에서 삼위일체적 구원경륜으로 하느님에 의해 드러난다. 신비적 징표와 상징으로서 신학(theologia)은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온전히 실현되는 것을 드러낸다(구원경륜) 교부 증거자 막시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학의 내용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며 신학의 목적은 구원경륜이다. 신학은 구원경륜의 실행과 그 질서 그리고 그 중심 안에서 드러난다. 구원경륜은 인간역사 안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이같이 신학과 구원경륜은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구원경륜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당신의 완벽한 사랑으로 읽어 가는 질서(taxis)인데, 그것은 사랑으로 이해된 세상의 질서 안에서 진행되는 그 독특한 모양으로 나타난다. 아버지는 모든 것의 원리이며 목표이시다. 육화하신 말씀 아들은 유일하고 보편적인 중재자이다. 성령은 모두가 하느님 안에 존재하고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발생하는 그 안에 계신 분이시다. 계시의 질서는 영이 인간들을 감싸안고 있는 의미에서 효력 있는 구원의 질서로서 드러난다. -신학적 반성- 1. 하느님의 구원경륜과 우리의 구원적 희망을 이야기해 봅시다. 2. 구원경륜과 신학의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3. 신앙과 신학
1) 주님, 예수와의 만남 하느님께서 당신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고, 인간이 그것을 받는 역사는 우리가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을 구성한다. 그 신앙과 그 내용 그리고 그 역동성에 신학은 신앙의 지성으로서 언급한다.
2) 신앙 체험의 기초 성서의 신앙 하느님의 구원경륜- 아담, 카인, 노아, 아브라함...-예와 아니오의 역사에 축복하시는 하느님의 역사 (출애급, 부활)(마태8,16;요한1,4;루가5,1-11)(계시헌장21)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구약에서 하느님이신 바위 위에 각자의 생명을 기초하여 세우는 것을 말한다(창세12). 인간은 하느님께 대한 ’아니오’ 역사(창세3) 안에서 넘어졌던 여정을 다시 하느님 안에로 걸어가는 것이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아브람에게 말씀하셨고, 이집트 종살이로부터 히브리백성들을 해방하신 하느님을 다시 인식하는 것 즉 깨닫는 것이다. 그 하느님이 바로 역사의 주님이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으뜸이시며 가난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고, 정의와 평화로 회심하도록 부르시는 분이시며, 당신 종을 죽음의 골짜기로 버리시지 않으시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이시다. 신약에서 신앙은 하느님의 성성(聖性)이시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생명과 빛이신 나자렛 예수의 구체적인 인물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면서 그 분을 따르도록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그 분에 의해 배우며 그 분이 가르쳤던 것을 살고 그 분의 용서와 구원의 힘을 체험하는 자들의 공동체에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선포를 받아들이고, 믿는 이들의 공동체의 한 일원이 되어 참여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생명을 지닌다. 그들은 인격적 상호관계와 사랑과 용서 그리고 은혜 안에서 공동체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들은 절망의 두려움이 없이 죽음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하는 것은 진리가 믿는 이에게 관계되어 있지 않을 때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안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1고린13,12)
성전과 교회의 가르침 신약성서 시대를 지나 4세기 동안 신앙은 초기 계속된 박해시대에서부터 로마제국의 정치적 구조에 의해 보다 확대되어 지탱되어온 공동체 편에서 공동 언어로 표현되어, 살아갔고 거행되었으며, 방어하게 되었고 심화되어 왔다. 교회 안에서 신앙의 내용들이 살아남아 왔고 심화되는 필요성이 빠르게 부상된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으로 특별한 신앙을 이해하는 자체 양식 역시 발전하였다. 특히 초기 4-5세기 동안 그리스도교의 시기는 헬레니즘 문화와 함께 특색화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처해있던 모험은 사람들에게 복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선교적 긴박성에 있었다. 우려했던 위험은 신앙의 특별한 차원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주님의 성체와 함께 성경을 항상 존중하고, 특별히 거룩한 전례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과 성체의 식탁에서 생명의 양식을 얻고 신자들에게도 준다. 교회는 성전과 함께 성경을 자기 신앙의 최고 규범으로 늘 간직하고 있다.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 모든 시대를 위하여 단 한 번 기록된 것으로서 하느님 자신의 말씀을 변치 않게 전하며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말 가운데 성령의 목소리를 반영시킨다."(계시헌장21) 그리스도교 신경의 기초적 내용은 그리스-로마 세계 안에서 확산된 문화에 적용된 언어 안에서 표현되어왔다. 초기 세계 공의회의 주제는 삼위일체론이었다. 세기가 지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유럽과 중동에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에 의해 나뉘어 지는 현실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슬람교는 발전되어 갔다. 그리스도교 메시지는 항상 보다 문화와 예술과 정치 사회적 삶에 감도를 주었다. 1215 4차 라테란 공의회-하느님의 초월적 현실에 인간의 모든 경험의 믿음. 트리덴틴 공의회(1545-1563)-주교들의 일치-신적 계시(성경과 성전)가 적합하게 전달되고 모아진 것은 바로 교회이다. 개신교의 위기, 계몽주의, 18세기-신앙의 내용이 달라진다. 성숙한 인간 이성 즉 인간 스스로 그들의 다리로 일어설 수 있고, 인간을 인식하며, 그들의 힘으로 세상을 알 수 있다. 가톨릭 교회는 신앙과 이성의 긍정적 관계를 말한다. 서로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1차바티칸 공의회1869-1870) 오직 교회에 의해 선포된 아버지의 계시자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세상과 인간의 존재는 빛을 발견한다.(2차바티칸 공의회 1962-1965)
4. 교회와 신학
1) 신앙은 삶을 전환하고 변화하도록 한다. 하느님의 받아들임 창조주 하느님 믿음, 악으로부터 구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 성사 전레 생활 교회 봉사 신앙 또는 하느님 없는 인간(무신론)
2) 어떻게 교회는 그 신앙을 살고 표현하나? 신앙은 공적으로 표현한다. 신앙고백, 전례 특별히 세례, 강론, 선교, 교리교육... 신앙은 거행된다. 역사에서 하느님의 개입 즉 그리스도의 역사에 명백한 모양으로 상징과 동작 그리고 말씀 등으로 성령 청원(에피클레시스)과 찬미 안에서 다시 인식하고 기억하며 현실이 된다. 신앙은 가시적이며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신앙은 연대적 봉사(caritas)와 선익의 나눔과 희망 안에서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그 희망이란 하느님께서 "모든 이 안에 모두"(1고린15,28)이실 때 하느님의 나라의 최종적 선물에 대한 상징과 참여로 더욱 드러날 수 있는 미래이고 그를 위해 일할 수 있는 능력과 환상의 전망이다. 신앙은 증거 한다. 인간을 믿는 다는 것은 죄인이 아니라 모두가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제한에 의한 상징이다. 성서의 증언과 믿는 이의 공동체의 권위 있는 안내 안에서 그들의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전승과 사도들의 말씀을 통해 성령 안에서 증거 되는 심오한 인식의 선물이다.
3) 생각하는 신앙: 인간의 요청과 하느님의 스타일 인간과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자유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능력, 감각들 단지오감 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시공간에서 다른 체험을 한 자들의 증거를 청취하고 기억하는 것을 통해서 직접 인식하는 능력이다.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행동 구약, 신약,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계시2) 역사와 오늘의 교회 안에서 신학적 반성의 복합성과 진리 다양한 교회의 봉사적 삶, 전례, 역시 신학도...
4) 21세기의 신학적 방향은 동서양 정신의 조화와 통합의 길이다. 신앙 안에서 먼저 우리는 조화를 이뤄야 하는 주제, 회개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편합니까? 아니면 무엇인가 마음에 부담이 갑니다. 편안하나요? 아닙니까? 왜 그런지 알아봅시다. 사실 우리는 조화와 균형 잡힌 신앙 생활이 필요합니다. 회개(悔改, conversio)와 회심(悔心. metanoia) 우리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뿌리며 회개할 것을 다짐한다. 사순절은 회개의 시기이다. 그러나 작년 사순절에, 아니 매년 우리는 이미 회개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그전에 우리가 한 회개는 그저 형식적인 것이었는가? 아니면 회개의 유효기간이 지났는가? 우리는 사순절이 돌아오면 당연히 회개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가슴을 치며 우리가 지은 죄를 찾아낸다. 나도 초등학생 때 사순절이 돌아오면 항상 내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를 많이 발견할수록 사순 시기를 잘 보냈다는 기억이 난다. 어린이 미사를 집전할 때 어린이들이 자비송을 부르면서 외치는 가사 내용을 들으면 정말 마음이 아프다. 그 자비송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죄인, 착하신 주님,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어린이들은 자기들이 죄인들이라고 소리치면서 노래를 부른다. 죄인이라는 뜻이나 제대로 이해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착하신 주님께서 어린이들을 죄인이라고 부르실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오히려 어린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할머니 할아버지도 한 숨을 내 쉬면서 ’죄인에게 강복하소서.’라고 고해를 시작한다. 어쩌면 그렇게 사순절이 죄의 시기만으로 느껴지는가. 사순절은 죄를 알아내고 그 죄를 끊어버려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대희년을 앞두고 우리가 준비해야하는 사순절의 영성적 의미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더욱 닮아 가는 시기이다. 희랍어 ’회개’(metanoia)는 라틴어 ’회개’(conversio)와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라틴어 회개는 죄를 끊어버리고 방향을 바꾸어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라틴어 회개를 말하는 것은 먼저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죄인을 전제로 해서 그 죄인을 돌아오게 하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라틴적 회개의 적용은 매 주일미사를 참례하고 신앙 생활을 열심하고 있는 어린이들보다는 세례를 받고도 주일미사에 나오지 않고 여러 가지 이유로 신앙 생활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소위 ’쉬는 양’들에게 해당될 수 있는 것이다. 희랍어 ’회개’는 마음을 바꾸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정확한 말로 표현한다면 회심(悔心) 즉 심보를 바꾸는 것이다. 희랍적 회심은 먼저 우리가 죄를 지어서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고 보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지도 않으셨으며, 또한 우리도 죄로 인해 하느님을 멀리하여 그분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도 않았다. 그러면 왜 회심해야하는가? 그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살면서도 그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심은 마음을, 생각을 바꾸어서 하느님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눈을 떠서 하느님을 바라보며,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임마누엘)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신학적 반성- 1. 나는 아우구스티노 성인 말씀하시는 것처럼 참으로 믿기 위해서 얼마나 알고 이해하려고 했는가? 혹시 이해하지 않고 믿기만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해하지 않고 믿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일까? 2. 우리 문화와 사상 안에서 조화와 일치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예: 언어, 음식, 의복, 건축, 사고방식, 음악, 미술 ....) 3. 믿음과 이해가 동전의 양면이라면 먼저 우리가 먼저 준비해야하는 면은 무엇인가. 믿음인가? 이해인가? 4. 나는 그 동안 회개(conversio)의 생활을 얼마나 했으며, 이 회개의 삶이 나를 기쁨으로 인도하였는가? 아니었다면 회심(metanoia)으로는 가능한가? 5. 회심(metanoia)의 삶이 나를 기쁜 신앙인의 삶으로 안내할 것으로 믿는가? 6. 세례자 요한의 회개(루가3,3-9;마르1,4-5;마태3,7-10))와 예수 그리스도의 회개(마르1,15;루가4,18-19;19,1-10)에 대해 그 차이점을 생각해보자. 나는 그 동안 어떠한 회개의 삶에 익숙해졌는가? 7. 용서와 자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회개-용서의 관계는? 용서와 회개의 관계는? 8. 2000년 대희년은 나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5) 믿음과 이해를 어떻게 조화할까요? 서양에서는 사실 믿기 위해서 이해하고 분석하려는 데 많은 중심을 두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철학적 사고(思考)뿐만 아니라 신학의 사조(思潮)들이 발전은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심지어 인간의 정신과 내면 즉 영성적인 측면에까지 모든 것을 알아내어서 일정한 틀에 넣어 인간의 내면을 객관화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동양에서는 무엇인가 이해하기 위해서 그냥 믿는 경향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에서도 따지는 것을 미덕으로 보지 않습니다. 참으로 믿기 위해서 따져 물어서 이해해야하는데 우리는 너무나 따지지 않습니다. 요즘 IMF가 들이닥친 것도 너무 따지지 않아 계획성이 없이 그 때 그 때 임기웅변이 불러일으킨 인재(人災)라고 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옳습니까? 모든 것에 따져 물어야 합니까? 아니면 묻지 않고 그냥 믿습니까? 둘 다 필요합니다. 시작은 따져서 묻고 마침은 그냥 믿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직은 따져 묻지 않고 그래서 서로 당하고 나니까 나중에는 웬수가 되어서 서로 네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하며 싸우죠. 순서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목표는 서로 단순하게 따지지 말고 믿는 것입니다. 목표가 그렇다고 해서 시작부터 그럴 수는 없습니다. 현대인을 위해 왜 신학이 필요한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현대의 세계는 어떻게 가고 있는가? 세속주의-세상의 비신화화-인간지배화-기계자동화-인공두뇌학-하느님께 대한 권태감, 불안감, 적대감 신화(神化:인간과 세상의 목표)-인간화-진취적 기업정신-발명정신-주도권신장-용기-관용정신-애타주의-동료의식-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정신 인간의 마음은 하느님 안에 안식처를 발견하기까지는 불안하다 -아오스딩성인- 인간은 자신을 무한히 초월하는 존재이다 -파스칼- 발생한 역사(historisch), 반성된 역사(geschichtlich) 존재함(being), 되어감(becoming) 현대는 하나와 다수가 함께 가는 세상 많은 학문들이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에 신앙으로 대답할 수 있는 인간 존재를 분명하게 해석해주고 있다. 그 실례로는 역사학을 들 수 있다. 신학적 숙고는 역사적 인식과 해석에 관련된 비판이론에 주목해야한다. 교회의 역사를 모르는 신학자들은 역사의 오류를 반복하여 범하게 될 것이다. 개인과 공동체는 신학을 하는 사람이 당연히 고려해야하는 조건이다. 신학 안에는 명확함을 추구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공동체의 신앙이 있다. 우리는 공동체가 신학자들로부터 기대하는 봉사의 중요한 모습을 "새로운 언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묘사해 볼 수 있겠다. 신학자들은 공동체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통교된 신적 계시와 하느님에 대하여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검증하고 비판하며 교정하는 과제를 다른 그룹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다.
2장 신학의 역사와 방법론
1. 신학의 역사 사도교부-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바르나바 등 호교교부-유스티노 그리스 교부 신들에 관해 기록된 고대 시(詩) 안에서만 신학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신학의 개념은 점차로 그리스도교 사상 안으로 받아들여졌다. 비록 오리게네스(185-253/254)가 여전히 이방적인 의미로 신학을 사용한다하더라도, 오리게네스는 신학을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으로 언급하였다. 황제를 신으로서 숭배하는 단어 신학(theologein)이 그리스도교화 되었고 그리스도를 참으로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의미로 다가왔다. 디오니시우스에 의하면 신학은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길이다. 그 방법은 신비신학, 부정신학이다. 4세기 비잔틴 신학의 영향으로 신학(theologia)은 구원경륜(oikonomia) 또는 그리스도 신비에 대한 신학과 대비된다. 신학은 삼위일체의 거룩한 가르침(Sacra Doctrina de Trinitate)를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을 위한 구원계획에 대한 하느님의 교의에 관한 것이다. 신학, 구원경륜, 하느님에 대한 신비적 인식. 초기 교회에서 신학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께 대한 찬양(Doxologia)이었다. 교의학은 17세기에 출현한 용어인데 그러나 사실상 3세기 교부 오리게네스 이래로 이미 존재해 왔다. De principiis(근본원리에 관하여): 1장 하느님 2장 세계 3장 자유 4장 성서. ’최초 그리스도교 교의학’으로 간주 될 수 있다. 그것은 신플라톤주의와 고묘한 상관관계를 맺고 잇기 때문에, 접촉의 신학, 포괄적 신학의 원형이기도 하다. 그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안티오키아학파의 신학과 함께 이레네오, 테르뚤리아노, 치프리아노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배타적 한계의 신학과 분명히 구별된다. 성이레네오(130-140) 영지주의자들의 신학에 반대하는 구원역사의 일치를 강조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세상 만물의 창조주이신 구약의 하느님을 악한 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계시된 하느님은 선한 분으로 대비하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4-5세기)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오리게네스가 대표적인 교부이다. 플라톤 내지는 신플라톤 영성주의를 지향하며 성서 해석은 상징적이며, 우의적이다. 오리게네스, 클레멘스, 아타나시오, 디디모, 치릴로.. 안티오키아 학파는 보다 조직적 제도성을 강조한다. 상서 해석도 문자대로하고 있다. 타르소의 디오도로,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 치로의 테오도레토.. 성 아오스딩 신학은 신들에 관한 수양으로서 3가지로 나눈다. 신화적이며 육체적이며 예배적(공적인 예배의 신학)이다. 아오스딩 성인은 바로(Varro)의 고전전인 정의를 받아들였다. 아오스딩은 진리를 발견하고자 늘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Crede ut intellegas, intellege ut credas. (setmon 43,9) 아오스딩의 신학은 은총론, 구원예정론, 성사론, 삼위일체론, 구원역사 등이다. 그러나 모든 것의 시작은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다. 그 은총의 선물은 하느님의 빛과 함께 인간 정신을 밝히며, 인간은 구원하는 진리와 함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삶은 지성적인 연구가 될 때, 영원한 것들의 징표는 창조된 것들로부터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 일치하도록 인도한다. 그 길을 달려가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빛에 의해 우리는 지속적으로 교육되어야 한다. 교부신학 성서-주석, 강론 생명을 위한 관심-교부는 사목자, 선포자, 신앙의 증거자이다. 인간 문화와의 관계-철학 경향과 동향의 복수성-안티오키아 학파, 알렉산드리아 학파 동방신학-그리스도교 삶의 정점으로서 신적 삼위의 친교 안에서 그리 고 신비적 일치에 하느님 신비의 관상을 대부분 집중한다. 서방신학-인간의 삶과 구원된 죄인의 상태 그리고 역사 안에서 인간 의 상태와 윤리적 행동에 대한 집중적인 염려이다. 중세 라틴 신학 Summa theologiae: 신학대전은 중세기 교의학의 절정에 다다랐다. 그 명석한 논리전개와 방법론적 선명성 때문에 두드러지고 교의학의 합리적 관철의 수준이 최고도에 이르렀다. 철학적 신학, 성서 신학. 토마스는 신학을 거룩한 교의와 동의로 사용하였다. 스콜라 교의 신학(Theologia Dogmatico -Scholastica) 14세기 유명론(唯名論) 아비뇽으로 교황청이 옮겨진 후(1305-1378) 황제로부터 대표된 사회적 힘과 교황으로부터 대표된 종교의 힘 사이의 긴장이 서로 간의 보편적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리면서 극에 달하였다. 14세기에 신학의 흐름은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이다. 그것은 보나벤투라, 둔 스코투스의 신학 사상을 어떤 면에서 극단화하는 것이다. 그 외 그 가지들은 아오스딩에서 뿐 아니라 역시 프란치스코 영성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될 수 있었다. 유명론 학파의 수장은 영국 프란치스칸 옥캄의 굴리엘모(1285/90-1348)이다. 이성과 신앙 그리고 철학, 신학을 나누는 깊이가 이제는 채워질 수 없었다. 철학은 무엇보다 인식과 언어의 비판이다. 다시 말해서 이성의 연구가 아니며 그 위에 있는 존재들이 사이에서 만나는 관계들이 기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계들이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자유로우며, 전능한 원의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보편적 존재들의 인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직 개체적인 것이 현실이며 보편적 개념과 이상들이기 때문이지 유명론이라는 용어에서 오는 이름이 아니다. 유명론주의자들(Gabriel Biel, 1410-1459, 트리엔트 공의회까지 영향을 줌)은 유럽의 많은 대학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유명론에 따른 신학은 토마스 데 아퀴노와 보나벤투라가 세워 논 위대한 신학적 업적인 그리스도교적 삶의 책임과 지성적 연구 사이의 인식과 영성적 차원의 통합이 결핍되어 있으며, 논리적 세심함과 추상작용 즉 관념의 경향으로 성격 지어진 특별한 어조를 지니고 있다. 이브 콩가르가 확인하는 스콜라 신학의 개요를 보면 첫째 너무 극심한 이성적 논리적 방법론으로 인한 과다한 오만, 둘째 불필요하게 세분하는 경향, 셋째 형식적으로 완벽한 조직 안에서 정화하고자 하면서도 구체적 인간의 문제나 질문에 무관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15세기 신비신학, 인본주의, 종교개혁, 제2의 스콜라 신학 우주의 강한 의미 즉 하느님에 의해 원하신 질서에서 창조된 인간이 역시 발견되는 내적 세상에 까지 성격화 된 스콜라 중세기는 어떤 점에서 우주 중심에서 인간이 발견되는 깊은 필요에 더 이상 대답하고 있지 않았다. 첫째 신앙의 체험에서 출발하는 영성과 신비적 영감과 호감의 연구이다. 더 이상 스콜라적인 질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Giovanni Eckhart 1260-1464, Giovanni Gerson 1364-1429, Nicolo Cusano 1410-1464) 둘째는 인본주의의 길이다. 성서 텍스트의 원천으로 돌아가면서 성서 원어를 탐구한다. 그 것은 물리적 탐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윤리적으로 일구어 온 행위의 정신을 알기 위해서 이며, 문자적 환경에서 본질적으로 탐구하면서도 성서 본문과 고대 문화 그리고 어떤 신학의 척도 안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접촉하여 쇄신하고 자하는 것이다. 루터의 전형적인 성서에 대한 열정은 인본주의자들의 어원학적 활동 없이 이해될 수 없다. 셋째는 스콜라신학의 극단적인 포기를 위해 성서본문에 집중된 연구를 위한 인본주의적 길로 통합하고자 한 것은 루터(1483-1546)와 종교 개혁에 의해서였다. 가톨릭 전승으로부터 이탈은 아오스딩 사상의 이름으로 시작하였다. 루터에게 깊은 문제는 구원이었다. 사물들이 어떻게 존재하는 지를 알려는 걱정에 앞서서 신학은 역시 어떻게 구원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응답해야 했다. 대답은 이성적 연구와 계시에 적용된 철학으로부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온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참 인식은 오직 바오로 사도가 말한 십자가의 지혜만이 있을 수 있다. 참 신학자는 기도와 유혹 안에서 고통과 죽음의 체험을 살아가신 그 분이었다. 신학은 스콜라 신학자들의 영광의 신학에 반대하는 근본적인 십자가의 신학으로서 제시되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께서 참 신학이요 하느님의 인식이다.(하이델베르그 선언) 마르틴 루터의 신학은 아퀴나스의 신학이 잘 조정된 분수놀이 같다면, 거친 여울과 같다. 그것은 중세기의 변증적, 포괄적인 신학 형태와는 달리 논쟁적, 배타적, 예언적인 신학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심원한 실존적인 신학이기도 하다. 명상(meditatio), 시련(tentatio), 그리고 기도(oratio)는 루터에게 신학의 방법이었다. "우리는 하느님의 비밀을 탐구하기보다는 차라리 경배해야 하리라." "그리스도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분의 구원행위를 인식한다는 것을 뜻한다."(그리스도 개요-Loci communes- Melanchthon) 루터적 정통주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사고형태를 수용한 데서 신학의 세부적 특징이 드러난다.(C.H.Ratschow) 넷째는 스콜라 전통을 지속시키려는 책임으로부터 대표된 것으로 그것은 원리뿐 아니라 문제들과 방법론까지 스콜라 전통을 계승한다. 근대 현대 신학 계몽신학: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의 두드러진 재생산적, 배타적 신학과는 반대로 생산적이고 두드러지게 포괄적인 신학이 제시되었다. 정통주의의 부차적 기본조항의 좁은 영역이 이러한 전형적인 동화(同化)의 신학에서 점차로 모든 그리스도교 교의로 확대되었다. 자연적 신학은 처음에는 초자연적 신학과 경쟁하다가 결국에는 그것을 대체해 버렸다. 이성이 가르침의 규범인 성서를 억압함으로서, 이젠 정통주의에서 형식논리학의 사용에만 제한되었던 신학의 학문적 기능이 예외적으로 강하게 전면에 등장했다(역사 비판적 연구의 기원). Johann Adam M hler(1776-1838)와 튜빙겐 학파-독일, Johann Sebastian von Drey(1777-1853), Johannes Evangelist Kuhn(1804-1887) John Henry Newman(1801-1890) 영국성공회에서 개종한 신학자, 역사와 전승 위에서 신학을 전개한다. 그는 자신의 신학을 신앙과 인간적 지성으로부터 달려가는 길들이 더 확대되는 시점에서 통합하고 전승과 발전의 지성적 개념을 그의 작업에서 극복한다. 관념주의로 말미암아 계몽철학이 해체되자. 19세기 초엽엔 관념주의의 특색을 띤 새로운 신학이 등장해서 점차로 계몽신학의 자리를 차지했다. 관념주의 신학은 계몽신학과 똑같이 역시 주관적 출발점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비록 이성으로부터 비판적 학문의 본질을 물려받았지만, 그 이성에서부터 출발하지 않고 오히려 신앙의 원천으로서의 의식, 경험 그리고 체험으로부터 출발했다. 프로테스탄트의 자유주의 신학은 가톨릭의 환경 안에서 신학발전의 한계가 되었다. 쉴라이어마허의 자의식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신학은 자유적이고 중재적인 신학만이 아니라, 가슴의 신학이나 각성신학과 같은 보수 학풍과 에어랑겐학파의 복구적 신학이다. 19세기의 지도적 신학자로서 두 번째 위치를 차지하는 자는 칸트의 영향을 받은 리츨(A.Ritschl)이다. 헤겔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도 있으며, 관념론을 띤 신학계를 지배한 자유주의적 신학 외에도, 19세기에는 전통에 예속된 신학도 대두했다. Friedrick Schleiermacher(1768- 1834), Albrecht Ritschl (1822-1889), Adolf von Harnack(1851-1930), Ernwst Troeltsch(1865-1923) 20세기 현대신학 개신교는 말씀 중심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고, 가톨릭 교회는 성사 구조의 가치를 두고 있으며, 동방 교회는 교부와 전례 전승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개신교 신학 계몽기로부터 20세기 초엽까지 개신교 신학에 대항한 반대운동으로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개신교의 노정에 터져 나온, 냉혹하게 배타적인 신학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객관적 출발점을 두는 변증법적 신학이다.(K. Barth 1886-1968, Paul Tillich 1886-1965, Emil Brunner 1889-1966, Friedrich Gogarten 1887-1967, Rudolf Bultmann 1884-1976) Barth: 하느님 말씀의 신학-하느님 말씀의 우선권. 바르트에게 하느님은 인간에 비교하여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시다.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본질적인 어떤 다리도 없고, 하느님을 인식하거나 하느님께 도달할 수 없는 인간관으로부터 출발하면서, 특별한 인간 체험의 가치에 어떤 현실도 없다고 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에 다가오면서 인간적인 것에 대한 추론과 자립을 거부한다. 역설적으로 인간을 거부하면서 인간을 구원하고 있다. 세상을 거부하는 것과 세상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긴장은 변증법적 신학의 명칭이라는 기원에 있다. Tillich는 인간의 질문과 하느님에게서 오는 응답 사이의 어떤 일치와 상관 관계에 관한 연구에 집중된 신학적 방법론을 취하였다. 상관방법, 변증신학. 그 시대, 철학, 문학, 예술, 과학, 사회적 관습과 대화. Dietrich Bonhoeffer(1906-1945)는 신학과 삶 사이의 실현을 실천하였다. (1945년 4월9일 교수형에 처해짐) 본회퍼의 삶과 신학의 주제는 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실현이다. 성인이 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더 이상 종교적이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비종교적’ ’창녀’ 해석을 위해 본회퍼의 호소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위 세속화 신학자와 사신(死神)신학자들에 의해서 수용되고 극단화되었다. John A. T, Robinson(1919-), Harvey Cox(1929-), Thomas Altizer(1930-), William Hamilton(1924-), Paul van Buren(1925-), Dorothee Soelle(1929-), Jurgen Moltmann(1926- 희망의 신학), 60년대 신학의 중심에는 역사의 미래와 신앙의 정치적 차원에 그리스도교의 개방이 일어났다. 보다 최근 개신교 신학은 Wolfhart Pannengerg(1928-)와 Eberhard Jungel(1934-)에 의해서 하느님의 문제와 역사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어나는 것을 다루고 있다. 가톨릭 신학 Maurice Blondel(1861-1949)의 철학적 공헌의 덕분으로 근대주의자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20세기 초 가톨릭 신학은 계시와 교회와 연결된 주제에 직면하였다. 독일-Romano Guardini(1885-1968), Karl Adam(1876-1966), Erich Przywara(1889-1972). 프랑스에서도 역시 신학적 쟁점은 계시 주제와 자연과 초자연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집중되었다. 도미니코회 수사 신학자들의 연구가 돋보였다. Marie-Dominique Chenu(1895-1989)와 Yves Marie Congar(1904-). 전례 운동, 성서-교부학적 운동, 일치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이후 신학은 계시와 동시대 문화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고자 하였다. Pierre Teihard de Chardin(1881-1995), Henri de Lubac(1896-). 지상 현실의 신학과 Yves M. Congar의 평신도와 교회론적 주제에 관한 역사적 조직 신학적 연구. 독일에서 신학적 쇄신은 특별히 M. Heidegger의 존재주의와 철학의 덕분으로 나타난다. 신학과 인간학 사이의 관계가 보다 밀접하게 발전하였다. Karl Rahner(1904-1984)의 신학은 동시대 가톨릭 사상에 좋은 부분을 풍요롭게 하면서 영향을 주었다. Edward Schillebeeckx(1914-), Hans K ng(1928-), Hans Urs von Balthasar(1905-1988) John Baptist Metz(1928-)의 정치신학,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실천적 접근. 실천에 대한 비판적 반성 反省) Gustavo Gutierrez(페루 신학자), Leonardo Clodovis Boff, Jon Sobrino(브라질 신학자). Joseph Ratzinger(1927-), Walter Kasper(1933-). W. Kasper의 가톨릭 신학의 공통 원리- 교회성의 원리: 교회의 생생한 기억 안에서 믿음과 창조성으로 일원이 되는 능력 학문성의 원리: 하느님과 당신 계시에 대한 확고한 동향과 교회의 신앙은 항상 그 것에 관련해야 한다. 각 시대의 문제에 대해 개방의 원리: 자유에 대한 여정을 바라보며 인간의 인격적 사회적 삶에 활동적으로 참여함.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신학적 쇄신으로 열매를 맺었다. 즉 세상과의 관계를 새로운 모양으로 생각하며, 모든 교회의 봉사에 이 신학운동이 기여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가톨릭 신학이 오늘날의 정신적 주변세계로부터 분리된 채, 독점되어온 토마스 사상을 가지고서 마치 표석(漂石)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그것은 보수적, 배타적, 재생산적 신학과 진보적, 포괄적, 생산적 신학으로 양분되어서, 계몽주의를 "다시 찾을" 뿐만 아니라 그 사상을 새롭게 하면서 미개척 분야를 터놓고 있다. 교의학의 규범은 성서이다. 교의학이 성서에서 규범을 찾는다고 할 때 뜻하는 것은 성서적 사고를 복제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서적 사고와 유사하게 그 "모범"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교의학적 사고는 단지 신앙에 관한 사고만이 아니라 신앙하는 사고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인식을 출발하고 하느님에 대해 말함이다. 교의학은 우리 시대의 언어로 "성서를 옮겨놓는"기능을 가진다. (실존적-교회적 기능, 재생적 기능, 생산적-새롭게 표현 기능, 합리적-학문적 기능) 동방 신학 동방의 위대한 교부들의 가르침과 사상에 깊이 있게 연관되어 있다. 동방신학은 신학적 활동에 있어서 전승의 살아 있는 의미와 기도의 차원과 전례와의 관계를 담고 있다. Fozio(820-897/98) New Theologian Simeon(+1022), 1054년 동 서방 교회의 결별 이후 Gregorio Palamas(1296-1359), Nicola Cabasilas(1320-1363/90) 동방신학은 지난 세기 러시아 동방 신학자들에 의해 심도 있게 재생되었다.-A. B. Chomjakov, Vladimir Solov’ v(1853-1900). 1917년 10월 혁명이후 파리와 뉴욕으로 망명한 동방신학자들은 동방신학을 꽃피웠다. Sergej bulgakov, Vladimir Lossky, Pavel Evdokimov, Oliver Clement-프랑스 파리, Giorgio Florovskij, Jean Meyendorff-뉴욕. -신학적 반성- 1. 신학의 흐름으로 보아 현대적인 경향을 이야기해봅시다. 2. 성서와 신학이 우리의 문화와 사상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나?
2. 신학의 약사(略史)와 범위 신학의 약사 고대, 교부-거룩한 가르침(Sacra Doctrina) 중세-성서학(biblical science) 사변, 또는 조직신학(speculative or systematic theology) 13세기-교회법(canon law)-시민법(Civil law)에서 분리되었다. 15-16세기-역사신학(historical theology)-언어학, 역사학의 발전으로, 역사 비판적 방법론 발전으로 성서 해석학 탄생(biblical exegesis) 18세기 계몽주의시기-논쟁신학(polemical theology)의 형성과 발전으로 호교학(Apologetics) 탄생, 사목신학 19세기 호교학에서 발전하여 기초신학(Fundamental Theology) 탄생 신학의 범위 역사신학 - 성서학, 교회사(교부학, 고대, 중세, 근대, 현대 ; 장소-한국교회사) 조직신학 - 교의, 윤리, 수덕신비, 그리스도교 사회적 가르침, 교회일치 실천신학 - 전례, 교회법, 사목, 설교, 교리교수, 선교 기초신학은 역사, 조직, 실천신학의 입문으로서 계시 사실의 신빙성을 증명하는 데 그 임무가 있다. 도그마(교의) 도그마는 사도적 공의회(사도16,4)에서 결정된 사항들을 의미한다. 구약의 토라 계명(에페2,15;골로2,16; 로마14,20-21) 그리고 국가칙령(루가2,1;사도17,7;히브11,23)에서 그 기원을 알 수 있다. 교부시대에는 도그마(교의) 대신 12-3세기에 신앙조항(articulus fidei)으로 사용하다가 18세기 이후 현재와 같은 도그마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 교회의 정신적 보편적 가르침의 뜻을 담고 있다. 교의신학의 세 가지 기능 수용적 분석적 특성 능동적 종합적 특성 예언적 종말론적 특성 신학의 방법론은 실증적 (역사)이면서 사변적(철학)으로 통합성(영성과 전례)을 중요시 해야한다. 실증적 방법(역사) -성서 - 긍정 - 객관 상징적 방법(전례)-기도, 수행, 영성 사변적 방법(철학) -신학 - 부정 - 주관 신학적 반성 1. 신학이 역사를 통해서 발전한 것을 자세히 살펴보시고 나와 우리의 신앙도 어떠한 단계를 이루어 성장하고 있는가? 2. 신학의 전체 범위와 교의의 뜻을 살피고 그것들이 나와 우리의 신앙과 삶의 전체 부분에서 어떤 것을 어떻게 적용될 수 있겠는가?
3. 신학방법론
’신학을 한다’고 할 때, 무엇을 하는가? 그 고유한 목적은? 어떤 방법으로 어떤 원천과 비판기준을 사용할까? 신학적 반성에 어떤 전제가 따르나?(예를 들어 신학을 하는 자는 공동체에 속해 있는 신앙인이라는 것을 반드시 전제해야만 하나?) 신학이란 신앙(信仰)에 대해 탐구와 질문을 계속하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질문하지 않고 단순히 무조건 믿어야만 구원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안보고 믿는 것은 우리의 목표이다. 그 목표를 시작부터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의 성숙 즉 잘 믿기 위해서 질문하는 것이지 탐구 자체와 질문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탐구와 물음을 계속하는 신앙으로서 신학이 우리 믿음 성장의 시작이요 궁극적으로는 물음에 머무르지 않고 믿어 구원에 이르는 우리의 참 신앙을 살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신학이란 지금 완전히 진리를 소유하지는 못했지만 조금이나마 깨닫고 있는 진리에 대해 반성(反省)하고 질문(質問)하며 최종적으로 그렇게 깨달은 진리를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우리의 삶을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1) 어떻게 신학을 할 것인가?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은 또한 신앙의 주체이기도 하다. 신앙은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신앙은 생명이 없거나 또는 조작 가능한 우상과의 관계가 아니다. 세상 창조 속에서 분명히 나타난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의 신비는 구원경륜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계시와 사랑으로 드러나며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은 하느님의 신비로 둘러 쌓여 있다. 신비는 의문과 상당히 다르다(Gabriel Marcel). 의문은 풀려질 수 있지만, 신비는 풀려질 수 없다.
부정신학-부정성의 길(via apofatica) 부정신학은 먼저 문화적으로 볼 때 그리스-러시아-동양의 문화에서 더 잘 이해될 수 있는 방법이다. 인도의 예수회 신부 엔소니 드멜로 신부의 저서가 최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범신론적이며 너무 그리스도교 신학과 대치되는 곳에 대해 일종의 경고로서 출판 불허 조처를 취했다. 이 같은 조처는 문화적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있겠다. 드멜로 신부의 글은 아시아적인 심성의 매우 적절한 표현으로서 서유럽의 신학에 많이 익숙해 있던 전 세계 신자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던 점으로 볼 때 상당한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교황청에서 볼 때는 서구 신학의 방법인 긍정성의 길과는 반대이기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부정신학은 구약 성서 안에서도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구약의 하느님(출애 3,14-15)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 나는 어디에 있을 지 스스로 있는 자이다. 인간이 하느님 계실 곳을 조작할 수 없다. 우상숭배는 바로 인간이 하느님계시는 곳을 조작하는 것이며, 인간이 하느님의 길을 개입하고 이니셔티브를 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같이 인간은 하느님이 계시는 곳을 어떻게 라도 좌지우지 전혀 할 수 없다. 너는 이 산기슭을 돌아가며 표를 해놓고 아무도 이 산에 오르거나 이 산기슭에 발을 들여 놓지 말아야 하며 이 산에 발을 들여 놓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일러 주어라(출애19,12)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려가서 이 백성에게, 야훼를 보려고 마구 넘어 들어오다가 많은 사람이 죽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단단히 일러 두어라.(출애19,21) 모세는 하느님께 얼굴울 보여달라고 요청한다(출애33,18-23). 그러나그 요청은 거절된다. 왜냐하면, 아무도 하느님을 보고 나서도 그대로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신명5,24-27참조). 하느님을 보는 사람은 죽는다. 하느님의 이름도 부를 수 없다. 모세는 오직 ’하느님의 뒷모습’만을 보도록 허락되었다. 그저 주님(아도나이)이라고 호칭해야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데 있어서 무능해서라기 보다 그 하느님은 우리의 인식밖에 계시는 너무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알 수 없다. 그래서 2세기 호교 교부 이레네오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말할 수 없는 분"이시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교부도 하느님은 우리가 증명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하였다. 우리 아시아의 심성에서 특히 한국의 심성에서도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 이름은 기록할 수 있지만 부를 때는 아호(雅號)를 사용한다. 또한 우리는 기분이 무척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슬플 때나 표현을 부정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아파 죽겠다. 좋아 죽겠다. 재밌어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 배불러죽겠다." 자기 자식이 나가서 놀다가 친구들한테 심하게 매맞고 들어오면, 어머니는 한숨을 쉬면서 "에이 이놈아 나가 죽어라"고 한다. 정말 죽으라는 소리인가? 아니다. 답답하다는 거다. 이렇게 한국의 말에도 강조하고 최고의 표현으로서 부정적인 표현 -죽겠다-가 우리의 마음에 와 닿는 방법적으로 부정 신학적인 면을 읽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신학적 반성- 신비(神秘,misterium)는 부정 신학적인 측면에서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 능력 밖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의문(疑問)은 긍정 신학적인 측면에서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요소로 파악될 수 있다. 하느님의 존재는 신비이기 때문에 알 수도 볼 수도 없지만, 하느님의 속성 즉 선하시고, 무한하시고, 자비로우시며, 질투하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 드러내시는 백성에 대한 당신의 구원경륜(oikonomia)은 당신께서 모든 구원의 사랑을 우리에게 분명히 드러내시는 방법은 긍정적인 길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 추구하는 신학(theologia)은 우리가 불분명하고도 비인식적인 방법인 부정적인 길로 드러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잠시 후에 구원경륜과 신학을 설명할 것이다. 1. 우리 문화 안에서 부정 신학적인 요소가 무엇이 있을까? 찾아봅시다. (예: 모른다는 말의 다용(多用), 순자 아버지, 모른 길 삼거리나 오거리에서 길을 선택할 경우..., 구약과 신약의 사도선택에서 제비뽑기, 동방교회 총대주교 선출: 부정 신학의 긍정적인 측면) 2. 우리 문화는 적극적으로 알려고 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며 자신의 의견도 말로 많이 표현하기보다는, 소극적이며, 말이 많지 않지만 자기 말만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말하고 듣기보다는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우리가 무엇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가?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듣고 말하기는 싫어하는가? 3. 부정 신학적인 방법론이 극단적인 어떤 경향으로 갈 수 있는가? -부정신학의 부정적인 측면-
긍정신학-긍정성의 길(via catafatica) 긍정신학은 우리 정서에 비해 서양의 문화에 더 알맞는 방법론이라고 생각한다. 긍정신학의 방법론은 먼저 하느님의 구원경륜을 말할 수 있다. 긍정적인 길은 신학하는 자의 주체가 출발점이다. 내가 시작하는 방법론이다. Cogito ergo sum (데카르트) "나는 내 자신의 존재를 제외한 모든 것을 의심함으로 확실성을 추구한다." Deus sunt ergo sum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비를 보여 주셨기 때문에 내가 물음을 갖는다."
긍정적인 길과 부정적인 길이 서로 만나는 길: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전례(기도, 예배)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은 그 신앙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 특히 교회의 교리들을 생각하는 것에 빠져 지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생각과 삶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실천이 없는 이론은 공허하며 이론이 없는 실천은 맹목적인 것이 된다. 신학과 삶은 기도(예배)와 봉사이다.
출발-신앙(1) 성서-긍정신학 공동체, 삶 ------------------------- 신학(2) 목표-신앙(3) --------------------------전승(신학)-부정신학 기도, 예배, 봉사, 실천 영성. 신비 생활 -신학적 반성- 1. 긍정신학의 긍정적인 측면을 이야기 해보자. 2. 긍정 신학적인 방법론이 극단으로 어떤 사상으로 변할 수 있나? 3.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을 잘 조화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일상의 삶에서도 긍정과 부정의 길을 어떻게 균형 있게 만날 수 있는가?
2)무슨 신학들을 공부해야 하는가? 신학은 하느님과 인간에 관한 말씀이며 이야기이다. 하느님과 인간에 관한 말씀과 담화는 세계 공의회에서 교부(敎父)들에 의해 다양한 문화와 역사 위에 기초한 종교 신학적 개념으로 나타난 사상들과 만나 토의되고 논의되는 격렬한 과정을 거쳐 교의(敎義)로 선언되고 정착된다. 신학은 하느님에게 드리는 인간의 응답인데 이것은 다양한 모양의 가르침으로 나타난다. 신학은 먼저 삼위일체의 교의(Dogma) 안에서 나타난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관한 신학이다. 신학은 신학의 원천인 성서를 깊이 숙고하면서 시작한다. 이것이 성서신학(biblica)이다. 신학은 살아 계신 주님께 드리는 천사들의 찬미송이다(묵시4,8;이사6,3;시편98,3.5.9;에폐1,15-23). 신학은 살아 계신 주님께 드리는 인간의 찬미송(doxology)이다. 신학은 하느님에 관한 신비를 인식하는 신비학이다(mystica). 신학은 ’위엄 있는 그리스도’(pantocra tor)의 이콘(성화)을 전례 안에서 만나고 그리스도의 이콘 앞에서 드리는 기도이다. 인간은 은총 안에서 인간의 창조적인 조건을 수락해야 한다. 우리 인간의 본질과 영적인 모상은 모두 은총을 숨결 안에서 지성적인 말씀(Logos) 그리고 창조적 지혜(Sophia)에로 신적인 영(Spirito)을 살고 이해하도록 하는 가능성인 영(Spirito)에로 설비하고 세우는 은총이다. 신약성서 신학에서 중심이 되는 부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신약성서에서 신학을 하기 위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영,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新婦)인 교회공동체를 만난다. 우리는 변모된 인간을 만나곤 하는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에 의해 변형된 새사람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창조주 하느님에 의해 변화되는 세상을 만나게 된다.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되는 종말(eschatology)을 향하고 준비하게되며 그것은 성사(sacrament)와 함께 그리스도의 신비를 거행함으로써 준비된다. 생명의 영은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을 구원의 종말론적인 현실에로 인도하신다. 즉 생명의 영은 어떤 가능성도 배제되어 고통 중에 생명을 취하려는 인간에게 다가간다. 유일한 하느님은 영이시다. 신학에서 초월적 존재로 지적되고 있는 영은 가끔 맑고 참다운 영으로 불리고 있다. 하나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은 영이시지만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으로 표현된다. 아버지는 비가시적인 하느님이시지만 성령을 통해 죽을 우리 인간의 몸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로마8,11). 아들은 부활의 영광 안에서 인간으로 계시는데 그분은 성령에 의해 신화(神化)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신화 되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도 생명을 주시는 영, 마지막 아담이 된다. 그것은 신바람(신적숨결), 생명바람(숨결) 그리고 인간의 살아있는 영혼과 정신으로 인해서 이다(1고린15,45;창세2,7). 성령은 마지막이 아니라 성체 성사적인 결론(요한6,22-59)에서 주님 자신의 성령적인 고백을 받아들인다. 이상의 삼위일체의 성령론적인 모습은 하느님 안에 아버지, 아들, 성령을 분리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그것을 세 가지 양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가치를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하나로 우리가 사랑하고, 하나로 예배하며, 하나로 기도하고, 하나로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가 하는 신학도 위와 같이 동일하게 서로 분리하지 말고 서로 만나는 성령론적 신학이어야 한다. 즉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교회론, 인간론, 성사론, 전례, 윤리, 종말론등 모든 신학들이 하나로 통합이 되는 성령론적 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분리적인 신학은 모든 영지주의적인 모습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신적 계시는 하느님 백성과 그 역사를 통해서 아들 안에서 아버지의 현실, 즉 자기 전달과 통교를 말하며 그것은 전부 하느님의 영의 작용인 것이다. -신학적 반성- 1. 신학을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2. 모든 신학의 연관성을 생각해 봅시다. 그 통합의 원리가 무엇일까요?
3) 신비로서 신학 신학은 삼위일체로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에 관한 담화이다. 신학은 하느님 말씀(성서)을 관상하는 것이다, 신학은 살아 계신 주님께 드리는 천사들의 찬미이다. 신학은 인간들이 하느님께 올리는 찬미이며 영광송이다. 신학은 묵시4,8; 이사6,3; 시편98,3.5.9. 그리고 에폐1,15-23과 연관되어 나타나는 천사 찬미송이다. 신학은 하느님의 신비적인 인식을 살아가는 것이다. 신학은 전례 안에서 인간의 얼굴이며 말씀의 신적 위격이신 이콘 ’위엄 있는 그리스도(Pantokrator)’께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영을 계시하는 유일한 삼위일체적 선함이다. 신학은 그리스도 이콘, 또는 천주의 모친과 아들이 중심에, 천사들과 성인들 또는 그리스도, 어머니 또는 교회의 삶은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그리스 교부들이 명백하게 시도하는 신학은 성서의 신비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이다. 신비로서의 신학은 삼위일체적이다. 분명한 것은 그 신비는 인식할 수 없으며, 형언할 수 없고 오히려 어지러울 정도로 무지한 우리를 발견토록 한다. 그 신비는 신적 위격들이 분리되지 않고 혼동되지 않는 거룩한 본체적인 세 위라는 것이다. 즉 원리 없는 원리이며, 끝이 없는 목적이며, 장소 없는 중심이고 알파요 오메가이다. 그것은 심연, 빛, 생명, 생각, 사랑, 지혜, 위엄, 힘, 영광, 거룩함, 축복이다. 그 신비는 유일하며, 일치적이다. 왜냐하면 인식하고 깨닫고, 흠숭하도록 하는 양면의 조화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주님 안에 하나이며 셋이시다. 그 신비는 내적 구원경륜을 위하며 모두를 위해 함께 하면서 인간에게 향하여 간다. 신적 위격들이 하나 안에 계시고 이해할 수 없는 영원성 안에서 알파요 오메가로 머물러 계신다. 아버지는 참으로 인간에게 영과 함께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유일하며 영원하신 세 위의 도움과 신비를 계시하신다. 영과 함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을 선물하고 아버지를 계시하며 모든 이를 그분에게 다시 인도하기 위해서 이사9,6(희랍어 70인역)의 위대한 도움을 주는 천사가 되도록 허락하신다. 신비는 인식하도록 배려된다 신비의 초월성은 그것을 관상하도록 허용한다. 하느님의 무상적 은총을 받는 자, 변모된 자, 신화된 자는 사람들을 항상 인간의 창조적인 특별한 모양으로 하느님을 잘 인식하도록 돕는다. 다양한 모양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관상하도록 이끄신다. 부정 신학과 비 인식 그리고 고요함 안에서 겸허한 찬미가, 인식가로서 긍정적인 구원경륜과 케리그마적 선포 그리고 지속적인 교리교육 안에서 영광송 안에서 인식자, 다시 깨달은 자 그리고 찬미가, 선포자 찬미가 사랑하는 자로서. 결국은 신학이건 구원경륜이건 모두는 이해할 수 없는 흘러 넘치는 신적 사랑이다. 그러나 인식과 다시 깨닮음 그리고 관상하는 것은 항상 가능하며 특히 의무적인 모양으로도 나타난다. 이것을 위해 신적 지혜는 그들의 역사 안에서 인간들에게 영, 불꽃 그리고 빛으로서 선물된다. 영은 하느님의 모상 인간들에게 다가가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 힘 지혜이신 강생하신 말씀을 닮게 하신다.(골로1,15) 영은 다양한 모양으로 인식하도록 제시한다. 말씀학(logologia)으로서 신적 말씀에 대한 연구는 하느님의 말씀(Logos) 그리고 말씀으로서 인간 스스로에 대한 연구인데 그것은 마음을 맑게 한다. 지혜론(sofiologia)으로서 지혜(Sophia)에 대한 연구는 신적 지혜 그리고 창조된 지혜(sophia)로서 인간에 대한 연구이다. 지혜는 정신을 회복시켜 주시며 인식의 사랑을 선물하신다. 영학(pneumatologia)으로서 영(pn uma)의 연구는 신적 영과 창조된 영(pn uma)으로서 인간에 대한 연구이다. 영은 거처하시고 변형하도록 도우신다. 신부학(新婦, ninfiologia)으로서 신부(新婦)에 대한 연구는 신부, 그리스도 그리고 창조적 신부(新婦, n mph )로서 교회와 인간에 대한 연구이다. 신부는 사랑 안에 일치하고 그곳에서 이러한 말씀들이 영의 업적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길고 어려운 여정이 필요로 하며 신적 은총만으로 달려갈 수 있다. -신학적 반성- 1. 신비 생활이란 무엇인가? 2. 관상(觀想)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관상을 할 수 있을까?
3장 기초신학 계시. 방법, 중개자 1 계시의 식별 1) 말씀, 상징적, 예언적 현시 -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문자대로의 해 석은 곤란하다. 2) 전승적 요소와 개인적인 체험의 조화가 필요하다. 3) 본 것과 들은 것의 조화가 필요하다. 4) 성소(聖召)의 스케마 - 모세와 이사야의 성소 이야기 5) 구약, 신약, 현재성(예언성취)-과거전승, 현재의 행위, 미래의 성취
2 계시의 시기 1) 구약의 준비- 그리스도 이전 2) 신약,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하느님의 자기통교의 절대적 절정- 그리스도와 더불어 3) 계시와 구원의 지속적 현존-그리스도 이후 내용
야훼 하느님께서는 멀리 존재하시는 초월자이시지만 철학적 제1원인이 아니라 인간에게 사랑과 충성을 요구하시는 부드럽고 사랑스런 하느님이시다. 유다이즘-헬레니즘의 신관 은 위엄있는 초월성 즉 공간의 한계를 초월해 계신 분 | -----------|----------------- | 애정 어린 친밀성, 지성소
4)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와 구원의 체험 시기를 알아보고자 한다. 사도들과 그 계승자들이 하느님의 계시와 구원을 체험을 한다. 12 사도의 체험 바오로의 체험 - 갈라디아인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자기와 같은 체험을 하지 못한다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 체험을 하지 못하는 것을 책망한다.(갈라 3,1-5; 1고린11,17-19) 12 사도와 바오로의 체험 형태가 다르지만 계시, 전승, 영감 즉 그 내용은 같아야 한다. 계시의 "그 때"(계시와 구원의 기초적 역사)와 "지금"(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체험은 계시와 구원의 종속적인 역사)은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중재해 주신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자기통교를 이루어 주는 그리스도의 힘이 이러한 극도의 상처받기 쉬운 상태 안에서 그 절정에 이르게 됨을 이해하였다. "내가 약할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1고린12,10) - 십자가 신학, 겸허의 신학, 바오로 서간은 자신 그리고 믿는 이의 체험을 말한다. 바오로의 그리스도론은 아빠, 아버지, 성령의 내주(內住,로마8,26), 신적 사랑(로마5,15), 공동체 지체 선물(1고린12,4-11), 미래 부할(로마 8,11), 삼위일체적 그리스도론(1고린12,4-6) 마르코, 마태오, 루가는 바오로 서간과는 달리 예수의 자신 체험을 드러낸다. 즉 그리스도를 가족적이며 친밀감이나 부드러움으로 드러낸다. 이는 예수 삶 즉 기도의 특징을 나타낸다.
3. 비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 계시자 그리스도-기초신학은 신앙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에 대해 조직적으로 숙고할 목적을 두고 있다. 구원의 보편성, 요나, 발람(이스라엘인이 아니지만 참 예언자. 민수22-24), 익명의 그리스도인(칼 라너),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비록 하느님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자기 탓 없이) 있을지라도 구원 가능성과 현실인식을 지닌다.(교회헌장 16항)
4. 신적 자기통교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 체험 Homo interrogans homo cognoscens Fides quae- believing that- 믿음내용 homo decidens homo sperans Fides qua- believing in- 신뢰하는 행위
Credere Deum/Christum- 하느님/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느님이 특정한 방법으로 행동하셨음을 고백한다. 고백 - 잉태되어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심을 고백한다. Credere Deo/Christo - 하느님/그리스도께 신앙을 바치는 것은 신앙 실천의 현재적 투신을 가리키고 있다. 실천- 우리는 믿나이다. Credere in Deum/Christum- 하느님/그리스도께 신뢰하는 것은 신앙이 확신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미래, 하느님으로부터 도래할 미래에 관계되어 있다. 신뢰- 죽은 이들의 부활과 세상의 생명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과거 - 고백 - 신앙(信) - 신앙고백 - 인식 - 수직 - 하느님 사랑 현재 - 실천 - 사랑(愛) - 사랑실천 - 결단 - 수평 - 인간 사랑 미래 - 신뢰 - 희망(望) - 희망생각 - 바람 - 통합 - 구원의 사랑
5. 신앙진술의 공동체적 차원
1) 교도권 Charisma-구원적 계시, 말씀 | 신학자 Instituto 교도권(교황+주교단) 내용을 학문적 | 말씀에 봉사, 말씀의 으로 해석 populi Dei 유권적 해석(계시10) 본질적 신앙고백전달 그리스도교적 삶에 인도 교회에 봉사
2) 교의 - 신적 계시 진리 기초적 계시-사도시기 교회의 근원적 체험, 신앙, 가르침. 신약 안에는 교의가 없다. 종속적 계시- 공동체 안에서 교의가 태어난다. 교도권의 무류적 가르침의 권위에 의해 선포됨-칠성사 설정(트리덴틴 공의회), 성모 마리아 무염시태(교황비오9세)
3) 교도권 특별, 장엄 - 교황 세계 공의회 통상, 비장엄 - 보편적 (교황 + 주교단) 비보편적-회칙, 사도적 권고 시노두스(주교들), 주교회의 개인주교 4) 성경, 전승, 교도권 6. 전승 1) 전승의 인간적 현실 2) 신학적 문제 전승과정(사도성, 특별성)-paradosis 전승 내용(보편성) 부정신학-실중, 역사, 삶, 윤리, 신학원, 가정, 직장 공동체, 성사 긍정신학-이론, 관념, 철학, 가르침, 말씀선포, 교의, 신학교, 성서공부 상징신학-전례, 기도, 수행, 성당, 기도시간, 피정
성령, 영감 기초적 계시 성령 영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현실화 C 성서, 사도교회 (교부, 중세, 근현대)종속적 계시 B A
C = (A + B) -- 가톨릭 극단화 C = B 화 C = A -- 개신교
5-7. 전승의 진실성 1)교도권, 2)보편성, 고대성, 일치성 3) 공동된 이해(Sensus Fidelium) 4) 지속성 5)신경 6) 사도성 7)성서 8) 부활하신 주님 결론: 하느님을 만나는 세 가지길 하느님께서 가시는 길은 세 가지로서 지성적인 말씀(Logos), 청조적 자혜(Sophia) 그리고 하느님의 맑음을 살아가고 이해하는 영(프네우마) 이다. 이 세 가지 길을 만나고 아는데도 세 가지 길이 있다. 첫 째 길은 긍정적인 길로 나타나는 구원경륜이다. 구원경륜에 의해 신학을 알도록 첨부한다. 구원경륜은 무엇보다 창조적이고 역사적인 것 그리고 결국 오직 유비를 통해, 그리고 창조와 역사에 의해 창조되지 않은 것을 계시된 현실로 드러내는 길이다. 이제 구원경륜의 단언은 하느님 사랑을 인식하고 또 인식하도록 요청된다. 그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다. 바로 하느님의 은총이다.(성 토마스의 신학대전 S. th. 1,18,2c ad 1; 2-2, 174...) 두 번째 길은 부정적인 길로 나타나는 정화의 길로서 신학을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말 할 수 없다.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것은 하느님에게까지 정신을 일으켜 세우도록 하는 창조적이고 총체적으로 인간의 무능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모든 지성적인 오만함을 결과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며, 하느님에 대해 지식을 조직화하고 연구하며 인식하는 추론을 총체적으로 항상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 길은 주님께서 겸허함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두신 십자가의 길 같은 것인데, 오직 그것은 아담과 하와 원조들의 넘어짐 이후에 죄의 인간적이고 일반적인 조건으로부터 어두어지고 이러한 창조적인 이유 자체 안에 가난하고 인간적인 정신을 재건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참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은 정확하게 모든 정의가 넘치는 분이시다. 모든 이름을 면하고 넘치며 그분은 총체적으로 그분의 신적 존재에 계심으로서 그리고 모든 인간적인 접근 건너 의 저편에 계시는 총체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분이시다.(신학대전 S. th. 1,1,7,1;1,2,2,2;1,12,7;1,13,5c) 교부들은 성서를 따르면서 하느님께 공경을 드린다. 그리고 교부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인간은 오직 절대적인 무지의 어두움을 유일하게 발견한다고... 그들은 모두들 위대한 성인들이고 신비가들이시다. "우리가 하느님을 생각할 때 경악이 우리를 움켜쥘 것이다."(시편 주석 In Cant, Canticorum 12. in P.G 44, 1028) 교부들 사이에서 이러한 최상의 고백은 부정성이야말로 참 인식을 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고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러한 인식은 진실되며 복합적이고 눈에 환희 보이는 지식으로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야하는 길은 최고로 탁월한 길인데 그것은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길이다. 그 길은 전례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최고의 길이며 종합적인 길이다. 긍정성의 길은 오만한 이성주의 그리고 무분별하고 거만한 담론에로 빠지게 될 수 있다. 부정성의 길 또한 의심과 불가지론 그리고 무신론과 절망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이 양방의 길들은 서로 위험한 사상에로 전개될 수 있다. 이성주의의 재앙이 우리 시대에 서 있으며 오늘날 많은 신학은 완벽하게 타인의 말을 잘 듣는 자들이 되었다. 불가지론과 무신론 그리고 절망으로 드러나는 재앙 역시 폰 흄볼트(von Humboldt), 포이에르바하(Feuerbach), 니이체( Nietzsche), 그리고 하느님의 죽음을 선언한 신학자, 그리고 니힐리스트(Sartre), 하이데거(Heiddeger)의 약한 사상에까지 드러난다. 이 모든 경향은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 은총에 의해 지탱되지 않고 인간적 정신의 약함을 드러낸 것이다. 진리를 거슬러 오는 많은 폭력이 아직도 남아 있는가? 하느님을 만나는 최고의 길 "높으시어라, 야훼, 끝없이 찬미받으실 분, 그 높으심, 측량할 길 없음이여."(시편145,3) "전능하신 우리의 주님 얼마나 크시냐. 그의 슬기 형용할 길 없어라."(시편146,5)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이사6,3) 교부들은 이러한 찬미와 영광과 예배의 길로서 신학적 길들을 고백하기에 앞서서, 두 가지 길을 준비하였다. 그 길들은 먼저 구원경륜의 길로서 어떤 확실한 인식으로서 긍정성(catafasi)이고, 둘 째는 신학의 길로서 신비에 대한 총체적인 비인식이라는 부정성(apofasi)이다. 이제 통합의 길로서 종합되는 길은 공경과 찬미의 길인 하느님께 드리는 탁월한 길인 영광과 찬미와 예배를 드리는 전례의 길이다. 전례 안에서 바로 우리는 하느님을 참으로 만나는 것이다. 이 탁월한 길은 긍정의 길이든 부정의 길이든 모두를 통합하고 고양한다. (신학대전s. th. 1,13,6;1,13,3.) 우리는 결국 창조된 것으로부터 기인되는 원인들과 근본 원인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 결과적으로 드러난다. 원인에 앞서 우리가 선언할 수 있는 것은 인식에 대한 무능력이다.. 결국 우리는 긍정의 길에서 부정의 길로 진행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것에만 남지 않는다. 그 길을 진행해 가면서 우리가 합법적으로 하느님께 적용하고 그 속성을 밝힐 수 있는 것은 마치 하느님께 적합한 것으로서, 그분은 창조된 존재의 유일한 원인이며 무한하신 분이심을 인식하고 있는 창조된 완벽함을 드러낼 수 있다.(인과율 법) 그분은 인간에게 부여하는 마치 부모들이나 은인들에게 드리는 표현하는 것 같이 ’좋으신 분이’라고 하는 창조된 완벽함이 아니라 무한하며 최고의 선이시며 유일의 선이신데, 그렇게 우리는 그 분을 인식하고 깨달으며, 그렇게 사랑하고, 예배드리며 그렇게 그분을 찬미드리며 찬송드리며 전례를 거행한다. 이런 점에서 이 길은 창조되도록 적용될 수 없는 길이다. 마치 천사의 찬미송에서 ’하느님께 영광’(루가2,14)을을 크게 외치면서 우리는 노래한다. 신학은 결국은 세 가지 거룩한 모양 위에서 발전한다. 최대의 사랑(caritas) 실천, 참으로 일치(unity)하게 하며,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와 함께 이루어진 순응 안에서 드러난다. 부정성의 인식 즉 총체적인 비 인식을 드러내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로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데 첫 째 육화한 말씀의 신비 둘 째 십자가 위와 주님의 무덤 위 세 째 총체성과 최정상으로서 영광스러운 신적 부활에 대한 신비이다. 신학과 구원경륜의 문제들 그리고 서로 일치점에 서 있는 세 가지 길의 문제들은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풍부히 담겨있을 볼 수 있다.
신학을 하는 신앙인-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 교부들이 고백하기를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신적 현실들을 만나야한다. 즉, 기도와 영적인 삶으로 드러나는 신비의 생활을 해야하며, 그 것을 먼저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준비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맑게 정화하는 것이다. 신학을 하는 사람은 먼저 맑음(katharotes)을 따라 살아야하며, 신적 현존에 서 있도록 노력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지속적인 기억(mimneskomai)을 해야한다. 신학자는 자신 스스로가 정화되는 길을 찾아야한다(anakathairo).1 "복되도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마태5,8: 참고 시편 24,3-4) "아버지께서 얼마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는지 보시오. 우리는 하느님 자녀라 불리게 되었으니, 과연 그분 자녀들입니다. 세상은 그분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를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밝히 드러날 때 우리가 그분을 닮게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실제 모습 그대로 뵈올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1-2) 이것은 희랍 철학 전승에 의해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전승에서도 이미 천재 교부 오리게네스는 그의 긴 체험적 삶과 많은 신학 업적의 서적을 통해서 고백하고 있다. " 진실한 기도는 신적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신학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세는 먼저 모든 빛의 아버지, 모든 협조자(paraklesis)의 하느님, 보호자(parakletos)의 선물이신 성령에게 대한 충만한 축원(epiklesi)을 간절히 원하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학적 반성- 1. 하느님을 만나는 세 가지 길을 이야기해보자. 그 동안 나는 어디에서 하느님을 만났는가? 2. 신학의 최고의 길은 기도이다. 나는 최고의 신학인 기도의 삶을 살아가는가? 기도-염경기도-묵상기도-관상기도(마음의 기도) 3. 우리는 기도할 때 어떤 자세로 하는가?
마음의 기도
기도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느님을 마음으로 만나고 맺는 영적인 친교이다. 우리는 입으로 하는 염경기도에는 익숙해 있지만 마음으로 하는 기도에는 어색하기도 하며 혹시 생소하기도 할 것이다. 눈을 감아보자! 편안한 자세로 성체와 말씀(성서)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고요히 기도해보자!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아마도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있기도 할 것이다. 눈물의 기도는 기쁨 때문이기도 하지만 종종은 슬픔과 비통 안에 우리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슬픔과 고통을 피하지 말고 거기에서 일어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의 좁은 마음을 넓고 부드럽게 가져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빈 마음에 내려오시고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고백하게 도와주시며, 모든 잘못과 비통함을 하느님께서 용서하시고 치유하심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든든한 마음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잠시라도 떠오를 수 있는 분심들과 잡념들을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한다. 분심과 잡념들은 기도를 바르게 할 수 없도록 우리를 방해하고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쁜 생각과 좋지않은 사건은 우리가 기도 안에 열정적으로 머물러 있을 때, 우리 마음에 어떤 상념이나 분심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사실 우리에게 뭔가 압박하면서 다가오는 상념과 분심은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주의를 환기시켜야 할 어떤 것, 즉 해결해야할 숙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할 것은 먼저 그 숙제를 잘 해결하고, 마음을 비우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 분심과 상념은 우리의 기억 속에 계속 남아 있고, 우리 마음을 움직여 나쁜 생각과 좋지 않은 사건으로 계속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그럴 때 마음의 기도는 우리의 삶에서 멀어지고, 그 대신 염경기도만을 자신도 모르게 계속할 것이다.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이 벙어리와 귀먹어리가 되도록 힘을 쓰다면, 우리는 참으로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기쁨과 감사...의 열매이다. 기도는 슬픔이나 고통 그리고 절망과 반대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내면 안으로 경외심을 가지며 직관과 영적인 기도에로 마음을 모아서 고요한 상태에로 편안히 앉아 있어야 한다. 기도할 때 우리의 원의만을 채우지 말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과 충만히 일치하지 않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마음을 흐트르지 않고 하는 기도가 최고의 행동이며 마음의 기도이다. 기도는 하느님께 우리의 고요하고 비어있는 마음을 들어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머물러 있도록 먼저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고 청정하도록 욕망을 정화하면서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무지로부터 벗어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든 유혹과 자포자기로부터 참으로 자유롭도록 기도할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오직 정의와 하느님의 나라, 즉 덕과 진정한 영적 인식을 찾고,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앞에 거저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러지 못하고 우리의 마음이 아직도 기도할 때마다 산만하다면,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 수도원에 살고 있는 수도자라면, 우리는 수도자로서 제 기도를 아직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정원사로 고용되어 열심히 일하는 사람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자세는 습관적으로 동요되지 않는 고요하고 조용한 상태로 우리가 하느님께 열려있음으로 말할 수 있다. 기도하는 자세는 지혜를 사랑하고 그 강한 사랑에 의해 참으로 영성화된 최고상태로 그리고 지성적 현실로 다가서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우리가 마음을 비울 때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하신다. 우리가 모든 것에 있어서 물질적인 일에만 집착하며 연류된다면, 그로 인해서 우리는 끊임없는 상념에 사로잡혀서 동요하게되는데, 그럴 때 우리는 순수하게 기도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념과 분심을 포기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시편 노래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습관화된 욕정을 가라앉게 하고, 무절제를 치유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기도하도록 스스로 마음을 준비시키고, 침묵 안에서 고요히 마음의 힘을 다하여야 한다. 기도는 존엄한 마음에 맞는 활동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마음 자체의 고상함과 삶에 있어서 유용한 본질을 나타낸다. 기도하는 동안 눈을 감아라! 그리고 우리의 원의와 육이 아니라, 마음으로 살아가라! 왜냐하면 우리의 진실한 기도가 한 수도자를 또 다른 하나의 천사가 되도록 도와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수도자는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기를 원한다. 행복은 마음에 있으며, 행복한 마음은 우리를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며, 우리가 기도할 때 모든 것을 마음으로부터 비울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럴 때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뵐 수 있을 것이다. 수도자(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구도자도 포함해서)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사람이며, 모든 사람들과 조화 안에 있는 사람이다. 수도자는 모든 사람과 함께 자기 스스로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수도자는 모든 사람 안에서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되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각(視覺)이 모든 감각의 최고 가치가 있는 것처럼 기도는 모든 것에서 최고의 신적 덕목인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기도할 때, 모든 기쁨이 일어나고, 그 때 우리는 참 기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이제 마음의 기도는 동방 수도원의 전승이 되었고 유명한 ’예수 기도’로 발전한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교의 신학적 이해
인격적 하느님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비인격적인 분이 아니다. 그분은 부처도 알라도 그리고 철학자들의 신도 아니다. 우리 하느님은 강생하신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을 계시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성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시다. 삼위일체의 용어는 성서에서 발견할 수 없지만 성서의 내용 안에서 볼 때 분명히 드러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구분된 위격들 성자와 성령 사이에 존재하면서도 신적 존재의 일치 안에서 분리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드러나고 계시된 하느님에 대한 경배는 마땅한 우리의 믿음이며, 그 신비와 믿음 위에 교회의 기나긴 반성의 열매가 맺게 된다.
1. 전통적인 신관
고대의 신화론적 신관 하느님: 지상세계로부터 떨어진 천상세계에 별과 빛의 세계에 절대권을 보유한 군주로 거처한다. 하느님이 세계 위에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분으로 나타난다. ’우리 위에 계신 하느님’(Deus super nos)
교부. 중세의 유신론적 신관 헬레니즘으로 신 개념은 고대 교회 신론에 영향을 줌. 하느님은 이제 초역사적, 무시간적, 정태적 존재로 이해됨. 공의회부터 이제 신관은 내재적 본질적 삼위일체론화 되어갔다. 즉 성서는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론의 신학을 전개해가지만 공의회이후 신학은 내재적 혹은 본질적 삼위일체론으로 전개되었다. (긍정신학;하느님 속성과 위격들), (부정신학;존재.본질) 중세기는 그리스-헬레니즘적 신 개념의 영향을 받은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신 플라토니즘으로 가장 완전한 존재로서 하느님 규정.(스콜라 철학, 토미즘-주지주의). 스콜라 신학에서 말하는 신표상이 성서에서 증언되는 신표상과 부합된다고 보기 힘들다. 성서의 하느님은 인간의 추론과정을 통해 논증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만남을 통하여 체험되는 분이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59-1870)는 하느님을 절대적 불변존재로 파악한다. 즉. 전통적 우주론적 신관 안에서의 하느님은 다양하기 그지없이 변화할 뿐만 아니라 서로 분열되어 있는 이 세계와는 달리 단순하고 단일할 뿐만 아니라, 완전하고 전능하며 무량하고 무한한 분으로 이해되었다. 부동의 원동자, 제1원인, 필연유, 최고존재, 최고 지성적 설계자는 무상하고 고통에 가득찬 조물과는 무관한 초월성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하느님은 의인적, 초월적 성격 즉 여전히 인격체로 간주되지만, 육신을 지니지 않은 형이상학적 인격체로 간주된 것이다. ’세계 피안자로서의 하느님’(Deus supra mundum). 이 신관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전통적 신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 철학적 신 표상이 신조(信條)로 선언된 것은 아니다. 다만 하느님의 실재와 현실만이 신조화 되었을 뿐이다. 이 하느님을 ’고통당하는 분’으로 규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2. 현대의 하느님 이해 인간화, 세속화, 산업화, 정보화된 현대 세계에서 전통적인 신관 의문에 처해짐. 우주론적인 명증성이 오늘날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구태어 신의 존재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자연현상을 해석해내고 있으며, 세계 안에서 분명히 만나는 거대한 고통과 악의 실재에 직면하여, 이를 그대로 방치하는 신에 대해 오히려 반기를 든다. 이런 신은 흠숭할 가치가 없는 존재이거나 전능하지 못한 죽은 존재로 간주된 것이다. 신은 죽었다(니이체) 현대의 위기는 이 같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도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와 다른 초월적인 하느님이시지만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느님
출애3,14에서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정의하신다. 하느님은 항상 ’존재’하는 분이며, "언제나 존재하고자 하는 대로 존재하는 분"이시다. 내가 어디에 어떻게 있을지 스스로 있는자.
구약:거룩하신 분-완전히 다른 분-인간이 아닌 분(민수23,19)-주님(아도나이)-초월성
신약:사랑(1요한4,8.16)-완전히 우리의 하느님-인간이 되심-아버지(아빠) - 내재성
인격적인 분 하느님은 살아 계신 인격적인 분이시다. 하느님은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동산을 거니시고(창세3.8), 말씀하시며(창세1,3), 들으시며(출애16,12), 웃으시고(시편2,4), 눈(아모9,4)과 손(시편138,5)과 발(이사66,1)을 사용하시며, 인간적인 감정들로 분노(레위20,23)하시고 고통(창세6,6)을 느끼시고 질투(출애20,5)까지 하신다. 신약에서 하느님의 인격적인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매우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초월성을 흐리게 하거나 잃지 않으며 인간의 얼굴이 되고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보았던 사람들이 하느님과 말하고 하느님을 만지는 모양으로 하느님-인간이 된다(1요한1,1) 하느님은 예수 안에서 피곤해지고(요한4,6), 하느님은 예수 안에서 기쁘시며(루가10,21) 하느님은 예수 안에서 눈물을 흘리시고(요한11,35) 하느님은 죽음을 아파하시고 슬퍼하시며 괴로워하셨다(마태26,37) 그러나 예수는 동시에 하느님과 구별되는 인격으로서도 계시된다.(마태11,25;요한8,19)
아버지 하느님은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하느님은 구약에서 백성들의 아버지만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야훼의 부성(父性)은 개인의 아버지로도 그 자리를 옮긴다.(지혜문학 참조) ’하느님은 가난한자의 아버지이시고 외로운 자들의 아버지이시다’.(집회23,1-4;51,10). 하느님은 부드러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호세11,3-4). 그리고 야훼 하느님은 절대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거룩한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호세11,8-9). 예수의 메시지의 핵심에는 아버지를 계시하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던 초기 공동체에서 발생한 사건은 야훼는 참으로 아버지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이다. 예수 이전에 어느 누구도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단호하게 부른 자는 없었다. 예수가 유일하게 처음으로 단호하게 하느님에 대한 최대의 신뢰와 어린이다운 용어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순간에서도 ’아빠’라고 하는 아람어의 부드러움으로 하느님께 의탁한다.(마르14,36) 이 ’아빠’는 예수의 본래적인 말씀(J. 예례미아스)으로서 유다교와는 달리 예수는 자신의 기도 속에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다. 이런 가족적인 하느님의 칭호는 그 시대 사람에게 느낌이 생소하고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하느님에게 칭했던 ’아빠’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을 볼 수 있다.(갈라4,6;로마8,15) 구약과 같이 신약에서도 하느님은 역사의 하느님이시다. 야훼는 자연신이 아니라 "인간의 길을 따라 움직이는 하느님," "함께 하는 하느님"이다. 그분은 역사를 통해 족장들과 이스라엘과 동행하였고, 끝내는 예수 안에서 스스로 역사가 되셨다.(요한1,4 말씀이 육이 되셨다)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함께 그 분이 누구신지(존재, 본질) 무엇(속성, 위격들)을 하셨는지가 명백하다. 그 분은 아빠이시고 참으로 그 분 자녀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고난 당하는 아빠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은 자신의 기본 속성인 사랑을 계시하셨다.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점은 죽기까지 이르신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우리 구원의 증표인 부활을 통해 완성된다.
어머니다운 하느님 어머니다운 하느님 아버지는 J. 몰트만 신학자에 의해 표현되었다. 그는 간결하게 하느님의 어머니다운 얼굴을 강조하고자 시도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이미 그 시대에 세 위격이신 하느님의 경배적인 신비를 표현하기에 우리 인간의 언어가 부족하다고 확인하곤 했다.(De Trinit., V) 구약의 몇 군데에서 신적 사랑의 어머니성이 드러나고 있다.(호세11,1.3-4;시편131,2) 신약에서 예수께서 ’아빠’라고 부르는 용어는 하느님이 오직 남성적이고 부성적인 신적 존재만을 나타내는 강조이기 보다 부르는 자가 하느님께 현실적으로 다가가는 모습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남자와 여자, 종과 자유인의 대립을 극복하면서 남자나 여자에게 서로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사랑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느님의 부드러운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서로 섭리된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되고 이 모든 것은 남자-여자 개념으로 주어진 제한점을 극복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성별을 초월하신다. 그분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인간적인 부성애와 모성애의 근원이며 척도이면서도 이를 초월하신다. 요한 바오로 1세 교황께서는 매 주일마다 하는 정오 삼종기도 강론에서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어머니다운 아버지의 시각을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어머니다운 요소가 몇 세기 동안 신학적인 걱정과 애매함에 남아있던 것도 이제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하느님 안에 아버지 존재를 함축하는 사랑과 부드러움의 이러한 심연을 심오하게 발견하기 위해 아버지의 어머니다운 차원에 가까이 접근하고자 노력하는 신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예수께서, 그리고 교회가 했듯이 아버지의 남성적 용어를 지속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불완전한 시각을 취하지 않는 한 이 어머니다운 요소를 풍부히 할 필요는 있다. 하느님은 어머니처럼 활동하시는 아버지이시다.
마음 속의 하느님 "하느님 나라가 다가 왔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1,19) "복되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5,3) "복되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마태5,8) "진실히 말하거니와, 마음을 돌이켜 어린이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마태18,3) 과연 하느님의 나라가 당신들에게 와 있습니다."(루가11,20) "하느님 나라는 당신들 가운데 있습니다"(루가17,21) 삼위일체 이콘(안드레이 루블료프)
3. 하느님을 만나는 길 성서: 구원경륜의 긍정적인 길 신학: 부정적인 길 전례: 기도. 신화(Theosis.神化, 하느님의 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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