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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동 사막의 땀
첫째, 바레인 에서
1978년 제대 후 31세 까지 국내에서 억척으로 살면서 꿈을 키워갔습니다. 하지만 더 큰 꿈을 이루고자 현대건설의 해외 현장으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목표는 약혼 한 처녀와의 보금자리 집과 중단한 학자금 그리고 선교현장을 둘러보고 싶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다란 공항에 도착하니 사막의 열풍에 숨이 탁 막힙니다. 월남은 야자수 그늘 아래는 시원한데 여기는 섭씨 40~50도로 그냥 숨이 턱 막힙니다. 공항에서 잠시 밖을 나갔더니 이것은 마치 한증막 같았습니다.
고국에서 한증막에 들어갔다 뜨거우면 나오면 되지만 여기는 반대로 그곳에서 일상을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겨우 식사 할 때나 취침 때 에어컨이 있는 숙소 바라크로 피하지만 나머지는 사막의 건설현장에 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프로펠라식 페어차일드 비행기를 타고 옥색 빛깔의 아름다운 페르샤만을 낮게 날아간 바레인 공항 그리고 ''마하락''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현대건설은 드라이도크 항만, 국방성, 외무성, 병원, 정부부속 건물 등 수많은 크고 작은 건설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이른 아침 6시에 기상 어둠 속을 지척이며 아침을 먹고 버스로 현장에 도착하면 7시 30 분 경 입니다. 우리가 건설 현장에 도착하면 모두 부서별로 도열한 채 국민의례 두 가지를 시행합니다.
첫째, 태극기 앞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입니다.
“국기에 대해 경례” 이어서 “애국가 제창”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둘째, 국민교육헌장 낭송입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이때 어쩌다 일찍 나온 현지 중동인 이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아프카니스탄 사람들은 우리를 신기하 듯 바라보며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현대 기술자들은 모두 똑같은 옷을 입었고 동작 또한 기가 막히게 빠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모두 군 생활로 정신과 체력이 다져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바쁠 때는 뛰는데 그것이 그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에서는 도둑놈만 뛰지 보통 그냥 어슬렁입니다. 한참 일하다 보면 그때야 현지인 들이 출근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잠은 언제 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왜냐하면 어제 우리들 보다 먼저 퇴근하고 우리는 늦도록 일하다가 숙소로 갔다가 겨우 눈 좀 붙이고 나왔으니 그들의 눈에는 잠자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이상해 보인 것입니다
"아 이것이 진정 중동 건설현장의 신화 이야기랍니다."
이마의 땀은 흐르다 아예 말라버리고 옷은 소금으로 버적입니다. 월남에서처럼 소금정제를 한 움 큰 씩 먹으며 현기증을 견뎌냅니다. 당시 정치 타운 건설에 인도 등 여러 나라가 참여하였는데 그들의 건물들도 함께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속도 면에서 그들은 혀를 내 둘렀습니다. 우리는 10층을 올라갔는데 그들은 겨우 1~2층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인도 회사는 장비가 없어서인지 시멘트 몰탈을 세숫대 같은 곳에 담아서 일렬로 주~욱 서서 붓습니다. 그것도 야근이니 잔업이니 그런 것은 아예 없고 마냥 느리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기술진으로 만든 중장비로 밤 낯없이 일하니 상대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우리 현대 마하락 캠프 베이스 기지를 가려면 바레인 비행장 옆을 지나치는데 한번은 덤프트럭하고 콩고드 비행기하고 누가 더 빠른 가 경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콩고드는 지상에서 뜨고 내릴 때는 꼭 여치같이 뾰족한 머리를 수구리고 이륙하는데 우리 덤프트럭이 더 빨리 달렸다는 것입니다. 말이 그렇겠지만 그렇게 달리고 달린 것입니다.
점심식사는 기지로 와서 먹는데 너무 덥고 많은 땀을 흘려서 인지 미역오이 냉채만 벌컥 벝컥 들이키고 바라크 침상에 누우면 천장이 노래집니다. 그래도 현대건설은 모든 것이 풍족해서 먹을 것은 그야말로 산더미 같이 쌓아 놓았습니다. 하지만 도통 식욕이 당기지 않습니다.
현대는 고국으로부터 밧지선에 무엇이든 싣고 타그 보트로 끌고 옵니다. 그래서 음식이 풍족하고 현지 조달도 최고급으로 구매합니다. 싱싱한 과일 먹을 것 마실 것은 참으로 풍족했습니다.
한번은 주방장이 무슨 음식이 먹고 싶은지 설문조사를 했는데 ''족발''이었습니다. 중동사람은 돼지고기를 안 먹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아무튼 족발이 식당 문 앞에서부터 대형 소쿠리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았습니다. 우리는 그걸 하나 씩 집어서 새우젓에 푹 찍어 물어뜯으니 기가 막히게 맛있어 인기 짱이었습니다.
우리 설비 팀의 ‘에어 콘 샵의 포니 픽업’은 긴급 AS 전용차였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도 오직 임무완수를 위해 달립니다. 운전기사는 현지인 이고 선임탑승은 팀장이 타고 나머지는 그냥 적재함 바닥에 앉는 것입니다. 이때 비가온면 물에 빠진 생쥐처럼 그대로 젖는 것입니다.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현장으로 달렸습니다.
그때 저는 이를 악물고 이렇게 뇌었습니다. "이건 전투다. 그래 맞아 전투야... 3년만 참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희한하게도 숙소로 돌아 올 때는 옷이 다 말랐습니다. 비가 개면 옷은 입은 채로 순간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현장을 오가면서 가장 반갑게 맞는 것은 일주일에 한번 오는 KAL 기였습니다.
누구든 우리 비행기가 지나가면 멀리 가물가물 안 보일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한번은 본부 사무실이 밤새워 불이 켜졌습니다. 알고 보니 바레인 정부가 발주한 공사에 입찰을 넣고 기다리는 데 "와~아"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공사를 수주하게 된 감격과 축하의 소리로 달라를 벌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중동의 현대 건설을 이끌어 가신 분은 이명박 사장님이셨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고 정주영 회장님 등 모든 임직원들의 국가적 헌신은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당시 앞서 오신 선배들이 ''현대바레인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막사에 있는 것보다 교회에 있는 것이 더 좋아서 늘 교회를 청소하며 돌보았습니다.
예배의 설교는 순번을 정하고 돌아가면서 인도하는데 효과적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었고 그래서 회의 중 한 사람을 천거해서 회사에 상신 교회를 돌보도록 했는데 제가 피택이 되었습니다. 서울 현대건설 본사의 신우회와 연락을 취하며 또 고국의 어려운 교회를 도우며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생활로 역경들을 극복했습니다.
그때 믿음의 동역자들이 눈에 선합니다. 대사관 직원과 영사님 가족 그리고 영빈관 식구들 임 직원들과 비서실 친구 그리고 현지 ''살마니아 호스피탈''에 취업한 한인 간호사들 성탄을 준비해서 모든 직원들 앞에서 발표회를 가지던 그 날 밤이 그립습니다.
우리 샵에 근무하던 현지인 운전기사 두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열매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현지인들과 접촉하기 위해 ''마나마시티''(수도)에 나가 영국인 교회를 가끔 갔습니다. 80대가 되시는 선교사님이 계셨는데 한인들을 잘 위해주셨고 성실과 근면함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선교사님 말씀이 동료들은 다 순교 당하고 자기만 남았다고 하시는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우리나라 교민이 많아지면 언젠가 시내에 교회가 세워 질 것을 기도 드렸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로고스가 입항한다는 소식을 듣고 특히 한국인이 승선했기에 교인들과 함께 위로해주러 갔다가 위로를 받고 왔습니다.
감사한 것은 전 세계 어디를 가나 한인들이 중심에서 활동한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1979년 이란의 회교 혁명으로 팔레비 왕이 폐위되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우리 현대 기술자들이 그곳 이란에서 진출해 있다가 ''타그 보트와 밧지 선''에 실려 바레인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갑자기 밀어닥쳐 숙소가 없으므로 교회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임시 숙소로 개방했었습니다.
참으로 눈물겨운 시기였습니다. 땀과 눈물의 뒤범벅 이였죠 갑자기 들이닥친 난민들 해외에 나가면 모두 그랬을 것입니다. 당시 교회의 역할은 매우 컷 습니다. 향수병에 시달리는 이들이 교회에 엎드려 토로했고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어 정상 근무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난폭한 사람이 난동을 부리는데 알고 보니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국에서 부인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는 것입니다.
안전관이 교회의 도움을 요청했고 우리는 그를 안정시켜 본국과 연락을 취하며 양쪽이 신앙생활을 하도록 권했고 모두 안정을 찾은 것입니다.
둘째, 이락크 에서
시간이 흐르고 1979년 10.26 이때 애석하게도 박정희 대통령께서 시해를 당했고 우리는 한때 전쟁에 대비해 귀국을 준비하기도 했었습니다. 이 무렵 저는 이락크로 발령을 받고 애도의 검은 리본을 단 채 바그다드로 날아갔습니다. 페르샤만을 거쳐 유프라데스 강을 한참 거슬러 올라 간 유서 깊은 바그다드, 어려서 읽은 ‘천일야화’의 열려라 참깨 40인의 도적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곳은 낭만의 도시가 아닌 후세인을 우상처럼 여기는 이슬람 사회주의 국가였습니다. 우리나라와 수교도 안 된 그런 나라에 순수 민간회사 우리의 현대가 진출한 것입니다. 그곳에는 북한대사관이 있었기에 영사로부터 단단히 교육을 받고 최대한의 경계를 했습니다.
하지만 팩스가 연결되지 않아 바그다드 현대 사무소는 저의 송출 소식을 몰랐고, 저는 바그다드 공항에서 회사 직원이 데리러 오기를 꼬박 24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혹시 공항 경비대가 나를 수상히 여기고 북한 대사관에 너희 나라 사람이 있으니 데려가라면 어떻게 하나 큰 걱정이 되었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내 나중에 송출소식을 접한 현대 직원이 황급히 달려 나왔습니다. 목을 빼고 기다리던 저는 ''현대 자동차''에 ''현대 마크''를 부착한 동포를 보며 크게 기뻐하고 안도했습니다. 저 역시 ''현대 옷''에 ''현대 마크''를 달았기에 동료들은 즉각 알아보고 얼싸안았습니다. 저는 현대 사무소의 동료 품에서 오랜만에 평안하고 깊은 단잠에 골아 떨어졌습니다.
바그다드에서 다시 허호 소장님이 이끄는 바스라로 날아갔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서울은 바그다드요 부산은 바스라입니다. 유프라테스 티크리스 강이 페르샤만에 유입되는 항구도시 바스라 그곳은 석유 매장량이 엄청나고 최대의 정유소가 있으며 오일을 수출하는 기지입니다. 이곳에서 현대는 방대한 ''바스라 하수처리장''을 건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현대 바스라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관리과 소속으로 에어컨디션 샵을 혼자 이끌어 갔으며 베이스캠프에서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교회대표로 틈나는 대로 병원에 입원한 동포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매몰사고로 거의 죽게 된 ''동료''는 제 눈에는 영락없이 피와 땀 흘리는 ''전투중의 전우''였습니다. 시간을 쪼개서 죽을 쒀서 갖다 먹이고 함께 예배를 드리며 쾌유를 위해 주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그때 허호 소장님의 사모님 박정희 집사님과 어린 훈이가 바스라에 살러 왔고 박 집사님의 헌신의 땀방울에 교회가 갑자기 밝아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위로 받고 많은 이들이 교회에 나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날에 헌신들을 기억하시고 상급을 후히 주실 것입니다.
포크레인 삽을 머리에 맞고 영안실에 가있는 안타까운 우리의 전우들 마지막 알미늄 관에 담아 KAL 편으로 고국으로 보낼 때 우리는 두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울었습니다.
한번은 목수로 일하시는 분이 실족해서 다리를 다쳤습니다. 귀국을 해야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사연인즉 딸이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지금 귀국하면 무엇으로 혼수를 준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눈물지으며 안타깝게 매달리며 애원하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의 애련한 청원이 받아들여져 본부 막사의 화장실 청소가 주어졌습니다.
그때 저는 일평생 잊을 수 없는 감격적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분이 다친 다리를 이끌고 어떻게 일하나 가보았더니, 절둑 이면서 일하는데 사기로 만든 변기통을 끌어안고 땀을 뻘뻘 흘리며 딱는 데, ''변기 통''이 번쩍번쩍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깨끗이 할 수 있어요" 했더니 "이건 내 밥그릇입니다."하고 환하게 웃는 것이었습니다. 파리는 자취를 감추고 정말 밥을 먹어도 괜찮을 만큼 청결하게 만들었습니다. 딸의 혼수를 그렇게 준비했던 아버지,
사랑하는 대한의 딸들이여! 아버지 세대는 그렇게 땀을 쏟고 흘렸답니다.
시간이 흐른 후 저는 회사에서 휴가를 얻어 성경에서 나오는 메소포다미아의 유적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란 국경 쪽으로는 검문검색이 상엄 했습니다. 남쪽에 위치한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 ''지구랏'' 에덴동산이라는 ''엘리두'' 중부에 위치한 ''바벨론 성'' ''바벨탑'' 바그다드를 돌아보는데 검문이 더 심했는데 전운이 감도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다시 남부 바스라로 귀환했습니다. 이른 새벽에 아직 동이 트지 않은 도로를 바라보니 탱크들이 끝도 없이 이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스라 시내는 곧 전쟁이 날 것이라고 술렁거렸고 마침내 이락크가 이란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980년 이라크와 이란 양국 간은 오랫동안 영토분쟁으로, 긴장을 유지하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하여 1988년까지 백만 명이 희생되는 전쟁이었습니다.
바스라 시내는 완전 무장한 전투복 차림의 군인이 넘쳐났고 이란 국경으로 이동하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우리 현대회사 캠프 베이스는 바라크로 꼭 군대가 주둔한 막사 같아서 이란 공군의 폭격 제 1순위였습니다. 회사는 공사를 중단하고 출근을 하지 않은 채, 소개령이 내린 캠프에 머물며 각자의 안전을 지켰습니다. 이동도 멈추고 쿠웨이트로 향한 국경도 폐쇄되었습니다.
저는 곧 교회로 달려갔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정말 힘들게 자랐습니다. 그리고 자유통일 위해서 베트남을 전쟁 치렀고 이제는 이 건설현장에서 또 전쟁을 맞았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현대 건설 직원 전원이 무사히 고국으로 귀환하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합니다.”
교회 안의 인기척이 있어 뒤돌아보니 저 뿐 아니라 모두들 교회로 기도하러 왔던 것입니다. 모두 눈물로 하나님께 우리 모두는 그렇게 안전을 위해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음 날 공중에는 전투기들이 어지럽게 날고 국경선 쪽에서 여기저기 폭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유전이 폭격을 당하고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뒤 덮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후세인이 사용하는 ''독 GAS'' 살포였습니다. 만일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우리는 꼼짝없이 피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후세인은 쿠르드족에게 이 ''독 GAS''를 사용해서 얼마나 많이 희생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란은 물론 이라크 병사까지 타 들어가는 목을 움켜쥐고 방카 밖으로 기어 나와 뒹굴다 죽는 것입니다. 본국에서 정부와 현대회사로부터 긴급타전이 왔고 마침내 철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회사는 많은 장비를 모두 수송부에 집결시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최소한의 개인 짐을 꾸려서 트레일러에 싣고 버스에 분산한 채 쿠웨이트 국경선 근처로 달렸습니다.
어찌하든 이란 공군기로부터 공중 폭격을 피해야 했기에 길을 피해 넓은 사막으로 우회해서 멈추고 달리기를 반복했습니다. 낮에는 엄청난 사막의 더위를 피해 조그마한 천과 박스로 가리 우고 밤은 또 추웠습니다. 저는 참호를 파고 들어가 있었는데 그런 데로 견딜 만 했습니다. 밤에 모든 불빛은 보이지 않게 하고 소등을 했고 거기서도 우리는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의 숨죽인 찬송을 잊을 수 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지나던 그 광야를 그야말로 같이 경험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쿠웨이트 국경선에 도착했는데 그 통과 절차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또 기다렸습니다. 웬만하면 통과 시켜주지 우리는 언제 폭격 당할지 모르는 데 안타까운 가운데 드디어 전원 국경을 통과하였습니다.
거기서 우리 현대직원들이 나와서 우리를 얼싸안으며 수고했다고 모두들 눈물로 격려해 주었습니다. 숙소는 호텔로 이미 준비되었고 우리는 오랜만에 편안함을 누렸습니다. 몇 일후 대한항공 특별기가 왔습니다. 공항에 나가 선명한 태극기와 KAL을 목격하는 순간 목이 메이고 눈물이 또 쏟아졌습니다.
참으로 오 랫 만에 내 나라 비행기를 타고, 내 나라 동포 스튜디어스의 위로를 받으며, 안정 속에서 깊고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김포공항 내 조국 땅의 산하, 그리고 유난히 파란 하늘이 우리를 반겨 맞아주었습니다.
삼년 동안 한 번도 몸을 떠나지 않고 지니고 다녔던 빛바랜 약혼녀의 사진이 이제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아들아!" "오빠!" "어머니" "애들아" 했지만 이게 남자인가 봅니다. 손은 어머니를 잡고 동생을 잡았지만 눈은 약혼녀를 찾아 두리번거렸습니다.
저 만치 약혼녀가 눈에 띄었습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 또한 얼마나 많은 날들을 지새웠겠습니까? 나중에 약혼녀가 한 이야기지만 약혼자의 모습이 외국서 돌아오는데, 때가 꼬질 꼬질 한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나오는 모습이 불쌍 하기도하고 우습기도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래도 빛바랜 양복이라도 입었지만 대부분 동료(전우)들은 전쟁의 피난민답게 슬립퍼에 러닝셔츠 차림이었답니다.
마무리 글.
그렇게 원했던 작은 집은 장만했고 결혼식을 올리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게는 또 다른 인생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못다 한 공부,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공부, ''책가방''이 ''연장가방''이 되었던 그 아픔과 시련의 사연들을 이 시대의 아들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그래서 중동에서 가장 먼저 준비한 것이 ''삼손 나이트 가방''이었습니다.
그로부터 꼭 12년을 공부했습니다. 인천 등용문학원 엄인배 집사님의 수학부터 시작해서, 새벽에 도시락 두개를 싸들고 인천 제물포의 대성학원, 서울노량진의 정진학원 등 ''학력고사 재수''까지 3년, 그리고 85학번으로 대전의 침례신학대학 4년(Th.b), 침례신학대학신학대학원 3년(M.div), 침례신학대학대학원 2년(Th.m). 참으로 긴 세월을 학문에 몰두했습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뒷바라지 한 아내도 그사이 부산에서 대전까지 다니며 침례신학대학 상담심리학과 4년을 마쳤습니다.
훨씬 전 신혼시절 한번은 학력고사를 준비하는데 학원으로 아내가 찾아왔습니다. 자장면을 사준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먹었으니까 나만 먹으면 된다기에 자장면 한 그릇을 앞에 놓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 맛있게 먹는데 거의 다 먹어갈 무렵 아내가 "오늘 무슨 날인 줄 알아?" 자장면을 입에 물고 "몰라" 했더니 "오늘 결혼기념일이야" 힘든 세월에 사실은 자장면 한 그릇으로 결혼기념일을 지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젠 결혼기념일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결혼 일은 ''11월 11일 11시''였는데, 요즈음은 뭐 ''빼빼로 데이''라 해서 그 날 사랑하는 이들이게 고백하며 난리들입니다. 그래서 지난 11월11일 ''칼국수'' 집에 가서 이번에는 당당히 두 그릇을 시켜놓고 마주보고 앉아 참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 아들 부부는 내외가 지금 침례신학대학신학대학원(M.div) 3학년 졸업반입니다. 이 녀석은 초등학교 시절 내내 하는 말이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에, 나 뭐 사 줄 꺼야?" "예 우리 결혼기념일인데 왜 널 사주니" "그래도 나 뭐 사 줄 꺼야?" 이상한 논리의 항변에 우리 부부는 웃고 말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들의 요구도 일리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랑의 열매이자, 분신이자, 삶에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1987년도 공주 ''송문교회''를 첫 목회로 지금은 부산에서 ''비전교회''를 개척하고 작은 교회지만 영혼을 사랑하고 서로 섬기며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저의 작은 소망은 제게 남은 ''눈물과 피와 땀''을 이곳 부산에 흘려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한 세대를 살아온 아버지로서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걸어온 발자취를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럽게 전하니 참으로 기쁩니다.
이 글을 후대에 전하면서 아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아들아, 아버지의 세대를 잊지 말거라, 지금 너희들이 누리는 경제의 풍요는‘눈물과 피와 땀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너 또한 강하고 담대하므로 네 아들에게 더 위대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물려주기를 기대한다.
사랑한다 아들아!”
첫댓글 감동적인 이야기 잘읽었읍니다. 아이들에게 꼭 전해주고싶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