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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히브리서 11장 1~6절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의인에게 요구되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헬라어로 「πίστις피스티스」인데, 이는 ‘확신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πείθω페이쏘」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확신’, ‘성실’이라는 의미입니다. 신약성경 227구절 중 히브리서에서만 29구절에서 30회 사용되었는데, 그중에서도 11장에서만 24회 나타납니다. 대부분 ‘믿음’이라고 번역되었으나, ‘신(信)’(마23:23), ‘도(道)’(행6:7; 24:24), ‘충성’(갈5:22. 딛2:10), ‘신앙’(빌1:27, 히6:1)이라고도 번역되었습니다. ‘바라는 것들’(1절)은 헬라어로 「ἐλπίζω엘피조」인데 이는 ‘기대하다’, ‘바라다’, ‘소망을 두다’라는 동사입니다. ‘실상’(1절)은 헬라어로 「ὑπόστασις휘포스타시스」인데, 이는 히브리서 1장 3절에서 ‘본체’, 히브리서 3장 14절에서 ‘확실한 것’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증거’(1절)는 헬라어로 「ἔλεγχος엘렝코스」인데, 이는 ‘논박하다’, ‘훈계하다’, ‘잘못을 찾아내다’, ‘꾸짖다’, ‘책망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엘렝코’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책망’, ‘확신’, ‘증거’라는 의미이며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믿음은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의 본체이며 보이지 않는 사실들에 대한 증거입니다(1절). ‘선진들이’(2절)는 헬라어로 「πρεσβύτερος프레스뷔테로스」인데, 이는 ‘장로’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곳에서만 나타나며, ‘장로’라고 번역되지 않고 유일하게 ‘선진’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아벨’(히11:4), ‘에녹’(히11:5), ‘노아’(히11:7), ‘아브라함’(히11:8-9,17-19), ‘이삭’(히11:20), ‘야곱’(히11:31), ‘요셉’(히11:22), ‘모세’(히11:24-26), ‘라합’(히11:31),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 외 모든 선지자들(히11:32)과 같이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신앙의 위인들을 ‘장로’라고 칭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증거를 얻다’(2,4절), 또는 ‘증거를 받다’(5절)는 헬라어로 「μαρτυρέω마르튀레오」인데 이는 ‘증거’, ‘증인’, ‘목격자’라는 의미의 명사 「μάρτυς마르튀스」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신약성경 72구절 중 히브리서에서만 7구절에서 8회 사용되었으며, ‘증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장로들’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증거를 받았습니다(2절). 우리 역시 ‘장로들’이 소유한 것과 동일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만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3절上).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비췸을 받지 않고도 모든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3절下), 이는 장로들과 동일한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지어진’(3절)은 헬라어로 「καταρτίζω카타르티조」인데, 이는 ‘완전히 완성하다’, ‘수리하다’, ‘고치다’라는 의미로 신약성경에서 13회 사용되었는데, ‘온전케하다’(마21:16. 눅6:40. 고전1:10. 고후13:11. 살전3:10. 히13:21. 벧전5:10), ‘깁다’(마4:21. 막1:19), ‘바로잡다’(갈6:1), ‘준비하다’(롬9:22), ‘예비하다’(히10:5) 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아나니’(3절)는 헬라어로 ‘마음을 사용하다’, 즉 ‘이해하다’, ‘마음에 두다’, ‘심사숙고하다’, ‘인지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νοέω노에오」인데, 이는 신약에서 14회 사용되었고 히브리서에서는 단 1회 쓰였습니다. 이 단어는 ‘알다’(6회), ‘깨닫다’(6회), ‘생각하다’(2회)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나타난’(3절)은 헬라어로 ‘빛나다’라는 의미의 동사 「φαίνω파이노」인데, 이는 주로 ‘나타나다’, ‘보이다’, ‘보다’, ‘비취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벨’과 ‘에녹’을 들어 그들이 가진 믿음에 관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먼저, ‘아벨’에 관하여 말씀하길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라고 합니다(4절). 가인과 아벨에 관하여는 창세기 4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4장]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농사하는 자’인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양 치는 자’인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만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물에는 열납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구약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가인이 드린 땅의 ‘소산’은 ‘열매’라는 의미의 명사 「פְּרִי페리」가 단수형으로 표기되었고, 아벨이 드린 양의 ‘첫 새끼’는 「בְּכוֹר베코르」의 복수 형인 「בְּכֹרוֹת베코로트」로 표기되었습니다. 히브리서 본문에 표기된 ‘더 나은’(4절)은 헬라어 형용사 「πολύς폴뤼스」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수나 양이 ‘많은’, ‘큰’, ‘허다한’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아벨이 드린 ‘더 나은 제사’는 양의 첫 새끼들을 드린 ‘더 많은 제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는 헬라어 원문에 「ἐπὶ에피 τοῖς토이스 δώροις도로이스 αὐτοῦ아우투 τοῦ투 θεοῦ쎄우」라고 기록되었는데, ‘예물’「δῶρον도론」이 복수형으로 표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예물’은 ‘그의 예물들’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생축의 제사를 드릴 때에 아낌없이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예물들을 열납하심으로 그의 의로움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아벨이 가인보다 더 많은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반면, 가인은 땅의 소산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기에는 인색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제물을 열납치 아니하신 것입니다(창4:5上). 가인은 ‘믿음’이 없음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아까워했는데, 이는 하나님께 ‘선을 행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창4:7上). 그는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려고 하기보다는 질투심으로 분노가 끓어올랐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지만(창4:7), 급기야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죄를 다스리지 못한 결과 죄의 노예가 되어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믿음’때문에 죽임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믿음’으로써 산 자처럼 이 모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4절). 비근한 예로서, 열왕기하 5장에 기록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의 탐심(왕하5:20-27)과 사도행전 5장에 기록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 관한 사건도 이와 같습니다(행5:1-11). 모두 ‘가인의 길’(유11)을 따라가다가 무서운 심판을 받은 결과입니다. 다음으로, 에녹에 관하여 말씀하길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라고 합니다(5절). 에녹에 관해서는 창세기 5장에 아주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5장] 18 야렛은 일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0 그가 구백육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이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야렛’은 162세였습니다. 이때 그의 할아버지 ‘마할랄렐’(227세), 증조할아버지 ‘게난’(297세), 고조할아버지 ‘에노스’(387세), 현조할아버지 셋(492세), 그리고 최초의 인류 시조인 아담(622세)까지 모두가 현존해있었습니다. ‘아담’이 죽을 때 에녹의 나이 308세 였으며, 그로부터 57년 후에 셋(857세), 에노스(752세), 게난(662세), 마할랄렐(592세), 아버지 야렛(527세)이 보고있는 가운데 에녹이 365세를 향수하고 데려가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기 때문에 그가 더 이상 세상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본문의 옮기웠으니’(5절), ‘옮기심으로’(5절)는 헬라어로 「μετατίθημι메타티쎄미」인데, 이는 ‘자리를 뒤바꾸다’라는 의미의 동사로서 히브리서 7장 12절에서는 ‘변역한즉’이라고 사용된 단어입니다. ‘옮기우기’(5절)는 헬라어로 「μετάθεσις메타쎄시스」인데 이는 ‘메타티쎄미’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옮김’, ‘위치전환’이라는 의미이며 히브리서 7장 12절에서는 ‘변역’, 히브리서 12장 27절에서는 ‘변동될 것’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에녹은 인류 역사상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움을 받은 두 사람 중(다른 한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던 시간 약 100년(참고 창12:4; 25:7)이었습니다. 에녹은 아브라함보다 3배나 많은 기간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300년동안(창5:22) 그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여(창5:22,24上), 옮김을 받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5절下). ‘기쁘시게 하다’(5,6절)는 헬라어로 「εὐαρεστέω유아레스테오」인데, 이는 ‘완전히 일치하여 만족시키다’ 그리하여 ‘매우 즐겁게 하다, 매우 기쁘게 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히브리서에서만 3회 사용되었습니다(히11:5,6; 13:16). 어의적(語義的)인 면으로 살펴본다면, 에녹이 무려 ‘300년’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여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았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5절上). 오늘날 우리에게도 에녹과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에녹과 같은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6절上). 그 ‘믿음’은 첫째,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6절中). ‘그가 계신다’(6절)는 헬라어 원문에 ‘이다’, ‘있다’, ‘존재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εἰμί에이미」의 3인칭 단수 현재형 「ἔστιν에스틴」이라고 표기되었습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 현재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며’(계1:4,8; 4:8), ‘시방도 계시는’(계11:7; 16:5) 분입니다. 에녹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6절下). ‘찾는’(6절)은 헬라어 원문에 ‘조사하다’, ‘수색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ἐκζητέω엨제테오」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히브리서 12장 17절에서 에서가 눈물을 흘리면서 ‘구한’ 행위에도 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서 선지자들이 구원에 대하여 부지런히 살피고 ‘연구한’ 행위에도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찾아서 없으면 말고’ 식의 단순한 찾음이 아니라, 간절히 구하고 연구함으로써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잠언에 이르기를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下)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상을 주실 것입니다. ‘에녹’은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동행했음을 짐작케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비단 ‘에녹’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된 ‘아벨’도 소유했던 ‘믿음’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 많은 ‘선진들’이 가졌던 ‘믿음’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도 동일하게 간직해야 할 ‘믿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댓글 안녕하세요~오랜만에 들어왔습니다~^^
잘 이해하지 못했던 가인과 아벨(믿음으로 아벨은)부분을 잘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주님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