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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현정은짱 원문보기 글쓴이: 돌맹이의 꿈
지난 여름 이장 집으로 신문을 보러 간 그는 옥선 아버지가 평양에 갔다
가 오는 길에 뭔가를 싸온 평양 지방지 신문에서 모란 부기학원 광고를 본
적이 있었다. 부기학원 속성과 6개월을 수료하면 학원이 책임 지고 취직을
알선한다는 내용의 광고였다.
그대도 옥선이는 다 떨어진 신문에서 뭘 그렇게 열심히 읽고 있느냐고 하
면서 같이 그 광고를 들여다보았다.
주영은 기차를 타고 가면서도 그 일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이번에도
옥선이가 그 얘기를 아버지한테 이르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그
는 자신이 가고 있는 곳이 평양이 아닌 서울이었기 때문에 다소 마음은 놓
였다. 평양에 있는 그런 부기학원이 서울에는 없으랴 해서 그는 서울행을
결심한 것이었다.
기차는 신고산 역을 향하고 있었다.
(6개월! 그동안 학비랑 하숙비랑 얼마나 들까........)
그는 아직 책보에 싸서 아랫배에 차고 있는 소 판 돈이 확실히 얼마인지
몰랐다. 그 돈을 세어 볼 장소도 없었고 그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어쨌든 6개월 후에는 아무 회사에든 회계원으로 취직될 것이다. 회계원
이면 아무리 월급을 적게 받아도 30원은 받을 게다. 30원이면 1년에 3백 60
원.....한달에 10원짜리 하숙을 한다고 해도 1년이면 2백40원이 남는다. 2
백40원이면 쌀이 스물 네 가마가 아닌가, 쌀이 스물 네 가마라.......)
1년 내내 온 집안 식구가 몽땅 논밭뙈기에 매달려도 쌀로 치면 열 가마의
수확도 어림없는 그네 집 농사였다. 특히 아산리에는 논이 적고 밭이 많았
기 때문에 밭곡이 흔했는데, 흔한 밭곡이라고는 하지만 그 밭곡으로도 그네
집은 제철 양도를 대 먹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주영은 열심히 부기공부를 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한 다음 적어도 1년 안
에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소 판 돈까지 훔쳐 내온 이 불효를 만회하리라 결
심하면서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는 수소문해서 먼저 덕수궁 옆에 있는 대경 부기전수학원을 찾아갔다.
다행히 속성과를 개강한 지가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다가 마침 빈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즉석에서 입학할 수가 있었다.
입학금 5원, 한달 수업료 5원에 교재대 2원, 도합 12원을 내고 책과 학원
안내서 등의 유인물을 받아 든 그는 그날부터 먹고 잘 하숙을 구해 나섰다.
처음부터 그는 무학재 쪽 변두리로 싸구려 하숙을 구해 나섰다. 아무리
싼 하숙도 아침 저녁 두 끼 먹고 두 사람이 한방을 같이 쓰는데 12원 내지
15원은 주어야 했다.
그는 12원짜리 하숙에 들었다. 요행히 빈방이 하나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
지 다른 하숙생이 들어오면 같이 방을 쓰기로 한다는 조건으로 우선은 독방
에 들 수 있었다.
그날 밤, 주영은 비로소 훔쳐 가지고 온 소 판 돈을 마음 놓고 세어 보았
다.
돈을 세어 보고 난 그는 믿어지지 않았다. 소 판 돈 치고는 너무나 적은
돈이었다. 채 백50원이 못 됐다. 적어도 그만한 황소 두 마리를 팔았으면
아무리 못 받았어도 2백 50원은 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가 훔쳐낸 돈은 이미 동네 뒷산의 산다랑지 서
너 마지기를 사기로 하고 계약금 일부를 지불하고 잔금조로 남겨 놓은 돈이
었던 것이다.
(한달 수업료가 5원, 교통비는 걸어서 다닌다 하더라도 하루 점심값 5전,
한달이면 1원 50전.......하숙비 12원. 겨울을 지내려면 옷도 한 벌 사 입
어야 한다. 고무신은 내일이라도 당장 사 신어야 할 판이다. 책가방은 차차
형편 봐 가면서 준비하고 우선은 책보에 싸 가지고 다니자.........)
아무리 절약하는 방향으로 따져 보아도 한달 기본 지출이 20원이나 되고
보니 백50원을 가지고 6개월을 견뎌 낸다는 것이 빡빡할 것 같았다. 좌우간
허리띠를 바짝 졸라메고 형편에 맞추거 지내기로 결심한 그는 부기책이며
학원 안내서 같은 것을 뒤적이다가 꼬박 날밤을 새웠다.
밥 먹고 들어 앉아서 공부만 하라고 하면 그는 언제고 일등할 자신이 있
었다. 그는 보통학교 때도 그 바쁜 농사일을 다 거들면서도 내내 일이등을
다투다가 6학년을 졸업할 때는 당당하게 수석으로 졸업했었다.
그래서 학교 선생님들이나 동네 이장 같은 이는 하나같이 주영이처럼 머
리 좋은 아이는 어떻게 해서라도 높은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들 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숫제 귀담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주영 자신도 높은 학교는 언
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었다.
그는 여섯살 때부터 열살까지 서당에 다니면서 소학에서 논어. 맹자까지
뗐다. 그쯤 공부시켰으면 글눈은 떴으니까 그냥 농사나 짓게 하면 그만이
다.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는 신학문을 해야 일본 글을 배워 가지고 제 앞가
림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가세를 무릅쓰고 보통학교까지 졸업시킨 것이기 때
문에, 더 잘 살면서도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 다른 부모들을 생각하
면 주영으로서는 그나마 감지덕지해야 할 형편이었다.
학원에서는 개강한 지 사흘밖에 안 됐는데도 속성과였기 때문에 이미 부
기책에 있는 부기의 기본원리에 속하는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라든가 거
래. 계정. 장부. 시산표와 정산표. 결산 등의 이론 강의가 끝나고 나흘째부
터는 경리 실무에 속하는 계정과목 강의가 시작되었다.
주영은 그날 배운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날로 머리 속에 집어 넣어서
내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미처 배우지 못한 부기의 기본원리도 책에 있는대
로 깡그리 외워 버렸다. 계정 과목에 대한 강의도 불과 열흘 동안에 끝내고
보름께는 장부 조직상의 분개장 분할방법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하루 네 시간이라는 수업시간에 비해서 진도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한 주
영은 어느날 학원 당국에다 내놓고, 아무리 속성과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개
머루 먹듯 가르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했다. 그랬더니 학원측 말이, 이
론은 한달 안에 대충 끝내고 나머지 5개월 동안에 실습을 쌓게 해서 부기
전과정을 이수할 무렵에는 직장을 알선해 주어야 하므로 강의를 속성으로
진행하는 것이니 그렇게 알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것이었다.
학원측의 그 말은 곧 공부만 잘하면 취직을 시켜 줄 테니 걱정 말라는 말
과 같았다. 공부만 잘하면 직장이 보장된다고 생각하니 그는 신이 났다. 그
는 밥을 먹으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무리 공부하는 일이 힘들
고 고되다 해도 오뉴월 뙤약볕에서 논밭의 김을 매는 일보다는 편했고 눈구
덩이 속에서 딩글며 나무를 해서 져 나르는 일보다는 편했다. 그는 일등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등을 해야만 남보다 좋은 직장에 그것도 제일 먼
저 취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는 공부였으므로 공부에
재미가 들려서 밤에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난 주영은 얼른 나가서 세수를 하고 들어와서 예습
을 하고 아침밥을 뚝딱 먹어 치우고는 부리나케 부기학원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전날에 배운 것을 복습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침 일찍 학원으로
달려가서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선생님을 잡고 물어보곤 했었다. 오늘도 어
제 배운 것 중에 확실하게 모르는 것이 두어 군데 있었다.
서대문통을 지나서 재판소 앞을 지나 덕수궁 담 모퉁이를 돌아서던 주영
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어 붙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아버지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던 것이다.
주영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주영아........"
아버지 목소리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주영은 어쩌면 좋을지 몰랐다.
그냥 엉엉 울어 버렸으면 속이 시원할 것만 같았다.
"아버지, 어떻게 또 찾아 오셨어요?"
"한길에서 이럴 게 아니다. 네가 먹구 자는 데가 어딘지 그리로 가자."
"전 지금 공부하러 가는 길이란 말예요, 아버지."
"공부? 누가 너더러 공부하랬어, 이놈아?"
"아버지........"
주영은 몹시 안타까왔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아버지와 함께 현저동 하숙
집으로 되돌아 갔다.
아버지는 그가 염려했던 그대로, 이장 딸 옥선이의 말을 듣고 평양에 있
는 부기학원을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서울에도 부기학원이 있으니 거기 가
서 알아 보라는 말을 듣고 어젯밤 밤차로 평양을 떠나 오늘 아침 서울역에
도착한 것이었다.
"돈은 얼마나 남았니?"
"서울 올라오는 노자하고 학원비 낸 것하고 한달치 하숙비 낸 것 말고는
고스란히 은행에 예금해 놨어요."
"그럼 됐다. 내 아뭇소리 않을 테니 당장 그 돈 찾아 갖고 내려 가자."
"아버지! 제가 여태까지 말씀드렸잖아요, 예?"
"이놈아, 너는 맏아들이야. 너는 네 맘대로 살 수 없는 거야. 이 애비 어
미를 생각하고 네 동생들을 생각해야지 응?"
"제가 서울에 있는다고 왜 맏아들 노릇 안 한대요, 아버지? 서울에서 돈
벌어 가지고 더 훌륭한 맏아들 노릇 할께요. 아버지 예?"
"이놈아, 네가 서울에서 무슨 재주로 돈을 벌어? 아, 서울이 어떤 덴지
아냐? 눈 감으면 코 베 먹는 데가 서울이야."
"제 코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하는 말이 나올려고 하는 것을 주영은 꾹 참았다. 그리고 그는 별의 별 사
정을 다하면서 죽어도 안 가겠다고 버텼다.
그러자 나중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잡고 통사정을 하면서 울었다.
"주영아 이놈아, 맏아들인 네가.....나는 너 하날 믿고 있었는데 네가 끝
내 정신 못 차리고 이러다간 이제 우리 집안에 떼거지 난다 떼거지
나......주영아, 너 어쩔려고 이러니 응? 주영아......."
아버지가 집안에 떼거지가 난다고 하면서 우는 데는 그로서도 더 이상 어
쩌는 수 없었다. 1년 3백 60원 벌이의 푸른 꿈은 산산이 깨어져서 허공에
흩어졌다.
주영은 그날 오후 아버지와 함께 은행으로 가서 예금했던 돈을 도로 찾아
가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하숙집을 나온 뒤로는 부자간에 말 한 마디 오고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안 가겠다고 하던 아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 마음에 언짢았던지,
"주영아, 너 서울 구경했냐?"
하고 말 머리를 꺼냈다.
"안 했어요."
"아무데두?"
"예!"
"창경원 동물원에도?"
"예."
"그렇거든 우리 창경원의 동물원 구경이나 하고 밤차로 내려가자. 이제
가면 우리 같은 촌사람이 뭔 일로 또 서울에 올라올 일이 있겠냐?"
그래서 부자는 발길을 창경원 쪽으로 돌려 세웠다.
창경원 입장료는 대인 10전 소인 5전이었다.
"자, 얼른 들어가서 구경하고 나오자."
"표를 사야죠."
"표를 사다니. 짐승 구경하는 데도 돈 받냐?"
"그럼요."
"그래 얼마냐?"
"어른은 10전이고 애들은 5전이에요."
"옛다!"
아버지는 5전짜리 동전 한닢을 선뜻 내놓았다.
"이거 뭐 하라구요?"
"넌 아직 애들이잖아. 너나 구경하고 나오너라. 나는 호랑이도 보고, 시
골에서 볼 만한 짐승은 다 봤으니까."
주영은 10전이 아까와서 창경원 문 앞에까지 왔다가 그저 돌아가겠다는
아버지가 측은하도록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에라. 아버지를 위해서 살자. 이렇게까지 순박하고 불쌍하신 아버지 마
음을 아프게 하고 내가 돈은 벌어 무엇 하나.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아버
지 자시는 대로 같이 먹으면서 죽으나 사나 부지런히 일해서 동생들 세간이
나 내주고 하는 것이 바로 맏아들인 내가 할 짓 아니냐.)
그렇게 체념한 주영은 동물원 구경도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라서 또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후로 그는 다시는 도망갈 궁리를 하지 않고 농사 일
에만 열중했다.
그랬는데 그 이듬해, 주영의 나이 열아홉살 때였다. 흉년이 들었다. 그가
철 든 이후로 처음 겪는 대흉년이었다. 가을 추수는 했지만 거둬 들인 알
곡이 없었다. 농사철에 그토록 가물었던 것이다. 그해 겨울로 받아 놓았던
네재 삼촌의 혼인 날도 내년으로 물렸다.
주영네는 세끼 밥 먹기도 어려웠다. 조반석죽은 옛말이고 아침에도 죽,
저녁에도 죽이었다. 보릿고개가 닥치면서 동네 사람들은 산나물로 연명해
갔다. 굶기를 밥 먹듯 해온 동네 사람들 얼굴은 이미 누렇게 붓고 떠 있었
다. 부황병이라는 것이었다.
정 주영은 다시 아산리 마을에서 20리쯤 들어간 안골이라는 산골에 사는
오 인보와 함게 서울로 올라왔다. 오 인보는 정 주영보다 나이는 세살이나
위였지만 보통학교는 동기동창이었고, 그네 집 가세는 정 주영네보다 훨씬
잘 사는 편이었다.
서울역에 내린 정 주영과 오 인보는 서로 헤어지기로 했다. 어차피 아무
데나 가서 닥치는 대로 막일을 할 판인데, 둘이서 같이 있으면 서로 불편할
테니 차라리 안 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길로 정 주영은 인천으로 내려갔다. 부두에서 할 수 있는 노동 일은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해냈다. 그러다가 이왕에 막일을 할 바에는 서울이
좀 낫지 않을까 싶어서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그는 오류동에서 농사 품팔이도 했었다.
서울에 올라오니 마침 안암동에서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신축공사가 벌어
지고 있었다. 막 기초공사를 끝내고 벽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정 주영은
공사장 한바에서 먹고 자며 돌을 져 날랐다.
그렇게 뼈 빠지는 중노동이었지만 하루 노임은 1원, 열흘을 일해야만 쌀
한 말 값을 벌 수 있었다. 그나마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다.
정 주영은 비 오는 날이면 좀더 나은 일자리는 없을까 해서 거리를 헤매
고 다녔다. 두어달 후의 어느 비 오는 날, 삼각지를 걸어가던 정 주영은<견
습공 모집>이라고 써 붙인 종이가 비바람에 젖어 펄럭거리고 있는 것을 보
았다.
견습공 모집 광고를 보고 그가 찾아간 곳은 석유시설을 제작하는 철공소
였다. 그는 일공 50전을 받기로 하고 그렇게도 목마르게 바라던 취직을 했
다.
일공 50전이면 공사판 일공 1원의 절반이었지만 철공소에서 일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잇점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요일을
빼놓고는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잇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주어진 일은 파이프를 묶어 내는 것이었다. 한 달이 가도 두 달이
가도 그 일밖에는 시키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때가 되면 기술을 익힐 수
있는 일을 시키겠거니 하며 묵묵히 참고 주어진 일에 열성을 다했다. 그렇
게 일년이 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비로소 이 철공장은 내가 몸 담고 일할
만한 곳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