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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연구/인터뷰] 췌장암에 걸린 낚시인 宋祐씨의 죽음 준비 全과정 공개
『못 살았지만 잘 죽고 싶다』
김순자
●췌장암 선고를 받은 즉시 그는 인터넷을 뒤져 자신의 생존 時限을 확인하고 신변정리를 시작했다.
他人의 자서전을 대필해 온 그는 가족·친구에게 자신의 운명을 공개하고 치열한 투병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자서전·유언·碑文도 쓰고 있다.
한국 견지낚시의 大家인 宋祐씨는 지금 여유롭고 담담한 모습이지만 末期의 고통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죽음을 直視하기로 한 이 50代 남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하는 데 동의했다
무기력감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동시에 죽어간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곧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는 동안 우리는 죽음을 잊고 산다. 때때로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 맞닥뜨릴 때가 있지만 그것도 순간일 뿐, 대개의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명제는 곧 잊게 마련이다.
3개월 전까지만 해도 宋祐(송우·58·史草출판사 대표)씨도 그랬다. 아직 50代인 그는 죽음이 그렇게 가까이 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다. 그는 건강하고, 취미인 낚시를 즐기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아내와 함께 산책을 하는, 두 아들을 둔 평범한 家長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는 평범하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그 실체를 선명히 드러낸 죽음의 계곡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고 있다. 매일매일이 地上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나날들을 보내는,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宋씨는 평소 감기를 앓은 적이 별로 없을 정도로 건강했다. 6년 동안 당뇨로 병원을 다니긴 했지만,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면서 정기적으로 주치의(서울중앙병원 가정의학과 김영식 박사)의 상담을 받았으므로 심각한 건 아니었다. 점심 식사 후 30분 정도 걷고, 하루 두 시간씩 한강에서 견지낚시를 즐기고, 저녁에는 아내(鄭明子·49)와 함께 동네 산책을 하는 등 건강 관리를 해온 그였다. 견지낚시는 에너지 소비가 많아 웬만한 체력으로는 하기 힘든 것이다. 宋씨는 그만큼 건강했다.
그런데 갑자기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 3월경 이유 없이 무기력감이 몰려왔다. 언제나 정열적으로 일을 하기 좋아하는 그로서는 그런 무기력감이 견딜 수 없었다.
宋씨는 즉시 병원을 찾았다.
『모든 현대 의학 장비를 다 동원해 검사를 했습니다. 내시경, CT촬영, 세포조직검사 등 안 해본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상이 없다고 하더군요』
이상한 징후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5월이 되자 아내와 저녁 산책 하는 것이 힘들 정도가 되었고, 6월에는 몸무게가 2~3㎏ 줄었다. 宋씨는 당시 낚시 관련 화보를 촬영 중이었다. 전에는 하루 종일 낚시를 해도 끄떡없었는데, 30분 정도 하고 나니 힘이 들어 할 수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평생 낚시를 했지만 힘들어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그였다.
나중에는 속이 쓰리고 아파왔다. 주치의와 상의하자, 정밀검사를 더 해보자고 했다. 정밀검사 결과 십이지장궤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다행이다 싶었다. 잔탁, 겔포스 등 궤양치료제를 먹자 속쓰림은 가라앉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허리 뒤쪽이 쑤셨다. 병원에서는 근육이 뭉친 것이니 파스를 바르라고 했다.
7월이 되자 입맛이 뚝 떨어졌다. 몸무게가 하루에 500g에서 1㎏씩 줄기 시작했다. 열흘 만에 8㎏이 줄었다. 단신에 68㎏이었던 다부진 몸은 60㎏의 마른 체격이 되었다.
아내의 걱정은 늘어만 갔다.
『뭔가 좋지 않은 병이 걸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병원에 빨리 가보라고 성화를 했지요』
宋씨는 다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다.
7월14일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들어 함께 가자는 아내를 만류하고 혼자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췌장의 머리 부분에 1.5㎝ 가량의 물혹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물혹이라는 의사의 말에 宋씨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보다는 7월28일부터 8월10일까지 하와이에서 열리는 국제 빌피쉬 토너먼트에 참가할 수 있을지가 더 문제였다. 그는 견지낚시의 代父(대부)로 불릴 만큼 낚시에 관한 한 전문가였다. 「견지낚시」 「고기를 낚으러 태평양에 가다」 등 낚시 이론서를 펴내기도 했던 그는 MBC TV와 3년 계획으로 태평양 탐사 특집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던 중이었다. 하와이 낚시대회도 그 일환으로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출발 예정일이 열흘 남짓 남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宋씨는 8월20일에는 메아리 산악회 산악인들과 백두산에 가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서 낚시하는 모습을 촬영하기로 되어 있었다. 11월에는 멕시코에 가서 대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고기인 세일 피쉬(돗새치) 낚시 모습을 촬영해 MBC-TV에 방영할 계획이었다.
『8월20일과 11월 계획은 포기할 수 있어도 하와이 낚시대회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어요. 방송사에서 이미 1억원이나 되는 예산을 들여 준비를 해놓았기 때문에 제 개인 문제로 차질을 빚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지요』
췌장암 진단
宋씨는 의사에게 하와이 대회에 참가해도 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사에게서 돌아오는 말은 단 두 마디였다.
『서둘러 입원하십시오. 체력이 남지 않았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병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물혹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의례적인 말이었다. 암이라는 것은 직접 확인하기 전에 그것을 암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단지 물혹이라고 할 뿐이었다. 말하자면 宋씨는 췌장암이었다.
그 사실을 인식한 순간 宋씨는 담담했다. 췌장암이라는 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 대학 선배인 鄭東星(정동성)씨도 바로 췌장암으로 幽命(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鄭東星씨의 죽음은 그에게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그때의 충격으로 宋씨는 정작 자신이 췌장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담담했다고 고백한다.
鄭東星씨는 4選 의원에다 체육부 장관을 지낸 사람으로 1998년에 회갑을 맞았다. 宋씨는 25년간 자서전과 회고록을 대필해 출간해 주는 史草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던 터라, 鄭東星씨에게 자서전 출판을 권고했다. 그때 鄭東星씨는 고희 때나 하자며 고사했다. 1999년 宋씨는 鄭東星씨에게 다시 권고해 결국 집필에 들어갔다.
그 일로 宋씨와 鄭東星씨는 1월에서 5월까지 매일 만나면서, 일이 마무리될 즈음인 5월 마지막 주 일요일 낚시 가기로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갑자기 취소되었고, 그후로 鄭東星씨는 연락이 없었다. 연락이 두절된 채 鄭東星씨의 책은 출간되었다. 그리고 7월 말, 宋씨는 鄭東星씨의 비서실에서 급히 오라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다. 비서관이 신문지 뭉치 하나를 건네며 어딘지 전화를 걸더니 바꾸어 주었다. 鄭씨였다.
『내가 좀 아프네. 그동안 수고했어. 잘 있게』
몸무게가 90㎏이 넘는 鄭씨의 목소리는 땅 속으로 기어드는 것 같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鄭씨는 8월5일 세상을 떠났다. 신문지에 싼 것은 돈 300만원으로, 그것이 이별의 전금이라는 것을 鄭씨가 떠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鄭씨는 6월에 췌장암인 것을 알고, 두 달 만에 세상을 뜬 것이었다.
『선배는 발병한 후 미국으로 갔는데, 우리나라의 치료법대로 한다면 7월19일이 사망 예정일이라고 했답니다. 그때 저는 췌장암이라는 것이 돈과 권력, 그 어떤 힘으로도 고칠 수 없는 무서운 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췌장암은 걸리면 속수무책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런 병에 걸렸으니 숙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췌장암에 걸린 또다른 선배 얼굴도 떠올랐다. 그는 술·담배도 하지 않고, 持病(지병)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올 1월에 발병해 3월에 세상을 뜬 것이다.
병원을 나서는데 머리 속은 하얗게 표백된 듯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단지 鄭東星씨가 죽은 병으로 자신도 가겠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인터넷으로 췌장암 자료 검색
차를 몰고 곧장 사무실로 향했다. 아내가 초조하게 기다릴 터였지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니 연락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宋씨는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췌장암에 관한 자료를 검색했다. 미국, 일본, 우리나라의 저명한 의사들의 논문에서부터 간단한 상식까지 30~40장 분량의 자료를 프린트해서 읽어나갔다.
<췌장은 이자라고도 하는 한 뼘 정도 크기의 장기로 간, 위, 작은창자, 쓸개에 둘러싸여 있으며 혈당을 조절하고 소화효소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암이 발생해도 조기 진단이 어렵다. 췌장암은 일단 증상이 생겨 진단을 하게 되면 거의 모두가 주위 임파선이나 간, 혈관, 신경 등을 침습해 2~3개월 정도밖에 살 수 없는 무서운 암이다. 비교적 드문 질병으로 발병확률이 50만명에 한 명 정도가 걸린다. 원인은 아직까지 알려진 것이 없다.
증상이 서서히 나타나며, 식욕감퇴, 상복부 통증, 황달, 체중감소, 오심 및 허약해지기 쉬우며, 특히 이유 없는 체중감소는 가장 흔한 증상이다. 상복부 통증이 오면 흔히 위염 때문인 줄 알고 있다가 손을 쓸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위장약을 먹어도 좋아지지 않으면 췌장질환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35세에서 70세 사이에 주로 발생하며, 평균 발생 나이는 55세이다. 상복부 및 등에 통증이 오는데, 몸을 앞으로 숙이면 줄어드는 특징이 있다.
간, 위, 십이지장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췌두(췌장의 머리 부분)이고, 늘어져 있는 것은 췌미(췌장의 꼬리 부분)인데, 암이 췌두에 있으면 황달이 서서히 진전되고, 심하면 소양증을 동반한다. 췌장 자체 부위나 췌미에 있는 암은 비정맥 폐쇄, 위 및 食道의 정맥류, 소화기관 출혈 등을 나타낼 수 있다. 특히 췌두 부분의 암은 잘 발견되지 않고, 혹 발견된다고 해도 죽기 직전이기 일쑤이다. 통증과 체중감소 등 증세가 나타나면 이미 전신 전이가 일어난 후라 치유율은 더욱 낮다. 미국에서는 다섯 번째 암 사망 원인으로 꼽힌다. 늦게 발견되기 때문에 수술 등 국소 절제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고, 근치 적출 수술을 한 경우에도 약 10% 정도만 5년 생존율을 보인다>
宋씨가 인터넷에서 검색한 자료를 읽어나가면서 얻은 결론은 췌장암에 걸리면 3개월에서 6개월內에 다 죽고, 수술을 할 경우에는 12개월에서 18개월 정도 사는데, 그중 4~25%만이 4~5년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살아갈 날이 2~3개월』
자료를 다 읽고 난 宋씨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내가 앞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은 최소 2~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판단했습니다. 鄭東星 선배가 두 달 만에 사망한 것만 보아도 그 정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물론 희망은 크게 가질수록 좋은 것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최소한 생활주의자입니다. 무엇이든 적게 바라고 적게 일하자는 게 제 평소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살아갈 날이 2~3개월이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더 살아도 4~5개월이겠지요』
이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宋씨는 문득 가족이 떠올랐다. 宋씨의 표현을 빌자면 「100원짜리 볼펜」에 宋씨 네 식구의 생계가 달려 있었다. 정치를 하겠다고 국회의원 비서관 생활을 했을 때는 고정적인 월급이 나오니까 그런 대로 살 만했다. 하지만 1975년 집필실을 내고부터는 가난은 언제나 아내의 몫이었다. 두 아들들은 아직 결혼도 시키지 않은 상태였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아쉬움이 많았다.
그런 아내와 두 아들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알릴까? 이것이 宋씨에게 당면한 첫 번째 과제였다. 문득 시계를 보니 오후 6시였다. 병원에서 돌아온 지 서너 시간이 흐른 뒤였다.
宋씨는 우선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상황을 알릴 작정이었다.
宋씨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하는 순간은 정말 세상에서 처음 경험해 보는 감정이었습니다. 충격을 전해야 하는 전화였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이 착잡하더군요』
전화기 저편의 아내는 이미 짐작한 듯했다. 평소 외식하자는 말 한마디 없는 남편이 전화를 했으니 뭔가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눈치챌 만도 했다. 두 아들에게도 전화했다. 큰아들은 약속이 있어 못 온다고 했다. 宋씨는 그때 「세상 떠난다는 이야기 전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충남 홍성고 동기인 친구 김용해씨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약속이 있냐고 묻고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했다. 평소와 다른 宋씨의 목소리를 들은 친구는 갑작스런 전화에도 두말 않고 나왔다.
음식점에서 불고기를 시켜놓고 아내와 작은아들, 친구와 마주앉은 宋씨는 고기는 물론 밥을 거의 먹지 못했다. 이때는 이미 몸무게가 10㎏이나 빠진 상태였다. 그는 태연한 체하며 가족과 친구에게 먹으라고 권했다. 자신은 먹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기만 하자 그들도 잘 먹지 못하고 있었다.
가족에게 통보
식사가 끝난 후 宋씨는 그들을 데리고 사무실로 왔다. 그리고 췌장암 평균 생존 기간을 미리 컴퓨터로 쳐서 인쇄해 놓은 것을 친구와 아내에게 건넸다. 아들에게는 인터넷에서 검색해 인쇄한 췌장암에 대한 자료를 보여주었다. 宋씨의 병을 가족들은 순식간에 알게 되었다.
宋씨는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에 미리 준비한 말을 차분히 꺼냈다.
『가장 먼저 이야기한 것이 재산 문제였습니다. 저는 선비 사상을 가지고 평생 산 사람이라 돈 모으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소 非현실적인 삶을 살았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재산이라고는 20평짜리 연립주택과 집필실로 쓰고 있는 18평짜리 오피스텔이 전부입니다. 연립주택은 큰아들 홰에게 주고, 오피스텔은 아내가 가지고 있다가 작은아들 별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재산 문제를 정리해 보니 인생의 비애가 느껴지더군요. 평생 정신 노동을 하다 보니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이 정말 없었습니다. 단지 25년간 유지해 온 집필실에 대한 노하우와 知的 유산인데, 아들들은 모두 저와 동떨어진 일을 해 물려줘도 소용없는 것이었지요』
그때까지 잘 참아주었던 가족과 친구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宋씨의 이야기는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시신 처리와 묘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애써 태연한 체하던 그 자신도 감정 컨트롤이 쉽지 않았다.
시신은 기증한 후 머리카락과 손톱 등 신체 일부를 충남 홍성군 서부면 송천리 宋씨의 先山(선산)에 어머니의 묘보다 작은 크기로 가묘를 쓰고 묻어줄 것을 부탁했다. 머리카락은 태워서 어머니의 묘에 뿌려달라고 했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몸이니 어머니에게 바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碑文(비문)을 써놓을 테니 그 碑文을 새겨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돈 갚을 게 있는지 생각했다. 300만원 정도 갚아야 할 돈이 있었다. 그는 친구에게 자신이 받을 돈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받아 빚을 갚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야기를 끝내고 그는 사무실에서 자겠다며 가족과 친구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그들은 한사코 안 가겠다고 했지만 억지를 부려 돌려보냈다.
가족들을 보내고 혼자 사무실에 덩그러니 남았다. 시계를 보니 9시 무렵이었다. 그는 잠을 청했지만 잠을 잘 수 없었다. 자리에 누웠다 앉았다 불을 켰다 끄기를 반복했다.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떠나는구나. 나도 이제 세상을 떠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를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나도 모르는 새 얼핏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군요. 12시경이었는데, 문을 열어보니 아내와 큰아들이 서 있어요. 돌아가라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더군요. 하는 수 없이 셋이 잠을 청했는데, 2시쯤 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요. 이번에는 작은아들이었어요. 더 이상 가라고 할 힘도 없고 밤도 깊어 하는 수 없이 온 식구가 좁은 사무실에서 같이 잠을 잤습니다』
그날 밤은 그렇게 보냈다. 평시와 같이 잠도 잤다.
『생생하네』
이튿날(7월15일) 宋씨는 병원에 입원했다. 전날 저녁 가족과 친구를 보내고 난 뒤, 국제 빌피쉬 토너먼트 조직위원회와 MBC 프로그램 담당자, 항공사 등에 자신의 상황을 팩스로 보내두었다.
서울중앙병원 입원실은 대개 1인실, 2인실, 6인실로 나누어지는데, 입원비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이다. 하루에 1인실은 24만원, 2인실은 12만원, 6인실은 1만원이다. 병실이 없어 그는 바로 6인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병실이 날 때까지 1인실에 입원해야만 했다.
宋씨는 당장 암 제거 수술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황달 조짐이 있었기 때문이다. 宋씨는 췌장의 머리 부분에 1.5㎝ 가량의 혹이 생겼는데, 그것이 간 쪽으로 치밀어 올라가 담도를 막고 있었다. 췌장암이 무서운 것은 다른 장기들에 둘러싸여 있어 전이가 쉽기 때문이다. 宋씨도 혹이 담도를 막고 있어 담즙이 축적되어 황달이 생긴 것이다. 대개 황달 수치가 1~2 정도면 수술을 할 수 있는데, 宋씨는 10이었다. 입원한 후 황달 수치는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일주일 만에 26이나 되었다.
주치의가 소개한 이성구 박사는 며칠 동안 관찰하더니 담도를 확보하는 게 급선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암 수술은 그 다음 문제였다. 황달을 빼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스텐트 파이프(Stent Pipe)를 내부에 심어 담도를 확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옆구리에 구멍을 뚫어 직접 바깥으로 담즙을 빼는 것이었다. 스텐트 파이프를 시술하면 파이프가 담즙의 영향을 받아 막힐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다시 빼고 박아야 한다고 했다.
의사는 宋씨에게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더니 어느 방법을 택하겠느냐고 물었다. 宋씨는 스텐트 파이프 시술법을 택했다.
스텐트 파이프 시술법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내시경을 통해 시술을 하는데, 위 내시경만 받아도 고통스러운데, 그것을 십이지장까지 내려보낸 뒤 간쪽으로 올리는 逆내시경을 해야 했다.
담도 확보 시술을 하고 난 뒤 일주일이 지나자 26이던 황달 수치가 15로 내려갔다. 췌장암 수술을 할 외과 의사가 宋씨의 상태를 살피러 와서 하는 첫마디가 『생생하네』였다. 그리고는 『앞으로 관찰해 봅시다』하고 말했다. 췌장암에 걸려 입원을 하면 2~3개월 만에 죽는데, 대개는 온몸에 암이 전이되어 수술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의사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상태가 좋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책 읽기
다시 일주일쯤 지나자 황달 수치가 10으로 내려갔다. 의사는 2 정도로 떨어지면 수술하겠다고 했다.
다음날 황달 수치는 8이 되었다. 宋씨는 그 정도 상태라면 4~5일 후에 수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상황이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했다. 하루 자고 나니 갑작스레 황달 수치가 12로 올라갔다. 그러더니 16, 18로 올라가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루 사이에 황달 수치는 오르락내리락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황달 수치에 따라 宋씨의 절망이 깊어졌다. 하지만 宋씨는 비교적 담담하게 생활했다. 심지어는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농담처럼 말을 건네기도 했다.
『내 간이 미쳤나. 왜 자꾸 기어올라가지?』
며칠을 관찰한 의사는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다시 시술을 해야겠다고 했다. 담즙에 불순물이 있으면 파이프가 막힐 경우가 있다며, 몸 밖에 구멍을 뚫어 담즙을 직접 빼내야겠다고 했다.
宋씨의 마음 같아서는 파이프를 교체했으면 했지만 의사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의 말대로 그가 시한부의 암환자이고 죽음까지도 생각한다면서 굳이 돈을 들여 수술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고 제가 삶을 자포자기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모든 것을 의사에게 맡겼습니다. 난 이미 판단할 능력이 없고 선택의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췌장 수술을 하기 전에도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내 친구가 두 사람이나 췌장암으로 죽었다, 나는 담담하다, 의사에게 身命(신명)을 바치겠으니 최선을 다해달라구요』
그는 모든 것을 의사에게 맡겼다. 그의 말대로 그는 병원에 있는 동안이나, 퇴원한 후에도 자신의 판단을 갖지 않았다.
황달 수치는 몸 밖에서 구멍을 뚫는 시술을 한 후 3주가 지나서야 2로 내려왔다.
황달 수치가 2로 내려올 동안 그는 6인실 병실로 옮겨졌다. 암 병동은 아니지만 함께 입원한 사람 대부분이 암환자였다. 사람들은 宋씨가 시한부 암환자라는 것을 내색하지 않아도 눈치로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놀랍도록 태연한 모습을 보이자 간호사는 물론이고 환자들까지도 관심을 보였다.
『타임지, 내셔널지오그래픽, 월간조선 등 잡지를 읽거나 어렵고 딱딱한 책, 췌장암에 관한 논문 등을 읽으니 간호사들은 저를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환자들과 달리 대하더군요. 게다가 농담까지 하니 더욱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나 봐요』
사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평상심을 가지고 생활하기는 힘들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이 변한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다가도, 마지막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서운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기도 한다.
다른 암환자의 고통을 지켜보며
병실에 있으면서 宋씨는 그런 암환자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병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풍경처럼 흘러갔다. 대장암, 위암, 간암 등 온갖 암에 걸린 사람들을 보았다. 현대 의학의 보고에 의하면 인체의 270여 군데에 암이 발생한다고 한다. 암이라는 것은 조기 발견할 경우 대부분 수술을 하면 치료가 가능한데, 재발될 경우에는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게 일반적인 이야기이다.
宋씨와 함께 병실을 쓰던 사람들 중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죽어서 병실을 나가는 사람, 암이 재발해 들어온 사람, 너무 늦게 발견해 손도 못 쓰고 있는 사람 등등.
한 40代 초반 남자의 경우는 너무도 처절했다.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남매를 둔 그는 위암이었는데, 회사일로 바빠 차일피일 미루다 너무 늦게 온 경우였다.
『수술을 하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 그 사람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지요. 가족들은 침묵 속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어요. 병실 사람들은 가족들을 보고 모두 그 사람이 가망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지요. 정작 본인만 모르고 누워 있는 것이었어요. 수술을 하려고 개복해 보니 이미 전신에 전이가 된 상태라 가망이 없었대요.
의사가 가족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그냥 꿰맸다고 해요. 환자가 의식이 돌아오자 가족들은 그에게 수술이 잘됐다고 말하더군요. 환자도 2~3주면 회복할 걸로 믿고 있구요. 환자보다도 부인과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살까 생각하니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듭디다. 결국 그 사람은 체중이 줄고 혈압이 떨어져 사망하고 말았어요』
암 수술을 한 후 몇 년 만에 재발해 온 60代 농부의 고통을 지켜볼 때 宋씨는 인간이 죽을 때 고통 없이 죽는 것도 본인에게나 가족에게 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올해도 멀쩡하게 모내기하고, 논도 매고 한 농부는 병원에 왔을 때는 이미 약을 쓸 수 없는 지경이어서 진통제만 놓아주고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차츰 약효가 떨어져 나중에는 어떤 진통제도 효과가 없었다.
장기가 다 썩었는지 물 한 모금도 못 마셔서 주사기에 목숨을 의존한 채 하루하루 연명을 했다. 고통에 못 이겨 하루 저녁에도 20~30번 정도 신음을 하고 아우성을 치는데, 누워도, 일어나도, 앉아도, 걸어도 아프니까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환자의 몸에 온갖 주사기가 꽂혀 있으니 보호자도 함께 움직여야 하는데, 환자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행동하겠지만 간병을 하고 있는 그의 아들은 너무나 큰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농부는 그렇게 5일 동안 있다가 가망이 없다고 해 앰뷸런스로 집에 돌아갔다.
깡통 던지는 소리
어이없는 일도 보았다. 암이 재발해 온 50代 남자는 소생 가능성은 없었지만 정신은 말짱했고 큰 고통은 없어보였다. 그의 병수발을 하느라 가족은 몇 년 동안 고생한 모양이었다. 부인은 병원에서 다른 보호자를 붙들고 남편이 한 달內에 죽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하루는 잠을 자는데, 깡통을 던지는 소리와 함께 여자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 환자의 부인이었다. 그 부인은 다음날 새벽 보따리를 싸가지고 가버린 후 돌아오지 않았다.
『환자와 부부싸움을 한 거였어요. 그걸 보고 참 비정한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살 날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좀 참아줄 수 없었을까, 한 달만 더 보살펴 줄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리 몰인정해도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사람을 두고 그렇게 가버리다니』
어떤 사람은 죽음 앞에서 참 놀라울 정도로 침착한 사람이 있다. 고통을 참지 못해 아우성을 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용히 고통을 견디는 사람도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선량해 보이는 50代의 한 환자는 장이 폐쇄되어 요구르트 하나도 먹지 못해 모든 것을 인공으로 조달해야 했다. 영양을 고루 투입하다 보니 체중이나 겉모습은 멀쩡한데 고통이 어찌나 심했던지 진통제를 자동 조절하는 기계를 차고 다녔다. 그것을 차고 다녀도 통증이 오면 부인이나 간호사를 찾아 진통제를 놓아달라고 했는데, 언제나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 사람을 보면서 하늘도 무심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저렇게 착하고 선량한 사람에게 왜 암이 걸리게 하는지 말예요. 이 세상에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도 권력을 얻고 떵떵거리는 사람도 많은데, 왜 저렇게 착하고 고운 사람이 암에 걸리고, 재발하고, 고통을 받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병원은 묘하게도 각종 민간처방의 천국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상황버섯, 영지버섯을 팔러 상인들이 드나든다. 병원에 있는 환자들 중에는 영지버섯, 상황버섯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고, 느릅나무 껍질 한 번 삶아먹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죽음 앞에서는 나약해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 암에 효능이 있다면 어떤 처방이든 다했다.
『저는 오로지 의사의 말만 듣기로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먹지 않았습니다. 정말 상황버섯과 영지버섯이 암에 효과가 있다면 세계 유수의 제약회사에서 여태 가만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병실에 있으면 또 많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바로 종교인들이다. 서로 병실을 찾아와 신앙을 권유한다. 그들 중에는 눈살을 지푸리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죽음을 앞두고 처절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믿지 않으면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는 그들을 볼 때 宋씨는 정말 화가 났다고 한다.
글쓰기 시작
宋씨는 담담하게 병실 풍경을 바라보면서 황달 수치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몸무게는 자꾸 줄어 52㎏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고단위 영양제를 외부에서 강제 투여키로 하고 시술을 받았다. 심장 가장 가까운 정맥에다 주사 바늘을 찔러 넣어 몸 속으로 영양제를 투여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니 3일 만에 금방 56㎏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체중은 늘어나는데 혈당이 올라갔다. 당뇨가 있었던 宋씨는 부작용이 발생해 어쩔 수 없이 중단했다.
체중은 급격히 줄어들어 급기야는 50㎏이 되었다. 바람이 불면 몸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근육이 다 빠져버리고 나니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했다. 서면 노곤하고, 앉거나 누우면 엉덩이가 아프고, 옆으로 누우면 갈비뼈가 아파왔다. 그렇게 고통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宋씨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두 번 30초 정도 의사를 만나는 시간 외에는 대부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내야 하는데, 그러느니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줄 글을 쓰기로 했다. 말하자면 자전적 유언이었다.
『막상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그리워졌습니다. 가족, 친구, 아이들에게 제 심정을 담아 전해주고 싶었어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던 습관이 있어 육필 원고 쓰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의사에게 외출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간호사들은 선례가 없는 일이라고 반대했지만, 의사는 결국 승낙을 해주었다.
그때부터 매일 오전에 치료를 받은 후 사무실에 와서 글을 쓰고 오후에 입원하였다. 몸에는 담즙을 빼내는 호스, 주사 바늘 등을 주렁주렁 단 채로 승용차를 이용해 사무실과 병원을 오가며 글을 썼다.
宋씨가 이렇게 고통 속에서도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평소의 그의 생활 철학 때문이다. 건강했기 때문에 그는 늘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죽는다. 조금 빨리 죽고 조금 늦게 죽는 차이밖에 없다』
잠을 자라는 명령이 宿命
이러한 생각 때문에 宋씨는 삶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자포자기한 것도 아니다. 기적처럼 살아날 것이라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단지 삶이 허락하는 동안 그저 일상처럼 생활할 뿐이었다.
『암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떠오른 것이 세 가지 命(명)이었습니다. 天命(천명), 運命(운명), 宿命(숙명)이 그것입니다. 천명은 하늘이 준 목숨이고, 이 세상에서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 운명이고, 숙명이라는 것은 잠을 자라는 명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살다가 영원히 잠들라는 게 바로 인간의 숙명인 것이지요.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잠드는 것과 다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죽음에 대한 공포나 살고자 하는 집착에서 해방되더군요. 사람은 短命(단명)하는 것보다 長壽(장수)하는 게 좋겠지요. 하지만 단명과 장수가 특정인에게 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척도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오래 살고 싶지요. 하지만 현대 의학의 범주 안에서는 하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오래 살고 못 살고 하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그런 그도 수술 후 달라진 것이 있다. 그의 부인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하지만 그는 나름대로 심리적인 변화를 겪었다. 8~11代(김윤덕, 신상초, 우병규 의원)까지 국회의원의 비서관 생활을 했던 그는 정치적인 지향점이 자유민주주의에 있었다. 그렇지만 집에서는 달랐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폭군 그 자체였다. 독재적이고, 가정에서는 언론이나 행동의 자유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요즈음 많이 달라졌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다는 것을 통고받고 나니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행동이 평소보다 더 괘씸하거나 서운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평소 눈에 거슬렸던 일들은 더 보기 싫어지고, 약간 감정적인 말을 해도 가슴에 와 닿는 강도가 강해 큰 못처럼 박혔어요.
한 번은 식구들에게 좀 서운한 일이 있었어요. 건강할 때처럼 즉시 시정을 요구하거나 폭군 역할을 할 뻔했어요. 그런데 문득 이제 살아도 몇 달 살지 못할 텐데 아내나 아이들한테 섭섭하게 하거나 가슴에 못 박으면 죽을 때까지 혹독한 말을 하고 갔다는 것이 남을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가족들에게 감정 표현을 하지 않기로 작심했어요. 그렇게 한 번 참고 나니 잘 참게 되어 어느 정도 희로애락을 표현하지 않는 상태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親자 붙은 사람들의 고마움 새삼 느껴
병원에 있으면서 그는 親(친)자가 들어가는 사람들이 좋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친동생, 친구, 親知 등. 그를 찾아와 준 사람들에게 그는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친구들은 걱정이 되어 매일 찾아오는데 宋씨는 말할 체력이 없어 나중에는 오지 말라고 사정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들은 성의를 다해 문병을 오곤 했다.
『친구가 좋다는 게 그런 것인가 봅니다. 세상 마지막으로 떠나는 절차를 밟아주는 건 결국 친구잖아요. 죽어서 땅에 묻히기 전에 장막 밖에 앉아 있는 사람들, 무덤까지 와주는 사람들은 결국 친구나 친지들인데, 그들은 얼마나 고마운 존재입니까?』
5選 의원을 지낸 辛道煥씨는 10년 이상 추석이나 설이 되면 잊지 않고 선물을 보내주었다. 그가 문병을 와 『죽으면 안 된다. 아직 할 일이 많다』고 위로해 줄 때 젊은 자신이 팔순이 넘은 분의 問病을 받는다는 게 한편으로는 송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감격했다고 한다.
그의 오랜 친구인 김용해씨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퇴근시에 그에게 문병 왔다. 金씨는 宋씨가 췌장암이라는 사실을 알고 부부가 밤새 울었다고 한다. 청주 MBC 사장인 박우정씨, 금성출판사 김인호 사장 등도 먼길을 마다 않고 자주 문병을 와주었다.
김인호씨는 수술 전에 宋씨에게 『너는 죽지 않는다. 너의 어머니 염력이 있어 살아난다』며 위로해 주었다. 宋씨의 어머니는 10년간 장자불와하시다 돌아가셨는데, 김인호씨가 그 사실을 알고 한 말이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자 문득 어머니가 그리워졌습니다. 어머니는 하늘 나라에서도 아들을 위해 염력을 쓰신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습니다』
두 아들들의 예비 신부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찾아와 휠체어를 밀어주고 팔을 주물러 주는 등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宋씨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이들이 결혼하는 모습을 못 보게 될 것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동생들과 친척들은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멀리서 그를 찾아주었다. 宋씨는 친척들에게 『이제는 자신을 다시 볼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모든 사람이 병들어 쓰러지면 낫게 하려는 게 본능이지만 자신은 그들의 희망을 단절시키는 게 의무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아는 宋씨는 그들에게 두 번의 충격을 줄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問病 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에게 희망적인 말을 해주었지만, 어떤 말도 그에게는 곧이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건설협회 기술본부장으로 있는 친구인 윤형노씨가 와서 해준 말은 당시에는 믿어지지 않았지만 수술을 하고 난 후에는 참 타당하다고 판단했어요. 그 친구가 한 유명한 의사와 술을 마시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인간이 죽을 병이 걸렸을 때 名醫(명의)가 효력을 발생시키는 것은 30%라고 하더랍니다. 나머지는 순전히 환자 본인의 의지라는 것이지요』
황달 수치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병원과 사무실을 오가며 글을 쓰던 그는 「그리운 사람아,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자전적 유언과 碑文(비문)을 완성했다.
8월28일. 수술날짜가 잡혔다. 인터넷에서 췌장암에 관한 논문을 많이 읽은 宋씨는 수술 방법에 대해 대강 알고 있었다. 췌장암은 적게는 대여섯 군데에서 많게는 20군데까지 수술을 해야 한다.
여섯 시간에 걸친 수술
수술 전날 의사와 미팅이 있었다. 의사는 수술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설명해 주었다.
『췌장 위로 간 동맥이 지나는데, 복부를 절개해서 동맥에 문제가 있을 때는 그것을 자르고 잇는 수술을 할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수혈을 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의 피가 전신을 몇 바퀴 돌고 남을 정도로 다량 투입되어야 한다. 수혈량이 많을 경우 부작용이 생기면 치명적이다.
또 췌장을 절개할 때 췌장액이 흐를 수 있는데, 췌장액은 육류를 섭취했을 때 그것을 녹일 정도로 강력한 액체이다. 수술 과정에서 만일 다른 장기에 흘리면 그 장기가 녹는다. 그땐 정말 치명적이다.
췌장 수술말고도 보완 장치를 마련하는 수술이 20여 가지 정도 된다. 그렇게 많은 수술을 하다 보면 환자는 혼수 상태가 되고 그 부작용으로 깨어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의사를 만나고 나온 宋씨는 즉시 두 동생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술하다 죽으면 다시 못 볼 사람들이었기에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다.
큰동생은 일이 있어 못 오고 충청도에 사는 막내동생이 올라왔다. 동생에게 수술한다는 이야기, 碑文과 묘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막내동생은 두 시간 만에 돌려보냈다. 더 이상 이야기한다는 것은 구차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동생이 돌아간 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죽음의 공포도 없었다. 그저 뒤척이고 있다가 문득 어쩌면 地上에서 마지막으로 잠을 청하는 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잠이 들었다.
수술 날 아침. 수술을 받기 위한 절차를 밟느라고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평소 서울중앙병원에서는 하루에 30~40명이 수술을 받지만, 때마침 의료 분쟁이 한창일 때라 수술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날 두 번째로 수술 시간이 잡혀 있었다. 의사가 빨리 해주겠다고 하더니 조금 있다가 바로 수술실로 가게 되었다. 아침 8시경이었다.
宋씨는 마취에서 깨어날 때의 고통이 생애에서 가장 큰 고통이었다고 말한다. 생애 가장 큰 고통을 겪으며 마취에서 깼을 때,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자신이 있는 위치와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는 병실에 있었고, 시간은 오후 2시30분경이었다. 병실에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중환자실이라면 며칠을 정신 없이 누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보니 수술은 6시간 남짓 걸린 셈이었다. 20여 군데 수술을 하면 적어도 10~12시간을 넘겨야 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했겠구나 하는 판단이 들었다. 宋씨의 부인은 수술이 잘되었다고 말했다.
『위로의 이야기겠지 하면서 아내에게 그런 이야기를 일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내 병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으니 위로의 이야기를 하지 말라구요』
수술 후 일반적인 치료가 이어졌다. 수술 후유증은 없었다. 큰 수술을 받은 뒤라 체력이 허약해져 처음에는 혼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였고, 힘이 없어 말을 하면 목소리가 작은 새 소리만하게 들렸다. 화장실까지의 거리가 병실에서 불과 10m 거리인데, 그것도 혼자 갈 수 없었다.
차츰 경과가 좋아지기 시작한 것은 추석 무렵이었다. 몸이 좋아지자 추석 차례를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의사에게 상담했다. 의사는 차례를 지내고 난 뒤 방사선 치료를 하자고 했다.
의사의 허락을 받아 차례를 지내기 위해 병원 문을 나섰다. 속설에 아픈 사람은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는 맏이라서 차례를 주관해야 했다.
『차례상을 차려놓고 다들 절을 하는데, 저만 뒷전에 물러서 있었습니다. 뒤에서 절하는 풍경을 바라보자니 이젠 나는 어머니 아버지에게 절도 못하는 사람이 된 것이었습니다. 순간 묘한 감정이 일어 마음속으로 오열을 했습니다』
宋씨는 췌장암 선고를 받은 후 주변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기념비를 세우는 등 그가 평소에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해나갔다.
죽음 준비
『평소 저는 제 무덤을 쓰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모든 생물 가운데 죽은 다음에 무덤을 남기는 것은 인간 외에는 없습니다. 지상에 모든 것들은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저도 다른 동물처럼 무덤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는데,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아내가 그러더군요. 시신을 잘못 처리하면 아이들한테 영향이 온다구요. 그 이야기를 믿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아버지로서 잘 해주지도 못했는데, 마음에 상처를 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신기증 서약도 하지 못했습니다』
25년간 운영해 온 史草집필실의 노하우가 담긴 컴퓨터의 데이터들을 복사했다. 이것은 아들들에게 유산으로 남길 예정이다. 宋씨는 아들들이 집필실을 이어받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한다. 20년간 수집한 우리나라 낚시 장비 300점도 정리하고 있다. 그는 이 장비들을 전시할 낚시 박물관을 세우려고 했지만,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입원 직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한강 기획전을 하고 있는데, 낚시 장비 30점을 전시하는 동시에 영구 보관할 것을 제의했다. 宋씨는 50~60점 정도 더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할 예정이다.
宋씨는 그간 홈페이지에 현대 정치사와 그의 가족사에 대한 글을 재작년부터 연재하고 있었다. 당초 300페이지 단행본 20권 분량으로 계획되었는데, 그는 60~70세까지 쓰려고 매달 20회 이상 글을 올렸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는 과정까지 쓰여지고 중단되었는데, 다시 글을 올릴 예정이다. 고스트 라이터로 25년간 남의 자서전을 대필해 온 그였지만 정작 그의 자서전은 완성을 보지 못할는지 모른다.
지금도 그는 남의 자서전을 쓰고 있다. 병이 나기 전에 쓰던 것이라 그가 할 수 있는 한 마무리를 지을 예정이다. 주변에서는 시골에서 휴양이나 하라고 권유하지만 그것은 자신 같은 사람에게는 사치라고 한다. 아직 그가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은 것이다.
사는 데도, 죽는 데도 돈이 든다
宋씨는 주변 정리를 하나하나 해나가다 보니 그간 자신은 죽음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두고 보니 아내와 자식에게 하지 못한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식은 최소한 가르치고, 집 사주고, 결혼을 시켜야 하는데, 저는 집도 못 사주고 결혼도 못 시켰어요. 남편과 아버지로서 도리를 못한 게 아쉽습니다. 또 죽는 과정에 들어갈 돈에 대한 준비가 없었습니다. 수술비만 1300만원 정도 들었는데, 그 돈이 없어 막내동생이 감당해 주었습니다. 죽는 데까지 도움을 받으니까 고맙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돈을 벌지 못한 것에 대해 인생의 비애감이 든다고 말한다. 사는 것뿐만 아니라 죽는 데도 돈이 들어가는 것을 여실히 느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은 가슴속에 조국과 자유에 대한 열애가 가득한 사람이라고 먼저 말을 꺼내면서 국가와 민족, 친구, 가족들에게 각각 하고 싶은 말을 시작했다.
『한반도에 다시는 독재와 장기 집권, 비민주적 통치자가 나타나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에 저해되는 정치인, 지도자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친구들에게는 인생을 삭막하고 악착같이 바들바들하면서 살지 말고 정신적 여유를 갖고 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부부끼리, 가족끼리 연간 계획을 세워 여행을 많이 하라. 가족에게는 주어진 환경에서 가능한 보람된 생활을 하고, 처해 있는 환경에서 발전적으로 살길 바란다. 아들들이 일체 정치에 관심을 갖지 말고, 경제에 관심을 가지길 바란다』
『죽기 전에 낚시 한 번 가고 싶습니다』
宋씨는 그간 신세를 진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들면서 고마움을 남기고 싶어했다. 25년 전 집필실을 처음 냈을 때 격려해 준 정비석 선생과 선우휘씨, 병실을 찾아와 준 이택돈씨, 박우정씨, 김인호씨, 김용해씨, 신도환씨 등등.
그리고는 20여 권이 되는 자신의 저서 중 대표적인 저서인 4권의 저서에 대해 일일이 설명했다.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건네려는 듯했다.
『「3K 정치 이력서」는 3K의 출생부터 모든 것을 비교해 그들의 정치 철학을 비판한 책입니다. 「전두환 참회록」은 그의 정치 입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고발한 책이구요. 「견지낚시」는 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조상의 지혜 슬기 얼 등이 담긴 견지낚시에 대한 설명을 했고, 「고기를 낚으러 태평양에 가다」는 태평양의 유명한 아름다운 섬 200군데를 찾아다니며 낚시한 이야기를 모은 것입니다』
그는 담담한 모습으로 일상 생활을 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오후에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사무실에서 그간 써주기로 했던 他人의 자서전 원고를 정리한다. 300m 정도 걸으면 한 번 쉬어야 하는 체력으로 그는 약속한 일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가고 있는 중이다.
입맛이 없어 아내가 만들어 주는 특별식을 먹고, 그것도 마땅치 않으면 시레이션에서 입맛에 맞는 것을 찾아 먹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친구들과 점심 한 끼 먹는 것도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쯤이면 빙어낚시가 한창입니다. 11월, 12월에는 부시리 낚시 철이지요. 죽기 전에 낚시 한 번 가고 싶습니다. 남해안에서 겨울 감성돔 낚시도 하고 싶고, 7월에 포기한 하와이 낚시대회, 11월에 가기로 했던 멕시코에서 돗새치 낚시도 해보고 싶구요. 하지만 이루지 못할 희망이지요. 체력이 남지 않아서 말입니다』
지금은 방사선 치료를 받는 단계라 고통이 없어 그나마 견디기가 괜찮다. 11월 중순부터 항암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 그에게 어떤 고통이 시작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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