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는 신인으로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죄로 말미암아 절벽에 붙잡아 매어져 매일 심장과 눈을 독수리에게 파 먹히고 또 밤새 눈과 심장이 자라나면 또 파 먹히는 벌을 받게 된다. 이 신화는 단지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인류와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속성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게 되는 가를 말하고자 한다.
인류와 인간의 생득적인 속성이며 각자의 인격을 이루는 자유의지와 인류의 발전의 기원이 되는 불과는 사실상 연관성이 없으며 불이 인간에게 자유의지까지 개발하도록 하는 매개가 되었다는 설은 신화에 불과 하지만 그것이 증명을 요구하는 과학의 굴레를 벗어난 상징으로는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다.
불의 상징적 의미가 인간의 자유의지가 되고 불이 가져다준 인류문화의 발전이 자유의지 활동을 통한 결과물이라고 볼 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이기심이다. 인간에게 이기심은 모든 것의 중심이 인간이 되도록 했고, 인류문화의 발전이 인간을 위한 측면이 가장 크다는 것은 자유의지 개발과, 그것을 통한 문명의 발달 의 중심에 인간이 있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 나온 창세기 신화의 또 다른 해석은 상당히 자의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창세 직후의 인간, 즉 범죄하기 이전의 인간부터 자유의지를 부여받게 됐고 그 자유의지를 범죄하는 데 사용해서 원죄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결론만 본다면 이치에 맞다.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영의 세계에서 하나의 범죄사건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선도 알고 악도 아는 속성을 지녔다. 그 이후에 이 땅에 하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의도로 세상을 만드셨는데 하나님의 속성을 가져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범죄 함으로 원죄가 생겨난 것이다. 이 말에는 선과 악에 관한 상당히 까다로운 철학적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는데, 결국에는 인간이 이기심을 완전한 선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방향으로 자유의지와 결부시켜 나갔다면 계속해서 하나님의 속성만을 지닌 채 거룩한 삶을 살게 되지 않았을까?
자유의지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논하기 위해서 우선 거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이는 죄의 속성을 가진 인간의 차원에서만 고찰한다면 이기심이 있어서 조금 거룩하지 않더라도 자아의 이익을 꾀하게 돼 누군가는 손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출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문명적인 차원에서만 살펴본다면 그 근간에는 죄의 속성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는 아무 측면에서도 긍정할 수 없는 것이 악한 자유의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범죄의 속성을 가지게 된 만큼 다시 자유의지로 거룩한 속성을 가지게 된다. 악한 것이 원하는 비 진리를 위해 이기심을 발동하면 악한 것이 뜻하는 대로 문명이 창조되어지고 선한 것이 원하는 진리를 위해 이기심을 발동해 거룩한 곳에 남아 있으면 더 이상 아무 것도 창조되어질 것이 없는 완전한 세상에 머물며 이미 주어진 복을 누리고 살 것이다.
이미 더러워진 세상에서는 진리를 바라고 거룩해지고자 하는 또 하나의 이기심이 필요하며, 그 의지가 결실을 맺었을 때 다시 거룩해져 약속된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자유의지로 악인이 되어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간의 문명을 창조한 것이 자유의지의 부정적인 측면이라면 이제 그 자유의지로 다시 하나님의 속성을 찾아가는 이기심을 발동할 수 있게 되 천만 다행이라는 것이 자유의지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이제 와서 다시 천국을 허락 받기를 간구 하는 사람에게는 자유의지의 올바른 선택만이 유일한 길인 것이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께서는 다수를 원하셔서 흉내만 내는 반쪽 진리를 원하지는 않으시고 이 땅에서 원하시는 데로 완전한 믿음에 이른 극소수의 거룩한 자만 부르실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바라고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