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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77) 2026. 8. 23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행17:26-27
<바울이 선포한 하나님>
아레오바고 설교에서 바울은 자신이 믿는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5가지로 요약해 설명하였습니다.
첫째, 바울이 전파하는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둘째, 바울이 전파하는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모두 다스릴 수 있는 천지의 주재이십니다.
셋째, 바울이 전파하는 하나님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신전에 갇혀계시지 않습니다.
넷째, 바울이 전파하는 하나님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 없으신 분이십니다.
다섯째, 바울이 전파하는 하나님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은 참 하나님은 인간 세상을 초월해 계시고,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절대자’이심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바울은 계속해서 그 하나님이 인간의 삶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26절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첫째,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들었다’고 증언합니다.
이 고백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두 사람’, 곧 아담과 하와의 후손임을 밝힌 것입니다.
온 민족(족속)이 ‘한 혈통’이라는 믿음은 바울 신학의 바탕입니다(롬5:12-21).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롬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기독교의 신앙 원리는 신분과 인종을 넘어선 평등을 핵심 가치로 둡니다.
바울은 말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선교 여행 중에 직접 실천하였습니다. 훗날 로마 감옥에서 만난 오네시모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변화된 그를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편지를 통해 그를 자신의 형제라고 인정하고, 손해를 끼친 것을 자신이 갚을테니 용서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다시 바울에게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골로새 교회에 보내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게 합니다(골4:9).
이 고백은 당시 아덴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아덴 사람들은 그들이 아티카(Attic – 그리스 중부에 있는 반도) 본토의 흙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또,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온 사람을 노예를 부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노예와 한 혈통이라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실 바울의 이 혁명적인 주장은 인류 역사에서 받아들여진 지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노예 제도가 법적으로 완전히 폐지된 때는 1865년 12월 6일(수정헌법 제13조 비준)입니다. 150년 조금 넘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성경의 가르침은 소위 ‘기독교인’이란 사람들의 삶에서 실천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마크 트웨인이 쓴 ‘헤클베리 핀’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1884년).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가출한 허클베리는 도망친 흑인 노예 짐을 만나 뗏목을 타고 함께 미시시피강을 따라 자유를 찾아 떠납니다. 짐과 우정이 싹 텄는데, 대화 중에 그가 도망친 노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허클베리는 심한 내적 갈등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허클베리가 어려서 받은 유일한 교육은 옆집 노과부 더글라스 부인이 해준 성경공부가 전부인데, 이때 그녀가 도망 노예를 돕는 것은 지옥에 가는 악한 행위라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어린 허클베리가 앉아서 친구를 배반하고 천국에 가는가 아니면 친구를 지키고 지옥불에 영원히 고통 받을 것인가를 놓고 우습지만 나름 실존적인 고민을 한 것입니다.
밤새 고민하던 허클베리는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지옥에 가지 뭐"("Alright then, I'll go to hell.").
마크 트웨인은 이 소설을 통해, 노예 제도를 유지하려고 하는 남부 기독교인들의 위선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 자신의 영혼을 바치기로 한 무학의 허클베리의 행위야말로 참된 기독교인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말씀은, 오랫동안 기독교인들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신분제가 폐지된 때는 1894년 갑오개혁 때였습니다. 불과 132년 전의 일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가르침이 개화파 지식인들과 조정에 영향을 미쳐, 당시 신분제(노비제)가 공식 폐지되는 데 중요한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구한말 조선 사회에 들어온 기독교는 실제로 양반과 상민, 나아가 천민(백정, 노비 등) 간의 신분적 경계를 허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남자와 여자의 차이도).
오래전에, 우리 지방의 목사님들과 더불어 국내 성지순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전라북도 김제에 있는 ‘금산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이 교회가 유명한 것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ㄱ'자로 된 예배당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전북 문화재 제136호). 남자와 여자가 출입하는 문이 달랐고, 예배당 안에서도 혹시 서로를 쳐다보지 못하게 커튼이 쳐져 있었습니다. 강대상은 남자들 쪽으로 향하여 있었고 여자분들은 목사님의 옆모습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의 모습은 자랑스러운 모습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여, 교회를 세웠음에도 여전히 ‘남녀’의 차별을 극복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대에 세워졌던 정동교회나 상동교회는 남녀의 구별을 하지 않고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어쨌든 한국교회가 이 민족에 공헌한 것 가운데 하나가 믿음 안에서 모든 차별을 철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에는 인종적 신분적 차별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약속의 유업을 이을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차별은 존재합니다. 나라마다 민족적, 혈통적 우월 의식을 가지고 다른 민족을 멸시하거나 혐오합니다. 나아가서는 아예 제거하려는 ‘제노사이드’(대량학살) 범죄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차별적인 세속적 가치관에 정신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믿음 안에서 민족적, 혈통적 차이가 없고,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임을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을 풀어 해석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여 오시는 역사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개인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당시 헬라의 에피쿠로스 학파들은 만물의 움직임이나 역사가 우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헬라의 신들은 인간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구체적인 인간의 역사에 개입(간섭)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개인의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해 들어오십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 지방에 살고 있던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세 가지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2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3)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이 약속을 믿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고향을 떠났고, 하나님은 아브람의 삶의 고비고비마다 역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이라는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은 에서의 살해 위협을 피해서 도망가던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벧엘’로 돌아올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의 구체적인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공동체적(민족적)인 사건으로도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출애굽 사건이 가장 좋은 예입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압제에서 고통당하는 히브리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개입하셨습니다. 모세를 대언자로 세우셔서 애굽의 신들을 대표하는 바로와 대결하게 하셨고,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누가 진짜 하나님인지 증명하셨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만드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그리고 공동체에 구체적으로 개입해 들어오셔서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습니다(구속사).
<인간의 이성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
그렇게 개인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27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 발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은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숨어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숨바꼭질). 자연 속에 ‘당신의 능력과 신성’을 담아 두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고 말합니다. 내 주변의 환경을 통해서 신적 존재(초월자)를 가까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주 만물과 피조물을 통해 ‘초월자, 신적 존재’의 느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온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이성과 지성의 한계).
더듬어 아는 것은 완전히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한 번만 코끼리를 만지면 코끼리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습니까?
다리를 만지면 기둥과 같다고 합니다. 배를 만지면 벽과 같다고 합니다. 귀를 만지면 널빤지 같다고 합니다. 코를 만지면 호스와 같다고 말합니다. 꼬리를 만지만 밧줄같다고 합니다.
우리의 유한한 이성과 지식으로는 무한하신, 그리고 영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 ‘신적 존재’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까?
그 신이 스스로를 ‘계시’해 주는 만큼 알 수 있습니다. 그 계시가 바로 ‘성경’입니다.
| 여기서 잠깐,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여겨야 하는지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는 관점에 따라 구원의 주체에 따라 자력 종교와 타력 종교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에 이를 수 있기에 타력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또 계시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종교와 계시종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연종교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자연적인 본성을 통해 진리(신)를 알아갈 수 있다는 입장이고, 계시종교는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진리(신)를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알려 주셔야만 알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기독교는 계시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계시하여 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I am who I am”(“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자신을 밝혀주셨습니다. 또 계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신비한 자연현상을 통해 인간이 신적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것을 일반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반계시로는 신의 성품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내적 계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이나 의도, 섭리 등을 알게 됩니다. 우리 기독교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성품이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계시해 주신 특별계시로 인정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그런데, ‘특별계시’로 주신 성경도 문자로 기록되었기에,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하심을 문자로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성경을 가지고도 서로 다른 해석을 합니다. 서로의 주장을 앞세우다가 갈라서는 일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해석을 달리하는 수많은 교단과 교파가 생기고, 자신들만의 교리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전쟁까지 불사하였습니다.
예전, ‘폴 틸리히’(?)라는 유명한 신학자의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꿈에 예수님을 뵈었는데, 너무 감격해서 자신이 신학교에서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내용을 온갖 지식을 활용해 자랑스럽게 소개하였습니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예수님이 그러시더랍니다. “그게 나냐!”
어린아이가 아버지가 하는 일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모르는 부분은 남겨두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억지로 해석하다 잘못 나갑니다(이상한 해석 하는 사람을 조심).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계시’하신 부분만 알아도 충분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계시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바울은 오늘 본문 27절에서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신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오실 때의 예언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임마누엘(Immanuel)',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2) 공생애 기간 - 태어나신 이후부터 공생애를 마치시기까지 내내 인간의 삶의 현장 한가운데 함께 하셨습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3) 마지막 유언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어떻게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 곧 성령님의 오심을 약속하시면,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라”(요14:16)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아 바울 사도도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고 확인하여 주셨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육신의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우리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고, 예수님의 유언이고, 사도 바울의 증언이기에 우리는 성령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아니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하나님(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 ‘내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됩니까?
그분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바라기는 어떤 시련이나 고난 속에서도, 나 혼자가 아니라는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위로를 받고, 동시에 담대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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