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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나무, 오래된 믿음
삼십 들머리에 당신의 손을 잡아 오늘, 육십 들몰에 나앉으니 내 인생도 뚝 접어 절반이군요. 제 아내가 그 보다 십년 쯤 앞이고 부모는 아내의 이십년 전이었으니 당신은 몰라도 제 세 번째 은인인가 합니다. 이 아름다운 지구별에서 얼결에 놓쳐 운명이던 것이 기필코 이승에서 되찾은 인연의 실오리라 할까요.
실낱같은 한 줄기의 바람과 신 새벽 어둠 속에서 홀로 반짝이던 별빛과 철새처럼 줄줄이 오가던 허공의 길을 따라 어쩌면 천번 만번도 스치었을 당신이 어제는 후투티, 화려한 모관의 머리 깃으로 떠났다가 오늘은 길하다는 흰 제비, 진주 빛 초리의 눈부신 꽁지깃으로 다가와서 서로 얼싸안고 허공중에 놀다가 춤을 추다가 사뿐히 내려앉은 우리는 그렇게 형제나 같았습니다.
분분한지고! 욱복한지고!! 한 십년은 교정에 낙엽이 지고 한 십년은 들판에 강이 흐르고 한 십년은 반추의 눈보라 아득히 흩날렸을 우리. 당신은 천둥처럼 크고 천길 벼랑처럼 높았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맑고 아름다운 웃음을 가진 당신의 아내와 지상에서 가장 착하고 소탈한 웃음을 가진 그대 앞에 존경과 경의의 꽃다발을 바칩니다.
미사도 수사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문장도 웅변도 다 필요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우러르고 다만 우리가 다다라서 당신께 배우는 동안 이렇듯 나이가 건전하고 인생이 옳았으니 아니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남균 형! 사랑과 혁명과 자유와 진리가 우리 젊음의 뒤안길에 의젓하고 참과 순수와 교육과 열정이 우리 생애의 둘레에서 포근하니 감히 흉내 낼 수 없고 함부로 감출 수 없으며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 역사와 삶의 도저한 흐름 속에서 또한 결단코 무를 수 없는 한판, 당신과의 기막힌 시간들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우리들의 선한 뜻으로 우리는 마침내 우리들이 쌓은 선한 우정의 힘으로 단 한번 쏘아올린 화살로 시대의 어둠을 가르고 단 한번 내리친 칼바람으로 시대의 억압과 죽임의 사슬을 끊어내었습니다.
형, 당신은 늘 내 마음의 엄나무 같았습니다. 가시가 엄하고 향내 깊어 오동잎처럼 넓고 깊은 그늘에서 세상의 초록이 모두 초록다워지는 오랜 믿음이었습니다. 엄나무의 우리 나이쯤엔 몸에 가시가 없답니다. 스스로 가시의 끝을 자르고 군데군데 유두처럼 도드라져서는 남모를 저만의 생의 처소로 귀의한답니다. 울퉁불퉁한 수피의 멋은, 그럼요, 형이 인내한 가장 빛나는 미학이 아닐까요. 툭툭 불거진 고비마다 인생의 아픈 가시를 하나 둘 떨구고 완성과 결실의 꽃자리로 불거지시니 나는 그 자리에 삼십년을 앉았던 행운목이라 해야겠습니다.
이제 분필과 수학책을 내려놓고 저만치 갈대 우거진 순천만을 굽어보며 오갈피 열매를 땁니다. 신선초도 따고 두릅도 꺾으며 당신은 또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자네들 언능 오소. 어쩐 줄 안가? 이것이 독도 없고 영양 만점에 만병통치의 영약이네. 간에 좋고 심장에 좋고 콩팥에 좋고 폐에도 다 좋단 말이네! 장난기 많은 내가 웃고 약탕기 좋아하는 벗들이 웃으니 재야의 호탕한 후반을 이렇게 당신이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래요, 내일의 남균 형. 저와 함께 둘은 알고 세상은 정말 모르는 비밀을 캐내어 탕약을 달입시다. 손목을 잡고 맥 여울을 만지며 도라지도 말리고 천궁도 말려서 여기 앉은 옛 동지들의 푸른 수염들과 기꺼이 오래오래 살아갑시다.
다가올 당신의 호미와 당신의 괭이와 당신의 삽자루에 눈부신 신의 지팡이도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건승하십시오.
- 정남균 선생님의 명예로운 퇴임에 부쳐 2015. 2. 13 김진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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