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진흥 업무를 담당하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원전 관리·감독까지 하도록 하는 법률이 추진됨에 따라 ‘셀프규제’ 논란이 일고 있다. 산업부가 규제업무를 맡게 되면 원전 규제 체계가 2011년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 구성 이전으로 것은 물론, 원자력사업자를 규제하는 독립기구인 원안위의 역할과도 충돌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원안위 김혜정 비상임위원은 지난 14일 환경운동연합 홈페이지에 긴급호소문을 게재해 이 같은 내용을 밝혔다. 김 위원은 “산업부가 사업자에 대한 관리‧감독권을 가지는 법안을 제정해서 규제와 과징금 부과 등의 규제권을 가지게 되면 원안위가 심의‧의결 권한을 가진 핵물질 및 원자로의 규제에 관한 사항, 원자력이용자의 금지행위에 대한 조치 및 과징금 부과에 관한 사항 등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원전 비리로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 전 사장 등 임직원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원전 안전에 대한 불신이 극대화되자 원자력계가 내놓은 카드가 바로 ‘셀프 감독권’, ‘셀프 규제권’”이라며 “이는 탈핵 운동으로 만들어낸 규제기관의 시민참여시스템을 무력화하고 사실상의 상위법을 만들어 진흥부서가 규제권한을 흡수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산업부가 사업자 규제권을 갖는 법률이 제정되면 원안위가 가진 규제 기능이 절대적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한수원 스스로 자율규제 마련‧이행...?’
정책협의회에서는 ‘원자력발전소 해외수출 촉진 사항’ 협의...논란을 가져온 해당 법안은 지난해 12월 31일 새누리당 정수성 의원(경북 경주, 산업통상자원위)이 대표발의한 ‘원전 사업자 등의 관리·감독에 대한 법률’ 제정안이다. 여기에는 한수원 등 원전공공기관의 경영의무와 윤리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을 포함해 산업부가 해당공공기관이 의무사항을 지키고 있는지 정기·수시로 점검·평가하는 것이 포함돼 있다.
해당 제정안에 따라 산업부가 규제권을 갖게 되면 사실상 원자력안전에 대한 규제와 관리 감독 기능은 원안위가 아닌 산업부가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 법적지위로 차관급인 원안위가 장관급인 산업부보다 아래에 있기 때문에 원안위 설치 이전인 2011년 상태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현실이 될 수 있다.
제정안은 원자력발전사업자가 구매·품질관리, 조직·인사관리 등 안전하고 투명한 경영을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포함해 원자력발전산업협의회와 원자력정책협의회를 구성‧운영토록 했다.
협의회 구성 때문에 ‘셀프규제권’ 논란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해당 제정안은 한수원 등 원자력발전사업자 등이 원자력발전소의 건설·운영을 위해 △자율규제 마련‧이행 △개선사항 연구‧건의 등 사항을 수행하는 산업협의회를 운영케 했다. 원자력발전사업자이자 원자력발전공공기관인 한수원 장이 협의회 대표를 맡게 하고 한수원 등 원자력발전공공기관에서 정하는 관련사업자로 위원을 구성케 한 것이다.
정책협의회에서 제대로 된 규제·감독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원자력 진흥기관인 산업부를 중심으로 사실상 원자렵산업계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기관장이 모여 ‘원자력발전소의 해외수출을 촉진하는 데 필요한 관계기관 간의 협력에 관한 사항’ 등을 협의토록 했기 때문이다.
제정안에 따르면 ‘원자력발전산업 정책협의회’는 국무총리가 위원회 대표를 지명하고 국무조정실, 기획재정부, 미래창조과학부, 산업통상자원부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고위공무원으로 위원을 구성·운영토록 했다.
해당 제정안은 정책협의회에서 △원자력발전소 건설·운영에 대한 정부의 관리·감독체계의 점검과 개선 △원자력발전소 건설·운영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요인 해소에 필요한 관계기관 간의 협력 △원자력발전소의 해외수출을 촉진하는 데 필요한 관계기관 간의 협력 등과 관련한 사항을 협의한다고 명문화했다.
‘산업부는 원자력발전을 진흥하는 곳이지 규제하는 곳 아니야...더 큰 혼란 가져올 것’정부는 ‘제2차에너지기본계획’에도 산업부가 원전사업자를 관리·감독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부분을 포함시켰다. 정부는 지난 14일 국무회의를 열어 원자력발전소 추가 건설을 골자로 하는 제2차 에너지기본계획을 확정하면서 원전비리 재발을 막기 위해 ‘원전사업자 관리·감독에 관한 법률’ 제정을 포함시켰다. 산업부는 앞서 지난해 12월 11일 ‘제2차 에너지기본계획 공청회’를 진행했지만 이와 관련 내용은 설명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원래 에너지기본계획에는 없었던 내용을 정부의 공식적인 사업계획에 끼워 넣었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이 같은 조처는 박근혜 대통령이 주문한 산업부 중심의 원전 안전 관리체계 수립의 일환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7월 국무회의에서 “원전의 주무부처인 산업부가 원전 공기업에 대한 규제 권한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며 “산업부가 적극적으로 관리·감독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후에도 “원전 비리를 확실하게 본때 있게 한번 뿌리 뽑았으면 한다”며 수차례 원전 비리 척결을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시민사회와 원자력 관련 전문가 등은 산업부가 원자력발전에 대한 규제를 맡아야 한다는 것에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산업부는 원자력발전을 진흥하는 곳이지 규제하는 곳이 아니며 진흥과 규제를 분리하지 않는 것은 더욱 큰 혼란을 가져온다’는 것. 이들은 원전 비리 근절을 위해서 관리·감독을 강화할 필요는 있지만 이는 산업부가 아닌 원전 규제기관인 원안위가 중심이 돼야 한다고 보고 있다.
원안위가 생긴 것도 원자력 안전규제 업무와 진흥 업무를 엄격하게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운영해야한다는 IAEA의 권고 때문이었다. 후쿠시마 사고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원자력 산업을 진흥하는 부서와 이를 규제하고 감독하는 부서가 한 부처(당시 교육과학기술부)에 통합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원자력 진흥과 규제업무가 한 부서에 통합돼 있자 ‘원자력 규제 업무에 대한 독립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자력 진흥과 규제를 분리하는 법률이 제정됐고 원안위는 2011년 10월 대통령 직속의 독립된 행정기구로 탄생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당시 원안위가 원전사업자의 들러리 역할만 하는 자문기구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쏟아졌고 환경단체 등도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후 박근혜 정부들어 정부 조직안이 개편되는 과정에서 여야 협상을 통해 전체 위원 9명 중 4명이 국회 추천으로 할 수 있도록 했지만, 원안위는 국무총리소속으로 바뀌고 위원장은 차관급으로 격하됐다.
이 때문에 차관급인 원안위가 장관읍으로서 연구와 진흥을 책임지는 미래부나 산업부와 동등한 관계 설정이 어렵고, 유기적인 협조관계가 담보되기 어렵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실제로 원안위원장은 국무회의에 참석하지도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원안위의 권한을 높여야 한다는 법안까지 발의된 상황이다.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14일 원안위를 대통령소속으로 하고, 위원장을 장관급으로 격상하는 내용의 ‘원자력안전위원회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 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국무총리소속으로 격하됐던 원안위의 위상을 회복시키겠다는 것.
최민희 의원은 “진흥과 규제는 균형감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원자력 분야에서는 시작부터 한쪽으로 쏠려있어 균형을 맞춰줄 필요가 있다”며 “단순히 원안위원장을 장관급으로 격상시키는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위상 회복과 함께 지위에 상응하는 책임과 권한을 줘 원자력 안전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