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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고린도전서 13장(3) / “사랑의 덕목!(2)”
+ 본 문 : 고린도전서 13장 4절 - 7절 (신약성경 279쪽)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아멘!
돌이와 순이는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여섯살짜리 아이들이었습니다. 그 둘은 짝꿍이었습니다.
요즘 애들 조숙하잖아요? 서로가 서로를 매우 좋아했어요. 그러다가 뜨거운 사랑까지 간 거예요.
시대가 그러니까 어른신들 이해하십시오. 여자인 순이가 먼저 결혼하자고 프로포즈했습니다.
"얘, 돌이야! 나는 너를 좋아해. 내가 너를 사랑한단 말이야. 그러니 우리 결혼하자!"
순이의 사랑고백과 함께 청혼을 받은 돌이는 밤새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차마 말로 대답을 못하고, 사랑하는 순이에게 편지 한 장을 써서 정중하게 건넸습니다.
거기에는 순이를 향한 돌이의 이런 애절한 사연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얘, 순이야. 나도 너를 무지 무지 좋아해. 내가 너를 무지 사랑하는 것 너 알지?
그러나 미안하지만, 순이야, 나는 너와는 결혼할 수가 없어.
왜냐하면 우리 집안은 모두 가족들하고만 결혼을 했거든.
우리 엄마는 우리 아빠랑 결혼하셨고, 우리 할머니는 우리 할아버지랑 결혼하셨어.
그리고 우리 이모도 우리 이모부랑 결혼하셨고, 우리 고모는 우리 고모부랑 결혼하셨거든,
이처럼 우리 가족은 다 집안끼리만 결혼했잖아. 그런데 너랑 나랑은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친척도 아니고 남남이잖아? 그래서 미안하지만 나는 너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가 없단다.
순이야, 정말 미안해. 순이를 너무 너무 사랑하는 돌이로부터!"
여러분! 재미있었어요? 이런 우스운 이야기를 이해하고, 재미로 듣는 여러분들은 분명 어른입니다.
그러나 여섯 살짜리 유치원 아이의 수준으로 생각하면, 분명히 자기 집안은 다 가족들끼리만
결혼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이런 유치한 생각과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좀 더 시야를 넓혀서 모두, 또는 전체를 생각하거나 바라보지 않고, 그저 나, 또는 나의 가족,
내가 아는 우리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저 나만 잘 살면 되고, 우리 가족만 평안하면
되고, 내 부서만 잘 되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유치한 여섯 살짜리 돌이의
결혼관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너무나 유치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유치한 생각을 가지고 정말 웃기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옛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정말 유치하게 어린애들처럼 철없이 살았습니다.
보십시오. 교회 안에서 애들 장난도 아니고 ‘나는 바울파, 나는 아볼로파, 나는 게바파, 나는 그리스도파
나는 쪽파, 나는 대파’ - 그렇게 파당을 만들어서,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돌이와 순이는 유치한 로맨스라도 있었습니다만, 이것들은 예수님 사랑과는 180도 다른, 이기적이고
배타적이고, 다른 사람들을 조금도 배려할 줄 몰랐고, 그래서 그냥 싸웠습니다.
여러분! 이런 싸움이 왜 일어납니까? 오래 참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속상한 일을 당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할지라도 꾹 참아버리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향해서 참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싸운 것입니다.
여러분! 싸움이 왜 일어납니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온유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선대하는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온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그냥 싸운 것입니다.
여러분! 싸움이 왜 일어납니까?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시기심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면 칭찬해 주고, 축복해 주고 함께 기뻐해 주는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문제는 남들이 잘되는 꼴을 보기 싫어하기 때문에 시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믿음의 가족 여러분! 저의 모습,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신, 우리 예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우리 예수님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계시는 동안, 피조물인 인간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천대를 다 받으셨습니다.
버림도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하셨고
오래 참으셨고, 오히려 온유함으로 대하셨고, 결코 시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신을 이렇게 말씀으로 소개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의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아멘!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삶으로 오래 참으셨고, 온유하셨고, 시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당연히 이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이 따라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이 있는 곳에 사랑의 꽃이 아름답게 피고, 또 사랑의 열매가 아름답게 열리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사랑의 열다섯 가지 덕목 중에 세 가지입니다.
오늘 이 시간은 계속해서 사랑의 열다섯 가지 덕목 중, 넷째, 다섯째, 여섯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의 네 번 째 덕목은, 자랑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자랑하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특히 자기 PR 시대라면서 자신을 공공연하게 자랑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자기 자랑을 잘 합니다. 그러면서도 ‘너를 위한 나의 간증일 뿐이라.’ 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자랑하면 ‘잘난 체 한다’ 고, 상대방의 말을 무시해 버립니다.
여러분! 기억할 것은 나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면, 나 자신은 우월감을 느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자랑을 보고 듣는 상대방은, 상대적으로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고야 맙니다.
그래서‘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는 덕목 다음으로‘자랑하지 아니하며’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평등 시리즈’ 라는 이야기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사람의 나이 40대가 되면, 지식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공부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은, 어린 시절 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입니다.
40이 넘어가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똑같아진답니다.
50대가 되면 외모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예쁜 사람, 못생긴 사람은 어리고 젊은 시절 이야기입니다.
50이 넘어가면 배도 나오고 엉덩이도 쳐지고 두루뭉실해져서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60대가 되면 성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평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60이 되면 남자는 순해집니다.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억새 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나 비슷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70대가 되면 건강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나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나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래서 노인의 건강은 절대로 장담할 것이 못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80대가 되면 재물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 돈이 많으면 무엇하겠습니까?
가진 사람이나 못가진 사람이나, 재물의 많고 적음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입니다.
90대가 되면 생사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말은 살았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그것이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두고두고 생각해보면, 우리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도토리 키재기 아닙니까? 그게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은 자랑이 심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6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이 말씀대로라면, 함께 모였습니다. 찬송도 다함께 불렀습니다. 같은 설교를 들었습니다.
계시도 있었고, 방언도 있었고, 방언 통역자도 있었습니다. 문제 생길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모인 그들이 각각 따로따로 노는 따로국밥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열광적으로 찬송을 부릅니다. 거기에 뒤질세라 다른 사람이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큰소리로 암송하기 시작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라면서, 큰소리로 외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한 쪽의 사람들은 방언을 한다고 떠들면, 그 방언을 통역한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니 그 예배와 모임의 모습이 얼마나 무질서했겠습니까? 안 봐도 뻔하잖아요?
그래서 보는 사람들에게, 특히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도무지 덕이 안 되었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생겼겠습니까? “나 은사받았다. 너 은사받았냐? 너만 은사받았냐? 나도 은사받았다!"
그러면서 자기가 받은 은사를 과시하듯 자랑하고 뽐내다 보니까 무질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비록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 할지라도, 사랑은 이렇게 자신을 과시하고, 뽐내고,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교회를 무질서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우리 예수님은 그야말로 자랑할 모든 것을 갖추신 완전한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자랑하거나 과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까?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9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우리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하실 때도, 자의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주신 말씀만 전하신다고 겸손히 자신을 감추셨습니다.
자랑할 모든 것을 갖추신 예수님이신데도, 한 번도 자신을 자랑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본시 자랑할 것이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자랑하려고 들어서는 안되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를 자랑하기보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성도가 됩시다.
나를 자랑할 그 시간에 예수 십자가를 자랑하고, 다른 사람을 칭찬해 주는 성도가 됩시다.
바로 그런 성도가 자랑하지 않는 사랑의 덕목을 가진 성숙한 성도다운 성도입니다.
사랑의 다섯 번 째 덕목은, 교만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자랑이 외적인 것이라면, 교만은 내적인 것입니다.
자랑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교만은 마음에 행동으로 나타나는 정말 못된 자세입니다.
구약성경 잠언서 16장 18절의 말씀을 우리가 잘 압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교만이 선봉을 서서 앞서갑니다. 그 교만을 반드시 뒤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패망입니다.
이걸 알지 못한 그 옛날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무척이나 교만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6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는 신실하고 겸손한 주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고린도 교인들을 가르쳤습니다.
자기들을 높이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을 높여주는 것도 원치 아니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이 파당을 만들어 싸웠습니다. 그 원이 바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는 사도 바울이 다시금 고린도를 방문하는 것조차 원치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은 이미 배울 것을 다 배웠다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에게서도 배웠고, 아볼로에게서도 배웠고, 게바에게서도 배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것 다 알고 있는데, 바울이 온들 우리에게 무엇을 더 가르쳐 주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음행을 저지른 자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계모를 범한 자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로마법에서조차도 엄격하게 금지한 일이었습니다.
더 나쁜 것은 그러한 음행을 저지르면서도 회개할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자기가 잘못했으면서도 큰소리치는 것이 교만한 자의 특징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의 말씀입니다. /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그 당시 이방인들은 음식물, 특별히 고기를 통해서 세상의 더러운 잡귀들이 사람의 몸속에 침투해서
좋지 않은 영향을 일으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푸줏간에서 고기를 잡으면 먼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일부는 불태우고 일부는 제사장에게 주고 나머지는 도로 가지고 왔습니다.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리면, 그 신이 고기를 지켜주기 때문에 더러운 잡귀가
그 고기에 가까이 오지 못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시장에서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친 고기가 상당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상의 제물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꺼림직 하니까 아예 시장에 나가서 고기를 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친척의 잔칫집에 가서도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고기를 마음대로 먹었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다. 고기는 어디까지나 고기에 불과할 뿐이다. 이방신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또 세상에 잡귀들이 고기를 통해 사람의 몸에 침투한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소리일 뿐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거리낌 없이 고기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우상의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보고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사랑 없는 지식은 교만해서 형제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사랑으로 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고린도 교인들은 교만했기 때문에 서로 대적했습니다.
그들은 교만했기 때문에 자기가 잘못해서 음행을 저질렀으면서도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교만했기 때문에 형제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사랑은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것입니다.
사랑이신 우리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모든 무릎으로 예수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케 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나를 높이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높이십시다.
나는 낮아지십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사랑의 여섯 번 째 덕목은, 무례히 행치 않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무례히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 생각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사랑은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랑으로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 소홀히 여기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무례히 행치 않았습니다.
보십시오. 그런데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은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무례했습니다.
또 한 가지가 방언의 문란성이었습니다. 예배시간에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몇 사람이 큰소리로 떠들면서 방언을 말하니까, 예배의 경건성이 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할 때도 방언의 은사를 받은 몇 사람이 큰소리로 떠들면서 방언기도를 하니까,
조용하게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지장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내 기도가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기도도 역시 소중한 것입니다.
한 제목을 놓고 통성으로 기도할 때에, 함께 큰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각자 개인 기도를 드릴 때는, 다른 사람이 지금 어떻게 기도하는지 살펴가면서 다른
이들과 조화를 맞추어 가는 기도를 드릴 때, 무례히 행하지 않는 기도가 됩니다.
기도뿐만이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내 멋대로 살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이해와 배려가 사랑의 덕목 중 ‘무례히 행치 않는’ 여섯 번 째 사랑의 덕목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 주일에 이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의 덕목 세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사랑의 첫째 덕목은 오래 참고, 둘째 덕목은 온유하고, 셋째 덕목은 시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의 넷째 덕목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랑하려면, 내가 아니라 예수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다른 사람을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다섯째 덕목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나를 높이려고 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다른 사람을 높여 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여섯 째 덕목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존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내 멋대로 살려고 하지 말고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의 실천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의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아름다운 열매가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라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