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빈틈없이 탄탄하게 잘 만든 영화다. 그리고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이 영화는 기존 블록버스터 공포 영화들과는 다른 색깔이 있다. 우선 코미디적 설정이 지나친 공포감을 순화시키고 있다는 점, 한국의 사회정치적 단면이 자주 반영되고 있다는 점, 박수 받는 영웅이 아닌 박수 받지 못하는 소시민의 가족애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 물론 이 세가지가 다른 공포영화에서 나타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더 도드라진다.
봉준호는 한국에서는 블록버스터가 가진 엄청난 제작비에 대한 부담 때문에 더욱 확실하고 탄탄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부담을 안았을 것이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시리즈처럼 환타지와 베스트셀러에 의해 뒷받침 되거나, 미국의 각종 <…맨>시리즈처럼 흥행만화에 탄탄히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면, 너무나 식상한 헐리우드 공포물의 공식에 길들여진 관객을 사로잡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공포 영화와는 변별되는 자기식의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풍부한 코미디, 사회정치적 반영, 소시민의 삼각형은 좋은 소재지만 그래서 자칫 우스꽝스럽고 억지스런 공포물로 귀착될 수 있는 여건을 안고 출발하였다. 하지만 봉준호의 뚝심은 이런 것들을 너끈히 융합해냈다.
아무튼 봉준호는 결국 다시 한 번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정식 사회파 감독은 아니지만, <살인의 추억>처럼 짧은 산업화와 군부정권으로 인한 한국사회의 그늘을 영화 속에서 현재적으로 재조명하는데 탁월한 재주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일단 1300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기록 때문이라도 비판적으로 이 영화를 보기 시작한 내게도 별 불만 없는 영화가 되었다.
코믹한 캐락터와 연기는 공포물에서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 흔히 쓰는 수법이지만, 이 영화는 무력한 소시민의 일상과 평온을 강조하는 기능을 하였다. 특히 공포물임에도 불구하고 밤의 장면이 비교적 적고 낮의 공간이 압도적으로 유지되면서 오직 공포의 대상에만 집중시키지 않고, 사회정치적 단면들을 관객들에게 적절히 대면시키는 기능도 담당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국사회의 단면은 여러 가지이다. 군부독재의 소위 개발독재에 의한 짧은 근대화로 인해 생긴 각종 권위주의와 비리의 장면은 오히려 소시민 자신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 나서게 하는 요인이 된다. 과학자나 의사들도 군인들처럼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환자는 연구 대상이 되고 인격적으로 무시되며, 경찰과 군인도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보다 오직 명령에 복종만 할 뿐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다. 소위 운동권이었던 지식인도 천박한 자본주의의 야만적인 법칙에 따라 변절하고 친구를 팔아먹고, 공무원도 개인적 이익을 위해 틈만 나면 뇌물을 요구하고, 역설적으로 법의 그늘을 역이용하며 갱단은 돈을 챙긴다. 한편 같은 도시에 사는 거지들은 완전히 관심밖에서 산다. 소시민은 무력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그들이 몸소 나선다. 여기서 나는 한국 영화의 특징이 되어버린 처절함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왜 한국 영화는 처절한가? 끔찍한 장면들이 넘치고 관객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가? 왜 처절함에 우리는 내성을 갖게 되었는가? 심지어 <무사>같은 무술영화도 처절한 몰락을 보여준다. <살인의 추억>의 장면들도 그렇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김기덕의 영화를 보더라도 처절과 잔인이 심드렁하다시피 구사된다. 그렇게 처절과 잔인은 이곳 한국에서 특정 개인이 구사하는 기법이 아니라 현대 한국영화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그 이유에 대해 우선 관객의 시선 잡기라는 상업적 계산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상투적이다.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우리 사회의 절망감 때문이 아닐까. 한국문화의 특징으로서 ‘한’을 얘기한다. 엄청난 강자의 폭력 앞에 저항할 수 없는 이들이 그것을 해소하지 못하고 가슴에 쌓아 생긴 슬픔의 병명이 '한'이다. 거대한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겪은 무수한 전쟁과 무능한 후기 조선왕조 시절 지배계급의 착취, 그리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착취로 인해 이 땅은 여성의 한이 유독 짙게 응어리져 쌓이고 계승되어 왔다. 그것이 남도와 산골에서는 무당의 살풀이로, 판소리로, 타령으로, 아리랑으로 승화되어 나타나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동학과 일제시대, 6.25, 그리고 개발독재의 과정을 거치면서 과거의 상놈 천민들은 소시민으로 변하였다. 한때 그들은 이름만 좋은 백성, 그리고 민중으로도 불린적이 있지만, 지금은 서민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억눌린 슬픔과 절망이라는 ‘한’ 이 바로 서민의 가슴 속에 처절함에 대한 기호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그것은 분명의 ‘한’의 변형된 모습이지만, 삭히고 삭혀 풀어내는 전통의 양식에서는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라커인 윤도현이 부른 ‘아리랑’과 다른 여가수의 ‘진달래꽃’은 얼마나 속 시원하게 한의 응어리를 터뜨리고 있었는가?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과는 달리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억압 받아 생긴 ‘한’을 더 이상 억누르지 않고 분출시키거나 처절함에 대한 탐닉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물론 일상에서는 몇 개의 당근에 자위하며 살고 있지만. 이런 이유는 아무래도 90년대의 정치적 민주화의 성과와 경제적 성공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그 ‘한’이 처절함과 더불어, 영웅이 아닌 소시민의 우당탕탕 왁자지껄한 활약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소시민은 무력하다. 술에 빠지거나 보신주의와 적당한 비굴을 몸에 익혀야 한다. 그들은 억울하지만, 법과 제도는 언제나 돈과 권력을 지배한 자들을 위해 움직인다. 그러나 이 영화처럼 특별한 재난 즉 가족의 구출이라는 급박함 속에서 소시민은 급속히 단결하고, 각자의 울분과 재능을 동시에 분출시켰을 때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런 기억을 우리는 사회적으로 4.19와 87년에 경험한 바 있다. 그때는 그들이 민중으로 불렸다. 이 영화의 가족 구도는 그런 사회적 현상의 연장에서 파편화된 서민인 소시민 가족의 분출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외 이 영화는 주한 미군과 WTO 같은 각종 국제기구들의 대처가 상당히 현실과 동떨어진 거리를 유지하게 함으로써 세계를 지배하는 힘의 근원에 대한 불신까지 드러내고 있다. 정말 반미영화라는 논란이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다. 아마도 1000만 관객 돌파라는 타이틀 때문에 애초 이 영화에 대한 반미 논란이 한국에서는 어려웠는지 모른다, 극우가 판치는 나라에서.
끝으로 괴물이 상징성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포름 알데히드라는 독극물의 무단방출로 인해 괴물은 탄생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그 상징은 넓고 깊다. 홉스는 국가를 구약에서 나온 괴물 리바이어던에 비유한 바 있다. 국가뿐이겠는가? 저 원시적부터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자연현상을 우리는 괴물신화로 해석해오지 않았는가? 현대의 소시민들이 지키고 싶어 하는 안온을 파괴하는 것은 모두 괴물로 설정될 것이다. 군대라는 괴물, 법이라는 괴물, 돈이라는 괴물, 학교라는 괴물, 직장이라는 괴물 등 괴물은 수없이 많다. 사실 그것은 국가라는 괴물의 수족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것이 괴물의 구체적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것의 명령에 복종해 사는 소시민이다. 국가가 크면 개인은 작다. 어쩌면 여기서 제시된 괴물처럼 괴물이란 자연의 단순한 돌연변이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만들어낸 현대 문명 자체이다. 문명 자체가 돌연변이 괴물이다. 아닌가? 홉스는 국가를 요청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잠재적 위험을 통찰하여 그것을 리바이어던이라는 불렀던 것이다.
영화는 끝났다. 그렇다면 진정 괴물에 맞서 소시민은 언제 일어날까? 하지만 개인들은 너무나 무력하다. 모든 상상력과 사유가 이미 테두리 안에 갇힌 것 같다. 송강호는 눈 내리는 한강 둔치 공원 매점에서 장총을 들고 어둠을 응시하다, 잠이든 거지 아이를 모듬으며 눕는다. 어둠이 깊고 깊다. 밤도 깊다.
사족 : 해석의 여지가 많은 영화는 내게 재미나고 좋은 영화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둠과 동시에 해석의 여지를 풍부하게 제공한 재미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