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조선 땅에 발을 들인 지 7년 만에 아이들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간 남덕은 자신이 떠나올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친정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집은 폭격으로 페허가 되었다. 언니도 남편을 잃고 친정에 와 있었으며, 혼란스러운 상황이라서 그나마의 유산도 처분할 수가 없었고, 그저 세 여인네와 아이들이 서로 의지하며 삯바느질로 겨우 연명할 뿐이었다. 남덕은 큰 결심을 하여 도쿄 대학가에서 서점을 하는 친구에게서 5만 엔 가량의 일본서적을 사들여서 이중섭의 오산학교 후배인 마씨에게 발송하여 판매를 부탁하였다. 다행히 첫 거래는 잘 성사되었다. 그러자 간댕이가 붜서는 첫 거래보다 5배가 넘는 27만 엔어치의 책을 보내게 되었는데 마씨가 그만 부도를 내고 잠적해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중섭이 전해듣고는 수소문하여 찾아보니 마씨 사는 행색이 너무도 곤궁한지라, 8만 엔 받는 걸로 시마이하고 말았다. .... 그렇다면 중섭이 그 8만 엔을 일본 마누라한테 고스란이 보냈느냐? 헐... 술처먹고 말았디야. 조센징노머새끼... 누가 누굴 욕할 게 없어야.
허나영 지음 / 출판사 아르테(arte) | 2016.07.15
이중섭, 백 년의 시간을 넘어 그를 다시 만난다!
저자 : 허나영
들어가는 글
이중섭의 <돌아오지 않는 강>을 그려보려고 해. 물론 유화로지. 김남희의 그 ‘네팔 소녀’는, 그만 관둬야겠어.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군. 내가 그 표정을 그려낼 자신도 없고 말이야. 다시 그려보려고 뭉개고 뎃생을 새로 하긴 했는데...... 에이~
이중섭은 완전히 자포자기한 듯한 예감이 드는 그림도 그렸다.
이중섭(李仲燮, 1916∼1956) 백년의 신화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이중섭(1916-56)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평양, 정주, 도쿄에서 학업을 쌓았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화가 활동을 시작했고, 함경남도 원산으로 돌아온 후 해방을 맞았다. 한국전쟁으로 제주도, 부산 등지에서 피란생활을 했고, 전쟁 직후에는 통영, 서울, 대구 등지를 전전하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56년 4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식민지, 전쟁, 분단 등으로 얼룩진 한국의 근대사를 관통하면서도 이중섭은 끈질기게 '예술가'로서의 삶을 고집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민족의 상징인 '소'를 서슴없이 그렸고, 한없이 암울한 현실을 자조하는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가난한 피란시절에도 가족과 행복한 시절을 보내며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가 하면, 전쟁 후에는 강렬한 의지와 자신감으로 힘찬 황소 작품들을 쏟아내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표현에 충실한 '정직한 화공'이 되고자 했고, 한국의 전통미감이 발현된 '민족의 화가'가 되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진 후 사기로 인한 빚에 시달렸고, 경제적 생활고 속에서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 질환으로 불행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결국 쓸쓸하고 애잔한 작품들을 뒤로 한 채 홀로 생을 마감했다.
올해 이중섭의 탄생 100주년, 작고 60주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이중섭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한국의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한 천재적인 예술가의 '꿈과 좌절'의 경로를 되짚어보며,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과 예술의 의미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1916-50 평원-평양-정주-도쿄-원산: 화가가 된 중섭
이중섭은 1916년 9월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나, 외가가 있는 평양의 종로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 이후 1930년 정주의 민족사관학교인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예일대학교 출신의 미술교사 임용련(1901~?)의 지도를 받으며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1936년 일본 도쿄의 제국미술학교를 거쳐 1937년~1941년 '문화학원'에서 유학했는데, 문화학원은 당시 일본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의 사립학교였다. 문화학원의 선배들도 적극 참여했던 ‘자유미술가협회(1940년 이후 미술창작가협회로 개칭)’에서 작품 발표를 시작해서 일본의 주요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협회의 회원 자격을 얻기도 했다. 1941년에는 도쿄에서 이쾌대, 진환, 최재덕, 김종찬 등과 함께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여 전시를 열었고, 미술계로부터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1943년 태평양전쟁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가족들이 있던 원산으로 귀국하였으며, 1945년 5월 해방 직전 문화학원의 후배였던 야마모토 마사코와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50-53 서귀포-부산: 전쟁 속에 피어난 예술
1950년 12월 원산 폭격을 피해 어머니는 남겨둔 채 아내 및 두 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을 내려온다. 이 때 그 이전까지 제작한 작품을 모두 어머니 품에 남겨놓고 오는 바람에, 이중섭의 1950년 이전 작품은 극히 드물다. 피란지 부산이 너무 비좁았던 관계로 1951년 제주도로 거처를 옮기는데 여기서 약 1년간 가족들과 가난하지만 행복한 피란생활을 한다.
1951년 12월 부산으로 돌아와 피란촌를 전전하며 가난한 생활을 이어간다. 1952년 7월 아내와 두 아들이 일본으로 돌아가서, 홀로 남은 가운데 작품 활동과 전시회 참가, 잡지 삽화나 도서 표지화 그리기 등을 계속한다. 그러나 부산에서 제작된 수많은 작품이 대화재로 불타서 대부분 없어진 것으로 전한다.
엽서화: 무언의 대화
이중섭은 일본 유학기 도쿄의 문화학원에서 후에 아내가 되는 야마모토 마사코를 후배로 처음 만났다. 문화학원을 졸업한 후에도 이중섭은 1943년까지 도쿄에 머무르며 마사코에게 수많은 '그림엽서'를 보냈다. 한 면에는 가득 그림을 그리고, 다른 면에는 오로지 주소만 적혀 있으며, 글은 전혀 없는 '무언의 엽서'들이다.
총 90여점의 엽서화가 알려져 있으며, 그 중 일부가 전시되고 있다. 처음에는 먹지를 대고 선을 그린 후 옅은 색채를 가미한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그림을 그리다가, 점차 자신감과 투지가 불타는 그림으로 발전한다. 엽서화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두 연인의 사랑이 점차 진전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은지화: 은지에 새긴 영혼
은지화는 이중섭이 창안한 새로운 기법의 작품이다. 양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은박을 새기거나 긁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른 후 닦아내면, 긁힌 부분에만 물감자국이 남게 된다. 그렇게 해서 깊이 패인 선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드로잉이 완성되는데, 평면이면서도 층위가 생길 뿐 아니라 반짝이는 표면효과도 특징적이어서 매우 매력적인 작품이 된다. 이러한 기법은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이나 금속공예의 은입사 기법을 연상시킨다. 누구보다 한국의 전통을 존중했던 작가가 의도적으로 전통 기법을 차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중섭은 상당히 오랜 기간 약 300점의 은지화를 제작했다는 증언이 있는데, 그 중 일부가 전시장에 진열되었다. 제주도 서귀포 시절 행복했던 가족들의 모습을 추억하는 것에서부터, 비극적인 사회 상황과 자신의 처참한 현실을 암시하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장면들이 예리한 칼로 새겨져 있다. 이중섭은 이 은지화들이 후에 ‘벽화’를 그리는 밑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거대한 벽화를 그려서, 예술이 공공장소에서 많은 이에게 향유되는 꿈에 부풀곤 했다.
1953-54 통영: '소'의 걸음으로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전쟁 직후 1954년 6월경까지 월남한 공예가 유강열(1920-76)의 주선으로 통영 나전칠기전습소에서 강사로 재직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의욕적인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아름다운 통영의 풍경을 그린 유화작품이나 유명한 '소' 연작들이 이 때 제작되었다. 이중섭의 개인전이 최초로 열리기도 했고, <4인전>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으로 화가의 경력을 쌓아갔다.
편지화: 사랑의 편린
이중섭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7월경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졌다. 이후 그는 여러 지역을 정처 없이 떠돌며 가족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언제든 곧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겁고 다정다감한 편지를 많이 썼다. 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을 염려하며, 그림을 곁들인 사랑스러운 편지들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1955년 중반 이후 점차 절망 속으로 빠져들면서 편지를 거의 쓰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내로부터 온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중섭이 보낸 편지들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약 70통, 150매에 이른다. 이 중 일부가 여기 전시되고 있다. 이 편지들은 이중섭의 생애와 작품의 관계를 연구하는 근거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록적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자유자재의 글씨와 즉흥적인 그림이 어우러져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기에도 손색이 없다.
1954-55 서울: 희망의 노래
가족들과는 떨어진 가운데 홀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누상동, 상수동 등 지인의 집에서 기숙하며, 1955년 1월에 미도파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준비하는데 몰두했다. 일본의 아내가 일본에서 책을 사다 한국에 판매하여 그 차익으로 수익을 내는 사업을 했으나, 중간 업자가 돈을 떼먹는 바람에 극심한 빚에 시달리게 된다. 이 빚을 갚고 일본에 있는 가족들과 만나기 위해, 개인전으로 통해 작품을 팔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이 전시에서 작품은 약 20점이나 팔렸으나, 수금이 되지 않아 곤경에 빠지기 시작한다.
1955 대구: 좌절의 순간들
1955년 1월 있었던 서울 전시에 이어 4월 대구의 미국공보원 화랑에서도 개인전을 개최한다. 절친했던 시인 구상(1919-2004)의 도움으로 마련된 이 전시회는 서울에서 보다 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가장(家長)'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 채 "예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고 자책하며,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인 질환에 시달렸다. 대구 외곽 왜관에 있던 구상의 집에서 머무르며, 요양생활과 작품제작을 계속했다.
1956 서울(정릉): 마지막 기억
병원을 전전하던 이중섭은 1955년 12월경부터 서울의 정릉에서 화가 한묵(1914~), 소설가 박연희(1918~2008), 시인 조영암(1920-?) 등과 함께 생활했다. 이 때 문예지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고, <돌아오지 않는 강> 연작을 포함한 마지막 작품들을 남겼다. 그러나 거식증으로 인한 영양실조, 간장염 등으로 인해 다시 병원생활을 하다가 1956년 9월 6일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서울 망우리공원에 묘소와 묘비를 마련했다.
[ 이중섭 그림 모음 ]
1955, 전투수기 "저격능선"의 표지그림 1955, 자화상 1955, 성당 부근 1955, 돌아오지 않는 강 1955, 노란 달과 가족 1955, 나무 위의 새를 바라보는 예수 1955, 나무와 달과 하얀 새 1955, 꼬리가 묶인 채 서로 죽이려는 야수 1954, 피난민과 첫눈 1952, 추모 1951, 초상화 1951,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1951, 바닷가의 아이들 1951, 물고기가 그려진 소 1947, 시집 속표지 그림 아내에게 보낸 편지 1952, 월간 "문학예술"에 그린 삽화 1942-45, 소년 가족과 비둘기(1956)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길 떠나는 가족 꽃과 어린이 나무 위의 새를 바라보는 예수 나무와 달과 하얀새 나뭇잎을 따려는 여자 노란 태양과 가족 다섯 아이와 끈 달과 까마귀 닭 도원(은박지) 돌아오지 않는 강 동촌유원지
두 어린이와 복숭아 두아이(은지화)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두 어린이와 사슴 떠받으려는 소 문현동 풍경 물고기와 노는 두 어린이 바닷가의 아이들 박고석-범일동 풍경 벚꽃 위의 새 복사꽃이 핀 마을 봄의 아이들 봄의 어린이 봉황(부부) 부부 부인에게 보낸 편지 사나이와 아이들 새장에 갇힌 파랑새 서귀포 환상 성당 부근 섶섬이 보이는 풍경 세사람 소와 여인 시인 구상의 가족 어머니와 복숭아와 아이들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 연꽃밭의 새와 소년 욕지도 풍경 은박지 그림 은지화 적십자병원에서 그린 마지막 그림 정릉 풍경 춤추는 가족 토끼풀 꽃이 있는 바닷가 통영 충열사 풍경 통영 풍경 투계 판잣집 화실 편지화 피난민과 첫눈 한묵-이중섭상 해와 아이들 향도 활쏘는 남자 황소 황소 흰소 흰소
[출처] 이중섭의 일본인 부인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을 아시나요?|작성자 김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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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그 어느날 오후 원문보기 글쓴이: 알래스카 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