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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다 올려도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불편하시면 지워주십시오)
킬리만자로 등반기
8월 20일, 저녁밥을 먹고 해외등반에서 돌아와 시차적응과 모자란 잠으로 피곤 하였지만 그래도 설레임이 남아 컴퓨터를 켜놓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금번 휴기기간 중 다녀온 아프리카 여행 사진들을 어떻게 올려야 좋을지에 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마음속에 그려왔던 킬리만자로산에 대한 것이며, 끝없이 펼쳐진 사파리에 대한 동경심이 컸던 나머지 사진을 찍어 대다보니 카메라의 기록수치가 천 여건이나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7시가 조금 넘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휴가를 다녀왔으면 전화를 해 주어야지 왜 걱정하게 그냥 가만히 있느냐? 며 당장 호프집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친구가 좋다는게 다른게 뭐 있겠는가? 다 나를 위하는 일인데...나는 긴 여독에 다소 피로감을 느꼈지만 친구의 호의를 즐겁게 생각하고 약속된 장소로 나갔다.
그 자리에서 친구는 힘들게 여행을 다녀 온 소감을 글로 남겨 놓는 것이 좋다며, 기록물이 있으면 당장 어디엔가 올려놓아야 한다며 말하였다. 그래야 후일에 그 여행에 대한 회상을 쉽게 떠 올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기억을 되살려 당장 실행에 옮기라는 추상같은 명령(?)을 하였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전문 산악인이나 글재주꾼들이 쓴 기행문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글재주나마 이렇게 킬리만자로 등반기를 쓰기로 마음먹게 되었고, 이글은 쓰기 위하여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를 따로 연구하지 아니하여 내용이 충실하지 못하며,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라기보다는 먼 훗날 나 자신을 돌아보며 그 시절을 그리워 하고자 함임을 밝혀 두고자 한다.
1. 아프리카의 지붕 킬리만자로를 오르다.
(2012. 8. 9∼8. 16)
8. 9(목)
12:30 진주고속터미널에서 우리를 태운 버스가 서울을 향해 달린다. 우리는 지리산 여행사 K(사장)님을 대장으로 하여 11명이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등반에 나선 것이다.
서울에 도착하여 리무진 버스에 옮겨 타고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휴대전화기를 가지고 갔으나 자동 로밍이 되지 않아 공항 내 대여점에서 전화기를 임대했다. 임대 비용은 통화료를 별도로 하고 1일 2,000원이라고 하였다. 얼마나 효용가치가 있을지가 의문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론 제대로 준비를 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계획잡은 일정에 갑자기 끼어들어 거칠고 먼 아프리카 킬리만자로에 대한 등반을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통영 검역소에서 황열병 예방접종 주사를 맞았고, 나름 말라리아에 대비하기 위하여 처방약을 받아 두긴 하였었다. 그러나 등반 장비는 제대로 갖추질 못하였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은 어두웠다.
탑승장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21:55분에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국제공항을 향해 출발 하였다. 장장 13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이 좁은 좌석에서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지난 6월부터 직항로가 생겨났기 망정이지 그 이전엔 다른 지역을 경유하다 보니 22시간이 소요되었었다고 하였다.
오래전에 인도네시아 키나바루 등반을 가면서 비행기를 9시간이나 탔는데 갑갑함에 중간에 뛰어내리고 싶었더라는...
(인천공항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짐이 많았다. 커다란 카고백 하나씩에다 배낭에다 휴대용 가방까지...등반시에는 배낭은 우리가 메고, 카고백은 포타들이 운반을 해준다.)
아무튼 참고 기다리니 일단은 먹을 것이 나왔다. 나는 먹는 것에 관한 한 마다않는 성격이며 질보다는 양이다. 땅콩-오렌지 주스-맥주가 차례로 나왔다. 이어 저녁식사로는 낙지볶음을 선택했다.
우리는 음식의 나오는 순서가 바뀌었다고 말하면서 K사장님이 맥주를 더 달라고 하였고, 산행대장님이 위스키를 시켜 주었다. 거기에다 내가 와인을 주문해서 먹었더니 거나해 지기 시작했다. 나는 항공기 안에서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줄로만 알았더니 아예 승객들에게 술을 공짜로 주니 이게 웬 떡이냐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산행대장님더러 비행기에서 자꾸 술을 내어주면 술김에 갑갑하다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젠 잠이나 슬슬 청해볼까 하고 눈을 감았으나 정작 잠은 오질 않는다.
심심하기도 해서 통로 건너편에 앉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나이가 50으로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노총각(김원준) 일행 29명은 경상북도의 지원으로 1년간 케냐 등 아프리카 일원에서 새마을 봉사활동을 펼치기 위해 가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노총각님은 이전에도 인도 등지에서 봉사활동을 해 왔었고, 하여간 세계 50개국을 다녔다고 하니 경력이 대단하였다. 우리는 기회가 되면 서로 연락처를 갖고 소식을 나누며 그가 귀국을 하면 막걸리 잔이라도 같이 나누자고 약속을 하였다.
아프리카를 가는 길은 너무나도 멀었다. 좁은 비행기 좌석에서 다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13시간을 가야 한다는 사실도 고역이었다. 운항경로 창을 보고 또 보고...참을 청했다. 자는 둥 마는 둥. 그러나 길게 가지 못하고 금새 깨어나고 말았다.
멀리 창문을 바라보지만, 출발 할때도 어둠이었던 것이 거의 다 다가 갈때까지도 어둠에 휩쌓여있다. 설마 검은 대륙 아프리카라 모두가 검게 보이지는 않을터...
그렇게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였고, 두어번 화장실을 오가기도 하며 창을 통하여 멀리 아래편에 보이는 바다나 육지의 생김새를 보면서 비행기에 몸을 맡긴 채 우리는 아프리카로 달려가고 있었다.
카페에 글을 올리며 여기에서 이름을 거론하고 가야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글씨를 써는데 볼펜이 나오질 않았다. 짐을 준비할 때 볼펜 여분을 두 개나 챙겼는데 그게 어디에 숨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 볼펜은 여행기간 중에 꼭 필요한 것인데 달리 구할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하여 가까이 있는 스튜어디스에게 다가가 사정 이야기를 하였더니 선 듯 나더러 가지라며 자신의 볼펜을 내어 주었다.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짐을 찾고 있는데 볼펜을 주었던 그 스튜어디스에게 인사를 하며 나중에 카페에 글을 쓰게 되면 고맙다는 표현을 할 것이라고 하였더니 가슴에 단 자신의 이름표를 보여주며 그렇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KE 959편(인천→나이로비) 이지윤.
친절하고 고마웠다.
8. 10(금)
인천공항을 출발한지 13시간 가량 걸린 비행 끝에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도착했다. 우리가 오기 전인 올해 6월에 직항로가 생겨나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수속을 밟고 내려오니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피부가 시커먼 사람들 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 인류의 진정한 뿌리인 종가집 사람들 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짐을 찾아 대기실로 나오려는데 우리를 마중나온 사람이 있었다. "앗! 한국 사람이네" 나는 산행대장님이 가이드가 나올 것이라는 말에 시커먼 현지인이 나올 줄로만 알았다. 알고보니 이곳에서 여행사를 운영하시는 분이었다.
나이로비는 아프리카 적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고도가 높아 날씨는 다소 서늘하였다. 마치 우리나라의 가을을 연상케 하였다. 우리들이 한국에서는 혹서기를 겪다 왔으므로 정말 피서를 오긴 잘 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마침 우리가 시내를 진입하는 시간이 출근시간이라 시내의 통행은 매우 복잡하였다. 처음 공항 주차장에서부터 느낀 것인데 이곳 사람들의 주차질서는 매우 무질서 하였고, 그런데도 자신들은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못하고 묘기를 부리듯 교묘하게 이동을 하는 것이 경이스러울 정도였다.
우리가 도착한 시각이 아침이어서 사람들이 걸어서 출근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엔 대형버스란 거의 없고 우리나라 봉고차 정도의 차들과 승용차 크기의 탈것들이 대중교통의 주류를 이루고 있고, 특별히 지정된 정류소가 없었고 지나는 길가에서 세우고 차를 타고 내리는 것 같았다. 이곳의 부유층에서는 일본제품의 고급 승용차를 가지고 있었다. 대중교통 수단이 열악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먼 곳까지 걸어서 출퇴근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나는 넓은 들판이나 도로가를 걸어서 출근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무척이나 역동적이라는 첫인상을 받았다. 어려운 여건임에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지나는 우리들에게도 손을 흔들어 반가움을 표시하는 그들의 얼굴에서 희망이 서려있음을 볼 수도 있었다.
(차를 타고가며 카메라를 들이 대었더니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편견이 없고 감정의 숨김없는 귀여운 청년이다. 아무튼 건강하게 잘 자라거라.)
아침밥을 먹기 위해 여행사 사장님의 안내를 받아 식당을 찾아가는 길엔 5일장인지, 뭔지를 알 수는 없었지만 포장이 되지않은 황토빛갈의 넓은 공터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란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아오긴 하였지만 젊은 아낙이 젖가슴을 내어 놓고 어린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며 생선을 손질하는 모습이며, 우리 중 일행이 어린아이가 안타까워 땅콩을 사서 건네주자 다른 아이가 그것을 얻어먹으려고 달려드는 모습, 물건 하나라도 더 팔아보려고 소리를 치는 남자들, 그리고 인력시장을 기다리는 듯 작고 낡은 차량을 세워 놓고 그 주위에 잔뜩 몰려있는 젊은이 등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머릿속은 6∼70년대 우리의 현실을 떠 올려 보면서도 오히려 그때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연한 모습에 가슴에 울컥한 것이 솟아 오르지만, 그렇다고 값싼 동정을 펼치기에는 너무나 대상이 많을 뿐더러 그들 전체의 감정을 다스리기에는 우리들이 감내 할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비로소 우리가 아프리카에 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아는 아프리카에 대한 소설은 세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카렌 블릭센이 쓴 '아웃 오브 아프리카'이고, 두번째는 그 유명한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 그 다음은 르 클레지오의 '아프리카인'이었다.
그중 킬리만자로의 눈은 소설을 읽었고, 그것을 통하여 아프리카를 동경하여 왔으며,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영화를 보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은 그 내용을 접하지 못하였다. 나는 킬리만자로의 눈에 흥미가 많은 편이다. 주인공 해리가 다리에 패혈증에 걸려 킬리만자로 산록에서 죽어가는...
우리가 탄 차는 차선을 지키지 아니하고 급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노련한 운전기사이고, 아니면 막무가내식 운전이었다. 문제는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조그만 틈만 나면 재빨리 끼어들었고, 처음부터 차선이란 아예 무시되고, 갓길과 언덕길, 그리고 심지어 산길에서도 끼어들었었다.
그렇게 하다보면 여기저기서 사고가 날 것 같은데 그래도 사고가 별로 나지 않는 것은 눈여겨보니 우리가 탄 차가 고속도로를 달릴 때 상대편에서 차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중앙선을 무시하고 앞지르기를 하다 급하게 중간에 자기 차선으로 끼어들면 다른 차들이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고 받아 준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아하! 바로 그것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었다. 무질서 속의 양보! 우리나라 같으면 삿대질을 하고 안 끼워 넣어 주려고 하다보면 대형사고가 날 것 같음에도 그들은 그럴 경우는 느긋한 마음으로 운전을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횡단보도란 것도 없기 마련이어서 사람들은 자신이 알아서 차를 피하며 도로를 건넌다. 개나 염소 또한 사람을 닮아 비슷하게 행동을 취하였다.
시내를 비롯한 들판은 언덕이란 거의 없고 초원으로 이루어져 언제라도 사자가 튀어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여긴 가로수 나뭇가지들의 모습부터가 다르다. 킬리만자로의 자료 사진에서 보듯 가지가 넓게 퍼지고 잎이 듬성듬성한 가시나무이다.
(차를 타고 지나며 차창밖으로 카메라 샷을...뒤편의 끝없이 넓은 들판은 모두가 옥수수밭이다. 대체 저 넓은 곳의 농사를 어떻게 짓는지가 궁금했다.)
사람들의 삶은 대부분 칙칙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불행하다고 말하면 큰 실수를 하는 것이다. 통계치를 알 수가 없지만 예전에 본 자료에 의하면 소련과의, 그리고 내분전쟁으로 지긋지긋하고 지질이도 가난한 아프카니스탄 사람들이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하는 행복지수가 세계적으로 1∼2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두고 보면 이곳의 사람들도 아마도 그에 못지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도 언급 하였듯이 이곳 사람들의 활동적인 삶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내가 이곳을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관광산업과 이동통신 산업 열기가 대단하단다. 비록 지금 당장은 가난하고 힘든 삶이지만 이 황량한 평원의 지배자들로서 먼 장래 세계의 주인공이 되기를 꿈꾸는 그들의 모습이 있기에...
차를 달려 한참을 가니 번화가로 접어들었고, 이곳에서부터 차들이 많아져 정체현상이 나타났다. 우리가 탄 차는 넓은 시내를 돌아가는데 목적지로 제대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차를 탄 사람보단 걷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 시내는 무슨 피난민 행렬들이 지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교복을 입은 마사이족 학생들의 모습이 가끔 눈에 띈다. 우리네 60-70년대와 같이 헐렁한 차림의 교복을 입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듯 우리가 탄 차는 세계 각국의 대사관들이 있는 크다란 나무숲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어느 가정집 같은 곳에 머무르니 피부가 검은 청년이 나와 철문을 열어 주었다.
같이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곳이 바로 얼마 전 우리나라의 텔레비전에 소개된 교포가 운영하는 식당(빅마마)으로 이집 주인은 이 케냐사회에 많은 봉사활동을 하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란다.
애국자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대기업이 이곳에 상주하며 외화를 벌어들여 국가에 기여하는 면도 없진 않겠지만 이곳 사람들의 가슴속에 감명을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이 나라에 와서 먹는 식사로서 우리나라 음식과 거의 비슷한 메뉴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교포가 이 낯선 나라에서 인정을 받고 산다는 사실에 기분이 더 좋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사진도 찍고 기념품을 샀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빅마마식당이다. 가운데 분홍색 옷을 입은 여인이 주인이다. 저분은 이곳에서 사회사업도 하며 우리나라를 알리는데 많은 역활을 하고 있단다. 우리는 이곳이 마치 고향집 같이 느껴졌고 이곳에서 두끼의 밥을 먹었다.)
아침밥을 먹고 차에 다시 올랐다. 등반 출발점 근처 우리가 묵을 작은도시인 모시까지는 6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서울과 부산을 잇는 거리보다 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이야기였다.
달리는 차창을 통하여 보이는 건 온통 황량한 초원뿐이다. 나무가 크지도 않고 많지도 않다. 그리고 지금은 건기라서 땅이 매우 메말라 먼지가 많이 나고 있었다. 대지는 황토빛 아니면 거무티티한 색깔이다.
멀리 숲속엔 작은 집들이 하나씩 보이는데 대부분 옥수수나 바나나를 심어 놓았거나 양과 염소를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도로변에 위치한 작은 건물들은 거의가 가게이다. 바나나를 팔거나 주류 및 생활필수품들을 파는데, 외국 유명 음료회사들의 간판은 왜 이다지도 많은지...가난한 사람들에게 음료가 무슨 소용인지...그들이 벌써 이들의 마음을 점령하고 병들게 하였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마음이 씁쓸해졌다.
나무도 없는 넓은 벌판엔 간간이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그 크기란 이루 말할 수 없어 아마도 몇 만평, 몇십만평씩은 됨직하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곳은 개인소유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이곳에도 빈부의 차가 크고 외국의 원조가 있어도 제대로 배분이 되질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부자들이 몇만편 내지 몇십만평씩의 땅을 사 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길가는 곳에 보이는 것은 여기저기에 흙무더기를 쌓아올린 ?집들이 있고(알고보니 그게 흰개미의 집이라고,,,), 나무엔 동그랗게 수확을 앞둔 열매처럼 새집들이 가지 끝에 달려있다. 이 흙먼지 나는 아프리카의 삶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나는 '갓 오브 아프리카'라는 영화가 희미하게 머리속에 떠 올랐다. 한때 이곳은 영국이 지배를 하였었지만, 서양 열강들이 진출을 하기도 하였던 땅이다. 마치 황무지처럼 버려진 이 땅을 그들은 앞다투어 소유하고 무엇인가를 착취하기 위해서 피를 흘렸었었다.
길가엔 조그만 학교가 있었고, 그곳 운동장에선 먼지를 날리며 아이들이 맨발로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곳 아이들도 축구를 즐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노는 모습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차라리 축구보다는 그들이 잘하는 마라톤 연습이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마음이 들었다.
하늘은 온통 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도로 곁엔 기차가 다니는 철로가 있고, 철도원들이 곡괭이로 자갈을 다지는 듯 우리나라에서 본 광경들이 연출되고 있었다. 철도원...순간 시커먼 기차가 지나갔다. 우리의 70연대가 연상되었다.
이따끔씩 노란 덧저고리를 두른 경찰들이 보였는데, 손에는 방망이를 들고 있었다. 속도 측정기도 없이 무엇을 단속하려는 것일까? 그런데 그들이 주로 단속하는 것은 화물차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나라처럼 과적 단속을...그러나 무슨 근거를 위반여부를 따져든단 말인지...
이 나라에도 부정이라는 것이 있을까? 눈대중으로 과적을 단속하고, 그 단속을 미끼로 금품을 요구하기도 할지. 하긴 사람사는 세상에 전혀 그런 일이 없으리란 법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나는 이곳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끝없이 넒은 옥수수밭이 나타났다. 이곳에서의 작물이란 옥수수뿐이다.(다른 곳에서는 바나나만 보이는 곳이 있었다.) 인근에 별로 농가주택도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누가 이 넓은 옥수수밭을 관리 한단 말인가?
휴게소에 차가 멈추자 물건을 팔려는 사람들이 벌떼같이 달려든다. 물건을 사려면 흥정을 하고,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 어느 한사람의 물건을 사주면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것을 사주기를 강력하게 바란다. 대략 난감할 따름이다.
제법 큰 가게에 들렀더니 그곳에서는 호객행위가 덜하다. 그런데 물건들은 별로 세련되지도 못하면서도 비싼 편이다. 가게 옆에 귀여운 어린 소녀가 있어 사진을 찍었더니 주변에서 1달러를 주어야 한단다. 이곳에서는 사진을 찍는 데는 반드시 그 대가를 요구한단다. 지들이 무슨 탤런트라고...
나무를 자르기 위해 톱질을 하고 있는 사내에게 사진을 찍겠다고 하였더니 돈을 달란다. 집어 치워라. 네가 뭘 잘 못 아나본데 나도 너 만큼 톱질 할 줄 안다는 사실을 모른다.
내가 그만 두자고 하니 그때서야 사진을 찍으란다. 나는 사진을 찍고 내가 톱질 시범을 해 보였다. 짜식! 날 뭘로 보고...
(위의 사진은 산행대원인 c여사이다 어린애와 사진을 찍으면 1달러를 주어야 했다.
아래의 사진은 나무를 자르는 녀석인데 사진 찍는데 나더러 돈을 달라고 해서 버릇 나빠질까봐 주지 않았다. 차라리 술을 한잔 사라지...아이들이면 귀여서워 줄런지 모르지...돈이 문제가 아니라 습관이다. 성실하게 일하며 사는 근성을 배우라고...싱거운 녀석...그래서 내가 톱집하는 시범을 보여 주었다.)
멀리서 수많은 소떼가 풀을 뜯고 있었고, 소를 먹이는 사람들이 모여 무엇인가 놀이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길가는 사람들은 그저 어릴적 비가 오면 좋아서 비를 통째로 맞던 우리들의 과거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이젠 도로엔 차들이 별로 보이지 아니하고 우리를 태운 차만이 끝없이 뻗은 아스팔트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길가엔 검문소가 드문드문 있었는데, 초막 같은 막사에 군인 두 세명, 그리고 도로바닥엔 철퇴 같은 무서운 것을 깔아두고 있었다. 만약 검문에 불응하고 그냥 달리다보면 타이어가 문제가 아니라 차 밑바닥이 왕창 거들이 날 것 같은 생각이...
"어휴! 무시라."
다시 얼마를 가니 탄자니아를 넘어가는 국경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곳에서 내려 출국 신고를 하여야 했다. 화장실도 다녀오고, 누군가 사진을 찍으려다 제지를 당했다. 하긴 국경지대이니 보안이 필요할 것 같기고 하다. 출국 수속은 의외로 간단했다. 우리는 그들과 서로 손을 흔들었다.
다시 케냐 검문소를 만났다. 모두 차에서 내려 비자신청을 하고 사진을 찍었더니 사진촬영금지 장소란다. 하긴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찍어 버린 걸 어떡해. 내가 찍는 것을 그들은 보질 못했으니까.
그러다 걸리면 어떡하냐고? 그건 그때까서 볼일이다. 옆드려 빌던,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씨부려대든...ㅋㅋ
20여 미터를 두고 또다시 탄자니아 검순소이다. 희한한 국경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땅떼기 조금 팔고해서 직선으로 만들어 관광객들이나 조금 편하게 해주지...
하여간 탄자니아 → 케냐 → 탄자니아로 이어지는 검문소를 거치다보니 제법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우리는 더워 땀이 날 지경인데도 군인들은 겨울 가죽잠바를 입고 근무를 하고 있다. 더위를 안타는 건지, 아니면 근무복이 그러니 참는 것인지...
"도대체 이 나라는 추운거야? 아니면 더운거여? 우리가 이상한 사람들인가?"
(탄자니아 국경의 출입국 사무소 사진이다. 들키면 혼나는데 몰래 찍었다. 국경선이 복잡하여 검문소가 많았고 출입국 신고가 잦아 귀찮았다. 그래서 아쉬운 사람이 샘을 파야하니...)
오늘은 이곳의 장날인가 보다. 이곳의 장날은 따로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거의 매일 장이 서는지를 알 수는 없어도 우리가 지나는 곳마다 공터에는 사람들이 북적 거렸다. 한 군데는 규모가 아주커서 우리의 읍내 장터만 한 곳도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웬 이리도 많을까? 마을 사람들이 모두다 시장바닥으로 나섰나? 아프리카 인구가 급속도로 늘고 있다는데, 인구가 느는 건 지네들의 부부금술이 좋은 결과로 생기는 것이니까 못 막을 일이지만 먹고 사는데는 감당을 할 수 있을런지...
킬리만자로가 가까워질수록 도로 주변엔 온통 바나나밭 일색이다. 비가 자주 오는지 대부분의 식물들이 잘 자라는 것 같다.
그들이 사는 집은 바나나 나무속에 숨어 잘 보이질 않는다. 사람이 사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데도 시장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을 보면 아마도 대부분이 숲속에 산다고 보아야겠다.
어디를 가든 도로변에는 사람들이 많다. 도로를 따라 마을이 형성되었다. 비가 오는데도 사람들은 도무지 비를 피하려 서둘지를 않는다. 눈 씻고 살펴봐도 비 온다고 우산을 쓴다거나 비옷을 갖추어 입은 사람이 없다. 갑자기 누군가가 무슨 기우제를 지내거나 날굿이를 하는 것 같진 않는데...
드디어 우리가 묵을 첫 숙소인 모시타운 내 스프링 랜드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이래야 우리나라의 것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고 주변은 온통 먼지가 북석거리는 황토밭 지형으로 이곳에선 주로 등반을 하는 외국인들이 묵는 곳이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인데도 많은 외국인들이 킬리만자로 등반을 위하여 이곳에서 투숙을 한단다. 호텔 종업원이나 짐을 싣고 내리는 현지인들도 많지만, 하얀 피부에 코큰 서양인들이 많았다.
여장을 풀고 쉬려는데 갑자기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인지, 어떤지를 알수가 없다. 그래도 먼지는 덜 날 것 같아 보이고...
우리들은 2층 난간 지점에 모여앉아 어떻게 하면 우리들 모두가 등반에 성공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원들 대부분이 3∼4천 미터급의 산을 오르는 것을 경험 한바 있고, H여사님은 이미 희말라야 베이스캠프를 두 번씩이나 다녀오셨단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나름대로 기본 체력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우린 것 같았음에도 걱정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말라리아가 걱정되어 모기장 치는 것을 신경을 썼다. 현지식으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어제부터 한숨도 자질 못하여 매우 피곤했다.
(우리가 묵었던 모시타운의 스프링 랜드 호텔의 모습이다. 오가며 이곳에서 이틀 밤을 잤다. 가정집 같아 분위기는 좋았다. 그런데 모기가 있어서 조금은...이곳 노천 카페에서 휴식을 하며 킬리만자로 맥주를 마셨다. 아가씨들을 놀려 먹기도 하고...맥주맛은 순하고 그만이었다.)
8. 11(토)
두시쯤에 잠이 깨었다. 어제저녁 가볍게 술을 마신 탓도 있고, 시차를 따지자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침이어서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 어디선가 종교활동을 하는지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그것도 스피커를 통해서 계속해서 들려오니 짜증이 난다.
자신의 가족이 죽어 좋은 곳을 가는 것은 내가 탓할 바는 아니지만 남의 잠을 설치게 해가며 저렇게 하는 것도 내세에 좋은 곳을 갈 수 있는 조건이 되는지 의문스럽다.(ㅋㅋ)
5시가 가까웠음에도 그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온다. 성질 같아선 달려 나가 스피커를 부셔버릴까 보다.
개짓는 소리도 들려오고, 닭 우는 소리가 조금은 서글프게 느껴졌다. 여기선 닭 우는 소리를 어떻게 나타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꼬끼오가 아니라 또 무슨 표현방법을 쓰는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모기가 있었다. 우리는 오기 전 필수과정인 황열병 에방접종을 통영에 있는 검역소에서 받았고, 개인적으로는 말라리아에 대비하기 위하여 에방약을 처방받기도 하였었다. 나도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하던차에 의사 선생님에게 문의를 하였더니 꼭 예방약을 먹으라는 권유에 의하여 처방을 받아 왔었다. 그러나 이곳의 산악지대에는 모기가 없고, 우리가 머무르는 곳에는 괜찮다는 것인데...
자는 둥 마는 둥하고 일어나 식당을 가니 종업원들이 축구소식을 전한다. 3위, 우리나라가 올림픽 동메달을 획득했다고 요리사가 손가락을 들어 표시를 한다. 기분이 좋았다. 짜아식들 부럽지? 하고 말하고 싶었다. 어제저녁 애엄마로부터 문자를 받았는데 우리가 일본을 2:0으로 이겼다나...박주영과 구자철이 어떻고...
아침은 토스트, 빵, 소세지 등의 서양식이다. 입맛이 당기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많이 먹으려 노력을 하였다. 먹어야 살고 그래야 산을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9시에 우리들은 짐을 챙겨 마랑구게이트를 향하여 출발했다. 가는 도중에 시내 변두리에서 어느 현지인을 태웠는데, 그는 우리를 도울 가이드 책임자 존이란 친구인데 키가 훤칠하고 호탕한 기질을 가진 한마디로 멋쟁이 친구였다.
가는 길에도 시장이 있었는데 수많은 사람들로 운집해 있다. 군데군데 흙탕물이 튀는 비포장 세차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세차를 하고 빠져 나오는 차량들이 신기할 따름이다.
타이어수리소(빵구 집)도 있었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70년대의 모습이다. 나의 어릴 적 친구 한 녀석도 남포동의 빵구집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그 녀석과 맨날 저녁이면 술에 쪼려 지냈으니까...
(마을 주변의 간이 시장 건너편에 있는 가계이다. 시장은 이곳은 매일 장날인지 지날 때마다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런데 이집은 뭐가 좀 엉성해 보였다. 가게세는 주지 않을 것 같은데 장사가 제대로 되긴 하는지 모르겠다.)
어제부터 보아 온 것인데 이곳에서도 새마을 운동을 하는지 군데 군데 자갈을 깨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길가의 허름한 건물마다 붉은 페인트로 X표시를 해 놓았는데, 아마도 개선을 해야 할 대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독하게도 가난에 찌들리던 케냐가 이젠 경제발전의 동력을 가동시키고 있나보다.
어제 비행기로 같이 오면서 대화를 나누었던 옆좌석의 대구에서 이곳 주변국가로 봉사활동을 온다는 사람의 말에 여기에서 1년 동안 새마을 운동에 대한 봉사활동을 할 계획이라고 하였었다.
사람들은 생활이 나아지면 때론 어려웠던 때의 시절이 그리워진다고 하였다. 배부른 소리가 아니고 그럴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이 돈이 많이 생기면 문명생활에 쉽게 빠져들고 만단다.
그리고 다시 형편이 나아지면 옛날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런데 처음부터 어려움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간접경험을 가진다 하여도 정말 그 어려움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인을 뽑을 때 우리들의 형편을 대변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게 잘 안되고 만다. 그래서 속고 산다고들 하고 훗날 후회를 해 본들 그땐 세월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예전엔 투표를 잘못햇다고 영도다리밑에 잘린 손가락들이 수두룩 하더라는 ...
어제 오후엔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화창하다. 조짐이 좋다고 말해야겠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일기변화란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언제 검은 구름이 나타나 우리들의 기분을 잡쳐 버릴지 모른다.
지나며 보이는 넓은 들판은 온통 옥수수밭이다. 이 나라에선 옥수수가 주식일 테지만 그 식재면적이 너무나 많다. 나는 계속해서 이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벌판을 기계영농을 하는지, 아니면 손으로 농사를 짓는지가 궁금해졌다. 길가는 그들을 불러세워 물어 볼 수도 없고...
드디어 산행 기점인 마랑구 포인트에 도착했다. 그런데 짐을 챙겨야하는 가이드들이 취사도구 등 다른 것들을 챙기기 위하여 30분가량 늦게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미국 등지에서 온 등반가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우리들은 우선 등반 신고와 수속을 기다리며 사진을 찍었다. 이제 등반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설렌다.
잠시 후 그들이 도착했고, 이곳에서는 포터들이 짐을 짊어지고 가는 길에 짐의 무게를 계측하고 있었다. 어려운 여건에서 짐을 나르는 사람들의 무게를 줄여주고자 정부에서 정한 제도이다. 내가 알기로는 이곳 뿐만 아니라 네팔 등 희말라야 지역에서도 그렇게 한다고 들었다. 어쩌면 국제적으로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인 것 같았다.
산길은 붉은 마사토를 깔아 놓았다. 길가에는 몇 십년을 묵었을지도 모르는 커다란 나무들과 나무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이끼류, 고사리 종류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오래전에 보르네오섬의 키나발루산을 오를 때도 보았었다. 그리고 하얀 색깔의 털 같이 생긴 곰팡이류는 나무의 생장을 저지하며 자신만 살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나라의 소나무 재선충 같이 확산되는 모습을 부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나무위에는 원숭이들이 가지를 오가고 있고, 숲은 울창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날씨는 구름이 잔뜩 끼여 서늘하기만 하였다.
좁은 산길엔 올라가는 사람, 내려오는 사람들로 교차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서양 사람들이었고, 우리 팀과 서울에서 온 팀외에는 동양인들은 별로 눈에 띄질 않았다.
높은 산을 등반하다보면 영국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나는 영국 사람들은 탐험정신이 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미지를 탐험하고 그 결과로 식민지를 개척하는...그리고 요즘은 등산하면 우리나라 사람이 단연 으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자주 오는지 가이드나 포터들은 짐, 물, 심지어는 비켜달라는 리어카의 의미까지도 알았다. 그리고 서로 교차하는 사람들마다 나누는 현지 인사로는 ‘잠보(힘내세요?)’, ‘폴리 폴리(천천히)’가 주류를 이루고, 그 외에 현지인들은 우리나라의 인사말인 '안녕하세요?’와 ‘hi’ good-luck‘----들이었다. 그리고 아리랑도 알았다. 그중 가장 많이 나누는 인사는 잠보로서 '잠보'는 그들의 고유언어인 스와힐리어라고 하였다.
희말랴야를 오를 때는 누구든 합장하며 '나마스떼'를 말한다고 하였는데, 이곳에서는 '폴리 폴리'를 말하며 지나친다. 표현방법이야 어떻든 듣는 사람은 기분좋고 말하는 사람도 마음의 평화가 옴을 느낀다.
만다라산장에 거의 이를 즈음 우리는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귀여운 몸놀림을 하며 놀고 있는 흰꼬리 원숭이를 볼 수 있었다. 귀여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그 녀석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알아 줄 리가 만무했다.
무엇이든 희귀한 것은 험한 곳에 있고, 아름다운 것은 모습을 잘 나타내지 않는 법이다. 만고의 진리냐고? 그건 아닐 듯...
5시경 만다라산장에 도착했다. 산장은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방갈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들은 방갈로에 잠을 자고, 가이드나 포터들은 야외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잔다. 그런데 산행대장의 말에 의하면 외풍이 많은 방갈로 보다는 오히려 텐트에서 자는 것이 더 따뜻하다고 말하였다.
산장의 방배정은 선착순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우리는 미리 장소가 정해진 줄로만 알았었는데 그렇지 못하고 우리들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방 배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모르면 열심히 하라고...자업자득
(산에 올라 처음으로 숙박을 하게 되는 만다라 산장이다. 위에선 건장한 청년들은 가이드와 포터들이다. 사진을 찍는다고 포스를 잡으라고 하였더니...그래도 나보다는 낫다. 사진으로 보는 왼편의 키크고 조금 뺀질하게 생긴 청년은 가이드이다.
아래는 아침밥을 먹고 호롬보를 향하기 전 찍은 기념 사진이다. 첫날부터 잠을 설쳤지만 그래도 킬리만자로 정상을 정복하겠다는 각오는 대단했다.)
아직은 저녁식사가 준비되지 않아 야외에 나가 한참동안을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메뉴선정에 착오가 있어 감자요리를 준비하였다가 취소를 하고 밥으로 다시 대체하게 되어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이유야 어째든 현지 조리사들에겐 미안할 따름이었다.
조금 있으려니 포터들이 조그만 플라스틱 대야에다 물을 가져왔다. 말 그대로 고양이 세수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포터들의 성의가 고마워 그 적은 물에다 얼굴과 발을 씻었다. 따뜻한 차도 내어왔다. 포터들이 우리들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미안했다. 언제부터 우리가 왕 대접을 받았던가?
이곳 포터들의 일당은 대략 우리 돈으로 15,000원 정도로서 다른 케냐인들의 평균정도 수입인 3,000원에 비하면 상당히 괜찮은 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산악 가이드나 포터는 청소년들의 선망의 대상이라고 하였다. 하여간 그들은 항상 웃는 모습이고 스스럼없이 행동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포터들에겐 우리들의 당초 계약에 포함하여 팁이 제공되고 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개인 배낭을 지게 하거나, 특히 마지막 정상 등반시 매우 힘든 과정에서 도움을 받는 경우 개인적으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 관레이다.
그럴경우 20-30달러를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신에게 잘 대해주었다고 생각하여 개인에게 팁을 주는 것은 삼가야 한단다. 그럴경우 그게 관행이 되어 다른팀이 등반을 하는데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 산행대장님이 전하는 말이었다.
우리가 숙소배정을 늦게 받아서 그런지 잠자리가 조금은 불편하였다. 우리팀이 막사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잠을 자야했다. 말이 서로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과 함께 사용하려니 서로가 불편하여도 감수하여야 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밤새 사람들이 일어나고 무엇을 챙기는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지리산 종주를 하며 장터목산장 등에서 새우잠을 자야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숙소의 시설은 만다라산장 보다는 호롬보산장의 규모가 크고 시설도 좋다고 한다. 왜냐하면 만다라산장은 올라가는 사람들만 머무르는데 비하여 호롬보산장은 산을 오른는 사람들과 정상을 올라 하산하는 사람들이 뒤섞여서 이용자수도 많고, 시설도 양호 하단다.
8월 12일(일)
숙소가 어수선하고 시차적응이 되지 않아서인지 지난 밤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화장실을 오가고, 잠을 못 이루며 전전긍긍했단다. 같은 방가로에서 머물렀던 K사장님도 한숨을 자지 못하였다며, 괜히 산행에 따라 나섰다고 불평을 하였다.
그러나 그말은 시차로 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데 대한 푸념이지 진정성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러한 말들이 우리들에게 또 다른 각오를 새롭게 하는 활력소가 될 지도 모를일이다.
나는 일찍 잠이 드는 듯 하였는데 12시가 되자 잠을 깨고 말았다. 여기서의 12시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침 6시여서 집에서의 몇 십년간의 습관이 쉽게 깨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잠을 자는 것과 무념의 현상이 겹치고 충돌을 하는 듯 했다. 잠이 모자라면 정상정복에 차질을 가져 올 것이 뻔한 사실이지만 오지 않는 잠을 어떡하랴?
더 이상 잠자기를 포기하고 집에서의 경우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자 화장실을 다녀왔다.
(만다라 산장에서의 일출...집에서도 일찍 일어 나지만...이곳에선 잠을 거의 못잤다고 보아야겠다. 시차 때문에 잠이 들려고 하다가 깨어버렸으니까.)
아침햇살이 유난히도 빛났다.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지런하다. 새벽부터 일어나 설쳐댄다. 서양인들은 장이 굵어서인지 자다가 화장실을 가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런 곳에서는 부러울 수밖에는...
호기심에 공동취사장으로 내려가 둘러보니 온통 시커먼 사람들로 북적인다. 서로들 부딪치며 서둘러 아침밥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가 등반인원이 많은 시기에 산장에서 취사를 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우리를 위해 고생하는 그들이 고맙고 미안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웃었다.
서둘러 아침식사가 시작되는 사이 포터들이 아침 세숫물을 가져왔다. 간밤의 추위를 녹이려 손으로 더운물을 가져다 얼굴을 문질렀다. 더운 물이 이렇게 귀하고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찬것을 대하면 고소증이 빨리 온다고 하였었다.
그리고 더운 차를 준비해 주었다. 이른 아침 시간에 더운 차를 마시고 나니 속이 한결 든든했다.
각자가 집에서 맛있는 반찬들을 챙겨왔다. 자신의 짐이 무거운데도 남을 위한 배려에서다. 아무튼 일단은 서로의 단결된 의지가 중요하다.
8시 40분경 만다라 산장을 출발하여 조금 산을 오르니 식물 분포대가 달라졌다. 이제까지는 키가 크고 잎이 무성한 나무들 이었는데 이곳부터는 키가 작은 식물군이다. 그리고 멀리 산너머로 머리에 하얀 눈을 이고 있는 마웬지봉(5,149m)이 보였다. 감개가 무량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아래를 바라보니 까마득이 먼 곳에 우리가 지나 온 촌락들이 보였다. 구름이 수평선처럼 하얀 선을 이루었다가 다시 양털처럼 뭉친다.
한참을 가다보니 젊은 K사장님의 신발 밑창이 떨어졌다. 급한 대로 노끈으로 묵었다. 아직은 일정의 시작인데 모두를 걱정이 되었다. 산행대장님은 좋은 신발을 오래 신지 않다보니 갈라진다는 말을 하였다. 그래서 좋은 신발을 사면 자주 이용하라는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하였고...알고보니 K사장님은 시내에서 제일 큰 신발가게를 경영한다는...(ㅋㅋㅋ)
우리는 작은 나무들과 그 틈새에서 자라나 피는 예쁜 꽃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등반 이틀째...만다라산장에서 호롬보 산장을 향하여 진행하는 중이다. 아직은 산길이 걷기에 좋은 땅이다. 가다 쉬다를 반복해야 했다. 멀리 킬리만자로의 눈덮인 정상이 인상적으로 보인다.)
1시가 넘어서야 멀리 킬리만자로의 하얀 눈이 선명하게 보이는 곳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먹었다. 여행사에서 보내오는 도시락은 빵과 닭고기, 과일 등이 들었는데, 어제는 내게서 빠져 있었던 닭고기가 오늘은 다행히 있었다. 이곳에서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데 닭고기 한점은 매우 중요한...(ㅋㅋ)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다보니 힘이 들었다. 선인장 같이 휘귀하게 생긴 식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이드에 의하면 지구상에서 이 산에서만 자란다는 나무로서 우리는 잠시 휴식을 취하며 나무아래에서 사진을 찍었다.
(어제 산아래까지 다녀왔던 마웬지의 웅장한 옆 모습이다. 사람들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은 산이라 하니 어째 신비롭다는 생각이 더하였고...언제 저기에도 가볼수 있을까? 정말 구미가 당기는 곳이기도 하다.)
숲속에 작은 리어카가 숨겨져 있었다. 웬 킬리만자로 가는 길에 리어카냐고? 용도가 무엇인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산을 오르다 쓰러진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데 사용되는 것이란다. 그나마 상여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ㅋㅋ)
우리들은 정말 저것을 이용하지 않기를 바라며 길을 걸었다.
어느 조리사가 감자 깍은 것을 계속해서 길에다 흘리며 지나갔다. 중간 지점에서 짐을 진 포터에서 물으니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조금 지나 만난 포터의 짐을 보니 감자가 있었다.
우리는 비닐봉지를 꺼내 감자를 다시 담아 주었는데 알고 보니 하필 그는 우리의 담당 조리사 중 한명이었다. 에이! 자칫하면 우리의 귀중한 식량이 줄어들 뻔...
(어제하루 그리고 앞으로 5일동안 정처없이 걸어야 하느니... 마음을 조금하게 가지면 고소증이 빨리 온단다. 어째든 마음은 급해도 폴리 폴리...)
가끔씩 구름이 산허리를 감고 돌았다. 저러다 비라도 뿌리면 어쩌나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고도가 높아져서인지 사람들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산길도 부드러운 흙이 아닌 거친 작은 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시 산 능선 두어 개를 넘고 나니 드디어 호롬보산장이 웅장한 모습이 우리를 멀리 내려다보고 있었고, 산장 그 뒤편에는 우리가 가야할 최종 목적지인 킬리만자로산이 하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들의 식수가 거의 바닥이 나고, 일행 중 신발이 고장난 대원이 있는 마당인데 이제 다 왔다고 생각하니 힘이 솟았다. 산장에 도착하여 숙소를 배정받고 나니 기분이 상쾌했다.
짐을 정리하고 나니 포터가 세숫물을 가져왔지만 산행대장은 여기서부터는 절대 머리를 감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름 아닌 체온유지를 위해서인데 체온이 내려가면 고소증세가 빨리 온단다. 그것 참! 그래서 여기 사람들이 모두 새까만가???(ㅎㅎ)
저녁을 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서편하늘에서 저녁노을이 매우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었다. 놓칠세라 카메라를 가져다 사진을 찍었다.
아무튼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내일은 고소증을 대비한 적응훈련에 들어가게 되는 날이다.
(호롬보산장에서 산행대장의 늠름한 모습이다. 희말라야를 주름 잡았으니 이까짓껏 산도 아니지...그런데 대원들의 완등을 위해서는 무척이나 할일이 많으시다.)
우리의 저녁준비가 항상 제일 늦다고 불평들이다. 그래서 산행대장님이 조리사에게 호통을 쳤었는데 사실은 우리에게 문제가 있었다. 우리가 산장에 도착을 늦게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국내 산행을 하면서도 유난히 동작이 느린 사람들과 함께 산행을 할 때면 마음이 불안함을 느꼈다. 왜 우리를 따라 왔을까? 자신에게 맞는 산행팀에 따라갈 것이지...그러나 내가 잠시 늦추어 주면 모든 것이 다 잘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아무튼 어렵게 생활하며 우리들을 위해 일하는 그들에게 잠시나마 마음을 무겁게 한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아야했다.
□
8월 13일(월)
12시가 넘어도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고소적응 훈련을 하려 하여도 몇 십년을 생활해온 나의 잠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고소적응도 중요하지만 제발 잠을 자고 싶었다.
나의 간이침대 위칸에는 산행대장님이 잠을 자고 있다. 희말라야를 섭렵하신 분이니 이런 고산지형에서 잠자는 습관은 충분히 익숙해져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부러웠다. 다른 사람들도 더러는 코를 골며 자는 것이 부러웠다. 이러다 정상을 오르지도 못하고 쓰러지지 않을지 두려워졌다. 대장은 수면제를 먹으면 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오늘은 무슨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일출을 보려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바깥으로 나왔으나 일출이란 게 별반 볼거리가 없었다. 그러나 어디서 나타났는지 덩치가 큰 까마귀 녀석들이 나타나 산장주변을 서성이며 먹잇감을 찾는다.
부지런한 포터들은 오늘도 더운 차를 가져다주고, 세숫물도 따로 마련해 주었다. 아침에 일어난 아직까지의 우리 대원님들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이제 마지막 산장인 키보를 향하여 가야한다. 이제부터 4,000m를 넘어서기 때문에 본격적인 고소증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야...약간의 두려움과 솔직히 마음이 설레었다. 도중에 들것에 실려 내려오면 챙피스럽기도 하고, 본전 생각도...ㅋㅋ)
서울에서 남아공을 출발하여 아프리카 북부를 향하여 배낭여행을 하는 대학생을 만났다. 그는 우리보다 일찍 등반을 마치고 하산을 하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아프리카 여행에서 500만원 정도의 경비가 들었다고 하였다. 우리는 정말 대단하다며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데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학생의 말에 의하면, 그저께 자신들의 일행 중 한명이 키보산장에서 쓰러져 들것에 실려 내려갔었다고 하였다.
우리는 아침밥을 먹고 고소적응훈련을 위하여 산을 올랐다. 힘든 발걸음이었다. 어젯밤을 뜬눈으로 보냈기 때문에 눈이 저절로 감기기 시작했다. 차라리 고소적응 훈련을 포기하고 잠부터 자고 그 다음에 닥치는 대로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 대열에서 이탈하면 다른 사람들의 의지에 손상을 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과 스틱, 그리고 호흡이 일치해야 한다.
그래도 걸으니 조금씩은 나아지기 시작했다. 가다가 사진도 찍고, 쉬기도 하였다.
(이곳에서도 멀리 마웬지의 웅장한 모습이 보인다. 저곳도 5천미터가 넘는 산이다. 공식적으로는 등반이 금지된 곳이라하니 더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였고...)
건너편에 마웬지의 웅장한 자태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제 오루부터 보아왔던 킬리만자로산에서만 자란다는 관엽식물군(스커어니?)이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올라오니 가슴이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조심스레 조심스레 옮기며 산능선을 따라 계속해서 올라가니 얼룩말의 형상이 바위에 새겨진 것을 보았다. 우리가 가고자하는 곳은 이제부터 상당한 오르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올라가며 쉬기도 하여 드디어 우리 일행은 마웬지와 킬리만자로가 바라다 보이는 산 능선에 올라 반대편을 바라다보았다.
아! 킬리만자로...
그곳에는 멀리 평소 그렇게 동경해 마지않던 머리에 하얀 구름 두건을 두른 킬리만자로가 보였다. 우리는 킬리만자로와 마웬지를 배경삼아 한동안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내일이면 우리가 저 아래 펼쳐져 보이는 평원의 길을 걸어 다음날 산 정상을 오를 수 있을 것인지? 킬리만자로의 신은 정말 우리에게 정상을 흙을 밟게하는 행운을 허락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한동안 마음이 복잡해졌다.
많은 사진을 찍고 내려오다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하며 수면제 1/2알을 먹었다. 산행대장님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지만 잠을 자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몰래 먹은 것이었다.
우리는 준비해간 서로의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름하여 스커어니(?)라고... 선인장 같기도 하고, 바나나 같이 생긴 이 식물은 세계에서 킬리만자로 주변에만 자라는 희귀식물이란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킬리만자로 나무라고 불렀고...군락지가 많이 있었다.한그루 캐오고 싶더러만...)
산을 내려오니 점심이 준비되어 있었다. 갈수록 서로 간 박자가 잘 맞는지 요리사들과 의견도 잘 맞았고, 밥이며, 감자, 스프가 주종이지만 우리들은 음식 맛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점심을 먹자마자 숙소로 들어와 잠을 청했다. 피곤하기도 하고, 약기운이 스며들어 어느 듯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두어 시간을 잦을까? 잠에서 깨어나니 우리 방 대원들은 대부분 자리에 누워 있었고, 건너편 대원들은 술을 마시며 내일에 대한 걱정과 준비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산에 올라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마음속은 내일에 대한 등반으로 결코 홀가분하다고 말핳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내일 일은 내일에 걱정을 하란 말이 있었는데...
저녁을 먹으러 가며 내가 숙소 안에 L사장님이 남아 있는 것을 모르고 문의 열쇠를 채웠는데 저만치 가다가 무슨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안에 갇혀 있었다. 재빨리 다가가 문을 열었지만 우리들은 하마터면 밥을 굼길 뻔하였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8월 14일(화)
새벽 4시가 되자 건너편 방에서는 벌써부터 일어나 짐을 챙기는 듯 소란스런 가운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 그렇게 재미가 있는 것일까?
건너편 방은 우리들 중 조금 나이가 젊은 분들과 맹렬여성 대원 2명(H, C여사님)이 같이 방을 쓰고 있다.
이곳 산장에서는 불편하지만 남여가 혼숙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우리팀들끼리 같은 방가로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두분 여사님들은 불편을 느끼시겠지만 그래도 우리들 전부에겐 활력소가 되고,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 주셨다.
7시경 키보산장을 향하여 길을 나섰다. 오늘부턴 고소증에 대비를 해야한다. K회장님이 오늘도 선두에 나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계셨고, 우리들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산을 올라가고 있었다.
건너편 마웬지봉 산위로 비행기 한 대가 하얀 구름 띠를 남기며 날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일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우리가 묵었던 산장의 모습이 멀리나마 정겹게 흩어져 있었다. 그 한참 아래엔 흰구름이 솟아나 아프리카의 대지를 뒤덮고 있고, 까마득한 먼 곳에는 촌락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런 목가적인 풍경은 어디를 가서 보아도 정겹다. 사람이 사는 곳이나 그렇지 않은 곳에서도 우리들은 항상 자연을 사랑하고 우리가 자연에 동화되어 삶을 느낀다.
한참을 가다보니 선두와의 차이가 많이 나서 정상의 모습이 훤히 바라다 보이는 지점에서 잠시 쉬며 대열을 갖추었다.
이어 우리는 마치 사막과도 같은 길을 끊임없이 걸어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산허리, 건너편 마웬지가 점차 웅장하게 솟아나 보이기 시작했다.
이젠 4,000m가 넘어 나무는 보이지 아니하고 한 두 종류의 풀들만이 드문드문 솟아나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나무의 생장한계선이 4,000m라는 글을 읽은 것 같았다.
(천상을 바라보는 가는 길은 지옥을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내려 오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도 저들틈에 끼었으면...고소증이 현실로 다가오자 이쯤에선 각자가 누가 좀 말려주지 뭣하려 이곳을 왔을까? 하는 마음들이 들기 시작하고...)
(도마뱀 녀석이다. 지금은 건기라 녀석의 모습도 피부가 매우 건조해 보인다. 더운데 나다니지 말고 나무밑에나 있으려므나...요녀석도 마사이족을 닮아 용맹스러운지 쉽게 도망도 잘 가지 않았다.)
우리는 휴식하는 횟수를 자주하고 지나는 포터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전진을 계속했다. 멀리 킬리만자로 산 정상을 정복하고 비탈진 산길을 내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하나의 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길은 자동차 도로처럼 평탄해 보였지만, 고도가 이미 4,000m를 넘어서 우리는 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소증세로 말미암아 숨이 차고 자칫 호흡이 흐트러지는 불안함을 느꼈다.
평탄해 보이지만 평탄할 수 없는 길. 그길을 현지 포터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른다. 산악이들의 짐은 물론 산장에 필요한 무거운 자재들을 힘을 합쳐 나르고 있었다. 하긴 고소증도 적응이 되고나면 그다지 힘들지 않는다든 것인데...
우리가 멀리 산을 내려오는 그들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조금을 더 올라가자 드디어 마지막 산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호흡은 갈수록 가빠지기 시작했고, 발걸음은 더욱 더 늦어졌다.
산장이 한 시간 정도 남은 지점에서 우리는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젊은 L사장님은 식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걱정이 되었다. 행여나 고소증세로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대장님의 말에 의하면 이 지점에서 반드시 식사를 해야 하고 식사를 거르면 오히려 위험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고소증세 중엔 단체행동을 거부하는 면도 있다는 것이었다. L사장님이 점심을 먹지 않고 먼저 산행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나는 걱정이 되어 제일 먼저 산장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잠시 후 키보 산장에 도착하여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았다.
시력보호를 위하여 반드시 선글라스(고글이 적격)를 써야 하는데 나는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하여 다소 불안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시력이 안 좋아 지는데 이번 등반은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여러가지로 불편을 겪어야 했다. 산을 가벼이 보는 버릇은 고쳐야 할 점이다.
이젠 키보산장까지는 1시간정도면 갈 수 있었다. 어느 새 하얀 구름이 산허리를 감아 돌고 있었다. 포터들이 쉴새 없이 무거운 짐을 옮기고 있었고, 사방 어디를 보아도 웅장하고 황량한 자태뿐이었다.
이 웅장한 자연을 조물주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살아오며 현실에 역정을 낸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돌아다보면 그것들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저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감이 옳을 것 같았다.
(강한 자외선에 피부가 노출되면 손상이 일어난다. 입술이며 얼굴에 열심히 발라야 하는데 평소하던 습관대로 그게 귀찮아서...결국엔 코와 팔의 피부가 벗겨지고 말았더라는...)
고도는 높지만 후덥지근한 날씨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드디어 키보산장에 도착했다. 산장 입구에서 어저께 호름보 산장에서 보았던 아프리카(아니고 중동이었음) 산업현장에서 일한다는 우리나라 사람(박00)을 만났었는데, 그는 새벽에 정상을 올라갔는데 너무 급하게 올라가다 고소증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를 전하였다.
그는 학생때 우리가 사는 인근대학에서 산악부 활동을 하였다고 하였는데 너무 만만하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그는 산장에 내랴와 한 시간 정도 잠을 청하고 나니 조금 나아졌다는 것이었다. 역시 폴리 폴리가 정답이었다.
우리는 키보산장에 도착하여 산행대장님의 준비사항과 등반 시 유의사항을 듣고 각자 정상등반에 필요한 준비를 하였다. 고도가 높은 탓인지 머리가 멍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우리는 두 팀으로 나누어 등반을 하기로 하였다.
출발시간까지는 제법 많은 시간이 남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간이 침대에서 잠을 청하지만 잠이 쉽사리 올리가 없다. 나는 갑갑한 마음에 바깥으로 나왔으나 한걸음 한걸음 옮기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었다.
선두팀은 10시에 준비를 하여 11시에 출발을 하고, 후미팀은 11시에 준비를 하여 12시에 떠나기로 하였다. 나는 후미팀에 소속되었다. 일출을 보기위한 출발 스케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식사문제는 출발 전 간단하게 준비해간 누룽지나 라면을 먹기로 하고 준비가 끝나는 대로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준비를 잘 한다고 하여도 자신의 컨디션이 따라주지 않으면 허사일 것이다. 아직은 우리들의 컨디션 상태는 그런대로 좋았고 정상에 도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깥의 화장실을 다니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움직이면 고소증세가 나타나 머리가 더 아프고 몸이 무겁기 때문이었다. 그까짓 것 하고 절대로 가볍게 넘겨버릴 일은 아니었다. 평생에 다시 이곳을 오기가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더하기 마련이었다.
(처음엔 멀리서 바라다보며 평탄하고 가까워 보여 너무 가볍게 생각하였던 길이다. 그러나 가도 가도...이젠 고도가 높아지자 숨이 차오르고 머리가 띵해졌다. 단지 몇백미터를 앞서간 사람이 부러워 보이기도 하였고...)
멀리 아름다운 흰 구름이 흘러가는 것이나, 넓디넓은 산 평원, 그리고 웅장한 자태로 우리를 내려다보는 킬리만자로의 모습을 바라다보기도 하지만 아직은 나의 몸이 무겁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언제 이렇게 나 자신에 대하여 자신감을 잃어 본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나 자신을 마름대로 할 수 없는 현실....
자유! 나는 자유가 그리워졌다. 그러나 이 안타까운 현실을 외면할 수 없기에 더욱 더...
8월 15일(수)
10시가 되자 포터들이 라면과 누룽지를 끓여왔다. 누룽지를 끊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산행대장님이 전 조리사들을 불러 모아 열심히 설명을 하였었다. 그래서인지 그런대로 먹을 만하였다. 문제는 많이 먹어야 하는지, 아니면 적게 먹는 것이 좋은지가 궁금했다. 대원들은 대부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에 다시 누웠다.
11시가 되자 선두팀 3명이 가이드와 함께 먼저 출발하였다. 컴컴한 막사 밖에서 머리에 랜턴을 두른 대원님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제발 모두가 정상의 땅을 밟고 웃으며 산을 내려오기를 기도했다.
잠시 자리로 돌아와 배낭을 베고 누웠다. 반드시 정상을 정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의 머리속을 더 어지럽히고 있었다. 다행이 초저녁보다는 기분이 훨씬 좋아지기 시작했다. 됐다. 이 정도면 도전해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12시가 되자 우리들은 배낭을 메고 바깥으로 나왔다. 무슨 유격훈련을 떠나거나 번지점프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심정이러고나 할까?
드디어 열을 지어 출발했다. 그래도 다행이 이 아프리카의 황량한 땅에도 어둠은 짙고 날씨는 조금 싸늘하였지만 그런대로 견딜만 하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가이드의 진행에 따라 발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폴리 폴리...
그러나 출발 한지 얼마 가지 않아서부터 숨이 막혀 왔다. 길은 또 무슨 이런 길이 있단 말인가? 낮에 산자락을 올려보았을 때 급경사진 자갈밭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 까진 힘들 줄을 몰랐다.
가이드 존이 맨 앞장을 서고 우리들이 줄을 이은 상태로 전진을 계속하는데 경사가 너무 심하고 잘못 발을 디디면 자갈밭에 발이 미끄러져 내린다. 그러다보면 호흡이 가빠지고 자신감마저 잃는다. 사진을 한장이라도 찍고 싶었지만 어두워서 어디가 어디인지를 알 수 없었고, 얼마를 어떻게 가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고 너무 힘든 나머지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이럴 줄 알았냐고???
그렇다고 여기서 뒤돌아설 수는 없는 일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해 버린다면...우리 모두는 이를 악물었다. 서로를 격려하면서...(폴리 폴리)
1시간쯤을 진행 하였을까? 먼저 출발하였던 선두팀이 앞에 가고 있었다. 이제껏 여기밖에 가지 못하였나?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래도 잘 버티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했다.
앞을 보니 외국인 여자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산행대장님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이 지치면 가이드들은 하산을 종용한다고 하니 자신의 판단대로 등반을 지속하라고 하였었다.
나는 저 여인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스틱을 잡은 손에 힘을 더하였다.
도대체 어디를 가고있단 말인가?
올라갈수록 경사도는 높아지고 자갈이 줄어들고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끔씩 위아래를 바라다보면 현기증이 일어났다. 온통 보이는 것은 사람들의 머리에 두른 헤드랜턴 불빛뿐이다. 어디가 어딘지를 분간이 어렵다. 발밑만 바라다보자고 결심했다. 길만 포인트(5,682m)까지 6시간이 걸린다고 하였으니 시간의 흐름만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젠 누가 앞을 가는지, 누구랑 같이 등반을 하는지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가야한다는 생각만이 터질듯이 아픈 나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선두를 가시던 K회장님이 힘드시다고 하시며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신다. K회장님은 나보다 연배이시면서 평소 산행에 조예가 깊으시고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하여 나에게 자신의 인생사를 다 털어 놓으시며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었던 고마운 분이시다.
산행대장님은 나더러 선두를 서라고 하였다. 아무런 생각없이 가이드 존의 발걸음만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뒤를 따르는 대원들이 천천히 가자고 말하였다.
내가 가이드에게 천천히 갈 것을 주문하였지만 존은 나의 말을 따라 주지를 않는다. 문제는 우리들이 자의적인 진행을 하여야 하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직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산행대장님이 우리들에게 정상정복시 행동에 대한 설명의 의미였다.
잠깐의 휴식을 위하여 바위에 앉았다. 내딴엔 바로 앉는다고 중심을 잡고 앉았는데 그런데 몸의 중심이 흔들리며 옆으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이게 고소증세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몸과 마음이 일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하늘을 보았다. 야속하게도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깝고 별은 크게 빛나고 있었다. 언젠가 인도네시아의 키나바루산(4,100m)을 등반하면서 별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그 크게 보이는 별을 보면서 알퐁스도데의 별 이라는 글을 생각했었다. 그리고 백두산 종주등반을 가면서 북간도에서 윤동주가 보았던 초승달을 보며 그를 생각하였었고...
아마도 오늘이 그럴 것이라는, 아니 그때보다는 더 하늘에 가까워 별도 더 크게 보일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이 순간 지친 나머지 하늘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별을 제대로 바라다 볼 마음의 눈을 잃고 만 것이다.
어둠과 나 그리고 별...
비틀거리고 안간힘을 써가며 산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가히 볼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곳을 오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마음가짐과 육체의 단련을 가함으로써 이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할 일이었다.
정상이 가까워 옴에 따른 더 많은 체력소모가 수반되고 있었다. 수면부족에 고소증세까지 겹쳐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돌이 비닐로 보이더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웃고 말일이 아니라 훗날에라도 마음속에 고이 기억해야할 말인 것 같다.
그렇게 어둠과 미끄럽고 경사진 자갈길에다 고소증까지 극복해야 하는 어려움을 지속하며...
(드디어 길만 포인트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방향 감각을 잃고...체력이 모두 소진되고 정신이 몽롱하다. 말 그대로 비몽사몽...여기가 어딘겨? 내가 올라오긴 왔나?)
마지막 급경사를 기어 오르다시피 올랐다. 멀리 동녘하늘에 해무리가 나타날 즈음 우리는 그렇게 해서 난생처음 겪어보는 어려움을 견디며 밤길 6시간 만에 5,682m인 길만 포인트에 무사히 올랐다. 시각은 6시경이라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기념사진을 찍기에도 힘이 들었다. 다리는 휘청거리고 정신은 몽롱한 상태이니 말이다.
그래도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희열을 감추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었다.
마지막 깃발을 꼽아야 하는 우후루픽까지는 1시간 반 가량을 더 가야한다. 일반적으로 킬리만자로 등반은 길만 포인트에 이르면 정상을 다녀간 것으로 인정을 해주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후루픽이 최정상(5,895m)이기 때문이었다.
길만 포인트에 이르니 체력이 바닥이 났다. 그래도 나는 사진을 계속해서 찍어야 하고 특히, 우후루픽 주변의 만년설을 카메라에 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서는 사진 찍는 일도 고역이다. 사진을 찍으려면 위치를 이동하고 자세를 잡아야 하는데 그게 힘들고 마치 우주인처럼 걷던 걸음걸이의 리듬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들이 사진으로 만들어 놓은 킬리만자로의 모습과 내가 직접 찍은 사진과는 그 존재가치가 다른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꿈꾸어 왔던 순간이던가.
여기서 그냥 배낭을 벗고 쉬다가 하산해 버리고 말까?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만도 얼마인데...솔직히 깜깜한 밤 경사지고 미끌어지는 자갈밭길을 어떻게 올랐는지 기억마져 가물거린다. 그래도 내가 산악인이라고 자부를 해 본다면 여기서 주저 앉을 수는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호흡을 고른 뒤 마지막 등반에 나섰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옮겨 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길만 포인트를 오르면서부터 대열이 흐트러졌다. 산행대장님과 젊은 K사장님, 그리고 내가 선두를 섰다. 그래도 우리들의 기운을 돕는 것은 서서히 솟아오르는 붉은 기운의 일출과 그 밝은 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을 발하는 만년설의 모습이었다.
만년설! 이 얼마나 오랫동안 마음속에 염원하였던 광경이던가? 우리들은 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 숭고한 역사의 증거물에 대한 마음속 예우를 갖추었다.
드디어 우후루픽!
정상부위엔 눈이 조금 쌓일락 말락, 그러나 주변부위엔 만년설이 쌓여있었다.
평소 사진이나 인터넷을 통하여 보아 온 것보다도 훨씬 방대한 양의 만년설을 바라보며 한동안 넋을 잃은 듯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연신 카메라의 샷을 눌러대고 있었다.
마음껏 고함을 질러보고 싶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고함을 지른다고 설마 저 높게 쌓여진 만년설이 우르르 녹아 내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차마 입을 떼지 못함은 또 무슨 조화이런가...
단지 일백년을 살이 가기도 벅찬 인간의 단편적인 삶에 비하면 저 만년설을 과연 얼마나 수많은 세월동안 기다림의 연륜을 쌓아 온 것일까? 대체 그 누구를 위하여...
(우후루픽...여길 오려고 얼마나 용을 써댔던가? 산행대장님과 기념사진을...만년설은 평소 내가 알던 것보다 더 웅장하고 분포범위가 넓었다. 원 없이 카메라 샀을 눌러댔다. 그러나 이 산에선 사진을 찍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었다. 진행도중엔 대열에서 뒤 처지거나, 호흡이 틀려지면 허헉...)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의 한 귀절이 생각났다.
'킬리만자로는 높이 5,895m의 눈 덮인 산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이라고 한다. 그 서쪽 봉우리는 가까이 마사이어로 느예가 느가이에(신의 집)이라고 불린다. 이 서쪽 봉우리 가까이 말라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가 있다. 이처럼 높은 곳에서 표범은 대체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설명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소설에서와는 달리 이렇게 높은 곳에서는 표범이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식물의 생존 한계선이 대략 4,000m정도 인데 식물이 없으면 동물도 살수 없어 결국엔 높은 지대엔 동물이 없는데 헤밍웨이가 그러한 모습을 동경한 것 아니냐는 생각에 머문다.
또한 흥미는 더하지만 발음이 너무 빨라 따라부르기가 힘들었던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 중의 대사도 머리속에 떠 올랐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적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고 싶다.'
나는 잠시 긴 호흡으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내가 이곳에 오르기를 동경해 왔던가?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꿈을 이루었지만 그래도 가슴속엔 뭔가 허전한 것이 남아 있는 듯 하였다.
감격에 겨워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하산을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그 하산길 이라는 것도 매우 힘든 과정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오르는 길이 힘들면, 내려가는 길도 어려울 것이라는 일반적인 진리를 염두에 두었어야 했다.
올라갈 때는 한걸음, 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겨 놓았으나 내려오는 길에는 주변이 훤하게 보이기 때문에 마음 놓고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미끄럼이 더했다.
우리들은 아마도 낮 동안에 이곳을 올라가라면 도저히 못할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였었다. 그만큼 미끄럽기도 하지만 급경사를 이룬 마지막 정상을 향한 경사진 길의 고도 1,000m가 아무에게나 정복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킬리만자로 여신의 속셈인 것 같았다.
우리들은 전장에서 패한 병사들처럼 흐트러진 몸가짐을 보이며 하나 둘씩 키보산장으로 모여들었다. 사실은 아침은 먹지 않은 셈이고 아직 점심시간이 이르기 때문에 잠시나마의 휴식시간이 있었다.
모두들 매우 피곤한 형색을 감출수가 없었다. 몇몇은 화장실을 다녀오고 그리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숙소 바깥에서 방금 내려 온 산봉우리를 오려다보기도 하고 산을 오르기 위해 호롬보산장을 거쳐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막상 제일 필요한 것은 수면 부족을 채우는 일이었다. 점심시간까지 1시간여 남은 시간에 잠을 자기 위해 숙소로 들어 온 대원들은 깊은 단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가볍게 점심을 먹고 내려오는 길은 정상정복이라는 부푼 꿈을 가지고 올라오던 때에 비하여 너무나 허탈하고도 멀 길로 느껴졌다. 과연 우리들의 가슴속에는 무엇이 남겨졌을까?
올라오며 점심을 먹었던 곳이며, 황량한 공간에서 고소증세를 극복하기 위하여 호흡을 고르며 휴식을 하던 장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오르기만 하면 내려가는 것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던 우리들에겐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 않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길을 걸으며 올라올 때 미처 발견하지 못하였던 아름다운 풍광이 있을까? 생각하며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려오는 길이 비록 힘들다고 한들 그래도 오를 때만이야 하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긴 시간의 등반을 마치고 호롬보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장에 도착하니 아직은 저녁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무엇을 할까? 생각해 보다가 제대로 세수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벌써 K사장님과 K회장님이 가까운 계곡 물가로 가신다. 그곳에는 외국인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동안 산에 올라 포터들이 떠다주는 한움컴의 세숫물에 겨우 얼굴만 문지르고 견디어 왔었다. 그래서 발을 씻을 기회가 제대로 없었다. 그리고 물도 없을 뿐더러 고소증을 우려하여 머리를 감지도 못하였는데, 우리는 시원한 킬리만자로의 계곡물에 머리를 감고 발도 씻었다. 정말 개운한 순간이었다.
저녁 시간에 우리는 정상등반을 자축하기 위하여 가져간 소주 4홉들이 5병을 가볍게 해치우며 산을 오르며 힘들었던 순간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고생을 함께한 사이라 서로간의 신뢰와 친밀감은 더해 있었으며,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하루 동안 13시간이라는 대장정의 산악활동을 한 것이었다. 이제 고소증도 사라졌으니 어찌 곤한 잠을 이루지 않겠는가? 오늘밤은 위대한 잠님께 나의 육신을 모두 바쳐야겠다.
8월 16일(목)
5시가 되자 포터들이 따뜻한 음료를 가져왔다. 어제의 많은 산행시간으로 깊은 잠에 빠졌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은 7시에 출발하여 마랑구산장을 거쳐 우리가 묵었던 모시타운으로 갈 예정인데 5시간 정도가 걸린다는 산행대장님의 말이다.
산행대장님은 이번 등반팀은 다른 때의 사람들에 비하면 각종 약이 1/3밖에 팔리지 않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에 나는 이번에 온 우리들은 모두가 독종이어서 그렇다며 응수를 하였다.
식당을 가니 여느 때와 같이 소세지. 식빵 그리고 스프가 나왔으나 한참을 기다려도 우리들의 주메뉴인 밥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아무 것으로나 배를 채울 수는 있어도 그래도 한국사람, 우리들에겐 비록 현지 쌀로 지은 부석거리는 밥이나마 그것을 먹어야 식사를 끝냈다는 포만감을 느끼기 마련이어서 요리사들에게 연락을 하였더니 글쎄 쌀이 모자라 남은 것은 만달라산장에서의 마지막 식사용 밖에 없다나...
그러면 그렇지! 어쩐지 어젯저녁의 밥의 양을 보니 평소의 두 배는 되겠다 싶었다. (ㅋㅋ) 귀여운 우리 조리사님들...
세수를 마치고 화장실의 거울을 보니 눈두덩이 부어있다.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였다가 어젯밤엔 정신없이 꿈나라를 헤매다보니 꼬락서니가 이렇게 되었나보다.
짐을 챙기는데 K사장님은 짐의 양이 많아졌다고 하였다.
어떻게 된 일일까? 개수가 늘어났을 턱은 없을 것이고...킬리만자로의 여신이 자신의 짐을 옮겨다 놓았나? 그건 아닐테고 정리의 기법 탓이리라...
아침밥을 먹고 오르내리며 3일 동안을 묶었던 정든(?) 호롬보산장을 떠나왔다. 산을 내려오는 길도 제법 힘이 든다. 올라갈 때 하얀 눈 쌓인 킬리만자로의 정상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었던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었다. 산행대장님은 개인별로 기념사진을 담은 CD를 만들기 위하여 얼굴 전면 사진을 찍으신다.
(하산을 하다 올라갈 때 쉬었던 곳에서...뭔가 열심히 기록을 남기시는...저래뵈도 산악 전문가?)
20여분을 내려오니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끔 산을 오르는 포터나 산꾼들을 보며 우리들은 정말 날씨 덕을 본다고 말하였다. 올라가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올라가며 멀리 우뚝 나타난 만년설이 쌓인 킬리만자로의 자태를 볼 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날씨덕이라면 백두산에서 그렇고, 키나바루에서도 그랫었다.
우리가 산을 오르기 전에는 모시타운에 있을 비를 내려 먼지가 나지 않게 해주었고, 하산 길에는 비록 안개비가 내리지만 추억을 간직하게끔 하며 우리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게 해 주니 말이다.
하산을 시작한지 4시간 만에 만다라산장에 도착하여 미리 준비해 놓은 점심을 먹었다. 점심메뉴엔 누의 뒷다리라고 하는 고기가 나왔다. 쫄깃한 맛이 매우 감칠 났다. 소주도 몇 잔 곁들였다.
그리고 우리는 가이드와 포터들과 같이 하나가 되어 킬리만자로 산행을 축하하는 ‘킬리만자로’ 노래를 불렀다. 어울려 춤을 추며 우리를 위하여 흥을 돋우는 그들을 보며 고맙고 감격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마음의 부담이 거의 가신 듯 했다. 이젠 하산이다. 그런데 내가 가져온 말라리아 예방약을 아침에 먹지 못했다. 일단은 모기를 조심해야지! 우리가 묵던 모시타운의 호텔엔 모기가 있었다.
(완등 기념 축하연이다. 5박 6일동안 우리의 등반을 위하여 수고한 가이드와 포터 그리고 요리사들까지 모두가...킬리만자로 노래를 부르고...얼씨구! 흥이나니 춤은 자연히...)
우리는 다시 마랑구게이트를 향하여 하산을 시작했다. 올라갈 때와는 달리 다소 마음의 여유가 있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울창하게 우거진 열대우림을 바라다보며 감탄사를 자아내기도 하였다.
올라갈 때 미쳐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산꽃들이며, 빗물 고이는 나무, 그리고 울창한 산림들...내려오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출발지점인 마랑구게이트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개인별 등반기록이 담긴 증명서를 교부받았다. 이제 이곳을 다시 오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은 생태게 파괴로 인한 지구온난화로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고 있다는 슬픈 소식이다. 짧게는 불과 몇년, 길게는 30-40년 후에는 정상의 눈들이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기다리고 있던 승합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마당에 있는 카페에서 우리는 킬리만자로 맥주를 시켜먹고 이어 차를 타고 시내구경을 나섰다.
초저녁인데도 시내 시장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어두컴컴한 환경에서도 그들은 물건을 사고팔며, 한편으론 삶을 즐기고 있었다. 아! 이게 진정한 아프리카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리카의 삶...
우리는 막걸리집으로 들어섰다. 일단은 안주 없는 막걸리를 시켜놓고 그들의 생활상을 엿보았다. 안주도 없는 술을 무슨 맛으로 즐길까? 그러나 그들의 흥겨운 모습을 보노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의 배부르고 편향된 생각일지 모른다.
어디를 가나 우리들을 보면 그들은 물건을 사라고 달려든다. 국경근처에서도 그랬었고, 잠시 거쳐 가며 휴식공간에서도 그랬다.
그리고 어디서나 그랬듯이 상품의 가격을 갸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반으로 깎아서 시작되는 억매흥정이 이루어지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그런지 모르겠다. 오히려 정찰제가 비싸다는 인식이 들게 하는...
다시 차를 이동하여 안주를 시켜놓고 커피 전문점으로 향했다. 킬리만자로커피가 세계적으로 인가가 좋대나...다른 선물보다 실속이 있어 보여 많은 수량을 구입하였다.
(지나며 보았던 시장 풍경이다. 이건 작은 규모에 불과하다. 70년대의 우리나라를 연상하듯...)
호텔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시장근처에서 사온 누와 닭고기 그리고 피자를 안주삼아 맥주를 시키고, 가져 온 양주도 뚜껑이 따졌다. 많은 이야기 보따리들이 펼쳐졌다.
산행대장님은 종업원 아가씨가 자신더러 ‘궁둥이가 크다.’라고 하라고 시켰더니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녀는 덧붙여‘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성희롱이 아니라 이곳에선 엉덩이가 큰 것은 미인의 조건이고, 다산의 상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순수한 모습에 마음이 가볍다.
그렇게 우리는 등반을 무사히 마친 즐거움과 마음 홀가분함에 1시가 넘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등반의 성공을 자축했다.
2. 죽음의 레이스 사파리 마사이마라
(2012. 8. 17∼8. 20)
8월 17일(금)
연일 계속되던 등반에 따른 피로감과 정상정복이라는 쾌감을 맛본 후 마셔댄 축하주로 인하여 고단함의 잠에서 깨어났다.
호텔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끝내고 짐을 챙겨 나이로비를 향하여 출발했다. 가이드는 가는 도중 점심을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늦은 점심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차를 타고 케냐와 탄자니아 국경지대인 나망가로 이동을 시작했다. 우리가 며칠 전에 지나 온 길이었다. 국경 검문소에서 잠시 쉬며 입출국 수속을 밟는 순간에 물건을 팔려고 많은 장사꾼들이 몰려들었다.
특정인의 물건을 사주기도 그렇고 하여 매우 짜증이 났다. 우리 일행 중 사진을 찍었다가 총을 든 군인에게 적발되어 해당 사진의 삭제를 요구 받았다. 조금은 이해가 안가기도 하였지만 그들의 입장을 헤아리기로 하였다.
4시경에서야 입국 첫날 점심을 먹었던 빅마마식당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마치 고향집에 온 기분으로 즐거워했다. 점심으로는 맛있는 채소들과 우리들이 좋아하는 된장국에다 쇠고기 구이가 나왔다. 어떻게나 맛이 나는지 밥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잠시 짐을 다시 정리하고 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뒤 사파리 짚차 두 대에 옮겨 타고 사파리여행지인 마사이족이 사는 마사이마라 국립고원으로 향했다. 거기까지는 다시 6시간이 소요된다고 하였다. 정말 차를 지겹도록 타게 생겼다. 오늘도 13시간이라는 탑승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마사이족의 집이다. 아이들은 흙밭에 딩굴며 놀고...아직은 가난하기 짝이 없는...그러나 희망이 보이는 듯...그러나 얻는 것과 함께 잃는 것이...)
또다시 나이로비 시내의 복잡한 교통체증을 실감해야 했다. 도대체 차량들이 왜 이렇게도 많을까? 그러나 막연히 가난한 나라일 것이라는 우리들의 생각은 여지없이 허물어졌다.
시내 뒷거리를 가다보니 대통령궁도 보였고, 주변에는 수많은 좋은 집들이 아름다운 숲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거의가 넓은 정원을 보유하고 담장은 전기 철망을 설치하였으며, 대문 바깥에는 경비원까지 두었다. 빈부의 차가 나도 너무 난다. 언젠가 아프리카 사람이 쓴 '나쁜 원조'라는 책을 읽었었다. 왜 선진국들의 원조를 나쁘다고 하였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권력자들이 그 것들을 빼돌려 버렸고 국민들은 성장동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를 탓할 바가 아니다. 저렇게 호화스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하지 않았다면 그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결국엔 내가 알바가 아니다. 나는 오로지 이 복잡한 도시의 꽉 막힌 도로를 탈출하는 것만이 일단은 나의 바람이다.
가는 길엔 험난한 도로가 있고, 여러가지 이름모를 식물들을 볼 수 있었다. 선인장류로 '서유포르비아 칸델라브롬'이란 긴 이름의 가시달린 교목도 보았다. 이곳 마사이족들은 넓은 사바나 암보셀리초원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일부는 도시로 유입되거나 반 유목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황량한 들판에 소나 양떼를 키우며 살아가는 모습이 왠지 낯설음을 더하는 듯 하였다.
가는 길에 날이 어두워져 비포장 도로 길을 달리는데 어디를 지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밤길에 심하게 차가 흔들려 손잡이를 움겨 잡았다. 차를 오래 타다보니 엉덩이가 얼얼하다.
기사는 노련한 것까지는 좋은데 말말로 무지막지하게 달린다. 멀리 아래편에서 불빛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지대가 높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차량 헤드라이트 불빛에 놀란 토끼 한 마리가 황급하게 도로를 건넌다. 녀석이 태연한 걸 보니 더러는 우리들과 같은 사람들을 보았나보다.
밤 11시가 가까워서야 커다란 철제 바리케이트가 가로막고 총을 든 무장 경비원이 우뚝 서있는 마사이라마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마치 우리가 무슨 죄를 지어 차에 실려 수용소에 들어서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경비원은 운전기사와 한참동안 대화를 나누더니 아무런 검문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그가 알아듣지 못한 말을 지껄였다.
'짜샤! 피곤한데 문 빨리 안 열어! 우린 예약이 되어 있다구!'
호텔의 시설은 웅장했다. 이 호텔은 케냐에서는 제일가는 호텔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우선 방을 배정받은 후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는 양식으로 차려져있다. 늦은 식사를 마치고 잠잘 방을 찾아가는데 사파리호텔이라 단층규모의 방가로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군인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마사이족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올라가는 주변은 원시야생의 숲이었다. 혼자 다니면 언제 사나운 동물이 나타날지 다소 으스스할 정도의 분위기속에 우리가 묵을 방으로 들어갔다. 숙소는 다소 고전적인 분위기이지만 사용하기에는 다소 불편한 것 같았다. 그리고 모기가 많을 것 같아 모기장을 잘 치지 않으면 불안하였으나 너무 피곤한 나머지 곤히 잠에 떨어졌다.
새벽 5시. 시간에 맞추어 잠이 깨어 세수를 하였다. 잠시 후 모닝전화가 왔다. 짐을 챙겨 호텔로비로 내려가니 대원들이 하나 둘 모여 들었다. 아침을 먹지 않은 채 어제 타고 왔던 사파리 짚차에 몸을 실었다.
새벽에 사파리를 찾아가는 것은 사자 등 동물들은 주로 밤에 사냥을 하는데 간혹 새벽에도 사냥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보기 위한 것이다.
사파리 공원 문을 열고 들어가니 조금 후 임팔라와 얼룩말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처음 보는 그들을 향해 열심히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러나 초원 가운데로 들어갈수록 수없이 많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앞에 본 모습들이 싱거워졌다.
그러한 동물들 중에는 누와 얼룩말의 수효가 월등하게 많았고, 그 두 종류는 서로들 가깝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평원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물의 무리들에 우리는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중 제일 숫자가 많은 것은 단연 누이고, 그 다음이 얼룩말이다. 누란 녀석은 얼마나 건방진지 도로에 누었거나 지나다가 차가 다가가도 제기분대로 비켜준다.
운전기사가 창문으로 손을 뻗어 엉덩이를 때리려해도 겁을 내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이 차에서 내려서면 머리를 모우고 방어자세를 취하였다. 방심하면 달려든다는 것이다. 고얀 녀석들 같으니라구...
(끝없이를 몇 번이나 거쳐도....누와 얼룩말이 많았다. 들판에 깔린게 고기다. 누 고기는 쫄깃한게 맛이 있었다. 아래는 우리를 사파리에 태우고 다닌 운전기사이다. 비포장 도로를 어떻게나 세게 달리던지 엉덩이가 얼얼했다. 그런데 사파리에선 제법 실력을 내보여 같이 사진을 찍어 주었다. 마당쇠 같이 생겨서...ㅋㅋ 옆의 사람은 놀려나온 원주민 마사이족이다.)
한참동안 그러한 관경들을 찾아다니며 구경하다 어느 곳에서 한그루의 나무가 있는 곳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먹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무의 이름은 '아프리카 아까시아'라고 하였다. 물론 정식 명칭은 아니겠지만...
이어 계속된 사파리 관광에서 보았던 것은, 가는 도중 길가에 죽어있는 얼룩말의 모습, 멀리 홀로 서있는 외로운 타조, 도로 건너 임팔라를 두고 사자가 접근하여 사냥을 하였으나 실패를 하고 지쳐 풀밭에 주저앉아 버린 장면, 작은 강가에서 비급하게 고개를 숙이고 모여 있는 하마들(악어는 없었음), 초원 한가운데 가지 높은 나무위의 잎을 먹고 있는 기린, 죽은 동물의 시체를 먹어치우기 위해 많은 무리의 독수리들이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는 장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급하게 동료기사들의 무전을 받고 달려간 곳에서 본 사자 한 쌍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누 무리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벌써 이곳에는 10여대의 사파리 짚차들이 모여들어 모두들 사자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꿈쩍 않고 있더니 한참 후 드디어 두 마리가 일어서는 모습에 사람들은 때가 왔다는 생각에 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런데 녀석들을 차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더니 암컷이 벌렁 드러누워 사랑놀이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사람들은 실망하고 서서히 이곳을 떠나가기 시작했다. 에라이! 요녀석들! 니들이 동물의 왕 사자 맞아? 왕 실망이다.
(죽은 동물을 두고 독수리들이 거친 순위 타툼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죽은 놈만 서러운 법이다. 아래는 사자 한쌍이 멀리 누떼를 보고 있어 사냥하는 특종을 잡으려 10여대의 차량의 카메라들이 지켜보는데 사냥은 커녕 오히려 차량 가까이로 다가와 사랑놀음을 하더라는...에라이! 버릇없는 녀석들...)
멀리 까마득한 곳에 나쿠르호수가 보였다. 그곳에 가면 수많은 홍학떼를 볼 수 있을텐데 아쉽게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허락하질 못한다. 11시가 가까워지자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하여 호텔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건너편 개울가에서 나뭇잎을 먹고 있는 코끼리 무리를 발견하였다. 상황을 파악한 운전기사는 차를 후진시켜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코끼리가 뭐 대수냐? 하는 마음이 들겠지만 그래도 아프리카에 와서 상징동물인 코끼리를 보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먼가를 잃어버린 듯 서운할 뻔하였다.
나는 차를 타고 호텔로 오며 다시금 끝없는 초원을 바라다보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이 초원을 나는 언젠가는 한번 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 다시 동물들로 가득차고도 남은 초원을 향하여 카메라 샷을 눌러댔다.
(가는 길에 제법 크다란 얼룩말 한마리가 길에 죽어 있었다. 독수리들이 먹으려고 애를 쓰는데 가죽이 두꺼워 마음대로 잘 안되는 모양이었다. 아래는 호텔로 돌아오는 중에 건너편에 코키리 떼가 보여 차를 돌려 얼굴을 보여주고 돌아왔다.)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가 왔었던 비포장도로를 다시 덜컹거리는 짚차에 몸을 싣고 달린다. 어젯밤 어둠으로 보지 못했던 풍광들을 눈여겨 살펴보았다. 넓고 넓은 초원과 산속에는 간간이 마사이족들의 집들이 외롭게 보였다.
그들은 항상 어려서부터 소나 양을 키우며 살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물이다 전반적으로 건기가 되면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황량한 초원에도 물이 흐르지 않는 곳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
그리고 남자들은 항상 막대기를 가지고 다닌다. 우선은 그들의 구역을 정하고 정부에서 생활에 대한 지원을 해 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언젠가는 정부의 개발계획에 의하여 그들이 삶의 터전을 침해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7시경 복잡한 나이로비 시내로 들어와 마지막으로 우리가 묵을 사파리 파크호텔에 짐을 풀었다. 식당으로 가니 ‘사파리 캣츠 쇼’를 관람하며(사실은 나는 쇼를 보지 않았다.) 사파리파그호텔의 특식인 ‘야마초마'를 먹었다. 쇠고기, 양고기, 염소고기, 악어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등 몇 종류인지도 모를 많은 고기들을 요리사들이 긴 칼 꼬챙이에 끼어진 고가를 칼로 베어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오는지 우리나라 가수들의 노래도 부르고, 고기를 베어주며 고기의 종류를 우리말로 알려주었다. We are world가 아니라 Korea가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되었다.
8월 19일(일)
5시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짐을 챙겨놓고 6시에 아침밥을 먹었다. 오늘은 귀국 비행기를 타는 날이다. 뭔가 시원섭섭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7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나이로비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 이륙시간인 10시 반까지 시간의 여유가 있어 면세점에서 선물구입에 나섰다.
우리나라로 오는 게이트 근처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법 많이 보인다. 몇일 전부터 자주 보았던 서울의 혜초여행사 소속 킬리만자로 등반 대원들, 이곳 대사관에 근무하며 부모님들을 유럽여행을 시켜 드리고 같이 귀국하는 아가씨의 가족들, 그리고 이런 저런 사유로 여행을 왔던 사람들이 귀국길에 오른다.
8월 20일(월)
13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비행하여야 한다. 잠을 청하였으나 잠이 도무지 오질 않는다. 자주 휴대폰의 시간을 보고 항공기내에 부착된 영상기기를 통하여 영화감상이나 항공기의 항로정보를 보아도 얼마 있지 않아 실증을 느끼고 만다.
비행기는 아프리카 동북지점을 지나 아덴만과 인도북부를 거쳐 몽고 부근과 중국 북부를 거쳐 날아가는 것 같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하얀 뭉게구름이 시야를 가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바심은 더해지고, 하나의 일로 지루하게 긴 시간을 경과함에 대한 불편함이 머리속에 떠오른다. 13시간 동안의 정상정복 및 하산, 13시간에 걸친 사파리로의 차량이동, 13시간의 귀국 비행기 탑승...설마! 오늘이 금요일은 아니겠지! 불길함이 아니라 불편함이 머리속에 남을지도 모르겠다.
킬리만자로나 사파리를 생각해 내면 마음이 흐뭇하지만, 이 지겨운 비행기 여행에서의 즐거움이란 오로지 기내식이라는 육감적인 현실에만 의존해야 했다. 다른 건 다 제껴두더라도 그래도 먹을 땐 좋더라는 이야기다.
04:50 드디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고 리무진 버스를 이용하여 서울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차창 박에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젠 모든 과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평소 내가 그토록 염원해 왔던 킬리만자로 등반과 아프리카의 끝없는 평원을 발로 걸어 보았고, 눈으로 직접 보았다. 가상의 이야기가 아닌 눈으로 보고 발로 걸은 아프리카의 현실을 이야기 할 기회가 많을 것 같다.
그럼으로 또한 내가 바라던 큰 목표가 사라져 버렸다는 아쉬움도 남는다.ㅎㅎ 진주로 향해 가는 고속버스에 앉아 생각에 잠겨 본다.
(열대우림. 킬리만자로 등반을 하며 이런 울창한 숲속길을 걸었다. 그속엔 흰꼬리 원숭이도 살고 있었고...)
이제 또 다시 삶을 고뇌해야 할 현실이 눈앞에 다가 올 테지만 제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막상 누군가가 내가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등반과 사파리관광을 통해 느낀 것은 무엇일까? 묻는다면, 먼저 킬리만자로 산악에서 온갓 수고를 아끼지 않고 살아가는 포터들이나, 황량한 들판에서 외롭게 소떼를 돌보는 마사이족들의 순수한 삶을 돌아보며, 킬리만자로의 험난한 정복 과정을 통해서는 나 자신을 가다듬고, 사파리관광에서는 그곳에서 살고 있는 마사이족들의 용맹함에 비추어 자연에 순응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닮고 싶다고 말해 주고 싶다.
등반과 여행의 전 과정을 마치며 처음부터 끝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은 산행대장님의 노고와 또한 자신들의 모임에 함께 참가하여 평생의 좋은 경험을 가질 수 있도록 동행을 기꺼이 허락한 대원님들께 감사를 드리고 그분들이 항상 건강하고 아울러 사업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며 글을 맺는다.
첫댓글
,..
고
도화원님
잊잖고 찾아 주셨네요...
너무 감사해요
퇴근하면서 차안에서 천천히 봐야겠어요
절대 환영입니다
일단 간단히 댓글
내용파악후 다시 댓글 올리겠습니다..
거듭 감사해요
멋진 여행을 하셨군요
대단하십니다요
장장 긴 여행을 다녀온 느낌입니다
읽는데만도 이틀이 걸렸어요...ㅎ
이렇게 좋은기행내용을 읽게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킬리만자로여행하시는분들께 많은 도움이 되실거같네요
저도 여행다녀오면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막상 실천은 어렵더라고요...ㅎ
저는 살아생전 다녀오기 힘들것같은 곳이네요
한라산 다녀오면서도 넘힘들다며 헐떡이던 기억이 새로워
어려운 구간구간 읽을때마다 가슴을 죄어오는 느낌을 받았어요
넘 좋은글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꾸준한 관심과 사랑으로 좋은글 자주 접할수있는 행운을 주십사고 감히 부탁드려봅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