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국민은행 부근에서 부상
증언자 : 기일섭(남)
생년월일 : 1937. 2. 25(당시 나이 43세)
직 업 : 짐꾼(현재 짐꾼)
조사일시 : 1988. 12
개 요
기일섭 씨는 5월 19일 오후 3-4시경 금남로 4가 국민은행 앞 목재배달 도중 갑자기 달려든 공수부대의 무차별 구타에 의해 팔과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당함.
고달픈 가장
나는 현재 슬하에 5남매를 둔 가장으로서 리어카 행상을 하고 있다. 고향 광산군 임곡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 그곳에서 결혼했다. 아이들은 계속 자라나는데 논 3마지기로는 생활이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큰애가 국민학교 3학년 되던 해인 1970년도에 무작정 광주로 올라오게 되었다.
광주에 왔으나 별 뾰족한 수가 없어 힘들지만 스스로 생활의 터전을 잡아야 했다. 양동국민학교 뒤, 산위에 전세 3만 원에 방을 얻었다. 지대가 높아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애 엄마는 아이를 업고 새벽에 산으로 가서 물을 길어다 먹어야 했다.
이리저리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병원에 다니는 동서의 소개로 남광주에 있는 하역노조에 들어가 석탄 하역작업을 주로 하였다. 석탄을 퍼내리기도 하고 모래와 스레트를 배달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수입이 괜찮은 편이었다. 일당 6, 7천 원 정도를 벌 수 있었다. 인원은 70명 정도였는데 사람이 많을 땐 140명 정도가 같이 일했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그날 일한 총물량에 따라 돈이 나오면 그것을 가지고 일한 사람끼리 나눴다. 빠지지 않고 나가려고 했으나 일이 힘들어 한 달 30일을 꼬박 채우기는 어려웠다. 내가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아내는 새벽밥을 해 나르느라 무척 고생을 했다.
그러나 그 일도 오래할 수 없었다. 대단위 연탄공장이 효천에 들어섬에 따라 노조가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탄이 모두 효천으로 몰려 우리가 할 수 있는 물량이 줄어드니까 하나 둘 일자리를 옮기자 나도 그곳을 나왔다.
내가 직장을 잃고 집에서 5개월 가량 놀고 있는 사이에 아내는 보따리장사를 했다. 그 무렵에 큰 애가 조선대부속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입학금이 없어 간신히 돈을 구해 들어갔다. 나는 그 뒤로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물건을 날라주는 일을 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이사를 자주 하게 되었다. 전세금을 모을 틈이 없었으므로 우선 사글세를 살아야 했는데 열 달 지나면 다시 돈을 주고 방을 구해야 했다. 학동 가죽공장 뒤에 있는 5만 원짜리 사글세방에서 살다가 기간이 끝나 자 더 싼 방을 얻어 방림동으로 이사를 했다.
목재배달 도중 부상당해
이렇게 생활고에 쫓기다 보니 정치, 사회의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1980년 5월에 들어 심해진 학생들의 데모를 보며 마음이 불안했다. 하루 벌어 먹고사는 처지가 5월 19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오후 3-4시경, 당시 국민은행 건너편에 당구장 공사가 진행중이었는데 나는 그곳에 목재를 배달했다. 구원호청 빈터에 있는 평화목재소에서 목재를 싣고 당구장에 모두 내려준 뒤 당구장 계단을 막 내려왔을 때였다. 한바탕 시위대가 지나간 뒤였는지 거리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거리에 있던 공수부대 4명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당구장 공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냥 놔두고 문 앞에 혼자 서 있는 나에게 무차별 구타를 가했다.
늙은 몸으로 먹고살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나온 것이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나는 정신이 아득하도록 구타를 당했다. 순식간에 왼쪽 발이 부러졌고 갈비뼈도 크게 다쳤다.
한참 뒤 나를 죽사발로 만든 공수대가 가버지라 간신히 걸어 평화목재소로 갔다. 그곳 사장이 빨리 병원에 가자고 하여 함께 태평극장 옆에 있는 접골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부러진 팔에 깁스를 하고 다시 나왔다.
그 후 현 백제호텔 부근에 있는 한양섭 병원으로 역시 사장과 함께 갔다. 그곳에서 엑스레이를 찍고 깁스를 했다. 치료비가 3만 원 나왔는데 함께 갔던 목재소의 사장이 2만 원을 부담했고 남은 1만 원은 나중에 내가 갚았다.
응급치료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 거의 거동을 못 했다. 기침을 하던 중 공수부대에게 맞았던 갈비뼈 하나가 부러져버렸다. 가래도 심했다. 그래서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그때 치료비는 국고에서 부담했다.
그곳에 있을 때 구청과 도청에서 조사를 나왔고, 경찰서에서도 형사가 나와서 조사를 했다. 그들은 다치게 된 경위와 장소를 물었다. 또 '데모를 했느냐, 안 했느냐'며 따지듯 묻기도 했다. "늙은 몸으로 리어카를 끌며 벌어 먹는 사람이 데모를 했겠소?" 하고 대답했다. 나를 담당한 형사는 두번째 왔을 때 당구장 주인의 사모님을 아느냐고 물었다. 안다고 그랬더니 그럼 택시로 같이 가서 확인을 해보자고 하여 그렇게 했다. 형사는 당구장 주인으로부터 확인서도 받아갔다. 그 뒤로는 더 이상 조사하지 않았다.
입원을 한 지 3개월이 다 되어갈 무렵 도청에서 20만 원을 주고 갔다. 기독교인들이 와서 찬송가를 불러주기도 했고, 우유와 약간의 돈을 주기도 했다.
요즘의 생활
나는 3개월 후에 적십자병원에서 퇴원했다. 보기에는 멀쩡하여 완쾌가 된 듯 했으나 그 후유증이 심했다. 보름 동안 집에 있다가 다시 리어카를 끌어야 했다. 구 원호청 후문에 리어카를 대놓고 이삿짐 등을 주로 날랐다.
일하면서 관청직원들의 단속을 많이 받았다. 그들이 단속을 나올 때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니까 사정을 좀 봐달라며 애원을 했다. 지금까지 나는 리어카를 끌고 있는데 이제는 늙은 몸이 되어서인지 그렇게 심하게 단속으로 시달리지는 않는다. 처음에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많았으나 벌이가 없어서 그만둔 사람도 있고, 대부분 전직을 했지만 오래도록 그 일에 종사하다 나이가 들어 죽은 사람도 더러 있다.
현재 애들 어머니는 황태자예식장 등에서 청소부로 일하면서 월 15만 원 정도를 받는다. 큰애는 중학교를 마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곧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작은 애도 형편 때문에 많이 가르치지 못했는데 서울에서 공장에 다니면서 가끔씩 용돈을 보내오곤 한다. 둘째아들은 전남대학교 미술과에 다니고 있다.
9년 전부터 다섯 식구가 450만 원 전세로 얻은 단칸방에서 살아왔다. 지금껏 받은 보상은 도청에서 받은 20만 원과 부상자회로 나온 3백만 원이 전부였다. 5·18이 끝난 뒤에 동에서 의료보험카드를 만들어주었다.
생활난에 허덕이며 살다가 보니까 지금껏 별 관심을 갖기 못한 채 살아오다가 신문, 방송에서 신고하라고 하여 박옥재 씨가 회장으로 있는 5·18 광주의거부상자 동지회에 신고했다. 신고를 할 때도 매우 복잡했다. 치료를 받았던 병원에서 진단서를 끊은 뒤 거기에다 주민등록등본과 호적등본을 첨부하여 제출해야 했다.
나는 요즘 대학에 다니고 있는 둘째아들에게 자주 말한다. "데모하지 말아라. 데모를 하다가 다치면 너만 서러운 것이다. 너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다 해결하려고 하고 있으니까 가만히 있거라." (조사정리 최정숙)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