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2 사화]
사화란 조선시대에 정치적인 반대파에게 몰리어 조신 및 선비들이 참혹한 화를 당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은 개국 이래 유교를 국교로 삼아 문(文)을 숭상하고 유학(儒學)을 장려함으로 우수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서 선비사회 (유림)가 매우 활기에 찼다. 그러나 이들은 주의(主義), 사상(思想), 감정(感情) 향사(鄕士)의 관계 등으로 인하여 여러 파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서로가 상통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서로 대립 혹은 반목하는 파벌이 많았다 대표적인 파당은 세조의 왕권찬탈에 가담하여 높은 지위와 부귀를 누린 훈구파 혹은 기호파가 있으며 여기에 반대하는 절의파가 있다. 또한 세조의 왕권 찬탈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조정에 진출하여 기회를 찾는 사림파, 영남파, 청담파등이 있다. 이들의 각파는 서로의 논쟁과 대립으로 투쟁하고 패자는 역적으로 몰려 모든 것을 빼앗겨버리거나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한파가 이기면 또 다른 반대파가 생겨나와 사화를 야기 시켰다. 이렇게 한파가 물러나면 다른 파가 또 다른 파가 생기면서 조선의 당쟁은 그칠 줄 모르고 한편으로는 서당과 서원을 세워 유생들을 교육시키면서 정치의 비판의식과 복수 관념을 응집시켜서 당파의 희생을 야기 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당쟁의 회오리 때문에 많은 선비와 정치인들이 제물로 사라져간 사화가 일어나곤 했다
1. 계유(癸酉)병자(丙子)사화
1453년 (단종1) 에서 1456년(세조2)에 걸쳐 수양이 단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절개 있는 신하들에게 화를 입힌 일이다단종이 숙부인 수양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이를 분개하는 충신들이 단종복위를 위하여 의논하고 숙의하기에 이르렀으나 이를 사전에 알아버린 수양에게 성삼문 박팽년 이개등 사육신등을 참형하고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 시켜서 강원도 영월로 귀양 보낸 후 끝내 사사시킨 사건이다
2. 무오(戊午)사화
1498년 (연산4)에 김일손등 신진 사류가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게 호하를 입은 사건이다 당시 성종실록이 편찬되자 사관이었던 김일손이 훈구파의 비행과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렸는데 전부터 못마땅해 하던 훈구파등이 (유자광, 이극돈) 이 일을 문제 삼아 수양의 왕위 찬탈을 비방한 것이라고 연산에게 고해바쳤다. 이일로 인하여서 김종직 문하의 수많은 사림파 선비들이 화를 당하게 되었는데 무오년에 일어난 사건이라서 무오사화라 한다
3. 갑자(甲子)사화
1504년 갑자년에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복위문제로 연산군에 의한 사화이다윤씨(연산의 생모)의 죽음에 의문을 갖고 있는 연산에게 임사홍은 훈구파와 사림파를 제거하기위해서 윤씨의 폐위당시 관련이 있는 정치인들과 죽게 된 이유를 고해바침으로서많은 선비가 목숨을 잃었다특히 이미 죽은 한명회 정여창, 남효은 등은 부관참시를 당하는 일도 일어났다
4. 병인(丙寅)사화
1506년에 일어난 사화로서 무오, 갑자사화의 연장된 사화로서 이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가해진 사화이다
5. 기묘(己卯)사화
1519년 기묘년에 남곤, 심정 등 훈구파의 재상들이 당시 중종을 도와 정치개혁에 가담한조광조를 비롯한 젊은 신진들을 모략과 음모로서 제거한 사화이다
6. 신사사화
1521년에 (중종11) 안치겸 일파들이 심정, 남곤등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이다안당의 아들 안치겸은 사림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린다하여 심정, 남곤등을 제거하려하였으나 역으로 심정의 무고에 의하여 처형당한 사건이다
7. 을사(乙巳)사화
1545년(명종1)에 왕실의 외척인 대윤과 소윤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화이다세자 외숙인 윤임일파의 대윤파와 경원대군의 외숙인 윤원형의 소윤파의 왕위계승에 대한암투가 일어났으나 세자가 즉위하자 대윤파가 득세하여 일어난 사화이다
8. 정미(丁未)사화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로 일어난 사화로서 일명 벽서의 옥이라 한다전라도 양재역 벽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세를 농하여 나라가 망하려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벽서가 발견되어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이기 정명순 등이 을사사화 때 제거하지 못한 정적을 처형한 사건이다
9. 을유(乙酉)사화
1549(명종4)년에 이흥남 형제의 난언을 상주하여 이흥남의 역모 죄로 몰려 그의 아우 이흥윤 등이 능지처참당하고 그에 연튜 된 많은 선비가 화를 당한 사건이다
10. 을축(乙丑)사화
1613년(광해군5)에 영창대군을 몰아내기위해서 일어난 사건이다 문경세재에 강도사건이 일어났는데 김재남(영창대군의 외숙부)등이 연류 되었다고 고발을 해서 영창대군이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강화에서 죽임을 당했으며 김재남은 사사 당했다. 그 뒤 조야에서는 끊임없이 구원의 상소 등이 이어졌고, 형제의 의를 따지는 전은설(全恩說)과 여덟 살밖에 안된 ‘유자(幼子 : 어린 아이)’라는 이유로 그를 비호하였다. 그러나 대북파의 계속된 요구로 이듬해 봄에 이이첨 등의 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증살(蒸殺)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관작이 복구되었다.
11. 기사(己巳)사화
1689년(숙종15)에 서인과 남인들 간의 당쟁으로 일어난 사건당시 정권을 잡은 송시열등이 소의 장씨(장희빈)의 아들을 원자에 책봉하는 것은 이르다하여 늦추려하자 남인들이 왕을 충동질하여 원자 책봉을 늦추자하던 서인들을 축출하는 큰 옥사가 일어났다
12. 신임(辛任)사화
1721년(경종1)에서 다음해까지 노론과 소론의 대립으로 신축년의 신자와 임인년의 임자를 따서 신임사화라 한다. 경종은 노론파의 건의로 왕세제(후에 영조)로 하여금 대리 청정하게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소론파들이 노론파들이 왕의 신병을 조작하여 발설하였다하여 노론의 4대신(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 등을 탄핵하고 유배 보내는 사건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