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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조선 사람들은 고래를 잡지 않았나?
<해변무포어지인(海邊無捕魚之人>-바닷가에 고기잡이하는 이가 없다!
왕조실록(王朝實錄)은 피폐한 어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고래를 밀어 넣는 어민들
8·15해방 전까지 韓國인이 주체적으로 捕鯨業(포경업)을 일으키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官의 수탈이었다. 李朝말 우리 나라 어촌에선 해괴한 일들이 가끔 벌어졌다. 굶주려 영양실조 상태에 빠진 어민들은 죽은 고래가 바닷가에 표착(漂着)해도 이를 잡아 기름을 뽑아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규경(李圭景)이 1835∼45년에 쓴 책에 따르면 어민들은 표착한 고래들을 바다로 몰래 밀어넣어 버리곤 했다는 것이다. 고래 한 마리의 기름을 짜면 기천냥을 벌 수 있는데 이 무슨 짓인가. 고래가 바닷가에 얹히면 지방 관아(官衙)에선 어민들을 혹사하여 기름을 뽑게 하곤 막대한 이익을 독차지했다. 그래서 어민들은 고래가 표착하면 『눈깔 빠지게 일이나 하게 생겼다』면서 고래를 밀어넣어 버렸던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지배세력은 捕鯨을 포함한 어업을 장려하긴 커녕 그 발전을 틀어막는 데 힘써왔다. 서기 372년 불교가 이 땅에 전해졌다. 불교에 연유하는 살생금단의 풍조는 어업과 상충되는 것이었다. 599년 백제법왕(百濟法王)은 살생을 금하는 영을 내렸다. 민가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고 어구를 불태워 어업을 금지시켰다. 新羅에선 서기 529년(法興王 16년)과 705년(聖德王 4년)에 살생금지령을 내린 바 있다. 이런 명령은 일시적이긴 하였지만 어업 천시 사상을 조장, 우리 민족의 해양지향성을 꺾는 역할을 했다.
삼국시대와 高麗시대에도 해안엔 고래가 좌초 또는 표착하는 일이 잦았던 것 같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엔 고구려(高句麗) 민중왕(閔中王) 4년(AD 47년), 東海人 고주리(高朱利)가 고래눈을 왕에게 바쳤는데 밤에도 빛이 났다고 쓰고 있다. 『三國史記』엔 이밖에도 고래로 보이는 大魚의 출현을 여러 번 기록하고 있어 당시 고래자원이 풍성했음을 짐작케 한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년(AD 679년)엔 강에 길이 1백尺의 죽은 물고기가 나타났는데 이것을 먹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쓰고 있다.
고래는 죽은 뒤 12시간이 지나면 살이 썩기 시작한다. 고래는 두꺼운 지방층으로 감싸져 있다. 죽은 고래의 내부 열이 밖으로 발산되지 않아 부패가 빨리 일어나는 것이다. 국제포경조약은 고래를 죽인 뒤 33시간 이내에 공모선(工母船)에 옮겨싣도록 규정하고 있다. 『三國史記』의 이 기록은 죽은 고래고기를 먹고 집단식중독을 일으킨 사건을 적고 있는 듯하다. 高麗시대엔 등화(燈火)용의 경유(鯨油)가 등장했다. 元宗 14년(AD 1273년) 元의 「다루하치」가 함경도(咸鏡道)와 경상도(慶尙道)에서 고래기름을 구했다는 것이다.
高麗시대엔 왜구의 잇단 습격과 官의 수탈이 捕鯨의 발달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나타났다. 高宗 때는 어떤 병마사가 당대의 실력자 최이(崔怡)에게 아첨하기 위해 살조개를 잡게 한 적이 있었다. 명령을 받은 이 어촌(德源都護府龍津縣)에선 할당량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50여호는 마을을 떠나 달아나고 말았다『(高麗史)』.
日本어부들의 수탈 심해
어민에 대한 수탈은 李朝시대에 들어가선 세기말적인 가혹상을 드러낸다. 종실(宗室)과 귀족들은 정치망어장(漁箭)을 사점(私占), 터무니 없는 세율(稅率)로 어민들을 착취했다. 이에 덩달아 지방관리들은 상하계급에 따라서 어민들을 줄줄이 수탈, 한 어민이 5∼6회의 중세(重稅)를 지불해야 했다. 어민을 보호해야 할 병수사(兵水使)무리는 어획물을 약탈하는 데 앞장서, 어민들은 울면서 공수환가(空手還家)해야 했다.
정치망어장 아닌 일반어장의 경우, 관아(官衙)에선 어장부근의 활리배(滑吏輩)에게 漁稅징수를 맡겼다. 이것은 어선들이 고기를 잡은 뒤엔 흩어져 버려 징수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이 결과 청어잡이 큰배 1척이 청어稅로 8만 마리의 청어를 수탈당하는 형편이 됐다. 아전배들의 수탈에 주눅이 든 朝鮮어민들은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게 잡은 고기를 내주는 것이 습관화 됐다. 19세기말 韓國에 진출한 日本 어민들은 이 점을 이용, 어획물을 강탈해 갔다. 『…같이 고기를 잡아도 朝鮮어민들은 기술이 부족하여 어획량이 적다. 이 적은 어획량조차 日本 어부들이 선상에서 폭력으로 위협, 빼앗는 일이 잦다. 그저 위협만 해도 순순히 내놓는다. 日本 어부들은 日本에 돌아가면 韓國에 처음으로 출어하는 어부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이들은 당연하다는 듯 또 朝鮮人들로부터 고기를 약탈해 간다』<우원차길 저(羽原叉吉)著『日本近代漁業經濟史』>
李朝시대 어민들이 당한 수탈은 농민보다도 더욱 심했다. 현물에 대한 약탈의 용이성, 수탈자의 중첩, 어민천시사조등 어업의 특수성이 수탈을 가중시켰던 것이다. 철종(哲宗)때 고군산(古群山)열도의 어민들은 청어자원의 감소로 생업을 잃다시피했다. 그래도 漁稅는 여전하여 어민 1천여호중 8백여호는 세금을 피해 도망치고 말았다. 蔚山에선 상어연승 어민들에게 군리(郡吏)들이 학교자금(學校資金)이란 명목으로 상어 한 마리당 1백文을 거둬들였다. 어민들은 폐업으로 이 수탈에 대항하는 수밖에 없었다. 산업을 진흥시켜야 할 관리들이 산업발전의 가장 큰 저해요인이 됐던 것이다.
『해변무포어지인(海邊無捕魚之人)』―왕조실록(王朝實錄)은 피폐한 어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19세기 말 韓國여행기를 쓴 美國의 「비숍」여사는―『어민들은 돈을 벌 생각을 않는다. 모조리 관리들에게 빼앗겨버릴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빈곤 속에 남아있기를 바란다. 빈곤만이 그들을 보호해 주는 것이다』(Korea and Her Neigbours, 1897 New York)
『가난의 보호』를 구하는 어민들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捕鯨業에 진출할 리는 만무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慶南 고성(固城)과 진주(晋州) 등지의 어민들은 왜병(倭兵)으로 변장, 동족을 약탈했다. 무지막지한 官의 수탈은 어민들로부터 동족의식마저 빼앗아 갔던 것이다.
고래코를 꿰는 日本人
한편 이웃 日本에선 16세기 말부터 산업적이고 조직적인 捕鯨이 이뤄지고 있었다. 日本水軍의 지방조직인 번(藩)이 포경을 직영하거나 지방토호들이 포경業의 「스폰서」가 됐는가 하면 어민들이 경조(鯨組)라는 동업조합을 만들어 고래들이 연안에 회유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고래잡이에 종사했다. 北九州, 토좌(土佐), 기주(紀州) 등 日本의 捕鯨기지엔 고래잡이 철만 되면 3백∼4백명씩의 포경꾼들이 몰려 붐볐다. 慶長년간(1596∼1615)의 紀州太地浦엔 72개의 鯨組가 포경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의 포경법은 망취법(網取法)이라고 불리는 연안포경이었다. 1675∼1894년 사이 약 2백20년간 계속된 網取法포경은 세계포경사상 유례가 없는 용감무쌍한 것이었다.
바닷가의 언덕이나 산꼭대기에 고래관측소를 둔다. 고래가 나타나면 관측원은 신호를 보낸다. 포국(浦國)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자선(勢子船)이 일제히 출동, 고래를 쫓는다. 한편 망선(網船)은 그물을 적당한 곳에 쳐둔다. 勢子船은 뱃전에 방망이로 두드려 탕탕 소리를 내 고래를 미리 쳐둔 그물 쪽으로 몬다. 고래의 청력은 들을 수 있는 음역에서 인간(20「헬츠」∼20「킬로헬츠」)의 약 8배(20「헬츠」∼1백50「킬로헬츠」)나 돼 두드리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고래의 앞뒤를 망선(網船)들은 2개의 반원형 그물로 둘러싸 원형 속에 가둬 버린다. 그런 다음 勢子船들이 한꺼번에 고래로 몰려가 작살의 폭우(暴雨)를 퍼붓는다.
고래의 힘이 빠졌을 땐 길이 2m의 칼을 등지느러미 밑에 있는 심장을 향해 찔러 넣는다. 그래도 고래는 죽지 않는다. 이번엔 여러 勢子船에서 「하자시」(우자(羽刺)=작살 던지는 사람)들이 바다로 뛰어들어 고래를 향해 헤엄쳐간다. 맨 먼저 고래등에 닿는 「하자시」에게만 고래의 코를 꿰는 특권이 주어진다.
그는 고래를 덮어씌운 그물을 잡고 고래와 함께 뒹굴며 물속으로 자맥질, 고래의 이마빼기에 붙은 콧구멍을 밧줄로 꿴다. 고래가 솟구치면서 「하자시」는 등으로 옮겨가 등판에 구멍을 깊게 뚫어 밧줄의 다른 끝을 또 꿰는 것이다. 이 밧줄의 다른 끝을 또 꿰는 것이다. 이 밧줄로 고래의 허리부분을 칭칭 감아 잡은 지쌍선(持雙船)이 양쪽에서 당겨 고래허리를 조른다. 기진맥진한 고래에게 「하자시」는 마지막 「致命(치명)의 劍」을 박는다. 이때엔 持雙船의 선원들은 다른 배로 피신한다. 고래의 마지막 몸부림의 피해를 보지 않으려고―.
실학자 정약전(丁若銓)이 흑산도에 귀양가서 쓴 『자산어보(玆山魚譜)』는 고래의 눈을 접시로 만들어 쓰고 등뼈는 절구통, 수염은 자(尺)로 만들어 사용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밖에 몇가지 피상적이고 과장된 얘기를 적고 있다. 당시 美國과 日本에선 엄청난 규모의 포경업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韓國에선 아직도 환상적인 고래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東海는 예로부터 고래 天國이었다. 「구로시오」의 지류인 「쓰시마」난류와 北韓한류가 맞부딪혀 섞이는 동해는 고래의 먹이인 새우가 박신박신하는 바다였다. 또 남북으로 이동하는 고래 떼의 계절적인 통로이기도 했다. 19세기말 동해에 진출한 日本인들은 그저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여기에 20마리, 저기에 30마리, 이쪽에 10마리, 저쪽에 5마리… 사람눈이 미치는 한 사방팔방이 고래다. 근 30∼50해리는 고래 떼로 덮여 있었다』(『大日本水産會報』 226호). 『朝鮮海에 고래가 풍부함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고래 수백, 수천마리가 大群을 이루고 噴潮는 바다를 덮는다』(『最新朝鮮移住案內』. 山本樂軒著)
향고래 잡는 美國式 포경
韓國인이 손도 대지 않고 버려둔 이 고래의 보고를 捕鯨선진국 美國과 日本, 「러시아」가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1712년 美國「뉴·잉글랜드」의 「난터케트」항구의 포경선 한 척이 대서양에 출어했다가 풍랑으로 표류중 향고래 떼를 발견했다. 이것이 향고래를 대상으로 하는 美國式 捕鯨의 발단이 됐다. 美國식 포경의 특징은 세계의 모든 대양을 무대로 했다는 점이다. 향고래는 「바다의 코스모폴리탄」으로 불린다. 수십 수백, 때로는 수천마리의 「할렘」을 이뤄 북빙양에서 남빙양,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안가는 바다가 없다.
이 향고래를 쫓아 美國의 포경선은 약 1백50년간 세계의 바다를 누비게 된다. 「뉴잉글랜드」에서 출항한 포경선은 한번 항해에 2∼3년을 소모할 때도 있었다. 그 자신이 고참포경선원이었던 「허먼·멜빌」은 명작「모비·딕」에서 장대한 「스케일」의 美國式 捕鯨을 재현한 바 있다.
미국식 포경업의 발전을 부추긴 것은 18세기 중엽의 양초공업 발달이었다. 향고래의 기름은 거의가 「왁스」양초의 재료로 안성맞춤이었다. 1820년 美國 포경선들은 日本 근해에 향고래떼가 와글와글하고 있는 것을 발견, 선단을 보내기 시작했다. 1822년엔 1백여척이 日本동해의 금화산(金華山) 연안에 출어했다. 1847년 미국 포경선들은 「캄차카」반도, 「오츠크」海로 진출, 드디어 東海로 들어왔다. 이즘이 미국식 포경의 절정기였다.
1840∼50년의 「피크」에 세계의 포경선수(1842년 통계)는 8백72척(그중 6백52척이 美國船)에 달했다. 연평균 고래기름 생산고는 약 2만4천t. 이때부터 우리 나라 史書에 미국 포경선의 출현이 기록되기 시작한다. 哲宗 3년(1852년) 12월 현재의 부산시 南구 龍塘浦(용당포) 앞바다에 이양선(異樣船)이 나타났다. 동래부(東萊府)에서 문정(問情)한 바, 언어는 통하지 않고 선원이 배를 가리키며 「며리개」라고 하는 것으로 미뤄 미국 포경선인 것 같다는 보고가 조정에 올라왔다(『日省錄』).
이 배엔 日本인이 같이 타고 있었다. 아마도 길잡이였을 것이다. 동해안에선 미국 포경선원들이 상륙, 물을 길어가거나 나무를 베가기도 했으며 문정차 접근한 우리쪽 선박에 총을 쏜 적도 있었다. 이들은 고래를 쫓아 韓國영해까지 침범, 고래를 잡은 것 같다. 박구병(朴九秉) 교수는 이것은 李朝시대에 있어서 외국인의 불법어로의 하나로 취급했다(『韓國漁業史』).
185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석유가 발견됐다. 양초공업은 쇠퇴해지고 미국식 포경도 급속하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고래기름은 석유발견으로 효용이 감퇴됐으나 「칼러」를 빳빳하게 하는 고래수염은 수요가 줄지 않았다. 미국식 포경은 수염고래 종류를 잡아 겨우 명백을 유지해갔다. 이것도 1890년께 「셀룰로이드」가 발견되자 빛을 잃고 1898년 서사시적인 미국식 포경시대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러시아」捕鯨基地의 설치
美國이 물러간 뒤 東海에 진출한 것은 日本과 帝政「러시아」. 1901년 「러시아」황태자 「니콜라이」(뒤에 「니콜라이」2세)는 「블라디보스톡」에서 거행된 「시베리아」철도기공식에 참석하는 도중 군함 6척을 이끌고 日本을 방문했다. 황태자를 수행했던 「크로포트킨」장군(露日전쟁때 극동군사령관)과 「케이젤링」백작은 日本에서 귀국도중 東海를 지나면서 고래 떼를 발견, 고래잡이에 마음이 움직였다. 백작은 귀국 즉시 1백20만「루블」의 자본금으로 「블라디보스톡」에 太平洋捕鯨會社를 세웠다.
「러시아」포경선들은 개발된 지 얼마 안되는 최신식「노르웨이」포경포를 장치, 東海에서 활동중이던 日本 포경선을 단번에 압도하고 말았다. 1896년 「러시아」포경선은 咸鏡道의 마양도(馬養島) 근해에서 하루사이 7마리의 고래를 잡을 정도였다. 1863년 「노르웨이」사람 「스벤·포인」이 발명한 포경포는 세계 捕鯨史에 혁명을 가져왔다. 사람이 작살을 던져서 잡던 시대에서 포경포로 작살을 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증기선과 포경포의 결합으로 인간은 이제 20「노트」로 헤어나가는 대왕고래 참고래 등 쾌속고래를 놀라운 명중률로 잡을 수 있게 됐다.
죽은 뒤 가라앉는 고래의 배에 압축공기를 불어 넣어 띄우는 방법도 고안했다. 「노르웨이」식 포경시대 또는 근대 포경시대로 불리는 포경사의 새 章을 열게 한 「노르웨이」인 들은 「네델란드」 영국, 미국의 代를 이어 세계의 포경업을 주름잡게 된다.
동해에 나온 「러시아」포경선단은 잡은 고래를 처리할 포경기지를 필요로 하게 됐다. 1897년 「러시아」공사 웨베르는 포경기지 조차(租借)문제를 가지고 우리 정부와 교섭을 시작했으나 냉담한 반응만 얻었을 뿐이었다. 이 교섭이 별 성과 없이 질질 끌고 있을 때 자그마한 분쟁이 일어났다.
1898년 11월1일 「러시아」포경선 7척이 미개항지(未開港地)인 진포(鎭浦)(元山 북쪽)에 들어왔다. 元山海關은 이들중 3척을 元山으로 끌고 와 억류하고 다음날엔 鎭浦에서 허가 없이 고래 21마리의 배를 갈랐던 「게올기」호가 元山항에 들어오자 이것도 나포해 버렸다. 「러시아」측에선 일기불순 때문에 부득이한 입항이었다고 항변, 3만4천4백45元29錢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舊한국정부도 이에 지지 않고 손해배상청구의 약 3배인 11만5천9백20元의 벌금을 부과했다.
「러시아」는 이 사건을 정체상태의 포경기지조차 교섭에 촉진제로 이용하려했다. 신임 「파블로프」공사는 1899년 3월16일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에게 앞으로 3일 이내에 포경기지조차약정서를 조인시켜 달라는 협박조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포경선 억류사건은 동해안 포경기지의 필요성을 증명하고 있다는 게 「러시아」의 강변이었다. 「파블로프」공사는 3일이내 조인을 해 주지 않으면 高宗과 직접 면담, 담판을 짓겠다고 통보해 왔다.
정부는 할 수 없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중추원(中樞院)의 의관들은 이 약정서案에 반대, 부결시키고 말았다. 이권을 함부로 외국인에게 넘겨주는 것은 부당하다는 반대이유였다. 「파블로프」공사는 이에 격분, 高宗과의 알현을 요구, 3월24일 상오 10시로 약속됐다. 이때 「러시아」에 유리한 정변이 일어났다. 3월21일 露國과의 영수 조병식(趙秉式)의 공작으로 참정(參政) 심상훈(沈相薰)이 파직되고 박제순 등 4명의 각료가 면직됐다. 「3월정변(政變)」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심상훈과 엄귀인(嚴貴人)의 불화에 기인한 것인데 露國파의 세력증대를 가져왔다.
3月政變 일으킨 露의 捕鯨야욕
이런 상황에서 신임 外部大臣서리 이도재(李道宰)는 국왕과의 면담 몇시간전 중추원에 다시 이 안에 대한 동의를 구했으나 여전히 완강한 반대만 받자 정부는 가장 거센 반발을 보인 의관(議官) 5명을 면직시키고 말았다.
「파블로프」와의 면담에서 高宗은 포경기지조차를 윤허, 중추원의 반대와는 상관없이 3월29일 이 약정서는 조인됐다. 이 약정서 조인에 따라 「러시아」는 울산의 장생포, 강원도 장전(長箭), 함북의 마양도(馬養島)에 12년 조차(租借)기간의 포경기지를 세우게 됐다. 이 포경기지의 설치는 우리 나라 포경사(捕鯨史)에 획기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한국인들은 처음으로 근대포경법에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장생포 주민들 중엔 포경선에 자리를 얻어 승선하는 사람이 생겼고 고래해부원으로도 고용됐다.
1905년 발간된 『최신한국사정(最新韓國事情』(강용일저(岡庸一著))에 따르면 「러시아」포경선 7척엔 20여명의 한국선원들이 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 선원들은 갑판원, 기관원, 혹은 말단잡역부였다. 「러시아」포경선단은 「러시아」해군성(海軍省)으로부터 매년 5만「루블」의 보조금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포경 이외에도 해양조사 정보수집등 군사적인 활동도 벌였던 것 같다. 동해에서 잡힌 고래고기를 매년 약1천t씩 일본의 「나가사끼」로 수출하기도 했다. 당연히 일본의 신경이 날카로와 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 포경선이 한국에 첫 진출한 것은 1890년, 우리 나라 해산회사(海産會社)의 고용형식으로서였다. 이 해 포경선 22척 일본인 어부 2백56명이 부산에 들어와 3년간 20여두의 작은 귀신고래를 잡는데 그치고 1894년 2월 폐업하고 말았다. 1896년엔 망취법(網取法)포경의 일본찬주경조(日本讚州鯨組)가 포경 특허를 받고 17척의 포경선(어부 1백20명)을 데리고 와서 장생포 근해에서 귀신고래를 잡았다. 網取法 포경으로는 연안에 붙어서 회유하는 고래밖에 잡지 못하기 때문에 귀신고래를 주로 죽였던 것이다. 이 鯨組는 1899년 포경선원들이 다른 큰 회사로 「스카우트」돼 가버리는 바람에 폐업해 버렸다.
「노르웨이」식 포경기술을 익힌 「러시아」선단에 눌려 쪽을 못 펴던 일본은 1899년 일본원양어업(주)의 설립으로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이 회사는 「러시아」 태평양포경(주)선단에서 종사하다가 계약이 끝나 하선 중에 있던 「노르웨이」의 명포수 「피터슨」을 고문으로 추대, 포경 비법(秘法)을 배우는 한편 「노르웨이」에서 포경포등장비 일체를 사들여 「러시아」와 대결할 태세를 갖춰갔다. 당시 「노르웨이」포수는 세계대양을 석권하고 있었다. 「러시아」태평양포경(주)의 포수들도 모두 「노르웨이」人이었다.
일본정부는 일본원양어업(주)이 동해에서 조업할 수 있는 길을 트기 위해 한국정부와 포경특허교섭을 벌였다. 「러시아」가 만든 선례에 따라 1900년 2월2일 일본의 「하야시」공사와 일본원양(주)의 하북(河北)사장은 高宗과 면담, 경상(慶尙) 강원(江原) 함경(咸鏡) 3도연안 3해리 이내에서의 포경특허를 얻는데 성공했다. 모든 준비를 끝낸 일본원양(주)은 즉시 포경선 장주환(長周丸) 해부선 천대환(千代丸), 운반선 방장환(防長丸) 등 3척의 선단을 부산으로 출항시켰다. 북으로 향한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尖兵)이란 성격을 동시에 지닌 일본선단이 남쪽으로 뻗는 또 다른 제국주의를 맞아 싸우기 위해 동해의 결전장으로 첫발을 내딛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동해포경전(東海捕鯨戰)의 전단(戰端)이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