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이오와 대평원을 가다
|
|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친구가 선물한 그 책을 읽고서야 아이오와에 대해 구체적인 이미지를 갖게 됐다. 드 모인이나 원터셋, 메디슨 카운티 등의 지명과 다리 삽화가 인상적이었다. 대평원과 소박한 농가가 있는, 어쩌면 가장 미국적일 수 있는 그곳에 다녀왔다.
- 미국 내륙의 그레이트 플레인 -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잘 정돈된 수천 수만의 사각형이 사방으로 펼쳐진 거대한 바둑판이 있었다. 바둑판 사이로 구불구불 검은 띠를 이루며 강물이 흐르고 그 가장자리로 숲들이 호위하고 있다. 촘촘히 박힌 집들이며 그리 높지 않은 빌딩들이 마치 장난감 마을을 구경하는 듯했다. 곧게 뻗은 길 위엔 부지런 떠는 개미만한 자동차들이 열심히 어디론가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이곳이 바로 아이오와, ‘어메이징!(Amazing)’ 이란 탄성이 절로 나오는 대평원(그레이트 플레인, great plain) 그 자체였다. 아이오와를 비롯한 미드웨스트(미국 내륙지방)는 미국은 물론 전세계인을 먹여 살리는 곡창지대다. 2m 이상 땅을 파고 들어가도 여전히 기름진 토양은 곡물 재배에 적격이란다. 이곳에서 재배되는 작물은 옥수수와 콩이고, 옥수수는 대부분 사료나 공업용으로 쓰인다.
식용 옥수수는 ‘스위트 콘’ 이라는 이름처럼 정말 달다. 입에 착 달라붙는 한국의 찰옥수수와는 달리 서걱서걱해서 설익은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삶는 시간도 끊는 물에 넣어 살짝 데치는 정도. 스위트 콘은 껍질째 바비큐 그릴에 구워서 버터가 녹아 줄줄 흐르도록 발라 먹는데, 식성에 따라 소금을 조금 뿌려 먹기도 한다. 전자레인지에 익힌다면 1분 30초에서 2분 정도면 된다. 너무 오래 익히면 단맛이 나는 즙이 없어진다. 스위트 콘은 감자, 오트밀과 함께 미국인들의 식탁에 가장 자주 오르는 음식이다.
아무튼 이 지역에서 대규모로 경작되는 옥수수는 사람들이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에탄올을 만드는 등 공업용 재료로 쓰인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장대숲 같은 옥수수밭이 대평원을 가득 메우고 있다. 차에서 내려 옥수수밭 가까이에 다가가보니 옥수숫대가 어찌나 빼곡하게 있는지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이곳에서 재배하는 또 하나의 작물인 콩은 한국에서 된장, 콩나물 등의 재료로 쓰는 메주콩이었다. 그러나 아이오와 사람들은 콩의 조리법을 잘 모른다. 재배한 콩은 그저 일본이나 중국에 수출할 뿐이다. 미국에선 ‘토푸’ 로 알려진 두부를 뉴욕 등 대도시 사람들은 건강식으로 즐겨 먹지만, 정작 콩을 재배하는 이들은 콩요리법을 모른다니 조금 이상했다. 필자가 한국식, 일본식의 콩요리에 대해 몇 가지 얘기를 했더니 굉장히 신기해하고 좋아했다.
이들은 재배한 작물을 먹기보단 토질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더 큰 듯했다. 같은 땅에 같은 곡물을 연이어 심지 않는다. 올해 옥수수를 심었다면 내년에는 반드시 콩을 심는다. 같은 식물을 계속 심으면 그 작물에 필요한 특정 영양소가 결핍되어 토질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 유럽 이민 후예들이 꾸민 작은 유럽 -
아이오와에 사는 사람들은 2백여 년 전에 독일, 스웨덴, 덴마크 등에서 건너온 유러피언 이민자들의 4~5세대에 해당하는 백인이 대부분이다. 유럽에서 건너온 이들은 나라별로 한곳에 모여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아이오와 곳곳에는 독일계와 스웨덴, 덴마크 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집 구조는 물론이고 곡물이나 농기계, 건초 등을 저장하는 창고(Bam : 반)의 모양, 오래된 교회와 공공건물들은 유럽 각 나라의 그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그저 무심코 지나치면 별다른 것을 느낄 수 없지만, 각 마을의 기프트 숍이나 상점에 가보면 여느 미국의 상점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앨버트 시티는 스웨덴계 촌이다. 그곳 주민들의 성씨나 거리 이름들은 스웨덴과 많이 닮았다. 기프스 숍에 스웨덴풍 상품들이 고루 갖춰져 있자. 장식용 종이냅킨부터 머그컵, 디너 세트 접시들과 작은 인형 등 그들 조상의 고유문화를 만연히 이어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도 스스로를 스웨덴 사람, 독일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미국인일 뿐이다. 다만 조상 중 누가 언제 어떤 계기로 이곳에 이주해 와서 터를 잡고 가족을 이루었다는 가족사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족보는 귀히 여기면서도 증조부모의 함자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리와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농경지를 따라 곧게 뻗은 도로들을 지나다 보면 각 마을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온다. ‘웰컴 투 엘버트 시티’ ‘웰컴 투 포카혼타스’ ‘웰컴 투 포트 다지’ ‘웰컴 투 윈터셋’ ... 표지판을 따라 동네로 들어가보면 집과 공공 건물, 곡물을 실어날랐을 오래된 기찻길, 작은 상점과 식당, 소규모의 도서관과 우리나라의 동사무소 같은 법원 건물, 주유소, 약국, 한두 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작은 극장이 꼭 갖춰져 있다. 이들 극장은 마치 영화 ‘시네마천국’ 의 작은 극장을 연상케 한다. 물론 경찰서도 소방서도 있다. 자동차 숍도 있고, 슈퍼마켓과 대형 농기계를 파는 곳도 있다. 또 한 작은 모텔도 한두 개씩은 있는데, 자동차 여행을 하거나 물건을 실어나르는 트럭 운전사들이 주로 이용한다. 자동차로 이들 마을을 둘러보는 데는 5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자동차에서 내려 거리를 걸으면 상점에 들러 작은 기념품도 하나 사보라고 권하고 싶다. 작은 레스토랑에 들러 그 지방의 음식을 맛보는 것도 좋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곳 주민들과 나란히 앉아 콜라와 팝콘을 먹으면서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연상했던 미국의 이미지와 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방인을 곁눈질하며 관찰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할 각오는 해야 한다. 남녀노소가 다 마찬가지나, 결코 해코지하려는 게 아니니 안심해도 된다. 우리나라 시골 마을에 낯선 외지인, 그것도 백인이나 흑인이 돌아다녔을 때의 반응을 상상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잠깐의 시간이 흐르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질문을 한다.
“그래, 아이오와에 와본 소감이 어때요?”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우리가 물어보는 것처럼. 대답이 상투적이긴 하나 이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일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넓고 아름답군요. 특히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사람들도 친절하구요.” 그럼 대개 그들은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흡족해한다. 그러고 나면 솔직한 그들의 답도 얻을 수 있다. 이 고장 토박이로 예비역 해군인 농사꾼 필립의 대답이 가슴에 오랫동안 남아 있다.
“그래요?... 하지만 그 대지를 바라보고 있으면 지긋지긋할 때가 있어요.” 사실은 그게 그곳 주민들의 솔직한 심정인지도 모른다. 이런 갑갑함 때문인지 젊은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성인이 되면 서둘러 대도시로 나간다. 소위 브레인 드레인 현상(유능한 젊은 인재들이 외지로 나가버려서 인재가 고갈되는 것)이 이곳에서도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이나 미국 농촌의 문제가 별다르지 않는 듯싶다.
- 웰컴 투 포카혼타스 &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
‘포카혼타스’ 라는 디즈니 만화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그 만화의 실제 무대가 아이오와 주에 있는 폰카혼타스라는 마을이다. 인디언 공주의 사랑 얘기를 그 마을 주민이 디즈니사에서 알려서 만화영화가 탄생했다고 한다. 한때는 1만여 명이 살던 제법 큰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2천여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마을 입구엔 큼직한 목제 인디언 공주가 방문자들을 환영한다. 아름다운 인디언 프린세스를 상상했던 기대와는 달리 손님을 맞는 그 공주의 모습은 정말 못생겼다. 하지만 반가웠다. 폰카혼타스엔 인디언 공주의 전설과 함께 인디언 유적지와 역사를 알리는 안내표지가 곳곳에 남아 있다.
‘젖소’ 라는 이름의 동네 레스토랑에서 먹는 설로인 샌드위치와 감자튀김도 참 맛있었다. 설로인 샌드위치는 우리나라 돈가스처럼 돼지고기에 튀김옷을 입혀 바짝 튀긴 다음 햄버거 빵에 끼운 것이다. 큰 사이즈를 주문하면 빵의 3배 크기만한 엄청난 두께의 고기가 끼워져 나온다.
상상해보라. 얼마나 황당한 모양일지. 동그란 햄버거 빵은 손잡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작은 사이즈를 주문하면 빵 크기에 알맞은 모양으로 나온다. 맛은 아주 담백하다. 기름기를 좋아하지 않는 한국 사람들의 입맛에도 부담이 없을 정도다. 이 집의 홈 메이드 아이스크림은 인기 있는 디저트. 이곳 사람들은 한꺼번에 몇 통씩 사다가 냉동실에 보관해두고 먹는다.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프란체스카가 로버트 킨케이드를 초대하는 ‘메모지’를 붙여두었던 지붕 덮인 시더 브리지가 있는 메디슨 카운티는 목축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포카혼타스아 앨버트 시티는 그야말로 구릉 하나 없이 편편한 평원인 반면, 메디슨 카운티는 산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야트막한 구릉들이 많았다. 깊지는 않지만 강도 흐른다. 산도 없고, 큰 숲도 없는 아이오와 사람들이 더없이 아름다운 곳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지난 8월초,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가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소실된 것이다. ‘내셔널 지오그라피’ 의 프리랜서 사진작가였던 로버트 킨케이드가 이곳의 지붕 있는 목제 다리를 찍으러 온 것이 인연이 되어 프란체스카를 만난 건데... 1883년 세운 길이 23m의 목제 다리 위에 지붕을 씌운 유서 깊은 다리였는데 아쉬운 일이다. 필자는 지난 1999년 처음 아이오와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 가본 적이 있다. 95년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 주연으로 영화로 제작돼 전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킨 후 이 다리는 인기 관광지로 떠올랐다.
할리우드가 만든 이곳의 이야기는 소실된 다리뿐 아니다. 역사 속의 걸출한 배우였던 존 웨인의 고향이 바로 아이오와 윈터셋이다. 그가 태어난 집은 아무도 살지 않고 자물쇠로 채워져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아담하다 못해 초라할 정도로 작은 집이었다. 오랜 세월 존 웨인의 인기와 함께 그 집은 그의 가족사를 간직한 뮤지엄이 되었다.
드 모인은 한국에도 제법 알려진 도시다. 영화에서 잠깐 언급되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출신 메이저리그 최희섭이 미국 생활을 시작한 곳이 바로 여기다. 시카고 컵스의 마이너리그는 아이오와 컵스라고 부르고 그 팀의 홈은 드 모인에 있다.
드 모인 국제공항에 내려서 뭔가 국물 같은 것을 먹고 싶었던 필자는 사무실 건물들이 밀집한 다운타운으로 들어가 중국음식점을 찾아봤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고층건물의 지하 식당가에서 테이크아웃 중국음식점을 찾았다. 닭고기 국물로 만든 치킨 수프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이 집 주인이 한국말로 대화를 하는 게 아닌가. 정말 의외였다.
“한국 분들이시군요” 하고 말을 걸자 주방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끼리 모두 뛰쳐나와 반겼다. 주인인 김씨는 드 모인의 80여 가구 한인들이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서로 도우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아이오와에선 귀한 배추로 담근 김치에 스프링 롤까지 얻어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뉴욕에 있는 재미교포의 번잡한 삶과는 달리 아주 느긋한 분위기였다.
김씨는 드 모인을 비롯한 아이오와 주의 공립학교는 교육의 질이 아주 좋아서 아이들 교육 걱정은 안하고 산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빅텐(Big Ten, 미국의 10개 명문 주립대학이 속한 그룹을 일컫는 말)중 하나인 유니버시티 아이오와가 아이오와 시티에 있다. 아이오와 스테이트 유니버시티도 좋은 학교로 꼽힌다.
- 평범한 미국 농부의 일상 -
주민들이 이용하는 슈퍼마켓에 가면 그 동네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미국 사람들이 먹는 것과 입는 것이 모두 비슷할 것 같지만 가는 곳마다 조금씩 다르다. 파는 상품이 다르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손님을 대하는 종업원의 태도도 다르다. 이들 미드웨스트에 사는 이들은 뉴욕에서 만나는 사람들보다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다. 미드웨스트 출신, 아이오와 출신이라면 정직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필자의 경험으로도 정말 그렇다.
포카혼타스에서 그동안 찍은 사진을 현상하기 위해 작은 상점에 들어갔다. 카드와 기념품, 각종 약을 파는 상점에서는 사진 현상도 겸하고 있었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파란 눈의 금발 여성이 이렇게 물었다.
“우리 가게에 새 기계를 들여놓은 후 이곳에서 사진 현상을 해 갔던가요?” 분명히 필자가 이방인인 줄 알고 있을 터지만 그녀는 “우리 가게에 처음이죠?” 라고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 상대방을 배려하며 돌려 말하는 게 그들의 매너인 것이다.
또 하나 필자는 가는 곳마다 그 지역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산다. 아파트 월세와 매물로 나온 집들의 가격, 슈퍼마켓 광고, 일할 사람을 찾고 일자리를 구하는 구직, 구인난을 꼼꼼히 살핀다. 그 지면에는 그 지방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미주알고주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방 1마일씩 구획된 농경지 단위를 ‘스퀘어 마일’ 이라고 하는데 그 단위는 6백40에이커다. 대개 그 단위 경작지마다 한쪽 모서리엔 그로브가 있다. 몇 그루의 나무가 튼튼하게 방벽처럼 자라고 그 속에 집 한 채와 창고, 가축사육장 등이 들어 있다.
방벽처럼 둘러진 나무는 방풍림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산도 숲도 없는 대평원에서 토네이도(태풍)나 심한 바람, 홍수 등으로 인해 집이 날아가고,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 농가들에 달린 낡은 창고 건물들이 참 아름다웠다. 그곳에 무엇이 들어 있나 살펴봤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콤바인과 트랙터가 들어 있기도 했고, 가축을 먹이고 돌보는 데 필요한 건초를 저장하기도 했다. 말과 돼지, 쇠똥 냄새는 고약했지만 건초 냄새는 맡을 만 했다. 진짜 농부의 집안은 소박했다. 하지만 미국의 농부는 우리네처럼 밭에 나가 힘들게 농사를 짓지는 않는다. 스퀘어 마일을 서너 번 왔다갔다하면서 파종하고 추수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콤바인 운전을 하는 게 전부다.
체로키 카운티에 가다 보면 군데군데 커다란 바람개비가 춤추듯 빙빙 도는 광경을 볼 수 있다. 풍력 발전기다. 한두 대가 아니고 엄청난 규모인데 에너지 회사가 전기를 만들려고 설치한 것이다. 그 한 대의 값이 무려 90만 달러라고 했다. 풍력발전기가 세워진 땅의 주인에겐 1년에 대당 5천 달러씩을 지불한다. 물론 같은 자리에 농사도 지으니, 일석이조의 부업이 되는 셈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