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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성김씨 도곡공-구은공 독산파 가족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파솔비
신라왕 계보와 직계조상
신라는 골품을 지키기 위해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을 할 수 없는 근친결혼이 성행 하였다.
그리고 남녀관계가 오늘날 보다 더 자유로웠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문란 하였다.
임금님들의 가족 계보를 살펴보면 누구의 자식인지 모를정도로 참 흥미롭다.
1.박혁거세(박)
신라의 시조(?B.C.69~?A.D.4).
왕호는 거서간(居西干).
13세에 왕위에 올라 재위 17년에 전국을 순시하여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였으며, 21년에는 수도를 금성(金城)이라고 하고 성을 쌓아 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신라 56왕 중 가장 오랜 기간인 61년동안 재위하신 왕이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57년~기원후 3년이다. ※박혁거세 거서간
부인: 알영
자녀: 남해차차웅, 일지갈문왕, 허루왕(?)
2.남해왕
신라의 제2대 왕(?~24).
성은 박, 박혁거세의 맏아들로, 시조의 능을 짓고 석탈해를 사위로 맞아 대보(大輔)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재위 기간은 4~24년이다. ※남해 거서간·남해 차차웅.
부인: 운제부인(기록없음)
자녀: 유리이사금, 아효부인(탈해부인), 나로
3.유리왕
신라 제3대 왕(?~57).
성은 박. 노례 이사금(弩禮尼師今)이라고도 한다. 남해왕의 아들.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내렸으며 17등 관계(官階)를 제정하였다.
유리왕 5년(28)에 신라 가악(歌樂)의 기원인 〈도솔가〉를 지었다.
재위 기간은 24~57년이다. ※유리 이사금.
부인: 박씨(일지갈문왕의 딸, 즉 유리와 사촌)
자녀:일성이시금, 파사이사금.
4.탈해왕
신라의 제4대 왕(?~80).
성은 석(昔).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국호를 계림(鷄林)이라 하였으며, 일본과 화친(和親)하면서 백제·가야와 자주 싸움을 벌였
다.
재위 기간은 57~80년이다. ※석탈해·탈해 이사금·토해 이사금.
부인: 아효부인(남해의 딸)
자녀: 구추(벌휴의 아버지)
5.파사왕
신라의 제5대 왕(?~112).
성은 박. 유리왕의 아들. 월성(月城)을 쌓아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으며 음집벌국(音汁伐國)을 정벌하고 여러 나라를 병합하여 국위를 떨쳤다.
재위 기간은 80~112년이다. ※파사 이사금
부인: 사성부인(김알지의 아들인 허루갈문왕의 딸)
자녀: 지마이사금
6. 지마왕
신라 제6대 왕(?~134).
성은 박, `지마(祗磨)’라고도 부른다. 파사왕의 아들.
왜국(倭國)과 수교를 맺고, 백제의 협조를 얻어 말갈의 공격을 물리쳤다.
재위 기간은 112~134년이다. ※지마 이사금·지미왕.
부인: 애례부인 김씨(김알지의 아들인 마제갈문왕의 딸)
자녀: 내례부인(아달라의 부인)
7.일성왕
신라 제7대 왕(?~154).
성은 박, 유리의 아들. 말갈의 침입을 자주 받았으나, 농본국의 정책을 펼쳐 제방을 고쳐 쌓고 농지를 개간하는 한편 백성들의 사치를 금하고 검소한 생활을 장려하였다.
재위 기간은 134~154년이다. ※일성 이사금.
부인: 박씨(지소례왕의 딸, 지소례왕이 누군지 모름)
자녀: 아달라 이사금
8.아달라왕
신라의 제8대 왕(?~184).
성은 박, 현(縣)의 설치, 도로의 개통 따위의 내치(內治)에 힘썼다.
재위 기간은 154~184년이다. ※아달라 이사금.
부인: 내례부인(지마이사금의 딸, 즉 사촌)
자녀:?
9.벌휴왕
신라 제9대 왕(?~196).
성은 석, 탈해왕의 손자로 처음으로 좌군주(左軍主), 우군주(右軍主)의 군직을 만들어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다.
재위 기간은 184~ 196년이다. ※벌휘 이사금·벌휴 이사금.
부인: 기록없음.
자녀: 골정(조분, 천해이사금의 부), 이매(내해이사금의 부)
10.내해(나해)왕
신라의 제10대 왕(?~230).
성은 석, 벌휴왕의 손자. 209년 포상 팔국(浦上八國)의 침입을 받은 가락국의 요청으로 구원병을 파견하여 이를 물리쳤다.
재위 기간에 여러 차례 백제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재위 기간은 195~230년이다. ※내해 이사금.
부인: 석씨(골정의 딸)
자녀: 우로(명원부인, 조분이사금의 딸), 이음, 아이혜부인(조분이사금의 부인)
11.조분왕
신라 제11대 왕(?~247).
성은 석, 벌휴왕의 손자. 감문국(甘文國)을 정벌하여 군(郡)으로 만들고 왜병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골벌국(骨伐國)의 항복을 받았다.
재위 기간은 230~247년이다. ※제귀왕·조분 이사금.
부인: 아이예부인(5촌 조카)
자녀: 명원부인(우로의 부인), 광명부인(미추이사금의 부인), 유례이사금, 걸숙(기림이사금의 부)
12.첨해왕
신라 제12대 왕(?~261).
성은 석. 벌휴 이사금의 손자(골정의 아들). 조분 이사금의 동생, 사량벌국(沙梁伐國)을 쳐서 통합하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맺었으며, 달벌성(達伐城)을 축조하여 백제를 견제하였다.
재위 기간은 247~261년이다. ※첨해 이사금.
부인: 김씨
자녀:?
13.미추왕
신라의 제13대 왕(?~284).
김알지의 7세손(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미추).
김씨 왕가의 시조로, 구도와 갈문왕 이칠의 딸 박씨 소생) 조분이사금의 사워로 왕위에 오름. 농사를 장려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백제의 침입을 물리쳤다.
재위 기간은 262~284년이다. ※미추 이사금.
부인: 광명부인(조분이사금의 딸)
자녀: ?
14.유례왕
신라의 제14대 왕(?~298).
성은 석, 조분 이사금의 맏아들. 286년에 백제와 수교하였고, 297년에는 삼한 소국의 하나인 이서국(伊西國)의 침입을 격퇴 하였다.
재위 기간은 284~298년이다. ※유례 이사금.
부인: ?
자녀: ?
15.기림왕
신라의 제15대 왕(?∼310).
성은 석. 조분왕의 손자이며 이찬(伊飡) 걸숙(乞淑)의 아들로, 즉위 3년(300)에 왜국과
사신을 교환하였고 빈민을 구제하는 따위의 선정을 폈다.
재위 기간은 298~310년이다. ※기림 이사금·기립왕.
부인: ?
자녀: ?
16.흘해왕
신라의 제16대 왕(?~356).
성은 석, 기림왕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죽자 나해왕의 손자로 대신들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이후로 석씨는 완전히 왕위에서 배제.
재위 기간은 310~356년이다. ※흘해 이사금.
부인: 김씨
17.내물왕 : 의성김씨 직계조상 중 최초의 왕 (8세)
신라 제17대 왕(?~402).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말구-내물)성은 김, 미추왕의 조카로 김알지의 8세손이다. 고대 국가 체제를 갖추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이 시기에 한자가 처음 사용된 듯하다.
재위 기간은 356~402년이다. ※내물 이사금.
부인: 보반부인(미추의 딸로 기록 그러나???)
자녀: 눌지이사금, 복호(9세조상) , 미사흔
18.실성왕
신라 제18대 왕(?~417).
성은 김. 미추의 아우인 대서지와 이리부인 석씨 소생, 내물왕이 죽자 즉위하였으며, 고구려·일본과 수호를 맺었다.
재위 기간은 402~417년이다. ※실금왕.
부인: 아류부인 김씨(미추의 딸로 기록 되어있으나 내물의 딸로 해석됨)
자녀: 아로(눌지왕비)
19.눌지왕
신라 제19대 왕(?~458).
성은 김, 내물 마립간의 아들. 고구려 묵호자에 의해 불교가 전파됨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돌아와 실성왕(實聖王)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백제와 공수 동맹(攻守同盟)을 맺어 고구려를 견제하였으며, 왕위의 부자 상속제를 확립하였다. ※눌지 마립간.
부인: 아로부인(실성의 딸)
자녀: 자비이사금, 조생부인(지증의 모)
20.자비왕
신라 제20대 왕(?~479).
성은 김, 459년 월성(月城)에 침입한 왜인(倭人)을 격퇴하였고, 474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였을
때 백제와 나제 동맹을 맺었다.
재위 기간은 458~479년이다. ※자비 마립간.
부인: 김씨(파호갈문왕의 딸), 김씨(미즐희의 딸), 김씨(미사흔의 딸)
자녀: 소지마립간,
21.소지왕
신라의 제21대 왕(?~ 500).
성은 김, 각 지방에 우역(郵驛)을 두었고, 경주에 시장을 설치하였다.
백제와는 혼인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는 여러 번 싸웠다.
재위 기간은 479~500년이다. ※비처 마립간· 소지 마립간.
부인: 선혜부인(내숙의 딸, 삼국유사에 거문고 갑을 쏘라는 이야기 주인공,), 묘심과 사통 :
자녀-오도(딸), 오도는 위화랑과 사통하여 옥진공주와 금진을 낳음,
벽화부인(위화랑의 여동생)
자녀: 보도(법흥왕의 비)
※소지왕이 고구려 국경 순찰 후 돌아 올 때 날이(捺已,지금의 영주지방)에 들렀을때 그 고을 호족인 파로라는 사람이 16세된 미섹의 딸을 수례에 싣고 명주로 덮어 왕에게 바쳤다고 한다. 소지왕은 괴이하게 여겨 돌려 보내고 궁궐로 돌아 왔으나 벽화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어 몰래 그 집으로 행차하여 벽화와 함께 잠을 잤다고 한다. 한번은 벽화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고타군(古陀郡,지금의 안동)에 들러 한 노파 집에 묵었는데 노파로 부터 요즘 왕의 행실이 나쁘다는 말을 듣고 왕은 매우 부끄럽게 여겨 은밀하게 궁궐로 들여 별실에 두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을 두었다고 기록 함. 이 여인이 바로 벽화부인 이다.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영주에(날이)첫 행차 한지 두달 뒤인 11월에 죽었다고 기록 되어 있는데 그러면 두달 만에 벽화를 사랑하고 궁궐로 데려 오고 아들을 낳은것이라 그 기록이 재미 있다.
22.지증왕 (11세 조상)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말구-내물-복호-습보-지증)신라 제22대 왕(437~ 514).
성은 김. 이름은 지대로(智大路)·지도로(智度路)·지철로(智哲老).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순장법(殉葬法)을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우경법(牛耕法)을 처음으로 시행하였으며, 울릉도
를 점령하여 국토를 개척하고, 중국식을 따라 왕에게 시법(諡法)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재위 기간은 500~514년이다. ※지증 마립간.
부인: 연제부인
자녀: 법흥왕, 입종갈문왕(진흥왕의 부) , 진종(12세조상)
23.법흥왕
신라 제23대 왕(?~540).
성은 김. 이름은 원종(原宗).
이 무렵 불교가 들어왔고,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썼다. 이차돈이 순교함. 금관가야를 멸망시킴.
처음으로 율령을 반포하여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정하는 등 국가 체제의 확립에 힘을 기울였다.
재위 기간은 514~540년이다.
부인: 보도부인(소지마립간의 딸) - 자녀:지소태후(진흥왕의 모)
옥진공주(위화랑과 오도의 딸) - 자녀 :비대(아들)
벽화부인(소지왕의 후비) - 자녀:삼엽(딸)
보과부인(백제 동성왕의 딸) - 자녀: 남모(딸),모랑(아들,3세 풍월주)
계부 박영실
박이사부와 사통 _ 자녀:세종(아들), 황화, 숙명(진지왕의 모), 송화, 3 궁주를 낳음.
이화랑(위화랑의 아들) 과사통 자녀:만호낭주 낳음
24.진흥왕
신라 제24대 왕(534~576).
성은 김. 이름은 삼맥종(三麥宗)·심맥부(深麥夫).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아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영토를 확장하고 변경에 순수비를 세웠다.
팔관회를 처음 열었으며, 황룡사를 지어 불교 진흥에 힘썼다.
또 화랑 제도를 창시하고 《국사(國史)》를 편찬케 하였으며, 가야금을 제작·연주하게 하는
따위의 문화 창달에도 이바지하였다.
재위 기간은 540~576년이다.
부인
사도부인 : 자녀 동륜(진평왕의 부) 구륜
숙명궁주 박씨(지소태후와 박 이사부의 딸. 이화랑과 사통) : 자녀 진진왕(이화랑의 자식?)
이화랑과의 자녀 : 원광, 보리, 화명, 옥명
소비 부여씨
월화궁주 김씨 : 자녀 천주
금진(위화랑과 오도의 딸) 자녀: 난성공주
보명궁주(진흥왕의 아들 동륜과 사통)
25.진지왕
신라 제25대 왕(?~579).
성은 김, 이름은 사륜(舍輪)·금륜(金輪).
내리서성(內利西城)을 쌓아 백제의 잦은 침공을 방비하였다.
상대등 거칠부에게 국사를 맡겼으며, 중국 진(陳)나라에 조공을 바쳐 화친하였다.
실정으로 폐위 되었다.
재위 기간은 576~579년이다.
부인
지도부인(선혜왕후의 사자인 기오와 홍도낭주-사자부인의 자매-의 딸, 원래 동륜과 결혼하였으나 서로 관심이 없어 진지왕과 사통, 진평왕과도 관계)
도화랑(녀)
자녀
용수-진지왕의 아들인지 동륜의 아들인지 분명치 않음,
천화공주(후에 용춘에게 재가),
천명공주(용수 사후 용춘에게 재가)
용춘- 부인 천명공주(무열왕의 어머니), 호명공주
비형(도화녀의 자)
26.진평왕
신라 제26대 왕(?~632).
성은 김. 이름은 백정(白淨).
중국 수나라와 친교를 맺고 불교의 진흥을 꾀하였다.
진지왕이 폐위되자 진지왕의 형인 동륜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 하였다.
609년에 수나라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원정하였고, 당나라가 선 뒤에도 계속 친교를 맺어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재위 기간은 579~632년이다.
부인
마야부인(갈문왕 복승의 딸) 천명, 덕만을 낳음
승만부인
화명부인
옥명부인- 자녀:미실(딸),미생(아들)
(아시공과 삼엽궁주의 아들인 미진부+묘도)-미실, 미생 미실이 처음으로 만난 남자는 이사부와 지소태후의 아들인 박세종, 지소태후에게 쫓겨난 후 사다함(비량과 위화랑의 누나인 벽화의 아들인 구리지와 위화랑의 딸 금진의 아들)과 관계. 그러다 사다함이 전장에 나가있는동안 세종의 정부인이 되어 사다함은 죽고 미실이 아들을 낳는데 하종이다( 하종이 사다함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음.) 그 이후 미실은 사람이 변하여 색욕과 권력욕만 남게 됨. 동륜의 아이를 임신하고 진흥왕과도 관계. 그리고 원화가 된 후 설원랑(금진과 설성의 아들인)과 관계하고 자신의 친남동생인 미생과도 관계. 그러다 동륜의 사망사건으로 궁궐에서 쫓겨남. 그러다 진흥왕이 다시 그녀를 찾고 진지왕도 그녀와 결탁하던 중 진흥왕 사망. 사도부인과 함께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진지왕 폐위. 13살의 어린 진평왕의 첫여자가 됨. 그 후에도 20여년가 권력을 휘두르다 죽음.
노(비조부와 가야왕 찬실의 딸 문화공주가 사통하여 낳은 아들)과 윤궁(거칠부와 미진부의 누나 )사이에서 태어남.
27.선덕여왕(진평왕의 차녀)
신라 제27대 왕(?~647).
성은 김. 이름은 덕만(德曼).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여자로서 신라 첫 번째 왕이 되었다. 김춘추에게 중국 당나라의 원군을 청하게 하여 백제를 침공하고, 9년(640)에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어 그 문화를 받아들였다.
재위 기간은 632~647년이다.
삼서제로 남편을 3명 둠.
남편:용춘(선덕여왕 남편 부군), 흠반, 을제
※ 진평왕이 아들이 없자 사촌 동생 용수를 사위로 삼으려 했으나 사양하자 진평왕의 비인 마야부인이 끝내 사위로 삼아 천명공주의 남편이 되었다. 천명공주는 진평왕의 딸이자 태종무열왕의 어머니, 또 덕만(선덕)공주가 자라 임금의 자질을 갖추자 진평왕은 그녀로 왕위를 이으려고 용춘을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후사가 없자 용춘이 스스로 물러났다. 이에 진평왕은 용수에게 덕만공주를 모시도록 했으나 역시 후사가 없었다.
그 무렵 마야부인이 죽자 승만왕후가 진평왕의 비가 돼 아들을 낳아 선덕을 대신해 왕위를 잊고자 했으나 불행하게도 그 아들이 일찍 죽어버렸다. 한편 선덕공주가 왕위에 오르기 전 용수가 죽기전 부인과 아들을 동생 용춘에게 맡겼다. 그 아들이 바로 김춘추 이고 부인은 천명공주이다.
선덕공주는 왕위에 오르자 공주때 남편인 용춘을 다시 남편으로 삼았다. 이번에도 자식이 없자 용춘은 스스로 물러나고 군신들이 삼서제(사위를 3명 두는 제도)를 만들어 흠반공과 을지공으로 하여금 선덕여왕을 모시도록 하였다.
용춘은 선덕여왕 남편 자리에서 물러나 형수인 천명공주를 아내로 삼고 김춘추를 아들로 삼았고 진덕여왕 원년(647)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화랑세기 기록으로 보면 선덕여왕은 덕만공주 때 첫째 남편이 용춘, 두번째 남편이 그의 형 용수, 그리고 왕위에 오른 후 다시 용춘, 흠반공, 을제공이 남편이였다.
화랑세기의 이러한 내용은 왕실에서 이미 성골 남자가 없었기에 진평왕은 용수나, 용춘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28.진덕여왕
신라 제28대 왕(?~654).
성은 김. 이름은 승만(勝曼).(진평왕의 동생인 갈문왕 국반과 월명부인의 딸)
연호를 태화(太和)로 정하고, 648년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 군사 원조를 받았으며 김유신을 기용하여 국력을 키워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성골이 대가 끊어지다.
재위 기간은 647~654년이다.
남편:?
자녀:?
※김유신
어머니_만명부인(서현과 만호태후의 딸)
부인
영모(하종(세종과 미실의 아들) 사이에서 태어남)
유모(하종의 딸)
지소(무열왕과 문명왕후의 딸, 김유신의 생질)
【흥덕왕이 흥무대왕으로 추존】
자녀
삼광, 원술, 원정, 장이, 원망, 군승(서자), 진광(유신의 셋쩨 여동생 정희의 아들 흠돌과 결혼), 신광(문무왕비), 작광, 영광(유신의 동생 흠춘의 아들인 반굴과 결혼)
29.태종 무열왕
신라의 제29대 왕(602~661).
성은 김. 이름은 춘추(春秋). 묘호는 태종(太宗). 진지왕의 손자로 신라 첫 번째 진골출신 왕이 되었다. 율령을 정비하고, 당나라와 연합하여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재위 기간은 654~661년이다. ※무열왕.
부인: 보량궁주(설화랑과 미실의 아들인 보종의 딸)
자녀-딸 고타소를 둠(김품석과 결혼) 둘째 아기를 출산하다 죽음.
문명부인(김유신의 여동생): 자녀- 문무왕, 인문, 문왕, 노차, 지경, 개원, 지소(딸)를 낳음.
보희부인(김유신의 여동생, 문명의 언니) : 자녀- 개지문, 차득령, 마득외 딸 둘을 낳음
자녀 11명
※ 신라시대 프리마돈나 <미실>미실을 한번 보는 남자는 그 아름다움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미실이 처음으로 만난 남자는 사다함 이였다. 사다함이 병사 5000명을 거느리고 대가야로 출정하자 눈물을 흘리며 '풍랑가'를 지어 사다함에게 바쳤다. 그러나 여인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 사다함이 전쟁에서 돌아 오자 그의 애인 이였던 미실은 궁중에 들어가 세종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사다함은 이를 슬퍼하고 괴로워 하며 청조가를 지어 불렀다. 박세종은 이사부와 지소태후의 통정으로 아들인데 세종이 한 눈에 미실에게 반하자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미실을 궁중으로 불러 세종을 모시게 한것.
사다함은 또한 미실의 사촌오빠였다.
미실은 바로 세종과의 사이에서 임신이 되어 하종을 낳았는데 하종은 사다함과 꼭 닮아 세상 사람들이 사다함과 정을 통할때 이미 임신을 하고 입궁 하여 낳은 아들이라 쑥덕 거렸다.
미실은 이때부터 이미 가정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 자유부인으로 변모 한다.
하루는 진흥왕비인 사도왕후가 미실을 불러 "네 아들 동륜태자를 모셔 아들을 둔다면 동륜 즉위후 너를 왕비로 삼겠다."고 했다.
미실이 곧 동륜의 씨 다른 작은아버지 였다. 그러나 미실은 기꺼히 동륜과 정을 통해 임신을 했다. 그러나 이를 알지못한 동륜의 아버지인 진흥왕은 미실을 불러 자신의 시종을 들도록 했다.
이 사실을 안 세종은 자청하여 싸움터에 나가 버렸다.
왕의 총애를 받은 미실은 더욱 거리껏 없이 음란 한 생활을 하여 7세 풍월주인 설원랑과도 정을 통하고 친동생인 미생랑 과도 정을 통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진흥왕은 이를 알지 못했다.
미실은 권력욕도 많아 정부인 설원랑에게 원화가 되도록 고해 왕을 설득하여 원화가 되고 남편인 세종을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572년 어느 날 동륜태자가 보명궁에서 사나운 개에게 물려죽은 일이 있었는데 왕이 명령해 조사를 해보니 미실에게 혐의가 있었다. 미실은 죄가 두려워 스스로 원화자리에서 물러났다.
진흥왕은 아내 때문에 속 썩이는 세종을 불쌍하게 여겨 미실을 다시 불러 세종에게 돌아 가도록 했다.
진흥왕과 세종은 아버지는 다르나 어머니가 같은 배다른 동생이였다.
하지만 미실은 또 다시 끼가 발동하여 죽은 동륜태자 대신 태자의 자리에 오른 금륜(25대 진지왕)과도 정을 통했다고 한다.
미실은 화랑정치에 지속적이고 막강하게 영향력을 행사한 여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진흥왕이 돌아가시자 금륜태자가 진지왕으로 즉위 하였으나 세상 여론이 미실을 왕후로 봉하지 못하고 진지왕이 다른사람을 좋아 하자 미실은 낭도를 일으켜 진지왕을 폐하고 동륜태자의 아들을 즉위 시키니 이가 진평왕이다. 미실은 동륜태자와도 한동안 사랑을 나눴으니 혹시는 진평왕도 미실의 자식(?)은 아닐까? 그는 스스로 진평왕의 후궁일을 맡아 조정을 자기 마음데로 주물렀다고 하니 정말 그 시대에 대단한 여인이였던 것은 틀림없다.
그러니까 미실은 사다함, 세종, 요절한 동륜,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과 정을 통한 신라의 프리마돈나, 프리섹스의 동서양에 걸처 손꼽히는 대단한 여자였다.
미모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미실도 병에는 못 이기고 괴질에 걸려 죽으니 그녀 나이 58세 였다.
※ 사다함이 죽은 이유
진흥왕 24년(563)의 이야기
사다함과 무광랑(武官郞)은 어릴때 부터 같이 자라며 우정이 깊어 평생을 친구로 지내기로 하고 죽을 때도 같이 죽자고 맹세를 한 친구였다. 사다함은 비록 17세 나이지만 1년 전 대가야정벌에 큰 공을 세운 장수 이며 5대 풍월주의 신분으로 인품이 높아 수 많은 낭도들이 존경하며 따랐다. 그러나 사다함은 어머니의 분별없는 사랑행각으로 인해 부하 낭도들에게 소문이 퍼지고 있어 너무나 괴로웠다. 그런데 그 상대가 둘도 없는 친구 무관량 이라니.!! 무관량은 친구 사다함에게 굳게 약속을 했다. "신분이 미천한 저를 친구로 대해 주고 늘 곁에 두시는 것만 해도 황송할 따름 입니다. 앞으로 공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사다함은 알천가 벌판에서 친구 무관량과 함께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다함은 진골 출신으로 내물왕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구리지, 어머니 금진은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딸로 법흥왕을 셤겼으나 아들이 없었고 그리지와 몰래 정을 통해 토함, 새달 그리고 사다함을 낳았다. 몇일 뒤 무관량이 죽어 간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이 또 무관량을 침실로 불러 관계를 요구하자 무관량은 사다함과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금진의 요구를 뿌리치고 급하게 뛰어나와 월성의 담을 넘다 그만 아래 해자로 거꾸로 떨어져 크게 다치고 말았다. 몇일 뒤 무관량은 죽고 말았다. 사다함은 당시 어지러운 정치 풍토 속에 가슴을 터 놓고 의논을 하던 유일한 친구였다. 사다함은 비통하고 삶의 회의를 느꼈다.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혼란하게 했다. 사랑했던 미실도 빼앗기고, 어머니의 문란한 생활, 그토록 믿었던 친구의 죽음, 사다함은 아무것도 먹을 기력도 잃었다. 그때서야 달려온 어머니 금진은 울며 후회한들 기력을 잃고 눈을 감는 아들을 살릴 수 는 없었다. "살아서 못다한 효도 죽어서 저 세상에서 하겠습니다, 그리고 네 뒤를 이어 세종이 풍월주가 되도록 도와 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세종은 미실의 남편이였다. 죽을 때 까지 이미 다른 사람의 남편이 된 미실을 잊지 못했을까? 그렇게 사다함은 친구 모관량이 죽은지 7일 만에 죽고 말았다. 사다함이 죽은 이유는 생사고락을 같이 한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과 어머니에 대한 절망감이 겹쳐 세상이 싫어 죽었을 것이다. 실의에 빠진 사다함은 여위고 병들기 시작한지 7일 만에 죽고 말았다.
30.문무왕
신라 제30대 왕(?~681).
성은 김. 이름은 법민(法敏).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로 김유신과 함께 백제, 고구려를 멸망(668)시키고 중국 당나라 세력을 몰아 내어(676)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
당악(唐樂), 신력(新曆) 따위의 당나라 문화를 수입하는 데에 노력하였고, 죽은 후 유언에 따라 동해의 대왕암에 수장되었다.
재위 기간은 661~681년이다. ※문무 대왕.
부인
자의왕후(구륜의 아들인 선품과 보룡의 딸 사이에서 태어남. 보룡은 선품 사후 무열왕과 당원을 낳음, 선품은 견훤의 조상이라 전해짐) 자녀- 소명태자, 신문왕
신광부인(김유신의 딸)
마야부인, 자녀- 인명
31.신문왕
신라 제31대 왕(?~692).
성은 김. 이름은 정명(政明)·명지(明之). 문무왕의 맏아들.
자는 일초(日怊). 국학을 세워 학문을 장려하고, 관제를 다시 정비하여 신라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재위 기간은 681~691년이다.
부인
폐비 김씨(흠돌의 딸)
※ 신문왕 원년(681) 그의 장인이자 김유신의 딸 진광의 남편인 27세 흠돌이 반란을 일으켜 진압 되고 왕비 김씨도 폐위 됨. 이때 퇴역 및 현역 화랑이 다수 참가 하는 바람에 화랑제도가 폐지 됨, 그 후 화랑제도가 부활 되지만 무사와는 거리가 먼 득도로 변질 됨.
신목왕후(흠운의 딸), 자녀-효소왕, 성덕왕, 근질, 사종
32.효소왕
신라의 제32대 왕(643~702).
성은 김, 이름은 이홍(理洪)·이공(理恭). 신문왕의 맏아들. 설총을 시켜 이두를 정리함
관제(官制)를 정비하고 당나라 및 일본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처음으로 의학 박사를 두었다. 또 이찬(伊@163) 경영(慶永)의 모반을 평정하였다.
재위 기간은 692~702년이다.
부인:?
자녀:?
33.성덕왕
신라 제33대 왕(?~737).
성은 김. 효소왕의 동생으로 이름은 흥광(興光). 본명은 융기(隆起).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힘썼다. 혜초가 서역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을 지음.
재위 기간은 702~737년이다.
부인
성정왕후(김태원의 딸) 자녀-중경, 수충 (성정왕후의 자)
소덕왕후(김순원의 딸) 자녀-효성왕, 경덕왕, 사소부인(소덕왕후의 자,개성대왕 효방과 혼인하여 선덕왕을 낳음)
34.효성왕
신라의 제34대 왕(?~742).
성은 김, 이름은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740년에 파진찬 영종(永宗)의 모반을 평정하고, 당나라와 교섭하여 원만한 관계를 이루었다.
재위 기간은 737~742년이다.
부인
박씨(기록없음)
혜명왕후(김순원의 딸)
자녀:?
35.경덕왕
신라 제35대 왕(?~765).
성은 김. 이름은 헌영(憲英). 효성와의 동생으로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제도와 관직을 당나라 식으로 고치고 국내 지명도 한자식으로 고쳤다.
국학 진흥과 불교 중흥에 힘써, 통일 신라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부인
삼모부인
경수왕후(의충의 딸) 자녀-혜공왕(경수왕후의 자)
36.혜공왕
신라의 제36대 왕(765~780).
성은 김. 이름은 건운(乾運). 경덕왕의 아들.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 하였으나, 재위 중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 민심이 흉흉하였으나 사치와 방탕을 일삼고 국사를 돌보지 않다가, 780년에 이찬 김지정의 난으로 살해되었다.
재위 기간은 765~780년이다.
부인
신모왕후(유성의 딸)
창장부인(금장의 딸)
자녀:?
37.선덕왕
신라 제37대 왕(?~785).
성은 김. 이름은 양상(良相). 내물왕의 10세손.
이찬(伊湌) 김지정의 반란을 진압하고, 혜공왕을 살해 하고 왕이 되었다.
재위 기간은 780~785년이다.
부인
구족왕후(양품? 의공?의 딸)
자녀:?
38.원성왕 (19세조상)
신라의 제38대 왕(?~798).성은 김. 이름은 경신(敬信). 내물왕의 12세손.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말구-내물-복호-습보-지증-진종-흠운-마차-법선-의관-위문
-효양-원성)
상대등(上大等)에 올랐다가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김경신을 몰아내고 왕으로 추대되었다.
788년에 독서삼품과를 두어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한편 790년에는 벽골제를 증축하여 농사에도 힘썼다.
재위 기간은 785~798년이다.
부인
숙정왕후
자녀
혜충대왕(소성왕의 부)
헌평태자
예영(헌덕왕비 황아왕후의 부, 신무왕의 조부, 20세)
대룡소룡
39.소성왕
신라 제39대 왕(?~800).
성은 김. 이름은 준옹(俊邕). 원성왕의 태자인 인겸의 아들
왕세손으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재위 2년 만에 죽었다.
그의 죽음은 신라 왕위 쟁탈전의 시발점이 되었다.
재위 기간은 798~800년이다.
부인
계화왕후(숙명의 딸)
자녀
애장왕, 체명
정목왕후 장화(흥덕왕비)
40.애장왕
신라 제40대 왕(788~809).
성은 김. 이름은 중희(重熙).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묘당을 세우고 해인사를 창건하였다.
섭정을 하던 숙부 김언승(金彦昇)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시해되었다.
재위 기간은 800~809년이다.
부인:?
자녀:?
41.헌덕왕
신라의 제41대 왕(?~826).
성은 김, 이름은 언승(彦昇).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하여 친당 정책을 폈다.
822년 김헌창과 그 아들 범문(梵文)의 반란을 평정하고, 백영(白永)에게 명하여 패수에 300리나 되는 장성을 쌓게 하였다.
재위 기간은 809~826년이다.
부인
황아왕후(예영의 딸이라는 설, 충공의 딸이라는 설)
자녀
헌상, 장렴
42.흥덕왕
신라의 제42대 왕(?~836).
성은 김. 이름은 수종(秀宗). 뒤에 경휘(景徽)로 고쳤다. 원성왕의 손자이며 헌덕왕의 동생.
청해진을 만들고 장보고를 그 대사로 삼아 해적의 침입을 막게 하였으며, 복색 제도를 개정하고 백성의 사치를 금하였다.
재위 기간은 826~836년이다.
부인
정목왕후(소성왕의 딸
자녀
능유
43.희강왕
신라의 제43대 왕(?~838). 원성왕의 손자
성은 김. 이름은 제륭(悌隆).
흥덕왕이 후사(後嗣)가 없이 죽자 삼촌인 균정과 왕위 다툼 끝에 균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뒤에 그를 도왔던 김명 등이 난을 일으키자 목매어 자살하였다.
재위 기간은 836~838년이다.
부인
문목왕후(갈문왕 충공의 딸)
자녀
의종, 계명(경문왕의 부)
44.민애왕
신라 제44대 왕(?~839).
성은 김. 이름은 명(明).
시중(侍中)으로 있을 때 흥덕왕이 승하하자, 김제륭(金悌隆)을 희강왕으로 내세우고 스스로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정권을 잡았으며, 3년 후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듬해 신무왕에게 살해되었다.
재위 기간은 838~839년이다.
부인
윤영왕후(영공의 딸)
45.신무왕 (22세조상)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말구-내물-복호-습보-지증-진종-흠운-마차-법선-의관-위문-효양-원성-예영-균질-신무)
신라 제45대 왕(?~839).
성은 김. 이름은 우징(祐徵).
장보고, 김양(金陽) 등의 도움으로 839년에 민애왕을 시해하고 왕이 되었으나, 수개월 뒤에
병사하였다.
부인
정종왕후(명해의 딸)
자녀
문성왕
46.문성왕 (23세 조상)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말구-내물-복호-습보-지증-진종-흠운-마차-법선-의관-위문
-효양-원성-예영-균질-신무-문성)
신라 제46대 왕(?~857).
성은 김, 이름은 경응(慶膺). 신무왕의 태자. 장보고의 반란으로 피살됨
신무왕의 태자. 재위 연간은 신라의 쇠퇴기로, 846년에 일어난 장보고의 반란으로 피살, 양순(良順)·흥종·(興宗)·김식(金式)·대흔(大昕) 등의 반란이 계속 일어났다.
재위 기간은 839~857년이다.
부인:?
자녀: 안
47.헌안왕
신라의 제47대 왕(?~861).
성은 김, 이름은 의정(誼靖)·우정(友靖). 제방을 쌓아 농사를 장려하였으며, 후사가 없어 왕족 응렴(膺廉)을 사위로 삼고 왕위(경문왕)를 물려주었다.
재위 기간은 857~861년이다.
부인: 기록없음
자녀
영화(경문왕비)
궁예(??)
48.경문왕
신라 제48대 왕(?~875).
성은 김, 이름은 응렴(膺廉)·의렴(疑廉). 신라의 쇠퇴기에 즉위하여 중앙 귀족의 모반과
지방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힘썼고, 황룡사 탑을 세웠다.
재위 기간은 861~875년이다.
부인
문의왕후
자녀
헌강왕,
정강왕,
윤(문의황후 소생이나 경문왕의 아들이 아닐 가능성 있음)
진성왕
49.헌강왕
신라의 제49대 왕(?~886).
성은 김, 이름은 정(晸). 황룡사에 백고좌(百高座)를 베풀어 불경을 강론하게 하고 문치에 힘썼으나, 재위 중에 처용무가 크게 유행하는 등 신라는 사치와 환락에 젖어 쇠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재위 기간은 875~886년이다.
부인
의명왕후:
자녀
의성(신덕왕비)
김씨(효공왕)
50.정강왕
신라의 제50대 왕(?~887).
성은 김, 이름은 황(晃). 경문왕의 둘째 아들, 진성여왕의 오빠.
황룡사에 백고좌(百高座)를 베풀어 청강(聽講)하였으며, 이찬 김요(金蕘)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재위 기간은 886~887년이다.
부인:?
자녀:?
51.진성여왕
신라의 제51대 왕(?~897).
성은 김. 이름은 만(曼). 오빠인 정강왕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왕이 됨.
재위 기간 중에 나라가 혼란에 빠졌으며 후삼국으로 다시 나누어지게 되었다.
888년 각간 위홍과 대구 화상에게 향가집 《삼대목》을 편찬하게 하였다.
재위 기간은 887~897년이다.
부군
혜성대왕 위홍(경문왕의 동생)
자녀:?
52.효공왕
신라의 제52대 왕(?~912).
성은 김. 이름은 요(嶢). 정강왕의 아들.
진성 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궁예와 견훤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도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아 후삼국이 정립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재위 기간은 897~912년이다.
부인:?
자녀: 없음
53.신덕왕
신라 제53대 왕(?~917).
성은 박. 이름은 경휘(景暉). 본명은 수종(秀宗). 아달라의 원손.
효공왕이 후사 없이 죽자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견훤과 궁예의 침입을 받았다.
재위 기간은 912~917년이다.
부인
의성왕후(헌강왕의 딸)
자녀
경명왕, 경애왕
54.경명왕
신라 제54대 왕(?~924).
성은 박. 이름은 승영(昇英). 신덕왕의 태자.
후삼국(後三國)이 정립(鼎立)하여 패권을 다투던 때 왕위에 올라 기울어 가는 국운을 회복 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재위 기간은 917~924년이다.
부인
장사왕후(대종의 딸)
자녀:?
55.경애왕
신라 제55대 왕(?~927).
성은 박. 이름은 위응(魏膺).
신라의 국세가 쇠퇴할 때 즉위하여 왕건과 견훤의 압박을 받았으며, 즉위 4년(927) 포석정(鮑石亭)에서 견훤의 습격을 받자 자살하였다.
재위 기간은 924~927년이다.
부인:?
자녀:?
56.경순왕 (28세 조상)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말구-내물-복호-습보-지증-진종-흠운-마차-법선-의관-위문
-효양-원성-예영-균정-신무-문성-안-민공-실홍-효종-경순)
신라 제56대 마지막 왕(?~978).
성은 김. 이름은 부(傅). 문성왕의 6세손.
경애왕이 죽은 뒤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935년 고려 왕건에게 항복 하였다.
왕건에 항복하여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 사심관으로 여생을 보냄.
재위 기간은 927~935년이다.
능은 경기 연천군 장남면(長南面)에 있다
부인
죽방부인
낙랑공주(고려 왕건의 셋째왕비 신명순성왕후 의 딸, 소생 왕자 중에 고려 제3대 정종, 제4대 광종등 두명의 왕이 나옴)
왕씨(왕건 후비 박씨소생)
자녀
일 마의태자(죽방부인의 자) 상복에 해당하는 삼배옷 만 입고 살았다고 마의태자라는 별호가 붙음.
계자황
은설
석(의성김씨 시조), 태조왕건의 외손, 광종의 외조카, 경종의 매부
건선
추
명종
덕지
여-경종
여-이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