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덫 - 신경림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는다
벽을 들여 바르고 지붕을 세운다
이렇게 스스로 만든 집에서 한 30년
나는 자못 만족해서
글도 쓰고 책도 읽는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 그 집이
비도 바람도 막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허물 생각을 한다
지붕을 거두고 벽을 턴다
서까래를 치우고 기둥을 들어낸다
그러고는 이 나라를 반 바퀴는 도는
멀고 지루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돌아와 나는 절망한다
기둥도 벽도 형체도 없는 그 집이
오두마니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 동해바다 - 신경림
- 후포에서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하게
동산만하게 커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보다
멀리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 자화상 - 신경림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 조선족의 달 - 신경림
달이 시원스레 옷을 벗었다
첨벙첨벙 수로 속에 들어가 멱을 감는다
가없는 옥수수밭에 바람이 인다
수로에서 나왔지만 옷이 없다
부끄러운 곳 손으로 가리고 초가집을 찾아 들어가 숨는다
달이 초가집 속에 갇혔다
* 밤차 - 신경림
- 신림에서
세상은 온통
크고 높은 목소리만이 덮어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 줄을
가릴 수 없는 세월이 많다
밤차를 탄다
산바람 엉키는 간이역에 내리면
감나무에 매달린 새파란 그믐달
비로소 크고 높은 목소리
귓가에서 걷히면서
작고 낮은 참목소리
서서히 들리기 시작한다
속삭임처럼 흐느낌처럼
멀리서 가까이서 들리기 시작한다
* 초봄의 짧은 생각 - 신경림
- 영해에서
바닷바람은 천리 만리
푸른 파도를 타고 넘어와
늙은 솔숲에서 갈갬질을 치며 놀고
나는 기껏 백 리 산길을 걸어와
하얀 모래밭에
작은 아름다움에 취해 누웠다
갈수록 세상은 알 길이 없고
* 세밑에 오는 눈 - 신경림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등과 가슴에 묻은 얼룩을 지우면서
세상의 온갖 부끄러운 짓, 너저분한 곳을 덮으면서
깨어진 것, 금간 것을 쓰다듬으면서
파인 길, 골진 마당을 메우면서
밝은 날 온 세상을 비칠 햇살
더 하얗게 빛나지 않으면 어쩌나
더 멀리 퍼지지 않으면 어쩌나
솔나무 사이로 불어닥칠 바람
더 싱그럽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창가에 흐린 불빛을 끌어안고
우리들의 울음, 우리들의 이야기를 끌어안고
스스로 작은 울음이 되고 이야기가 되어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어서
* 목계장터 -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새벽 안개 - 신경림
사랑을 배우고
미움을 익혔다
이웃을 만나고 동무를 사귀고
그리고 더 많은 원수와 마주쳤다
헛된 만남 거짓 웃음에 길들여지고
헤어짐에 때로
새 힘이 솟기도 했으나
사랑을 가지고 불을 만드는 대신
미움을 가지고 칼을 세우는 법을
먼저 배웠다
법석대는 장거리에서
저무는 강가에서
이제 새롭게 외로움을 알고
그 외로움으로
노래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
그 노래로 칼을 세우는 법을 배우고
그 칼을 가지고
바람을 재우는 법을 배운다
새벽 안개 속에서
다시 강가에서
* 가난한 사랑 노래 - 신경림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 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던 내 등뒤에서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파장(罷場) -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遠隔地 - 신경림
박서방은 구주에서 왔다 김형은 전라도
어느 바닷가에서 자란 사나이.
시월의 햇살은 아직도 등에 따갑구나.
포장친 목로에 들어가
전표를 주고 막걸리를 마시자.
이제 우리에겐 맺힌 분노가 있을
뿐이다. 맹세가 있고 그리고 맨주먹이다.
느티나무 아래 자전거를 세워 놓은
면서기 패들에게서 세상 얘기를 듣고.
아아 이곳은 너무 멀구나, 도시의
소음이 그리운 외딴 공사장.
오늘밤엔 주막거리에 나가 섰다를
하자 목이 터지게 유행가를 부르자.
사이렌이 울면 밥장수 아주머니의
그 살찐 엉덩이를 때리고 우리는
다시 구루마를 밀고 간다.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밀린 간조날을
꼽아 보고 건조실 앞에서는 개가
짖어 댄다 고추 널린 마당가에서
동네 아이들이 제기를 찬다. 수건으로
볕을 가린 처녀애들은 킬킬대느라
삼태기 속의 돌이 무겁지 않고
십장은 고함을 질러 대고. 이 멀고
외딴 공사장에서는 가을 해도 길다.
* 겨울밤 - 신경림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 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 경칩 - 신경림
흙 묻은 속옷 바람으로 누워
아내는 몸을 떨며 기침을 했다.
온종일 방고래가 들먹이고
메주 뜨는 냄새가 역한 정미소 뒷방.
십촉 전등 아래 광산 젊은 패들은
밤 이슥토록 철 늦은 섰다판을 벌여
아내 대신 묵을 치고 술을 나르고
풀무를 돌려 방에 군불을 때고.
볏섬을 싣고 온 마차꾼까지 끼어
판이 어울어지면 어느새 닭이 울어
버력을 지러 나갈 아내를 위해 나는
개평을 뜯어 해장국을 시키러 갔다.
경칩이 와도 그냥 추운 촌 장터.
전쟁통에 맞아 죽은 육발이의 처는
아무한테나 헤픈 눈웃음을 치며
우거지가 많이 든 해장국을 말고.
* 친구여 네 손아귀에 - 신경림
1
창돌애비가 죽던 날은 된서리가 내렸다
오동잎이 깔린 기름틀집 바깥마당
그 한귀퉁에 그의 시체는 거적에 싸여 뒹굴고
그의 아내는 그 옆에 실신해 누웠다
창돌이와 나는 팽이를 돌렸다
무서워서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싸전 마당에서 저물도록 팽이만 돌렸다
2
소줏잔을 거머쥔 네 손아귀에 친구여
날카로운 칼날이 숨겨져 있음을 나는 안다
상밥집에서 또는 됫술집에서 다시 만났을 때
네 눈 속에 타고 있는 불길을 나는 보았다
네 편이다 아무리 우겨대도
믿지 않는 네 어깨짓을 나는 보았다
거적에 싸인 시체 위에 떨어지던 오동잎
친구여 나는 보았다
* 쓰러진 자의 꿈 - 한겨레신문
<농무>와 <남한강>의 시인 신경림(58)씨가 여섯번째 시집 <쓰러진 자의 꿈>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냈다.
지난 2년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으로서 혼란과 침체의 민족문학진영을 이끌어온 그의 새 시집에는 패자들을 다독거리고 사라져 가는 것들에 애정을 보내는 짧은 시 66편이 모두 4부로 나뉘어 실려 있다.
대체로 10행에서 20행에 이르는 특유의 단형 구조로 되어 있는 그의 시들은 무엇보다도 근거없는 낙관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패배를 있는 그대로 수락함으로써 새로운 모색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솔직하고 믿음직스럽게 읽힌다. 가령 `落日'이라는 시에서 그가 태양의 기쁨과 힘, 그리움과 안타까움, 슬픔과 추함을 열거한 뒤 "드디어 새맑음도 뜨거움도 홀연히 잊고/그리움도 안타까움도 훌훌 떨쳐버리고/표표히 서산을 넘는 황홀한 아름다움"을 상찬하고는 느닷없이 연을 바꾸어 "말하지 말자 거기서 새로 꿈이 싹튼다고는"이라고 가라앉은 어조로 시를 끝맺을 때 그것이 패배주의나 허무주의의 울림을 주지 않는 것은 그 냉철하고 객관적인 현실 응시의 덕분이다.
시인은 옛 빨치산과 토벌대 출신이 사이좋게 장기를 두는 장면을 서술한 `파고다공원에서'의 말미 역시 "하지만 성급하게 말하지 말자/역사란 안개처럼 모든 것을/이렇게 덮고 지나가는 것이라고/이렇게 묻고 흘러가는 것이라고/한밤중 땅속 그 깊은 곳에서/오늘도 그 큰 울음 들릴 테니"라고 맺어 역사의 엄중함, 어설픈 화해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즐겨 쓰는 방법론의 하나는 시적 대상에 그 자신의 자아를 투사하는 감정이입의 방법이다."슬퍼하지 말라 어둠이 걷히기 전에 돌아가/안개로 덮어야 하는 네 갇힌 삶을/곳곳에서 부딪치고 막히는 무거운 발길을/ 깃과 털 속에 새와 짐승을 기르면서/가슴속에 큰 뭍 하나를 묻고 살아가는/너 나의 서럽고 아름다운 무인도여"(無人島)라는 구절에서 `갇힌 삶'과 `무거운 발걸음'은 다름아니라 시인 자신의 것이며 커다란 꿈과 희망을 품고 기르는 모습 역시 시인 자신의 소망적 자아가 투사된 것이다.
제1부의 시 `裸木'에서도 시인은 헐벗은 겨울나무들이 "서로 부둥켜안고/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으로 나타나지만, 세상의 작고 보잘것없으며 구차하고 사소한 것들에게 애정과 공감을 보내는 시들은 제4부에 집중적으로 배치돼 있다.
이 시들에서 시인은 멀리서 보면 아름답게만 여겨지는 산동네의 고달픈 삶을 직시하며
(밤차를 타고 가면서), 모두들 큰 것만 좇는 세태 속에서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상기시키고
(거인의 나라)"세상에 버릴게 하나도 없다"(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는 교훈을
얻기도 한다.
쓰러진 자들에 대한 시인의 애정이 이 시집 제3부에 실린 일련의 시들에서는 무심한
세월의 질주에 추월당해 버려진 존재들에게로 향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북한산 어귀 늙은 소나무 아래서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파는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
(봄날),급행은 물론 완행마저도 서지않고 지나쳐 버리는 역(廢驛), 고향을 등진 지 십년
만에 빈 집에 돌아와 밤새 해수 앓는 소리를 내다가 세상을 뜬 영감(오랑캐꽃) 들이 세월에
밀려 "삶의 마지막 고샅"(봄날)에 버려진 자들이다.
제2부에 포함된 많은 시들은 청유·감탄·의문의 어법을 동원해 썩은 현실의 광정(匡正)과
바람직한 내일의 도래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몇몇은 가슴을 울리는 감동을
안겨주는 대신 상투성과 도식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쓰러질 것은 쓰러져야 한다/무너질 것은 무너지고 뽑힐 것은 뽑혀야 한다/그리하여 빈 들
판을 어둠만이 덮을 때/몇 날이고 몇 밤이고 죽음만이 머무를 때/비로소 보게 되리라
들판 끝을 붉게 물들이는 빛을/절망의 끝에서 불끈 솟는 높고 큰 힘을"(빛 전문)이라는
장담은 그의 다른 좋은 시들과 비교할 때 다소 공소하게 들린다.
* 신경림
35년 충북 충주생.
56년 문학예술지에 '낮달' '갈대' 등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 < 농무> <새재> <남한강> <씻김굿> <길> <가난한 사랑노래> 등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민요연구회 회장, 민족예술인총연합 의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