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하와 여미아가 조영의 집에 오던 날, 특히 이루하는 평소보다 매우 아름답게 치장하고 나타났다.
“어서 오세요. 공주마마.”
조영이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그 동안 못 본 사이 훨씬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감사해요. 제가 겉보다 속을 꾸미는데 애를 더 많이 썼거든요.”
이루하가 행복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아씨께서 요사이 경교의 가르침에 푹 빠져 저처럼 늘 임과 교통하고 계십니다.”
“오, 그래요?”
조영이 놀라며 새삼 이루하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 아닙니다. 어쩐지 전보다 더욱 영묘靈妙한 미를 갖추신 것 같아서요.”
오찬이 끝나고 조영은 이루하와 여미아에게 물었다.
“미혼의 여인이 미혼 남자에게 남몰래 비녀를 선물로 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요?”
조영은 대담하게도 껄끄러운 문제를 꺼내며 암암리에 여미아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낯에는 별다른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 예의 그 성결미聖潔美를 흠뻑 풍기며 조영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
“어머나! 혹시 공자님이 그런 것을 받으셨나요?”
이루하의 물음이다. 조영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예, 받은 적이 있습니다.”
“누구에게서요?”
이루하는 이렇게 물어놓고 쑥스러운 듯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었네요.”
“아닙니다. 세 여인에게서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머, 그래요? 그건 일종의 정표情表인데요, 그것도 보통 정표가 아니라, ‘난 당신의 여인이 되고 싶다’ 라는 뜻을 담고 있는 거예요.”
“오, 그렇게 심각한가요?”
“세 개씩이나 받았으니 공자님은 복도 많으시네요.”
이루하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그 중 두 개는 이미 본인들에게 돌려드렸고 나머지 한 개도 곧 돌려드릴 작정입니다.”
“왜요? 그 여인들이 맘에 들지 않던가요?”
“지금은 제가 그런 것을 받을 때가 아니고, 또 그런 걸 간직하고 있으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공자님은 약관 스물한 살로 장가가실 때가 되었는데, 때가 아니라니요?”
조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우리 조국의 고토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군요. 그럼 그 때까지는 혼인하지 않을 작정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나이가 오십이 넘고 환갑이 다 되어도 고토가 다물되지 않으면 홀로 사실 건가요?”
“참 쑥스러운 얘기군요. 그건 아닙니다. 언젠가는 저도 장가를 가야 하겠죠.”
조영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부언했다.
“서른입니다. 서른 살까지 제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으면 그 때 가서 혼인할 참입니다.”
“그런 장한 뜻을 품고 계신지 몰랐어요. 하지만 그렇게 쉽게 자신과 약속하지 마세요. 사람이란 내일 일이 어찌 될 수 알 수 없잖아요?”
조영이 곤혹스런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그럼 그 말을 취소하겠습니다.”
이루하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근데 오늘 경교의 진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달려왔는데, 그런 얘기는 일언반구도 없고, 뜬금없는 비녀 얘기예요?”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두 분을 만나니 그 얘기를 꺼내고 싶었습니다.”
이루하가 조영을 쏘아보다가 여미아에게 눈짓했다.
여미아가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보자기에 싸온 조그마한 궤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저의 조촐한 선물입니다. 공자님이 직접 펴보세요.”
조영은 보자기를 풀어 작은 상자의 뚜껑을 조심스레 열었다. 상자는 평범했다. 순간,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 안에 찬연한 비취빛이 서린 물건 하나가 담겨 있었다.
“어서 꺼내 보세요.”
조영은 초록빛 영롱한 물건을 꺼내었다. 여인의 비녀였다.
“이건 옥비녀?”
조영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맞아요. 옥비녀예요.”
조영이 놀란 것은 물론, 그것이 옥비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아연실색하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조영은 그 비취비녀를 들고 이리저리 자세히 뜯어보고 있었다.
‘과연!’
조영은 비녀를 들고 이루하와 여미아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맞아요. 공자님. 그건 우리 아씨의 물건이에요.”
여미아가 다소 긴장된 빛을 띠며 말했다.
“아, 이것이 이루하 아가씨의 옥비녀이군요. 근데···.”
“근데 뭐예요? 맘에 안 드시나요?”
이루하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그런데···.”
여미아가 빙그레 웃다가 물었다.
“전에도 이와 똑같이 생긴 비녀를 보신 적이 있죠?”
“네, 그렇습니다.”
“그걸 어디서 보셨나요?”
“그건 제가 지금 가지고 있습니다.”
“보여주실 수 있어요?”
조영은 여미아가 갑자기 옥비녀를 보여 달라고 하자 속으로 크게 당황했다. 도대체 이 여인들이 왜 이런가? 혹을 떼려다 오히려 붙인다는 말처럼, 이루하는 오늘 비취비녀를 가지고 오지 않나, 여미아는 조영이 간수하고 있는 그 옥비녀, 바로 여미아 자신이 날려준 그걸 꺼내 보여 달라고 하질 않나?
‘에라! 이판사판이다.’
조영은 여미아의 옥비녀를 꺼내 와서 이루하의 비취색 비녀 앞에 나란히 놓았다. 두 개의 비녀가 크기와 모양, 빛깔과 재질이 똑같아 구분하기 어려웠다. 둘 다 연초록의 비취빛이 선명하다. 비녀머리에는 양자에 모두 열십자 모양의 돋을새김이 들어 있었다.
조영이 비녀 두 개를 나란히 놓자 이루하와 여미아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조영은 그들의 표정을 살피다가 두 개의 비녀를 들어 다시 자세히 비교해보았다. 여미아의 옥비녀에는 “연연세세”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전에 미시아가 준 옥비녀와, 모양과 명각문이 동일했다.
그런데, 이루하가 지금 내어놓은 비녀에는 “모란화”라는 세 글자가 명각되어 있음이 그제야 조영의 눈에 들어왔다.
둘을 합하니 “연연세세모란화燃戀洗世牧丹花”였다.
‘아, 이건 여미아가 준 시문의 마지막 행과 같구나.’
이 때 두 여인은 무엇이 우스운지 서로 키득거리고 있었다. 조영이 영문을 몰라 멍한 표정으로 이루하를 바라다보았다.
“그 두 개의 옥비녀는 같은 장인이 동시에 만든 한 쌍의 물건이에요.”
조영은 아직 얼떨떨한 심정에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있다. 아니 당혹감을 느꼈다고 해야 옳다.
‘미시아가 전해 주었던 옥비녀가 오히려 여미아의 옥비녀와 동일한 한쌍이던데?’
그러고 보니, 옥비녀 둘과 옥비녀 하나, 이 셋이 삼일채三一釵(세 개가 한 벌로 된 비녀)였다. 조영의 곤혹스러움은 점증한다.
‘어떻게 해서 한 장인이 만든 삼일채가 여미아, 미시아, 이루하에게 골고루 하나씩 주어졌는가?’
도저히 풀 수 없는 의문이었다. 그 때 이루하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하나는 제가 지니고 다른 하나는 저의 비자인 여미아에게 주었지요.”
이루하는 조영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말했다.
“제가 비녀 하나를 여미아에게 주면서 뭐라고 말했는지 아세요?”
“···?”
“너는 나의 비녀婢女이니, 내가 누구에게 시집가든 너도 그의 첩으로 들어가는 거다.”
“네?”
조영은 깜짝 놀랐다.
“그건 너무···?”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니냐는 말씀이신가요?”
조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렇게 말한 것은, 여미아가 먼저 제게 그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네? 아씨···?”
여미아가 놀라서 정색을 했다.
“물론 여미아는 정확히 그런 말을 하지 않았죠. 단지, 자신은 평생 시집을 가지 않고, 나의 여종으로 늙겠다고 말했거든요.”
이루하는 과일을 한입 먹고 난 후, 말을 이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여미아의 갸륵한 정성에 감복해 내 남자를 그녀와 함께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일부일처一夫一妻를 가르쳐왔습니다. 경교에서도 일부다처를 반대하고 있는 줄로 아는데요?”
조영의 물음이다.
이루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가 좀 더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이루하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글썽글썽해졌다.
“저는 두려웠습니다. 내가 정을 준 남자가, 나를 거부하고 내 여종 여미아를 택할까봐.”
조영은 속으로 아연했다. 이루하가 부언했다.
“여미아는 얼굴도 마음씨도, 모든 것이 나보다 더 아름답고 매혹적이거든요.”
“아씨!···.”
여미아가 안절부절못했다.
“그 남자가 여미아만을 원하고 나를 원하지 않을 경우, 난 어떻게 되는 거죠?”
이루하의 목소리가 울먹거린다.
“그래서 전 여미아에게 말했습니다. ‘이 두 개의 비녀는 한 쌍이니, 둘 중 하나를 가지는 남자는 나와 너 둘의 낭군이다’ 라고요.”
그 때 여미아가 손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씨 둘 다 아씨의 것입니다. 둘 중 하나를 가지는 남자는 아씨의 남자입니다.”
이루하는 여미아의 항변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과거사를 털어놓았다.
“그래서 여미아에게, ‘네가 맘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그 비녀를 주라’고 부탁했습니다.”
“아씨, 저는 아씨께서 조영 공자님에게 맘을 두고 계신다는 사실을 진즉부터 알았기 때문에 그 비녀를 공자님에게 드린 것입니다.”
여미아가 해명했다.
“한 쌍의 비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받은 남자는, 우리 아씨의 낭군이 되는 거예요.”
조영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기가 막혔다.
“저는 이 한 쌍의 비녀 가운데 어느 것도 받을 마음이 없습니다.”
조영이 조용하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하며 덧붙였다.
“제게는 이미 혼약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함부로 받을 수 없습니다.”
뜻밖에도 이루하와 여미아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혼약한 여인이 누군지 저희에게도 알려주실 수 없을까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혼약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혼약한지 오래되었나요?”
“아주 어릴 적 내 나이 열 살이 되기 전이니 여러 해가 지난 셈이죠.”
“그 약혼녀는 지금도 살아있나요?”
“네?”
조영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깜짝 놀랐다.
“그건, 그건···.”
“공자님, 참 딱하십니다. 혼약한 여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아무튼 이건 제가 받을 수 없으니, 다시 거두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미아 아가씨에게서 받은 옥비녀도 되돌려드릴 참이었는데, 마침 잘 되었습니다.”
“이걸 받지 않으시면 나중에 후회하실 텐데요?”
“나중 일은 나중 일이고, 지금은 이런 걸 염려할 경황이 없으니, 부디 양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공자님, 제가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해주실 수 있나요?”
“네, 말씀하십시오.”
“혹시, 공자님께서 맘에 두신 여자라도 있나요?”
“아뇨, 하늘에 맹세컨대, 아직 없습니다.”
“우리 여미아도 공자님 눈 밖에 있는가요?”
정곡을 찌르는 이루하의 질문에 조영은 일순 뭐라 답변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가 한참 머뭇거리다가 겸손하게 말했다.
“여미아 아가씨는, 이루하 아씨와 마찬가지로 성스러움과 거룩함이 전신에서 풍기고 천하절색의 미염美艶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고고하고 청아한 기품이 가히 짝할 데가 없어, 신분의 여하를 떠나 소인은 두 분을 감히 쳐다보기도 어렵습니다.”
“그 말씀이 진심이에요?”
“암, 그렇고말고요.”
애정의 물결이 파동波動치는 떨리는 눈빛으로 조영을 응시하던 이루하가 갑자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조영이 보니, 그건 아주 낡은 봉투였다.
이루하가 봉투를 조영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 속에 든 것을 펴서 읽어보시겠어요?”
편지를 읽는 조영의 낯이 점점 이상하게 변해간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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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10. 12.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