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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평천국운동 원인
중국 근대기의 출발점에서 서구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못지 않게 중국의 전통적 질서를 재편성할 수 있을 뻔했던 태평천국운동이 왜 광서성(廣西省)의 오지(奧地)에서 출발하였던가를 살펴보자.
먼저 항상 한 왕조가 멸망할 즈음에 나타나는 현상인 일반적 배경(보편적 사회적 무질서 현상)을 살펴보고 하필 광서성에서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일반적인 왕조 말기의 현상을 살펴보면....
1)중앙과 지방정부의 행정이완 : 건륭 중기 이후 정계와 지방행정의 부패 - 가경초에 폭발한 백련교의 반란(1796~1804)
2)관료와 군대의 부패와 타락 : 백련교의 반란에서 노출된 청조정규군인 팔기와 녹역병의 무능과 부패확인.
3)지주제 등 경제적 모순의 심화 : 향촌사회는 지주 부상 고리대금업자 관료가 토지를 집적한 결과, 전체 4억인구의 60~90%는 토지가 없는 전호였으며, 일반 소농민은 전체 가경 면적의 겨우 30%를 분점하고 있어 생산액의 50%이상은 지대로 납부해야하는 전호와 자작농의 몰락이 사회 불안의 근원.
4)인구증가 : 보다 더 심각한 양상을 노정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 강희, 건륭기의 안정을 배경으로 한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경작면적의 증가는 거의 정체, 18세기 중엽의 1억 8천만 인구가 19세기 중엽에는 4억으로 증가했고, 경작지는 7억 무(畝)에서 7억 3천 무(畝)로...
5)자연재해의 빈발 : 1840,50년대에 걸친 양자강의 범람. 황하의 수로 변경. 광서성의 기근은 향촌민을 비적과 천지회당 등의 반란 집단으로 쉬게 연계.
6)은가의 등귀 : 19세기초이후 아편유입의 격증에 따른 은의 해외유출로 말미암아 은가가 등귀, 따라서 납세수단으로 사용되는 은과 일반시장의 거래수단으로 사용되는 동전 의 교환가치가 1:2에서 1:3으로 등귀 ==일반농민의 가계를 더욱 악화====18세기이래 생존을 위한 대규모이민, 사회적 불안, 향촌사회내부의 갈등과 투쟁은 운명적..
2. 광서성에서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
위에서 설명한 사회적 분위기의 한 부분을 점하고 있었을 뿐아니라 지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은 종족적, 사회적, 경제적 복잡성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으며, 서구열강의 충격파가 심강(尋江;西江)을 통해 미치고 있었다.
1)종족적 : 광서성에는 다양한 민족이 섞여 있는데 한인과 소수민족들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한인 중에는 원래 그곳에 살고있었던 토착세력 즉 본지인과 언젠가 화북에서 이주해와서 살고있는 한인 즉 객가(客家 : 타향에 머물고 있는 집안이란 뜻)와의 대립이 태평천국운동이 광서성에서 발생하게 되는 큰 원인이라고 하겠다. 그러면서 한인에 의해 산악지역으로 배척된 장족, 요족 등의 소수민족들이 탄압에 반격하고자 하였으며 광산 노동자와 숯구이 등은 독자적인 무력집단을 형성하게 되면서 광서성은 태평천국이라는 폭풍이 서서히 휘몰아치게 된다.
2)사회적 : 광주델타의 해적들은 내지의 천지회와 연계되고, 천지회 등 비밀결사들은 소금과 아편 밀매업의 주요한 담당자였다. 전쟁후 향용은 해산되어 생계의 보장 없이 행촌에 방치되었고 1840년대에 영국해군에게 광동과 광서의 내륙으로 쫓긴 해적들은 천지회의 지도하에 광서성 내의 수로에서 정비(艇匪)가 됨으로써 사회불안을 악화시킴.
= 광서성의 불온상은 반청복명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비밀결사인 천지회당의 반란으로 더욱 심화되어 갔다. 1836년 호남성 남부에서 일어난 백련교도이고 요족인 남정준의 반란, 1847년 호남, 광서성교계 지역에서 백련교도와 한인 천지회당과의 연계위에 일어난 요족 뇌재호의 난이 있었고, 1849년에는 뇌의 잔여세력을 규합한 이원발이 호남, 광서, 귀주성을 휩쓸었다.
3)경제적 : 아편전쟁의 패배로 5개 항의 개항에 따라 무역중심이 광주에서 상해로 옮겨지게 되면서 전통적으로 교역무역을 독점하던 광주는 불황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대량의 실업자들(운송업자들)이 발생하게 되면서 사회혼란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즉 개항 이전은 광주에서 육지에 부려진 수입물자는 몇 개인가의 교통루트를 따라 북방으로 운송되며 수출품의 경우는 이들 루트를 역으로 더듬는 형태로서 해외로 출하되었다. 이들 교통루트를 따라서 많은 사람들(교통노동자와 그 가족, 또한 그들에게 의식주를 공급하는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교통 노동자라는 존재는 당시 중국 사회에서는 광산노종자나 하급병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갈 곳이 없어진 인간이 최후로 당도하게 되는 곳이었다. 5항 개항으로 북방으로 향하는 많은 물자가 상해에서 육지에 부려지게 되자 지금까지의 교통 루트가 가졌던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아져 교통 노동자의 실업문제가 발생하였다.
3. 배상제회 (拜上會)
태평천국의 창시자 홍수전(洪秀全)은 남경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843년에 기독교를 환골탈태시켜 혁명적 신종교를 창립했다. 그는 전통적으로 하늘의 주재자로 간주되어 왔던 상제(上帝)를 여호와와 동일시하여, 여호와야말로 유일무이한 참된 신이고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며, 천하의 남녀는 모두 그의 자식으로서 형제․자매이므로 그 사이에 차별ㆍ대립ㆍ항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배상제회(拜上帝會)의 발생이고 간략한 내용이다.
4. 객가(客家)
일반적으로 Hakka로 불리워 지는 객가(客家 : 客, 客人, 客家人으로 불리워 짐)는 , 광동동북부의 해현지방을 중심으로 복건, 광서, 강서, 호남, 사천 및 동남아시아 각지에 널리 분포․거주하며, 독특한 기질 풍습을 형성하고 있는 한(漢)민족의 일파였다. 과거에는 이 객가(客家)의 유래(由來)에 대해 여러 가지 학설이 있어 왔지만 지금은 북방(北方)에서 이주해온 한민족(漢民族)의 일파라는 것이 거의 학계의 통설로 되어있다.
객가(客家)의 유래를 살펴보면 객가(客家)란 한마디로 말해 유랑민(流浪民)이다. 객가라는 칭호는 당송시대(唐宋時代)의 객호(客戶)로부터 파생되었는데, 당송(唐宋)의 객호에는 빈곤파산한 소농(小農)들이 국가의 통제를 피하여 타향에 유랑한 끝에 부지(富地)의 지주에게 전객(佃客)으로 고용되어 농업에 종사하게 된 빈곤계층의 유민(流民)들이 주류를 형성했다. 나중에 광동(廣東)에 이주해온 객가도 이와 같은 유랑민(流浪民)들로서 선주한족(先住漢族)과 토착민(土着民)들로부터 이방인취급과 차별대우를 받으며 객가라고 멸시 당했다. 그러나 객가 자신도 스스로 객가임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한족의 유예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스스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이러한 객가의 남천(南遷)은 오기(五期)로 크게 구별된다.
제 1기 : 서진말의 영가의 난(A.D.311--316)을 계기로 하여, 중원의 한족이 호족(胡族)의 지배를 피해 대거남하하여, 지금의 하남, 호북, 강서, 복건ㆍ북변까지 이동한 시기로 그 기간은 수ㆍ당대까지 계속된다.
제 2기 : 당말의 황소의 난(A.D.875)을 계기로, 중원한족이 강서의 동남부, 복건의 서남부 및 광동의 동북변경까지 이동한 시기이다. 이것은 당대까지 지속된다.
제 3기 : 송의 남천(A.D.1127)과 원의 침입에 의해, 제 2기의 구거주지로부터 다시금 광동의 동북부로 이동한 시기로서 명말까지 이어진다.
제 4기 : 청의 침입(侵入 : A.D.1662)에 의해 제 3기의 구거주지로부터 사천 광서태만(廣西台灣)등으로 이동한 시기로 동치년간까지 지속된다.
제 5기 : 동치 6년(A.D.1867)에 발생한 토객간의 항쟁을 계기로 광주서남부의 신흥(新興) 은평(恩平) 학산(鶴山) 태산(台山)일대에 거주하던 객가가 적계(赤溪)와 해남도 해되 등으로 이동하는 시기로 현대에 이르고 있다.
이상과 같은 객가의 남천시기와 경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남하가 단순한 생존문제에 그치지 않고 중국의 동난(動亂)과 밀접한 관계는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제 4기에 있어서 그 남하의 정치적 배경이 청의 침입이었고 남하지역이 광서인 것은, 청과 태평천국과 광서기의간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이 남하기간 중 객가가 다른 민계(民系)와는 다른 독자적 문화체계 - 기질 풍습 -를 형성한 집단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제 2기의 구거주지로부터 제 3기의 이동을 개시한 시기 즉 송말원초이다.
이 시기의 신거주지 해현은 강서, 광동, 복건의 삼성이 교차하는 삼각형의 산간지대였다.
해현은 외계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지리적 배경으로 인해, 오대ㆍ송대의 혼란기를 경과하는 중에 객가 고유의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즉 해현이라는 산간벽지에 틀어박힌 객가가 필연적으로 봉착한 것은 토착민의 차별 속에서 자기생존을 보존하는 것이었고 토비(土匪)와 도적(盜賊)으로부터 오는 생존(生存)의 위협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비적의 끊임없는 창궐과 험난한 자연환경 속에서 객가들은 역경의 극복과정에서 객가 특유의 기질 즉 객기가 배양되고 투쟁성과 저항의식이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이 해현을 중심으로 한 일대야말로 객가의 숙명적인 정착지였으며 홍수전이 태어난 화현은 해현으로부터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고 홍수전의 선조는 해현에서 이곳으로 옮겨 해현에서 살게 된다. 그리고 홍수전을 중심으로 한 객가들이 태평천국 때에 중심인물로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5. 홍수전(洪秀全)
태평천국의 난은, 아편전쟁으로 중국 제도의 여러 가지 모순이 드러난 가운데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불우한 지식층과 유민들이 중국의 근대화라는 새로운 시대로의 도약을 꿈꾸며 일으킨 반봉건 혁명이다.
광주에서 북쪽으로 약 50킬로, 광동성 화현(花縣)의 중서부에 관록포라는 마을이 있다.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의 창시자 홍수전의 고향이다. 집의 구조나 배열방법, 길게 뻗어나온 지붕의 처마 등에 客家의 마을에서 볼 수 있는 특유한 특징이 있는 外에는 사방에 논이 펼쳐져 있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화남의 마을이다. 18세기 초, 수전의 6대조인 홍연삼(洪沿三)이 광동성 북부의 매현에서 9명의 가족을 이끌고 이주해 왔을 때, 이 주변은 거의 황무지였으며, 매현은 원대로부터 객가인의 집단 거주지였다. 그 언어와 습속이 독특하기 떄문에 객가인을 소수 민족의 하나로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들은 4세기-5세기에 걸쳐 胡가 침입했을 당시 장강유역으로 이주하였고, 그 후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과 몽고인의 강남 침입을 맞아 복건, 강서의 성(省)경계지방으로 다시 일부는 광동의 북부와 동부로 이주했다. 매현은 그 대표적인 정착지였다. 그러나 18세기부터 19세기 후반에 걸쳐 이 지방의 많은 객가인이 다시금 각지로 이주하게끔 되었다. 이때는 폭발적인 인구 증가에 따른 경지부족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조건이 좋은 경지는 이미 전 거주자인 광동인이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이주해 온 객가인의 대다수는 그들의 소작인이 되거나 거칠은 황무지나 산간지의 협소한 땅을 차지하고 거의 전적으로 수전경작(水田耕作)에 의존해서 살아 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 빈궁한 한족들이 가난과 관청의 수탈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으로 나아가는 길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친인척 가운데 뛰어난 아이가 있으면 공동으로 돈을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 이렇게 친인척의 모든 희망을 걸머지고 오직 공부에만 몰두해야 하던 인물 가운데 홍수전이 있었다.
홍수전(洪秀全 : 1814~64)의 본래 이름은 홍인곤(洪仁坤), 아명은 홍화수(洪火秀)로 광동성 화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어려운 가세를 돕기 위해 두 형과 함께 농사일을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총명함을 알게 된 친척들의 도움으로 6세가 되던 해부터 글을 배울 수 있었다.
홍수전은 7살에 書塾에 들어가 과거시험을 목표로 학문을 시작하였다. 13살에 현시(縣試)-縣學, 府學에 입학하기 위해 현에서 치는 예비시험. 합격자에게는 府試 수험자격을 주었다. 에 합격한 후 일 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府試(府에서 치는 예비시험)에 응시하였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과거에의 도전과 그 좌절은 그 개인으로서 볼 때 청왕조에 대한 반역이라는 것과 어느정도 상관관계를 가졌을 것이다.
가난과 멸시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과거에 급제하는 길뿐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홍수전은 열심히 공부하여 16세가 되면서부터 여러 번 과거를 보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홍수전에게 돌아온 것은 낙방이라는 고통스러운 잔이었고, 그는 심한 좌절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낙방한 후 고을 아이들을 가르치며 세월을 보내던 홍수전은 23세가 되었을 때 3번 연달아 과거를 응시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실의에 빠진 홍수전은 근 두 달간을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홍수전은 불가사의한 꿈을 꾸게 되었다. 꿈에서 그는 하늘나라 사람에게 영접되어 하늘로 올라가 아름다운 궁전에 사는 금발에 검은 옷을 입은 천부를 배알했다. 천부는 그에게 칼 한 자루를 주면서 요마를 주살 하라고 하고, 천형은 그에게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마침내 홍수전이 하계의 요마를 소멸하고 궁전으로 돌아가자 천녀들이 그를 열렬히 환대하였다. 그가 천상을 떠날 때 천부는 그를 태평천왕으로 봉하고, 수전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그로부터는 6년 후, 홍수전이 29세가 되던 해 어느 날 그는 서가에서 7년 전 광주 거리에서 선교사에게 받은 기독교 입교서인 [권세양언]을 보게 되었다. 그 글을 읽고 난 홍수전은 크게 경악했다. 그가 몇 년 전 꿈속에서 만난 천부는 여호와, 대형은 예수이고, 자신은 천부의 둘째 아들로 세상을 구제하는 사명을 가지고 지상에 파견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홍수전은 자신의 깨달음을 친구인 풍운산, 사촌동생인 홍인간 등에게 말하고 그들과 함께 우상들을 철거하고 새로운 신앙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런 홍수전의 태도는 그곳 보수파 인사들의 반발을 일으켜 마침내 아이들을 가르치던 학당이 폐쇄되고 그는 실직하고 말았다. 보수파의 공격을 받자 홍수전은 풍운산고 함께 광서지역을 다니며 약 5개월 동안 선교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많은 사람들의 의혹을 사게 되어 홍수전은 혼자 공동의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풍운산은 자형산에서 새로운 신앙조직인 배상제회를 창립한다. 그런데 처음 순수한 종교집단으로 시작한 이 배상제회의 모임에 그 동안 삶의 뿌리를 잃고 다른 집단에 의해 이리저리 쫓겨다니던 객가인들과 소작농, 광부, 숯쟁이, 유민들이 가입하면서 새로운 성격을 띄기 시작했다. 도광 25, 26년(1845~46) 경에 홍수전은 [원도구세가]를 완성했다. 이 책에서 그는 상제와 그 아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정치ㆍ경제적으로 평등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신선, 공자, 맹자, 천황제는 염라요, 관리와 군대를 요도, 귀졸이라 하며 타도해야 할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전통 중국의 권위를 완전히 부정하면서 만주족 정부를 비판함으로써 한족의 단결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1847년, 홍수전이 자형산의 배상제회에 합류할 때 배상제회의 회원은 이미 2천여 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홍수전은 자신의 종교적 페엄과 사상으로 신도들을 교육시키고 체계적인 이론을 세우는 데 전결을 기울이며, 자신을 태평천왕대도군왕전이라 한 후 태평천국의 건설을 주장했다. 이들은 가진 재산을 모두 바치고, 하느님의 자녀로 평등한 형제자매라는 구호 아래 태평천국이 건설되기까지 누구나 정결한 생활을 해야 한다며 부부의 동거도 금지했다. 이 때 농부 출신의 양수청과 소조귀가 성령과 예수의 영이 자신들에게 강림했다고 주장하며 많은 계시를 내리고 교단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했다. 이외에 위창휘, 석달개도 배상제회 내에서 자기 무리를 통솔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당시 광서성에서는 계속된 재해로 유민들이 날로 증가했고, 이들 굶주린 백성들은 각지에서 비밀결사조직인 천지회의 지시로 봉기해 청나라 군대와 무장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을 계기로 함풍 원년(1851) 12월 10일, 홍수전의 38세 생일을 기해 태평천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또 그들은 청나라를 토벌하고 명나라를 부흥한다는 가치를 내걸고 전쟁을 선언했으며, 자신들을 태평군이라고 했다. 그는 1951년 3월 23일 청조를 타도하여 태평천국을 수립할 것을 천명하여 廣西省桂平縣의 金田村에서 봉기하였다. 그 후 청조와 혁명전쟁은 1851-53년에는 廣西, 湖南, 江南, 安徽의 四省. 1853-55년에는 安徽, 河南, 山西, 山東, 直 (河北)의 五省. 1957-63에는 安徽, 江西, 浙江, 福建, 湖南, 廣西, 湖北, 西川, 貴州, 雲南, 江蘇, 河南의 十三省. 1964-66년에는 安徽, 江西, 廣東, 福建의 四省으로 17省의 戰域에 이르고 있다.
이때 가담한 사람이 만여 명에 달했고, 그들이 여러 지방을 거치면서 그 숫자는 급속히 증가했다. 기아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는 그들이 내세운 종교에의 신앙보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해 준다는 것이 가장 큰 유혹이었다. 이들은 청나라 전통 머리 모양인 변발을 하지 않고 머리를 길러 장발적 또는 발비라고 불렀으며, 북장도 한족의 전통복장을 입어 만주족과 구분했다. 홍수전은 이렇게 많은 무리가 따르게 되자 체계화․조직화할 필요를 느껴 [주례]를 바탕으로 홍수전이 천왕, 양수청은 동왕, 소조귀는 서왕, 풍운산은 남왕, 위창휘는 북왕, 석달개를 익왕이라 하고, 각왕 밑에는 자신들의 막료를 두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동왕 양수청이 실질적 통수권을 가졌고, 천왕 홍수전은 점차 명목사의 교주가 되어 갔다.
그 후 태평군은 겹겹이 포위한 청나라 군대를 뚫고 호남성으로 진격했는데, 그 세력은 마치 구르는 눈덩이처럼 갈수록 커져 이듬해엔 무창, 한양 등 양자강 중류 유역의 요충지가 함락되었다. 이때 태평군은 2백만 명에 달했고, 수륙 양군이 연안을 따라 남경을 공격해 정부군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태평군은 지하도를 파서 성벽을 돌파할 것을 기도했으나 청나라 또한 참호를 파서 지하도를 방어했다. 남경에 주둔해 있던 3만 명의 청군은 결사의 항쟁을 했으나 함풍 3년 2월 11일, 태평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홍수전은 이곳을 천경이라 하고 수도로 삼아 정착했다.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건설에 착수하는데 이때 발표된 『天朝田畝制度』는 태평천국이 지향하는 均等主義의 이상사회상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정착이 가져다 준 안정 속에서 태평천국은 지도층의 내분과 기존 왕조와 다를 바 없는 봉건화에 빠졌다. 홍수전은 옥새를 만들고, 중인들에게 만세르 부르게 하고, 천왕으로서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미녀 18명을 뽑아 후궁으로 삼는 등 중국의 역대 제왕과 같은 생활방식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다른 지도부자들간에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백성들에게는 전제와 금욕을 설교하며, 의식주에 필요한 것과 예배할 때 바칠 약간의 돈을 주고 자신들은 공동의 돈으로 사치를 즐겨 신앙의 열정과 평등사상은 이미 희박해졌다. 그러므로 요마의 타도라는 목표를 향해 전진하던 이들 태평군의 종교적 결집은 약화되고, 지도층간의 내분이 나타나기 시각했다. 또한 남왕 풍운산과 서와 서조귀가 잇달아 전사하고, 집행부의 실권은 동왕 양수청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는 외국사절을 혼자 접견하고, 행정상의 결재도 단독으로 처리하고 있었고, 어떤 때는 성령의 지시를 빙자하여 여러 사람 앞에서 천왕 홍수전의 사생활을 꾸짖기도 했다. 정치적 역량이 부족한 홍수전은 홍수전대로 종교적 환각에 빠져 정치에 대해서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홍수전이 정치에 무관심하자 자연히 동왕의 독재가 날로 현격해졌다. 1856년 9월, 양수청의 독재에 불만을 품은 북왕 위창휘가 동왕이 베푼는 연회에서 동왕을 살해하고, 동왕부의 가족과 부하 수천 명을 살육하는 사건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천왕 홍수전은 사건을 제대로 수습하지 않았고,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한 익왕 석달개가 무창에서 달려와 북왕을 문책하려 했다. 위기를 느낀 북왕은 즉각 익왕부를 습격하여 석달개의 모친, 처자 등을 비롯한 수십 명을 살해하자, 기습을 당한 익왕은 간신히 도망을 갔다. 그리고 북왕은 그 여세를 몰아 익왕을 천경으로부터 축출시켰다. 옛 동료의 손에 가족을 잃은 익왕이 호북에 있던 부하를 인솔하여 청군에게 향했던 창을 천경으로 돌려 진격하자, 천왕 홍수전은 그때서야 북왕과 그의 가족, 부하들을 참수했다.
이 사건으로 태평천국을 일으킨 주요 인물들 가운데 남은 사람은 무능력하고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 천왕과 익왕뿐이었으나, 체제에 회의를 느낀 익왕 석달개는 홍수전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천경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다. 이때 홍수전의 휘하에는 유능한 군사지도자로 진옥성, 이수성이 있어 그럭저럭 청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태평천국을 겨우 지탱해 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태평천국의 위세가 약화되고 홍수전이 더욱 미신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나타난 인물이 홍인간이다. 그는 초기 홍수전이 배상제회에 몰두할 때 그의 영향을 받았으나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려 봉기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 후 홍인간은 홍콩으로 가서 개신교 선교사에게서 정식 교리를 공부하고 전도사가 되어 천경에 나타난 것이다. 역사의 큰 흐름으로 볼 때 그의 등장은 태평천국에게 다가온 새로운 전기라고 할 수 있다. 홍수전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천경으로 온 홍인간을 반가이 맞이하여 간왕으로 봉하고 모든 실권을 넘겨주다시피 했다.
서구 교육을 받은 홍인간은 자신의 종교적 입장과 근대화로 넘어가는 세계 속의 중국의 위치를 잘 인식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뜻하지 않게 막중한 임무를 맡은 홍인간은 먼저 백성들에게 기도를 하게 함으로써 신앙면에서의 단결을 꾀하는 한편, 홍수전에게 [자정신편]을 제출하여 정치적 개혁을 도모했다. [자정신편]은 서양 자본주의 전신과 경제제도에 따라 태평천국을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싣고 있었다. 이에는 광산의 채굴, 기간산업의 개발, 기차와 선박 제조, 은행의 설립, 화폐의 발행에 관한 제반사항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홍인간의 이런 개혁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 지지세력이었다. 당시 영왕 진옥성은 간왕에게 협조를 아끼지 않았으나, 충왕 이수성은 새로이 등장한 홍인간에 불만을 품고 그의 개혁안을 따르지 않았다. 이수성은 당시의 위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다.
결국 태평군의 군사력을 통솔하여 청군을 방어하던 진옥성과 이수서의 불협화음은 태평군의 약화를 가져왔고, 마침내 중국번이 인솔하는 청군이 안경을 점령하여 영왕 진옥성이 죽고 말았다. 또한 천경 내부에서는, 홍수전의 아들과 홍수전의 두 형 홍인발, 홍인달은 간왕의 개혁이 자신들의 세력에 영향을 미치자 그를 모함하여 실권을 빼앗았다. 천왕 홍수전은 더 이상 현세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정치권의 막후로 숨어버리고,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던 홍인간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중국번이 군대를 이끌고 태평천국을 맹렬히 공격할 때, 홍수전은 군대로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고 모든 사람에게감로로 기아를 막으라고 명령하고 자신이 먼저 실행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천경이 함락되기 한 달 전인 동치 2년 (1864) 6원 1일 병들어 죽으니, 이때 그의 나이 51세였다.
1864년 7월 19일 천경이 함락되자, 유천왕으로 등극한홍수전의 아들은 소수 병력으로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탈출했다. 간왕 홍인간, 충왕 이수성은 청군에게 잡혀 죽었고, 청군은 천경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학살을 자행하니 이때 죽은 사람이 10만여 명이라고 한다. 이로써 14년에 걸쳐 18개성의 6백여 성진을 휩쓸었던 대규모 농민운동이 역사의 어둠 속으로 퇴장했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난은 민족주의 혁명이면서 중국근대화혁명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각지로 흩어진 태평천국의 무리와 그들의 사상에 동조하던 세력들이 비밀결사를 조직해 반청운동을 전개하며, 후일의 중국의 혁명운동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또 별 볼일 없었던 한족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고, 회군, 상군과 같은 군벌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면서 이들 세력의 확장과 함께 중국의 경제상태는 날로 악화되어갔다.
6. 태평 천국 운동중의 서양 열강의 침략 과정
1853년 천경이 건도된 후 많은 외인 선교사들은 중국에 기독교 국가가 수립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지만 1854년부터는 배상제교의 이단적 교리와 태평천국 지도자들의 거만한 태도 등에 대하여 반감과 불만, 혐오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반란세력에 대하여 기대와 희망을 견지하였던 선교사들은 본국정부에 항의하기도 하였지만 정책결정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였다.
더욱이 태평천국 지도층은 서구 자본주의 열강이 세계시장을 재편성하려는 침략적 본질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고 한편으로는 천부, 천형, 천왕의 국가인 태평천국에 외국 정부가 예속된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청조와 마찬가지의 전통적 중화관념을 노출시키는 등 근대적 민족 국가관념이나 민족주의의식이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서구열강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중국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존 이익의 보존과 확대를 성취하려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아편전쟁 이후 그들이 끊임없이 진출하고자 한 양자강 유역을 장악한 태평천국정권을 청조에 대응하는 또 하나의 실질적 정권으로 인정하고 이에 무장간섭과 진압을 유예한 채 자신들의 기본 입장을 보다 더 효율적으로 관철할 수 있는 정권을 선택하기 위하여 이후 전개될 정권의 향배에 대하여 관망하고 또한 양정부에게 상호 연대에의 희망과 위협, 이권요구를 제시하는 이른바 '중립'정책을 견지하였다. 서구열강 중에서 특히 중국시장에 대한 강한 기대 속에서 가장 광범한 세력을 부식하고 있었던 영국은 태평군으로부터 상해 등 조계항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확보하는 데 노력하고 있었다.
남경건도 직후인 1853년 4월 영국공사이자 홍콩총독인 본햄은 태평천국의 대열강 태도를 파악하기 위하여 남경을 방문하여 남경불평등조약상의 상해 등 5개항에서의 통상권리 승인과 태평군의 상해공격 여부를 탐색하였다. 12월에는 프랑스 공사 부르블롱이, 이후 무장ㆍ중립ㆍ정책은 태평천국 무장진압을 결정한 1862년까지는 기본적으로 유지되었다. 외국상인은 양정부에 무기 탄약을 판매하였다.
그 동안, 1855,6년에 서구열강은 유럽에서의 크리미아전쟁과 청조와의 조약개정문제에 몰두하고 있었으며 곧 제 2차 중ㆍ영전쟁이 발발하였다. 1858년에 천진조약이 체결되어 아편무역이 합법화되고 양자강 연안의 진강, 남경, 구강, 한구 개항이 결정되었다. 영국의 엘긴 경은 11월 정치정세와 상업전망을 파악하기 위하여 무한까지 항진했으며 귀로에 태평군과 우호적인 서신교환을 하였다. 태평군은 서신에서 총격을 사과하고 외국의 원조를 얻고자 하였으나, 그는 '중립'을 내세워 거절하였다. 1859년에는 영국외무장관 맬머스베리는 청조를 도와 태평천국을 제거해야 한다는 무력간섭의 의향을 명백히 밝히면서도 아직 구체적으로 개입하기에는 반란세력이 강하다고 경고하였다.
이제 영국외교관들은 점차 태평천국에 대해 비난하기 시작했다. 태평천국 지도자들이 체계적인 행정체계를 수립할 능력이 없으며 배상제교리는 사이비 기독교리로 평가되었다.(토사구팽) 그런 태평천국이 전국을 석권할 경우 만족스럽지 못한 수준이지만 기존의 행정체계와 교역질서조차 혼란에 빠뜨릴 것으로 우려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860년에 태평군은 군사적 승리를 거두고 있는 반면, 청조는 열강의 공격으로 존립이 위태로워짐으로써 중국의 정치적 향방은 불확실해졌다. 1860년 8월 이수성군이 상해로 진출하였을 때 영, 불군은 북경 근처의 대고에서 제 2차 중영전쟁과 관련, 청군과 접견하는 일방 태평군의 진출을 무력간섭, 좌절시켰지만, 10월에 청조와의 북경조약 체결 후에도 영국은 당분간 중국 내전에 개입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물론 상해진출을 무력간섭, 격퇴시킨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무렵에는 태평천국에 대하여 '중립' 과 구체적인 적대행동이 착종되는 정책을 취하는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제한된 의미에서의 중립이지만 1861년에도 태평천국을 아직 양자강에서의 사실상의 정권으로써 인정하고 있었다.
영국은 교묘하게 중국 내전에 '중립'을 유지해 나갔지만, 1861년 중반 무렵 대부분의 영국외교관들은 태평천국이 거의 모든 관점에서 볼 때 파괴적일 뿐이라고 비난하고 있었다. 1861년 여름 주북경공사 부르스는 명백히 청조측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태평천국의 왜곡된 기독교리에 대한 외인들의 점증하는 혐오감과, 아편무역에 대한 태평천국의 단호한 금지는 명백한 것이었다. 10월에 부르스는 태평천국측에서 외국선박으로부터 무기, 탄약을 구입하지 못하도록 교역을 한구(漢口)와 구강(九江)으로 제한하고, 그 이외의 양자강에서 정박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공친왕의 요청을 상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락하였다. 영국의 정책은 태평천국에게 직접적인 무력간섭이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립'이었지만 청조에 대단히 우호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부르스나 영국본국 당국에게 중국 내전에 직접 개입한다는 명백한 의사는 없었다.
그러나 1861연 말 서구 열강이나 태평천국은, 표면상 애매하게 보였던 현상유지적 태도를 불식하였다. 영국측은 11월 함풍제 사후 쿠데타로 등장한 서태후와 공친왕 정군을 원조하여 청조 권력을 재생시키고 이를 통하여 기득권을 유지 확장시키려는 입장을 명백히 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조약체제를 기반으로 입지를 확보하려는 공친왕은 서양열강의 군대원조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영국공사 부르스는 이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영국이 청조를 선택하게 된 것은 중국진출에 방해가 될 만큼 태평천국이 청조보다 강력하거나 배외적이라고 여겼다기보다, 영국의 기득권을 유지 발전시키기에 적절한 체계적인 통치역량을 가졌는지 회의한 결과였으며 또한 청조가 승인한 아편무역을 태평천국이 철저히 금지하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외국의 간섭은 영, 불군의 직접 개입보다는 특히 청군에 대한 근대병기와 훈련의 제공, 중국인 용병부대에 외국인 지휘관의 참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후에 상승군이라 불린 군대는 강소지방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1860년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열강의 직접적인 군사개입, 군함 무기의 제공, 청조군 훈련교관과 향병지휘관의 파견 등의 원조를 제기하였던 것이다.
1862년 1월 태평군이 오송강으로 진출하였을 때 2월 해군부사령 호프가 영.불군, 어워드군의 지원으로 상해 북동쪽의 태평군을 기습함으로써 직접 개입이 시작되었다. 4월에 부르스는 상해 주변 100리 이내의 태평군을 소탕하라는 공식승인을 내렸다. 5월 중순에 영ㆍ불군과 어워드군이 상해 주변 100리 이내의 주요도시를 탈환하여 요새화하였다. 그러나 이후의 상해 보위는 상해회방국(上海會防局)이 영국회사에게 차용한 기선으로 안경에서 4월에 도착한 이홍장의 회군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윽고 이수성의 태평군은 다시 6월 초에 상해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였으나 상승군의 협조를 받은 회군에게 격퇴되었다. 회군은 8월말에 가정 이외의 상해 주위 100리 이내의 지역을 재탈환하였고, 10월에 영ㆍ불군과의 최후의 중외 협동작전으로 가정을 탈환하였다.
이 후에도 상승군은 회군과 협조하여 태평천국의 멸망을 앞당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상승군은 이제 상해방어의 범위를 넘어서 태평군공격에 회군과 협조하였다. 연발총과 대포 등 근대병기로 무장된 상승군은 1863년이래 회군과 함께 강소 동부와 절강 북부지역을 탈환하였다. 태평천국에 치명적이었던 소주함락 당시 태평군의 일부 군사지도자들이 투항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소성 동부에서의 회군의 승리는 천경을 방어하던 태평군 주력부대를 다시 분할시켰고 그 결과 중국전부대는 신속하게 천경을 함락해 버렸던 것이다.
7. 기독교
태평천국 이념이 중심개념은 신으로서 太平은 大同, 天國은 기독교의 천년 왕국을 의미한다. 중국적 '天' 은 다신교의 신성으로 God는 '帝' '上帝' '皇上帝' '天主' '上主'로 나타졌으며, 단지 지상의 지배자 일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상제는 유일신으로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이고 無所不能의 권능을 가지며, 모든 인류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홍수전은 중국의 전통적인 인격신 상제를 기독교의 다른 모든 우상을 엄하게 부정하는 유일신으로 생각함으로써 서양의 신 여호와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神, 神釜, 魂釜, 神釜火革라는 용어를 통해 '신은 인간 정신의 아버지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신이 모든 인간의 아버지이며 개인은 각자의 아버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성립시키려고 노력했다. 신에 대한 용어를 통해 볼 때 홍수전이 생각한 신은 일체의 우상을 부정하는 것은 제외하며 기독교의 신보다는 전통적인 上帝나 天에 가깝고 의지를 지닌 인격신, 특히 인간의 모습과 함께 천상의 부인과 아들이 있는 것은 민간교도의 지상신인 玉皇上帝에 가깝다. 악마, 악의 정신에 용어로 魔鬼, 鬼, 老蛇, 邪神, 妖, 妖鬼, 閻羅를 사용하는데 이는 모든 우상에 대한 단어이다. 太平天國에서 太平 또한 <권세양언>에서 빌려왔는데 天은 昇天, 上天처럼 성경에서 차용한 것이다.
태평사상에 대한 종교적 영향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기독교가 정치적 집결력으로 이용되어졌으며 형제애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의미하는 형제는 혈연관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람들'을 의미한다. 홍수전은 이를 바탕으로 '天은 아버지라 불리 우고 天下는 一家이며, 天下의 男子는 모두 형제(兄弟), 天下의 女子는 자매(姉妹)이다'라고 주장하면서 拜上帝會에서의 종교적 형제에 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형제님, 자매님 어디서 많이 들어본듯 하다.
태평천국은 그들의 신에 대한 생각을 기독교로부터 받아들였으나 그것은 다분히 전통사상적 기반 위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신이 인간처럼 육체와 아내를 지니며, 신의 성격이 근엄, 자애한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전통적이 중국인의 자세였다. 홍수전은 예수의 신성을 통해서 그들 스스로의 존재를 높임으로써 신격화시키고 인민들로부터 순종을 요구하였다. 또한 '예언'에 있어서도 중국의 符命과 일치한다. 물리적인 증거로 봉인, 칼, 天王大道君王全을 들 수 있다. 또한 홍수전은 성경을 번역하며, 예수는 스스로를 청하는 말씀에 '朕' 이라는 단어를, 하느님과 예수가 어느 말을 하던 간에, 조(詔), 지(旨), 성지(聖旨)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표현이다.
이처럼 홍수전은 전통적인 사고를 통해 그들의 종교를 소개하였고 성경에의 인용을 왜곡하였다. 이는 태평천국의 이념이 비단 신의 개념뿐만 아니라 그 교리에 있어서도 순수한 기독교를 벗어나 전통사상과의 결합을 통해 현실을 반영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洪秀全 및 太平天國 지도자들은 그들의 전통성과 중국경전의 지식을 가지고서 여호와 신앙과 중국의 전통적인 경천사상을 일치시킴으로써 기독교의 외래성을 중화하여 태평천국만의 독특한 이념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8. 유교
태평천국은 유교를 적대시하고 폄하하였으나 태평천국 이념 안에서 유교의 영향이 적지 않다. 태평천국이 공자와 고전에서 채택했던 가장 중요한 종교적 개념은 天, 上帝, 皇上帝의 개념이다. 이러한 용어들이 태평천국에서 기독교의 하느님을 의미하기는 하였지만 즉, 중국의 天을 섬기는 것은 외국에서 건너온 혁신적인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에게 고유한 고대로부터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 고전을 참고 인용하였다.
태평천국의 하나님은 고대에 보편적으로 숭배되었던 대상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正道에서 벗어나 악마에 의해 잘못 인도되었고, 반면 서방국가들은 올바른 숭배의 방식을 따랐다고 했다. 이는 기독교 숭배의 대상과 군주가 제물을 바치는 대상이나 고대 현자들이 숭배의 대상을 동일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유교 서적에 태평천국이 기독교 신의 속성으로 치부했던 많은 특성들이 천의 전통 개념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들 중 하나는 天 과 地의 부자관계이다. 書經에서는 '하늘과 땅은 만물의 부모이다'와 같은 구절이 있다. 이러한 사상은 언제나 공자의 사상에 존재해 왔다. 洪仁은 각 국 사람들의 영혼과 영적인 성격은 天上의 아버지에게서 났다는 기독교적 신앙과 맹자와 고전에서 찾아줄 수 있는 같은 사상적 의미를 비교하며 고전에서의 언급을 인용하였다. 태평천국 지도자들은 그 추종자들로부터 완전한 복종을 얻어내기 위해 천이 통지자임을 강조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天이 天上의 통치부를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많은 구절을 고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친절하고 동정심은 많되 질투심도 있는 인간적인 신이라고 여겼다. 이는 고대 중국인들 마음속의 천과 동일한 감정이었다. 또한 그들은 天에다 종교적인 제사를 지냈는데 이러한 제사 사상은 외국보다 중국 내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유교의 영향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태평천국의 도덕관념 안에서이다. 梁阿發의 《勸世良言》과 楊秀淸의〈天父下凡詔書〉에서는 인간은 본디 선하다고 보는 데 이는 곧 태평천국의 사상이기도 하다. 논어에서 공자는 인간의 성품이 본래 선하다고 언급하였고 이러한 본래의 마음은 사람들이 세속적 목적을 위해 이상을 버릴 때 상실된다고 했다. 본성과 인간성품이 원래 선하다는 사상은 태평천국이 기독교의 원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죄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지도 않았다는 이유가 된다.
태평천국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고귀함을 유지하는 방법을 正과 不正의 개념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正이란 단어는 태평천국이 정의로움과 절대적 공명정대의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중국고전에서도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禮記》에서 正은 자신을 바로 세우는 행위는 내면으로 옮아가 지적 의미보다는 마음을 결정짓는 윤리적 의미로 이용되었다. 홍수전은 《百正歌》에서 正人은 진심을 가진 진정한 도덕감이나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 규정하고 이 양심이 짐승과 인간을 구분해주는 기준이며 인간본연의 성질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正의 윤리적 측면은 정치적 측면에도 적용되어졌다.
태평천국 이념에서의 오륜에 관계된 도덕적 특성은 그 형태를 조금씩 달리하여 나타나고 있다. 먼저 부자유친의 경우 幼學詩에서 아버지의 관계에서는 엄의 측면을 어머니에 대한 숨은 사랑을 강조하였다. 아버지의 엄격함과 어머니의 사랑은 분명히 중국인들의 대중적 특성이다. 이러한 엄격함에도 자식들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아버지의 태도에 대한 태평천국의 사상과 전통적 사상과는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태평천국은 모든 인간은 천부의 자식이라는 그들의 이론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그의 현재의 부모에게서 육체를 얻었다고 인식하였다. 이는 효경에서 보여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둘째 군신유의에 대한 태평천국의 사상은 《孟子》에 표현된 正義의 사상과 가깝다. 여기에 예기에서 표현된 군주의 자애로움은 고려되지 않으나 통치자에게 충성해야할 신하의 의무는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들은 효보다 충을 우선 시하여 부모와 군주에 대한 충성이 상충될 때는 당연히 후자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일 정하지 못한 일을 하고 충이 결여될 때 이는 악마행위로 간주되어졌고 재난이 닥쳐올 것으로 생각했다. 반대로 정한 일을 하고 충성스럽게 행동할 때 그들에게는 축복이 오는 것이 하늘의 도라고 여겼다.
셋째 부부사이는 '남편은 공정하고 아내는 순종해야 한다'는 禮記의 사상을 따라 ' 남편의 처세는 강건함에 그 바탕을 두고 있고,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은 적절한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내의 처세는 三從에 놓여있었고 남편을 거역할 수 없었다. 孟子에 나타난 '부부유별' 사상은 태평천국 내에서 단지 일반적인 남녀관계에 적용되어졌다. 禮記예 다르면 남녀유별은 부부관계를 완성시키기 위한 한 단계이다. 태평천국은 예기의 대중적 관념에서 이를 수긍하였다. 이는 차별적 개념을 포함하는 것으로 태평천국이념의 보편적 형제애 관념에 어긋난다. 태평천국 이념의 원리상으로는 만민이 천부의 자녀로서 남녀도 평등해야 한다. 실제로 여성의 전족, 매음 금지, 여성의 노동․군사 참여, 여성관료 등장, 토지의 남녀 균등분배들 진보적인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여성 노동력의 필요성과 보편적 형제애 관념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향상에 큰 역할을 했음은 틀림없지만 三從之道와 같은 유교적 男尊女卑의 유습이 여전히 답습되고 있었기에 실제적인 남녀평등과는 거리가 있었다.
넷째 장유유서에 대해서 孟子와 禮記에 모두 그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孟子에는 형제 관계에 대한 언급이 없고 禮記에는 친구관계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는 형제관계나 친구 관계에는 지위나 세력의 상하관계가 없이 나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은 孟子가 연장자, 연소자의 관계에 부여한 '차례'와 禮記에서 나타난 '형의 친정과 아우의 복종'을 함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형제간의 조화를 예로 들기 위해 고전에서까지 그 예를 찾고 있으며, 동시에 태평천국의 조직체에 가담했던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기 위해 형제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태평천국은 친구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모든 남자들은 형제들이고 여자들은 자매들이고 같은 천부의 자식들로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형제가 되기를 맹세한 경우에서처럼 우정은 형제애로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은 전통적인 믿음이었다. 그리고 한편 형제애는 종종 우정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우애'라는 구절에서 명백하다. 우애는 문자그대로 ' 우정어린 사랑'을 의미하지만 ' 형제의 사랑'을 의미한다.
이밖에 겸손, 인내 등의 사적 덕행들과 부에 대한 생각 또한 전통적인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태평천국은 또한 운명론을 믿었다. 중요한 일은 모두 예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하늘의 뜻을 따를 것을 강조했다. 홍인간은' 인간의 삶은 하늘의 손에 달려있다. 하늘이 인간에게 살라고 명령하면, 인간은 살 수 밖에 없다. 하늘이 죽으라고 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사의 문제가 운명의 문제이며, 부와 명예는 하늘의 손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안다.'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자신의 천운을 즐기고 자신의 운명을 안다는 태평천국의 운명론은 철저히 유교적인 것이다. 논어에서 '생사는 운명의 문제이고 부․명예는 하늘손에 달린 문제이다'고 한 것이나 《孟子》에서 '모든 것이 운명의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정해진 것을 순종하며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의 것이다.
무엇보다도 태평이 유교에 대해서 반대한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공자의 가르침이 어디가 거짓이고 왜 그런 가를 지적하기 위한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태평천국에서 유교에 대한 공격은 주로 유교경전에 관한 것일 따름이었다.
9. 불교
홍수전은 사교적 불교, 도교를 격렬히 비난하고 그 행위를 우상숭배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태평천국이념내에 邪敎 즉, 불교과 도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태평천국 이념에서 매우 중요한 천당, 지옥에 관련한 개념이 그것이다.
태평천국은 천당과 지옥을 '33天'과 '18층 지옥'으로 나타냈다. 이는 불교에서 정의하는 天과 地獄의 형태와 유사하다.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이 세계는 크게 '깨달음의 세계(悟界)'와 '헤매임의 세계(迷界)'로 나누며, 이것을 다시 나누어 十界로 체계화하고 있다. 十界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人, 天, 聲聞, 緣覺, 菩薩, 佛들이다. 이 가운데서 지옥, 이귀, 축생, 아수라, 천, 인의 여섯 세계는 미혹한 凡夫가 스스로 지은 행의 즉, 業에 따라 생사를 거듭하며 끝없이 연회하는 '헤매임의 세계(六道)'라 한다. 이 六道중의 하나인 天은 俗界6天과 그 위에 있는 色界 17천, 또 그 위에 있는 無色界4천으로 나뉜다. 태평천국의 33천은 俗界六天중의 하나인 33천을 의미한다.
이는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과 상당히 닮은 면을 보이면서 태평천국의 도덕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대부분 하층민 출신인 태평지도자들과 태평천국의 인민들은 공히 그들이 빠져 있었던 유교, 불교, 도교적 관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그러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순수하게 수용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나아가서는 그러한 기존의 관념들은 서구 기독교의 교의를 유교, 불교, 도교적 관념으로 해석, 당시 중국 사회와 민중생활에 맞게끔 분석한 면이 있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태평천국에서 기독교적 교의와 유, 불, 선의 관념의 혼용은 태평천국의 기독교적 이념을 중국화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은 태평천국이념이 형성된 이후, 태평천국 내에서 서로 혼합되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중국 봉건사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유, 불, 도 삼교는 이미 혼합되어 중국인들의 생활 속에 스며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태평천국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그들 속에 스며든 도덕관념에 대해서는 그 근원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위에 기독교의 평등과 박애사상, 형제애 사상이 혼합되어 태평천국 고유의 이념으로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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