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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서반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반도 면적의 약 40%를 차지하는 노르웨이는 스웨덴, 핀란드,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며 38만 6958km2의 국토를 가지고 있다. 이 넓이는 북극에 인접한 스발바르(Sbalvard) 제도와 얀 마엔 섬을 합한 면적이다. 해안선은 2만 1340km에 이르고 국토의 절반이 북극권 북쪽에 있다. 그러나 멕시코 만류와 서풍의 영향으로 기후는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 유사하며, 연평균 기온이 3~6℃ 정도이다. 노르웨이의 총인구는 434만 8410명(1995년 기준)으로, 1km2당 약 13명이 거주하는 정도이며, 이러한 인구 밀도는 유럽에서 이이슬란드 다음으로 낮은 수준이다. 2. 지형 노르웨이의 산지는 평균 해발 500m 정도로 그다지 높지 않은 고원상이다. 그리고 2000m 이상의 고원상의 산정은 만년설과 얼음으로 덮여 있으며, 평탄한 고원 빙하의 끝에서 골짜기 사이를 향하여 가파른 곡빙하(谷氷河)가 늘어져 있는 곳도 볼 수 있다. 신생대 제4기의 빙하기에 스칸디나비아를 뒤덮었던 빙상은, 산지는 물론 평지에도 빙식의 흔적을 남겼는데 노르웨이에서는 좁고 긴 피오르드와 그에 이어지는 깊은 U자곡을 형성하였다. 특히 서부에서는 높이 수백 미터에 달하는 양 기슭의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이 폭포로 되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노르웨이는 본토의 약 26%가 삼림이며, 전나무와 소나무가 가장 많다. 식생(植生)은 남동부에서 가장 풍부한데, 800~1000m 이상의 산지에서는 침엽수를 좀처럼 볼 수 없다. 강과 호수는 국토 면적의 약 5%이고, 사용중인 농경지는 3%에 지나지 않는다. 노르웨이 북부는 여름에는 태양이 지지 않는 백야가 계속되고, 겨울에는 한낮에 잠깐 동안의 미광 외에는 태양이 나타나지 않고, 하늘에는 오로라가 생긴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높은 산은 골드회피겐(Goldh쌤piggen)이며, 해발 2469m이다. 가장 긴 피오르드는 송네 피오르드(Sognefjorden)이며 183km에 달한다. 또 노르웨이의 풍부한 수력 발전을 가능케 하는 폭포 중 가장 높은 것은 마달스포스(Mardalsfoss)이며 297m이다. 가장 큰 호수는 뫼사(Mj앗a)로 368km2이고, 가장 긴 강은 글롬마(Glomma)로 598km이다. 3. 지역별 특징 노르웨이의 수도는 오슬로(Oslo)이며, 48만 3401명(1995년 기준)의 인구가 산다. 오슬로는 1048년 바이킹 왕 하랄(Harald)이 건설하였고 13세기에 수도로 정해져서 한자 동맹(Hansaneatic League)의 항구로서 번영하였다. 녹지가 많고 피오르드가 들어와 있어 경치가 아름답다. 트론헤임(Tronheim)은 노르웨이 제2의 도시로, 12세기에는 노르웨이 정신(精神)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1681년 큰 화재로 도시의 대부분이 타 버렸으나, 재건되어 아름다운 건축물이 거리에 즐비하다. 노르웨이 제3의 도시인 베르겐(Bergen)은 인구 약 21만 명의 도시이다. 12~13세기에는 노르웨이의 수도였으며 중세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최대의 항구였으며 무역의 중심지였다. 스타방게르(Stavanger)는 노르웨이 제4의 도시로 상업, 조선, 그 밖의 공업이 성하다. II. 역사 1. 선사 시대 노르웨이 최초의 주민은 B.C. 1만 년께 남쪽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인데, 이들은 해안가를 중심으로 거주하며 석기를 사용하였다. 그후 B.C. 15세기~B.C. 3세기 동안에는 스웨덴과 덴마크의 영향을 받았으며, B.C. 1세기부터 로마 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8세기께까지는 여러 부족 공동체로 나뉘어 있었다. 2. 바이킹 시대 9세기 바이킹 시대에 노르웨이의 소규모 왕국들이 하랄 1세에 의해 통일되었고 한때 분열되기도 하였으나, 기독교의 포교에 힘썼던 올라프 2세(Olav II)에 의해 11세기 초 재통일되었다. 노르웨이 왕국의 출범은 10세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3. 중세 중세기 초기에 노르웨이의 바이킹들은 영국, 프랑스, 아일랜드 및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등지에 정착하였고, 고대 노르웨이계의 항해자들은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보다 500년 앞서 아메리카의 항로를 발견하였다. 11세기에 기독교의 전래는 민족의 통합을 강화하였다. 1018~1035년까지는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으나 망누스 1세(Magnus I:재위 1217~1263)에 의해 국권을 회복하였고, 망누스 1세가 죽은 후 다시 분열과 내란 상태가 계속되었으나 스베레(Sverre) 왕이 장남 상속제를 확립한 후 손자인 호콘손 왕(H onsson:재위 1217~1263) 시대에 최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망누스 개법왕(改法王:1263~1280)은 전국적인 법전을 작성하였으며, 이 무렵부터 곡물 공급을 장악하는 독일 상인의 진출이 두드러져 스웨덴·덴마크 왕국과의 관계가 중요시되었다. 13세기 중엽부터 노르웨이는 선박업의 도움으로 북서 유럽에서 강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인구의 3분의 1밖에 살아 남지 못한 흑사병으로 인해 국력이 약화되었고, 결과적으로 오랫동안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1380~1814년까지 덴마크에 합병된 노르웨이는 나폴레옹 전쟁 후에 강대국들 사이에서 합의된 해결책의 일환으로 1814년에 스웨덴에 합병되었다. 노르웨이는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된 헌법을 제정했으나 짧은 기간의 적대 상황이 지난 뒤 스웨덴과 사적인 연합을 갖게 되었고, 노르웨이 국민은 자치 정부에 대한 권리를 보유하였다. 4. 근대 국민 투표에 의한 지방 정부가 1837년에 나타났고, 정부의 의회 제도가 1884년에 시작되었다. 1905년에 스웨덴과의 연합이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제되어 다시 독립 국가가 되었고, 덴마크의 칼(Karl) 왕자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호콘 7세(H on VII)라고 불리었다. 1차 세계 대전 때 중립을 지킨 노르웨이는 2차 세계 대전 당시인 전후 기간에는 경제 성장과 사회 보장법의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졌 다. III. 정치 1. 개관 노르웨이는 의회 제도를 갖춘 입헌 군주국이며 내각 책임제 국가이다. 행정권은 형식상 왕에게 주어지나 실제로는 국회 대다수의 신임을 받고 있는 내각을 통해서 행사된다. 노르웨이 헌법은 1814년에 제정된 아이츠볼(Eidsvold) 헌법을 몇 번에 걸쳐 수정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노르웨이에서 국왕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는 스웨덴과의 연합이 해체된 후 국민 투표로 1905년에 왕이 된 호콘 7세(1872~1957)와 그의 아들 올라프 5세(1903~1991)의 업적에 기인한다. 왕에 대한 국민들의 감사와 애정의 표현은 올라프 5세가 죽었을 때 특히 강하게 표현되었다. 현 국왕인 하랄 5세는 왕실의 전통을 이어 가고 있으며, 그의 선친과 조부의 방식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고 있다. 그의 부인인 현 노르웨이 왕비는 소냐(Sonja)이고, 호콘(Haakon) 왕자와 메르카 루이즈(M ka Louise) 공주가 있다. 2. 정부 내각 책임제 국가인 노르웨이의 실질적인 행정권은 내각에 집중되어 있다. 정부의 조직은 내각의 최고 책임자인 수상을 비롯하여 15개 부서로 편성되어 있다. 노르웨이 정부의 부서로는 외무부, 재무부, 수산부, 아동 가족부, 국방부, 사법부, 교회 교육 조사부, 지방 정부 노동부, 문화부, 농산부, 환경부, 산업 동력부, 교통 통신부, 사회 보건부, 내무부가 있으며, 현 수상은 그로 할렘 브룬트룬드(Gro Harlem Brundtlund)이다. 3. 의회 노르웨이의 의회는 스투르팅(Storting)이라고 불리며, 165명의 의원 가운데 4분의 1이 상원에 해당하는 러그팅(Lagting)을, 나머지 의원들이 하원에 해당하는 오델스팅(Odelsting)을 이룬다. 의원의 임기는 4년이며 비례 대표제에 의해 선출된다. 4. 정당 현황 노르웨이에는 14개의 정당(1993년 기준)이 있으며, 현 의회의 의석은 노르웨이 노동당이 40.6%로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고, 그 뒤를 보수당(16.9%), 기독교 민주당(7.9%), 중앙당(19.4%), 사회주의 좌익당(7.9%), 진보당(6.1%), 자유당(0.6%) 등이 잇고 있다. 5. 지방 자치 노르웨이는 19개의 필케(주)와 435개의 코뮤네(Kommun:군)로 나뉘어 있다. 필케와 코뮤네 단계에서 지방 자치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지방 정부는 국민 투표 중간에 4년마다 실시하는 선거로 구성된다. 주지사를 내각이 임명한다는 점에서 주 의회의 권한은 제한되어 있으며, 군의회가 중요성을 가진다. 군의회는 인구수에 비례하여 4년 임기의 의원 13~85명으로 구성되며, 군의회에서는 집행부격인 행정 위원회의 위원 및 시장을 선출한다. 6. 외교 역사적으로 북유럽 제국의 분쟁에 시달려 온 노르웨이는 중립 유지에 힘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중에는 5년 동안 독일군의 점령하에 놓였으며, 그 동안 정부는 런던에 망명하고 국내에서는 레지스탕스들의 활동이 지속되었다. 노르웨이는 2차 세계 대전 말엽에 UN(국제 연합)을 결성하는 데 협력하였으며, 전후(戰後) 소련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면서도 서방 진영에 서는 입장을 명확히 하여 1949년에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하였다. 또한 노르웨이는 UN의 모든 산하 기구에 참여하고 있으며, OECD(경제 협력 개발 기구)에는 1949년에 가입하였다. 노르웨이의 전략적 위치와 북구 보호 정책의 중요성은 북해에서 오일과 가스가 상당량 발견됨으로써 더욱 중요시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노르웨이는 대외 정책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노르웨이는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다른 북구 국가들과 이해 관계를 같이하며 협력해 왔다. 북구 국가들 사이에는 여권이 없이도 몇 년 동안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으며, 그들은 공동의 노동 시장을 가지고 있어 북구의 나라들을 다니면서 직장을 구할 수도 있다. 또한 사회 복지 분야에서도 공통의 이해와 협력 관계를 견지해 왔다. 노르웨이는 1960년에 EFTA(유럽 자유 무역 협정)의 회원국이 되었으며, 1994년에는 EFTA국가들과 EU(유럽 연합)가 공동 창설한 EEA(유럽 경제 지구)의 회원국이 되었다. 또한 1972년에 EC(유럽 공동체) 가입에 반대하였던 국민들은 1994년의 국민 투표에서 EU가입에도 반대하였다. 7. 우리 나라와의 관계 노르웨이는 한국 전쟁 당시 병원선을 파견하여 의료 지원을 하였고, 수교 이전인 1956년 3월 양국간의 협정에 의해 서울에 메디컬 센터를 설치, 운영하다가 우리 나라에 이양하였다. 1959년 3월 우리 나라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1973년에는 북한과도 수교하였다. 우리 나라는 1972년 12월 노르웨이에 상주 공관을 설치하였고, 노르웨이는 1980년 주한 상주 대사관을 개설하였다. 우리 나라의 노르웨이에 대한 수출품의 주종은 선박이며, 노르웨이는 선박의 설계, 안전 설비, 고도 정밀 부품 생산 등 첨단 선박 건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조선 관계 기술 협력이 활발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는 119명의 선수단을 파견하였다. IV. 경제 1. 역사적 배경 국토의 한쪽 면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바다에 접해 있는 노르웨이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13세기 중엽 선박업의 발달로 북서 유럽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으며, 현재도 세계 4위의 선박업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국토의 26%가 삼림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목재 가공 산업도 일찍이 발달할 수 있었는데 목재는 16~20세기 초까지 노르웨이의 주요 수출품이었으나 점차 이익이 많은 펄프나 종이로 바뀌었다. 그리고 풍부한 해양 자원으로 수산업이 발달하였는데 특히 세계 4대 어장의 하나로 꼽히는 북해를 끼고 청어·대구를 중심으로 조업해 왔다. 1957년 이후 어획고가 감소되었으나 어획 방법의 근대화와 어선의 대형화로 이를 극복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주변 국가들에게 끊임없이 점령당해 왔던 노르웨이는 1945년 나치 독일로부터의 독립 이후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19세기 노르웨이의 경제는 주로 농·임·어업에 의존하다가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공업이 최대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2. 최근의 산업 경향 노르웨이의 경제는 지난 10년 동안 전통 산업과 제조 산업의 쇠퇴와 서비스 분야의 증가, 오일 관련 산업의 증가, 엔지니어링·정보 처리 기술과 같은 선진 산업이 증가하는 중요한 구조적 변화를 겪어 왔다. 3. 주요 산업 분야와 기업들 주요 산업의 하나인 수력은 노르웨이 경제가 세계 시장에서 경쟁적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하는 밑받침이 된다. 또한 수력은 그 자체로도 중요한 산업 분야인데 1992년에는 노르웨이 GDP(국내 총생산)의 약 3.6%를 차지하였다. 서비스업이 노르웨이 GDP의 약 34.8%를 차지한다. 그리고 선박업은 전통적으로 우수한 수준이었으며, 1987년 노르웨이 국제 선박 등록 협회(NIS)의 창설 후 노르웨이 상선은 세계 네 번째의 규모를 자랑해 왔다. 노르웨이 선주들은 세계 선박의 약 10%를 통제하며, 이는 4800만 톤 규모이다(1993년 기준). 또한 노르웨이는 세계 원양 선박의 20%를 보유하고 있다. 농업은 GDP에서 적은 비율을 차지하며 또한 농촌 실업 억제를 위한 정부 보조금으로 유지되고 있다. 노르웨이의 농경 정책은 축산물의 자급 자족에 최우선의 목표를 두고 있으나, 농산물의 상당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농산물의 가격은 정부와 농협 사이의 연례 협정에 의해 조정된다. 소규모 자영 농장이나 큰 규모의 구매 협동 조합은 노르웨이의 농경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모습들이다. 노르웨이의 수산업은 유럽 최대의 규모이다. 최근의 수산업은 급속도로 팽창하는 양식업에 의해 확대되어 왔다. 주로 연안 어업으로 이루어지며 전체 어획량 가운데 약 50~60%는 어분이나 기름을 만드는 데 쓰여지는 청어이며, 대구류도 있다. 생선의 직접 판매는 수산업 협동 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노르웨이의 오일과 가스 산업은 GDP의 약 16%를 차지한다. 1994년에 노르웨이는 오일과 가스의 수출로 약 1억 1400만 크로네(Krone)를 벌었다. 노르웨이가 다른 오일 지대를 개발하지 못한다면 21세기에는 오일 생산이 서서히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지만, 가스층의 경우는 현 생산 수준으로 100년 이상 지속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노르웨이에는 다음과 같은 기업들이 있다. ABB:노르웨이 최대 기업의 하나로서 오일, 가스, 석유 화학, 환경 기술, 전력 공급과 케이블, 수송, 기계 설비, 금융 등을 취급한다. Hydro:1905년 창설된 에너지 기초 산업 그룹으로 주요 생산 분야로는 천연 비료, 오일과 가스, 알루미늄, 마그네슘, 석유 화학 등이 있다. Elkj앓:북구 최대의 소비자 전자 공학 및 가정용 전기 설비 회사이 다. Tandberg Data:노르웨이 최대의 정보 처리 기술 기업으로서 데이터 보관, 디스플레이, LCD 등을 취급한다. Protector:해상, 에너지, 산업, 경영 보험 등을 취급하는 보험 회사이다. 4. 경제 수준 경제 정책 노르웨이 경제 정책의 최고의 목표는 완전 고용이다. 실업은 1945~ 1980년대 중반까지는 낮은 수준이었으나, 경기 침체와 산업의 구조적 변화로 인해 1987년부터 상승하기 시작하여 1993년에는 6%로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러나 1994년에는 5.4%로 하락하였고, 앞으로 더욱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노르웨이의 1993년 GDP는 약 1조 1240억 달러였으며, 1994년의 GDP는 5.1% 상승했다. 1993년의 1인당 국민 소득은 약 2만 7200달러였다. 금융 제도 노르웨이의 통화 화폐는 NOK(Norwegian Krone)와 외레( e)이며, 100외레는 1크로네(NOK)이다. 1크로네는 약 0.16달러이며, 우리 나라 돈으로는 약 130원이다. 노르웨이를 방문하는 외국 관광객들은 2만 5000크로네까지의 돈을 소지할 수 있다. 물가 수준 노르웨이의 소비자 물가는 다른 북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꽤 높은 편에 속한다. 1994년 노르웨이의 인플레는 1.4%로 1960년대 이래 최저치를 기록하였다. 대외 무역 현재 해외 무역은 노르웨이 GDP의 약 45%를 차지하고 있다. 수출은 유럽 국가들로 82%, 북미로 10%, 아시아로 5%가 이루어졌고, 수입은 유럽 국가들로부터 72%, 아시아로부터 14%, 북미로부터 11%가 이루어졌다. 국가별로 본다면 영국으로의 수출액이 전체 수출액의 25%로 가장 많았고, 스웨덴과 독일로부터의 수입이 각 14%로 가장 많았다. V. 문화와 생활상 1. 인종 및 언어 노르웨이인을 구성하는 주체는 장신(長身), 장두(長頭), 금발, 벽안의 게르만계인이며, 북부에는 토착 언어를 사용하는 약 3만 명의 싸미(Sami:랩족과 동일)라 불리는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과거에 순록 방목을 하던 유목 민족으로 오랫동안 법적으로 차별을 받아 오다가 순록 사육의 독점권을 부여받았으나, 지금은 그 대다수가 농업 또는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또한 이들 문화의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공공 단체도 설립되었다. 노르웨이어는 북게르만어에 속하며, 현재 2개의 공용어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북몰(Bokm ), 혹은 릭스몰(Riksm )로 불리는 언어로 대도시 및 상류층의 일상어이며, 다른 하나는 뉘노시크(Nynorsk), 혹은 란스몰(Landsm )로 불리는 언어로 고(古)노르웨이어와 각 지방의 방언을 정리하여 만든 언어이다. 현재 이 두 언어는 교과서 등에 두 공용어로 쓰이고 있으나, 두 언어를 통합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2. 종교 종교는 복음 루터파를 국교로 하고 있으며 국민의 96%가 이에 속한다. 그 밖에 소수 종교로서는 유태교, 복음 루터파 자유 교회, 감리파가 있으며 신앙의 자유는 완전히 보장되어 있다. 기독교는 10세기께 주로 해외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왕족들에 의해 전래, 포교되었으며 유럽 국가들 가운데서 가장 늦게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3. 각 지역의 문화적 차이 노르웨이는 산이 많고 국토가 남북으로 길어 각지가 고립되기 쉬운 지형이기 때문에 지역주의의 전통이 뿌리깊게 박혀 있으며, 문화·스포츠·사회 등 여러 가지 활동이 지역 내 민간의 여러 조직을 통해서 실시된다. 특히 스키·스케이트·축구로 대표되는 활동이 활발하다. 4. 인물 후기 민족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인형의 집』의 작가인 입센(H. Ibsen), 북구의 로댕으로 불리며 오슬로의 프롱너 공원에 그의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현대 조각가 비겔란(G. Vigeland), 표현파의 시조이며 19세기 후반 이래 세계적 명성을 얻은 화가인 뭉크(E. Munch), 본격적인 국민 음악을 수립하였으며 모음곡 `페르킨트(Peer Gynt)'로 유명한 음악가인 그리그(Evard Hagerup Grieg), 탐험가 아문센(R. Amundsen) 등이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5. 언론 매체 노르웨이에서 평균 1만 2000부 이상이 발행되는 신문은 48가지(1993년 기준)이며, 이 가운데 20만 부 이상이 발행되는 신문은 『베르텐스 강 Verdens Gang』, 『아프텐스포스텐 모론 Aftensposten mrg』, 『다그블라렛 Dagbladet』의 세 일간지뿐이다. 8만 부 이상이 발행되는 잡지는 10가지(1993년 기준)이며, 이 중 『세 옥 허르 Se og h압』와 『예멧 Hjemmet』, 『노스크 우케블라르 Norsk Ukeblad』의 발행 부수가 가장 많다. 방송은 국영 방송국이 1국, 라디오 제1·2방송(FM), 지방 프로그램 방송 및 텔레비전 제2방송을 맡아서 운영하고 있다. 6. 생활상 인구의 약 70%가 도시 지역에 거주하며 인구 증가율은 해마다 감소하는 추세이다. 60세 이상의 노인 비율은 최근 100년 동안에 두 배로 늘어나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노르웨이인들은 다른 북구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결혼 전에 동거를 많이 선호하고 있으며, 성 생활에 있어서는 상당히 개방적인 편이다. 이는 프로그너 공원에 있는 비겔란의 작품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옥외의 생활에 대해 매우 열광적이다. 예를 들어 여름철에는 국토 횡단 여행, 낚시, 수영, 캠핑, 보트 놀이를 즐기며, 겨울철에는 스키나 스케이팅 등을 즐긴다. 스키는 노르웨이의 국가적인 스포츠라 할 수 있으며, 오슬로 교외 홀멘콜렌의 세계 스키 점프 대회는 국민적 행사의 하나가 되고 있다. 숲에서나 산 속에서나 즐길 수 있는 크로스컨트리 스키는 특히 인기가 있으며, 또한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축구도 무척 인기가 있다. 또한 탐험을 좋아하는 국민성으로 인해 난센(F. Nansen), R. 아문센 등 탐험가를 많이 배출하였다. 별장의 나라라 말할 수 있을 만큼 노르웨이인들은 산장이나 해변가에 별장을 갖고서 주말이나 휴가를 별장에서 보낸다. 모든 고용인들은 4주일 동안 유급 휴가를 가질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노르웨이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가장 높은 국가들 가운데 하나이다. 단적인 예로 정부의 여성 관료를 보면 1980년대 중반 이래로 40% 이상이 여성이었으며, 이 비율은 국회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노르웨이 최대 정당인 노동당의 경우도 여성들이 이끌어 가고 있다. 1993년에는 노르웨이에서 최초로 여성이 주교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7. 명절과 공휴일 노르웨이는 다른 기독교 국가와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Jul)와 부활절(Paaske)이 국민들의 가장 큰 명절 또는 연중 행사가 되고 있으며, 또한 중요한 연중 행사가 되고 있는 상크트한스(Sankt Hans)제는 전통 신앙 시대의 하지제에서 유래된 것으로 짧은 여름 기간에 태양을 동경하는 북유럽인의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5월 17일은 독립 기념일로서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8. 노벨 평화상 수여 스웨덴의 알프레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에 의해 창설된 노벨상 중 노벨 평화상은 매년 10월 10일에 오슬로에서 수여된다. 최초의 수상자는 적십자를 창설한 스위스의 앙리 뒤낭(Henri Dunant)이었으며, 마틴 루터 킹 목사, 미하일 고르바초프, 넬슨 만델라, 아라파트 PLO의장, 라빈 이스라엘 총리 등이 수상한 바 있다. 9. 사회 보장 제도 1967년 도입된 국가 보험 제도는 집단 의무 보험이며 모든 노르웨이인에게 베풀어지는 연금 제도이다. 그 목적은 모든 사람들이 일하며 살고 있는 동안 모아 놓은 것을 보장해 주기 위한 데에 있다. 국가 보험은 피보험자와 고용주의 기금으로 조성되기도 하며, 주 정부의 예산으로부터 충당되기도 한다. 의료 보험은 의료 기관에서의 치료를 보상해 주며, 만성 질환에 필요한 약품과 의사에게 지불되는 모든 비용을 보상해 준다. 질병에 대한 보상은 투병중에 지불되며 만성적이거나 장기간 치료해야 할 질병은 불구자 수당에서 수입에 대한 손실을 보상해 준다. 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는 67세부터이다. 평균치의 수입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규정된 일정 기간 동안 연금 보험 계약을 마치고 나면 받을 수 있게 되는 총연금은 수입이 가장 높았던 기간에 벌었던 액수의 3분의 2 정도가 된다. 10. 유명 관광지 노르웨이에서는 피오르드와 폭포가 관광 명소로 잘 알려져 있다. 다음은 노르웨이가 추천하는 관광 명소 열 곳이다. 프롱네르 공원(Progner Park):오슬로에 있으며, 비겔란드의 조각품으로 유명하다. 홀멘콜바켄(Holmenkollbaken):오슬로 바로 위에 위치하며 스키 점프 장소로 유명하다. 로테포센(L efossen):오슬로 서부 맞은편 해안 가까이에 위치하며 폭포로 유명하다. 뵈링스포센(V압ingsfossen):로테포센 위쪽에 위치하며 역시 폭포로 유명하다. 플롬스바넨(Fl sbanen):뵈링스포센 위쪽에 위치하며 철도로 유명하다. 내뢰이표르덴(N싻 fjorden):플롬스바넨 위쪽에 위치하며 피오르드로 유명하다. 요스테달스브렌(Jostedalsbreen):내뢰이표르덴 위쪽에 위치하며 빙하로 유명하다. 게이랑거표르덴(Geirangerfjorden):요스테달스브렌 위쪽에 위치하며 피오르드로 유명하다. 뢰로스(R압os):노르웨이 중부에 위치하며, UNESCO(국제 연합 교육 과학 문화 기구)의 세계 전통 일람표에도 나와 있는 독특한 전통 산간 지방이다. 노드캅(Nordkapp):노르웨이 북부에 위치하며 백야로 유명하다. 이 외에 1994년 동계 올림픽이 개최된 릴레함메르(Lillehammer)도 추천할 만한 관광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