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에게는 5명의 정식 왕후와 24명의 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첫번째 왕후는 태자가 없어서 왕위 계승 후보에서 탈락했습니다.
가장 충돌이 많은 부인은 제2왕후 장화왕후 오씨와 제3왕후 신명순성왕후 유씨 그리고 제 16부인 소광주원부인 왕씨 였습니다.
제 2왕후 장화왕후 오씨에게는 태자 무(제 2왕 혜종)이 있었는데요. 태자 무는 태조의 장자입니다. 그리서 유력한 후보였지만 장화왕후는 제 3왕후 유씨와 달리 유력한 호족의 집안이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태조는 어려운 갈등을 하게 되죠 제 3왕후 유씨는 막강한 실력자였던 충주 유씨 가문이였기 때문에 결코 호족들이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윤(태자)책봉 문제가 심각해질때 제 3왕후 유씨의 왕자인 태자 태가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맙니다. 제 3왕후 유씨에게는 세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때 당시는 태자 요(제 3왕 정종)와 태자 소(제 4왕 광종)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라 대세는 태자 무로 기울어져 결국 태자 무가 임금이 되었습니다.
임금이 된 후에도 혜종은 어머니의 미천한 출신때문에 호족들의 마음을 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때 기회를 보던 사람이 태자 요. 태자 소. 그리고 제 16부인의 아들 광주원군이였습니다. 광주원군은 그때 태자 요, 소와 달리 어린 나이여서 직접적인 도전은 없었지만 그의 외조부 왕규가 틈틈히 기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왕규의 난'이라고 아시죠? 그 난이 이 당시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박술희에 의해 왕규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 때 혜종은 큰 병을 얻고 맙니다. 혜종에게는 아들이 있었지만 어려서 이복동생인 태자 요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줍니가. 그가 제3왕 정종입니다. 정종 역시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 그의 동생인 태자 소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그는 제4왕 광종입니다.
자세하게 알기
왕 건의 부인은,
신혜왕후 유씨;-부, 정주 유천궁.
장화왕후 오씨;-부, 나주 다린군.
신명왕후 유씨;-부, 충주 유긍달.
신정왕후 황보씨;-부, 황주 황보제공.
신성왕후 김씨;-부, 경주 김억렴.
정덕왕후 유씨;-부, 정주 유덕영.
헌목대부인 평씨;-부, 경주 평 준.
정목부인 왕씨;-부, 명주 왕 경.
동양원부인 유씨;-부, 평주 유금필.
숙목부인 명씨;-부, 진주 명 필.
천안부원부인 임씨;-부, 경주 임 언.
홍복원부인 홍씨;-부, 홍주 홍 규.
후대량원부인 이씨;-부, 합주 이원.
대명주원부인 왕씨;-부, 명주 왕 예.
광주원부인 왕씨;-부, 광주 왕 규.
소광주원부인 왕씨;-부, 광주 왕 규,
동산원부인 박씨;-부, 승주 박영규.
예화부인 왕씨;-부, 춘주 왕 유.
대서원부인 김씨;-부, 동주 김행파.
소서원부인 김씨;-부, 동주 김행파.
신주원부인 강씨;-부, 신주 강기주.
서전원부인.
월화원부인 영씨;-부, 영 장.
소황주부인;- 순 행.
성무부인 박씨;-부, 평주 박지윤.
의성부부인 홍씨;-부, 의성부 홍 유.
월경원부인 박씨;-부, 평주 박수문.
몽량원부인 박씨;-부, 평주 박수경.
혜량원부인;-선 필.
『고려사』 후비(后妃) 열전에 의하면 왕건은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을 맞고 있는데, 대체로 정략 결혼에 의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918년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부인은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와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 두명뿐이었는데, 918년 왕위에 오른 후 적극적인 혼인정책을 추구하여 많은 부인을 맞이하였다. 부인들의 출신지는 황해도와 경기도에 12명이 집중되어 있고, 다음이 경상도, 그리고 기타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지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왕건은 자신의 두 딸을 경순왕에게 출가시켰다. 이러한 혼인정책을 통해 각 지방의 대호족과의 결합은 굳게 하였다. 태조는 29명의 부인에게서 25명의 왕자와 9명의 왕녀를 얻을 수 있었다. 왕건이 유력한 호족가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한 것은, 호족의 결합을 굳건히 하려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자손을 두어 왕가의 기반을 다져 고려 왕실의 번성을 꾀하려는 면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