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덕초등학교 10
동덕학교 3년째는 그야말로 원이 없던 한 해였다.
그토록 소원했던 도대회 금메달도 땄고, 학교간 육상대회 종합우승도 했으니까, 할 일을 다 했다 생각했었지.
이제 내년 3월까지 몇 달이 남지 않았다. 그래도 마무리는 철저히 해야 한다.
내 고향 학교, 내 죽으면 상여를 쫓아 올 아이들이잖나.
내 반 6학년 학습지도는 물론 육상부도 변함없이 지도했다.
그 해 9월 새로 오신 교장선생님께서 육상부 지도에 협조적이신 것도 큰 힘이 되었다. “이선생. 학교 형편이 그래서 도와주지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응원하고 있으니까 힘을 내줘” 얼마나 고마우신 말씀이신가. ‘인생살이 풀릴 때는 한꺼번에 쏟아지는 구나’ 정말 마음 편했던 순간이었다.
내가 떠나면 육상부를 지도할 선생님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훈련을 중단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그 해 겨울도 비닐하우스를 치고, 솔잎 트랙을 깔고 훈련에 매진을 했다.
내가 떠난 후에도 육상부는 영원하길 바라면서.....
단골 메뉴 우리 엄마표 돼지국은 여전히 난로 위에서 부글부글 끓었었지.
점심 휴식시간에도 열심히 학습지도를 했고....
느닷없이 아산군 장학사님께서 천안에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웬 일인가 ? 잘못한 일도 없는데....’ 껄쩍지근한 마음으로 다방으로 들어갔지.
“자네 대전 들어가려고 한다며 ? 내가 힘을 써서 들어가게 해 줄 테니까 150만원만 내” 단도직입적이다. 150만원이면 두 달치 월급이다. 돈도 없었지만 대전 갈 생각이 별로 없었다. “저는 대전 갈 생각이 별로 없는데요. 우리 안식구는 대전을 가고 싶어 합니다. 제 대신 안식구를 보내주실 수 없나요 ?” “에이 안 돼.” 혀를 차시면서 자리를 뜨셨다. 나는 어안이 벙벙할 수 밖에....
그 이유를 나중에 1년 후에나 알았지. 1년 후 내가 대전에 전입한 교사들 중에 1번으로, 즉 일등으로 들어왔다. 그만큼 점수가 많았다는 이야기지.
그러니까 그 해에도 대전에 전입할 점수는 충분했었을 거다. 그런 사람들을 미리 알아내서 찾아다니면서.... 그 일을 계기로 청렴을 모토로 삼게 되었으니 나에게 은인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없던 일이 일어났다.
아산군 교육청에 도교육청 등 외부 손님이 오시면 우리 학교로 모시고 오더라.
아산군에도 이런 선진학교가 있다고 자랑하고 싶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해 겨울 방학 때, 눈이 흠뻑 쌓인 운동장에서 육상부 훈련을 지도하는데 그 눈길을 헤치고 승용차가 두 대나 들이 닥쳤다.
‘웬 일이지. 이 눈길에....’ 먼저 내리셔서 나에게 다가오시는 분을 보니 이충식 아산군 교육장님이 아니신가. “교육장님 안녕하세요 ?” 황급히 인사를 했지.
“이선생. 교장선생님께 얼른 나오시라고 해. 교육감님 오셨다고...”
급히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나오니 키가 훤칠하신 분이 솔잎 트랙에서 달리고 있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시고 계셨다. 장기성 교육감님으로 기억한다
한참을 보시고. 비닐하우스 안까지 들어가 보시더니 나를 한참이나 쳐다 보시다가, 교육장님과 교장선생님 배웅을 받으시면서 천안쪽으로 떠나셨다.
교육장님께서 다시 오시더니 “이선생. 동덕에서 만기가 다 됐지. 대전으로 가려고 한다면서....” 갑자기 물으시는 말씀에 말문이 막혔다.
“이선생 내가 유보해 줄 테니까 한 해만 더 있다가 대전으로 들어가. 알았지”
내가 대답을 못하니까 한 번을 더 부탁하시더니 차에 올라 떠나셨다.
‘벽지에서는 유보가 안 된다던데....승진 점수가 달려있아서....’ 사실 대전보다 내 고향에 있는 것이 훨씬 좋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교육장님 덕분에 내 고향 학교에서 1년을 더 있을 수가 있었다.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이시다. 벽지에서 1년을 유보했다는 일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나중에 1년이 추가된 벽지점수는 교감 승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은 1년이란 세월을 더 마음껏 가르칠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3년 후엔가 흥룡에 있을 때였다. 교장선생님께서 교육감님 퇴임식에 다녀오시더니 부르신다.
“교육감님께서 퇴임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 ‘내가 교육감으로 재직하면서 관내 모든 학교를 다녀보려고 많은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퇴임하는 순간까지 잊지 못할 학교가 있었습니다. 어느 시골 작은 학교에 갔을 때입니다. 겨울 방학, 눈이 잔뜩 쌓인 운동장에 솔잎을 깔아 그 위에서 아이들이 열심히 뛰고 있었고, 비닐하우스를 치고 그 속에서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흘렀던 기억을 잊지 못하고 떠납니다’ “그 게 아산 이선생네 학교였지 ?”
그 순간. 내 가슴이 고마운 마음으로 먹먹하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해에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었다.
2월 말이 되어서다. 교육청에서 찾는 전화가 왔단다. ‘무슨 일인가 ?’
“이선생. 나 박장학사여” “예 장학사님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응 이 번 졸업생들이 중학교에 가서 배치고사를 봤잖아. 각 중학교로 흩어진 아이들 성적을 다 뽑아서 학교 반별로 평균을 냈어. 그런데, 이선생 네 반 아이들 평균 점수가 아산군 모든 반들 중에서 2등을 했어. 온양온천학교 같은 데를 다 제치고....이선생이 운동만 잘 가르치는 줄 알고 있었는데 공부도 잘 가르쳤다고 교육청에서 난리여. 교육청에서 표창을 할겨“
이 게 제일 가슴이 찡하더라.
영구 형님이 축하한다고 한 잔을 사시면서 “잘했어. 나도 놀랬어. 2등이지만 1등이나 마찬가지여. ” “예. 무슨 ?” “1등한 학교는 대동인데. 학생 수가 8명밖에 안 돼. 그 중에 재수 좋게 부진아가 없었던 거지. 이 선생네 반은 45명이나 되잖아. 게다가 거의 육상부고.... 동덕이 일등이라고 다들 그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마음만 뿌듯하면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