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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차 북한사찰순례 문화유적답사기 (4)
글/김형근
내금강 장안사, 표훈사와 정양사
`우리 순례단은 2015년 9월 3일 목요일에 원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갔다. 서쪽인 평양에서 동쪽에 있는 금강산을 가려면 평양에서 출발하여 터널을 몇 개 지나고 마식령 스키장 부근에서 차로 10분 이상 달리는 긴 터널을 지나면 원산부근으로 나온다. 원산으로 오는 길에 안변 석왕사 이정표가 보였다. 석왕사는 조선시대 이 성계가 세운 사찰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사찰중의 하나일 정도로 큰 사찰이었는데 아쉽게 불이문 등 몇 개만 남기고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원산, 금강산지역을 관광 특구로 지정하여 이 지역을 관광지로 개발하고 있는데 여기에 석왕사 지역이 중점 개발지역중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워싱턴 주의 타코마 서미사 주지 일면스님은 이 지역이 고향으로 어린 시절에 본 석왕사는 아주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또 이 사찰에는 재미난 이야기도 인터넷에 많이 떠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성계가 장군시절에 안변을 지나다가 꿈을 꾸었고 그 꿈 해몽을 설봉산에서 수행하던 스님이 왕이 된다는 꿈이라고 해몽을 잘해주었다. 이 스님이 무학대사이다. 이성계는 임금 ‘왕’ 자를 해석했다 하여 절을 짓고 석왕사(釋王寺)라고 했다고 한다. 이 처럼 재미난 이야기가 깃든 사찰이지만 전쟁으로 건물이 파괴되었으므로 석왕사 방문을 요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다음에 북한을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이 석왕사를 방문하고 싶다.
우리는 안내하는 이용오씨는 안변에 감이 유명하다고 하면서 감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감은 ‘문. 무. 충. 효. 절’를 상징한다. 감으로 글씨를 쓸 수 있다고 한다. 글씨는 문인을 상징한다. 무는 전쟁과 관련이 깊다. 감나무로 화살을 만든다고 한다. 또 감은 겉과 속이 똑같기 때문에 충성을 상징한다. 감은 또 효를 상징하는데 감은 이가 없거나 약한 노인들이 먹기가 좋다. 감은 절개를 상징하는데 감 잎이 다 떨어져도 감은 겨울에도 끝까지 남아 있다.
원산에서 송도원 해수욕장과 갈마반도에 있는 그 유명한 명사십리 해수욕장도 잠깐 둘러보고 9월 3일 오후 5시쯤 외금강 호텔에 도착하였다. 외금강 호텔에서 왼쪽으로는 수정봉이 보였다. 수정봉 봉우리에는 안개가 항상 둘러 있었다. 12층의 호텔이었지만 손님은 많지 않았다. 우리 그룹과 평양 양각도 호텔에서 보았던 노르웨이 18명, 그리고 20명 미만의 중국인들이었다. 중국인들은 다음 날에 또 수 십명이 들어왔다. 호텔에 도착했지만 전기 문제가 있었다. 7시부터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내부 발전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는 사용할 수가 없었고 호텔 룸에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9월 4일 부터는 금강산 관광을 했다. 금강산은 외금강, 내금강, 해금강으로 크게 구분된다. 첫날에는 외금강과 해금강 관광을 했다. 이날 2 년 전에 안내 강사를 했던 김금순 안내 강사를 만날 수 있었다. 전날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안내인에게 부탁했는데 다행이 만날 수 있었다. 북한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잘 느끼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반가움이 매우 크다. 김 금순 안내 강사도 자기를 찾는다는 안내인의 말을 듣고 누구인지 매우 궁금했다고 한다. 올해 29살인 김 안내 강사는 매 달 하루 이틀 정도만 제외하고는 매일같이 금강산을 오르면서 안내를 한다고 한다. 외금강 구룡폭포를 오르려면 매일 산행을 최소 3시간 이상 해야 한다. 직업으로서는 매우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안내강사를 해설을 들으면서 구룡폭포도 오르고 ‘선녀와 나무꾼’의 무대인 상팔담도 올랐다.
점심 후에는 삼일포 관광인데 가는 길에 신계사에 잠깐 들렸다. 신계사는 2004년에 조계종에서 복원한 절인데 지금은 조계종 스님들은 없고 북한 스님들만 있었다. 이런 연유로 원래 신계사는 방문사찰 명단에 없었고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해금강을 빨리 가야 하기 때문에 필자만 내려서 법당에 참배하고 탑에서 주지스님과 기념촬영만 하고 떠났다. 오후에는 해금강을 잠깐 둘러보고 삼일포도 보았다. 삼일포도 제대로 보려면 한 나절 이상을 보아야 하지만 맛만 본 것이다.
해금강
삼일포 호수에서 단체사진
9월 5일 내금강으로 들어가다
예로부터 금강이라 하면 주로 내금강을 뜻했다고 한다. 여기에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과 여러 폭포가 있다. 내금강은 만폭동(萬瀑洞) 구역, 태상동 구역, 백운대 구역, 비로봉 구역, 명경대 구역, 망군대 구역, 구성동 구역 등으로 나뉜다. 내금강에 있는 봉은 비로봉 외에 영랑봉(1,601m), 향로봉(1,030m), 법기봉·혈망봉(1,372m) 등이 있다.
유홍준씨가 쓴 ‘나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에 내금강을 관광하는 코스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있다. 일부를 옮겨본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금강행에도 일정한 탐승 코스가 있었다. 금강산 탐승의 종주 코스는 내금강 장안사에서 만폭동을 거쳐 안문재(내무재령) 너무 유점사에 이르는 길이 기본이었다. ~ 중 략~ 내금강에서 만폭동을 비롯한 명승지를 닷새 정도 다 둘러보고 안문령 너머 유점사에 가서 사나흘 놀다가 온정리로 나오면 대개 여기서 지쳐 외금강은 들리지 못하고 삼일포. 해금강.총석정을 보는 것으로 금강산 유람을 마무리한다.
~중 략~
돌아가는 길은 북쪽으로 통천 총석정을 거쳐 원산으로 가서 거기서 철령 너머 회양을 거쳐 한양으로 가는 길과 삼일포에서 남쪽으로 관동팔경을 따라 강릉까지 가서 대관령 너머 들어가는 길이 있다 여정은 길게는 달포, 짧게는 한 달 잡는 일정이었다”고 소개되어있다.
일제시대에는 경성역에서 경원선을 타고 철원에서 하차해 금강산 전철을 타고 내금강역까지 왔다고 한다. 여기서 장안사까지 걸어서 20분, 버스로 5 분이면 도착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철로는 거의 없어지고 일부만 남아있는데 안내 강사가 철로가 보이자 설명을 해 주었다.
오늘 우리는 이 내금강을 들어가는 것이다. 서류 관계로 우리는 9시 지나서 내금강으로 출발했다. 내금강을 보려면 최소한 하루 정도는 일정을 잡아야 하는데 반나절만 하기로 했다. 내금강 만폭동 구역에 보덕암, 마애불, 마하연 터 등이 있는데 우리 일행은 불교신자가 너무 적었고 또 70이 넘은 고령자가 많아 만폭동을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2차 순례시에는 내금강을 하루 일정으로 잡아 만폭동 구역을 갔다.
외금강 호텔에서 차로 출발하여 온정령 고개라는 곳을 따라 가야 내금강으로 갈 수 있다. 온정령 고개는 외금강의 고성군과 내금강의 금강군을 연결하는 고개이다. 지금은 터널로 차들이 오가지만 터널이 생기기전에는 온정령을 넘어가는 도로가 있었다. 이 도로는 일제시대에도 공사를 하다 실패한 것을 한국동란 당시인 1950년 11~12월에 고립된 인민군의 보급을 위해 북측 군과 인민들이 뚫은 것이다. 이 온정령 고개를 김금순 안내인이 설명을 하지만 필자도 그랬지만 그 배경을 미리 자세하게 알지 않으면 들으면서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하지만 나중에 알았는데 알고 안내강사의 말을 들으니 실감이 났다. 온정령 고갯길은 필자가 부탄 여행시 본 히말라야 산길 같았다. 산 비탈길을 돌아 돌아 가는 것이다. 이 길은 본래 사람들만 걸어다니는 산길이었다. 이 길을 6.25 전쟁 중에 106굽이 돌이 차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김 안내 강사가 이 도로가 생겨난 배경에 대해 설명 “일제시대에 10년에 걸쳐 이 산길을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로 만들려고 계획을 세웠다가 시행은 엄두조차 못한 길이었다. 그런데 전쟁 막바지에 금강산을 놓고 남북이 치열하게 싸웠다. 그 기간중에 우리는 단 2달만에 이 산길에 도로를 만들었고 그 결과 351고지 전투에서 승리하고 우리가 금강산을 지킬 수 있었다”라고 설명을 했다.
351고지 라는 것은 산 높이가 351미터라는 것이라고 한다. 이 351 고지 전투와 1211미터의 1211 고지 전투는 북한에서 승리했다고 자랑하는 전투다. 이번 여행에서 방문한 평양의 전쟁박물관에서 1211 고지 전투 때 북한 인민군이 지하에 파 놓은 요새를 볼 수 있었다. 사진촬영을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는데 아쉽게도 촬영 금지 지역이었다. 산 밑에 구축해 놓은 그 요새를 본 사람들은 1211 고지 전투는 인민군이 승리할 수 밖에 없었겠구나 하고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이 전투들에 대해 검색을 통해서 본 글들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남북이 치열하게 싸웠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는 이런 불행한 전쟁이 일어나면 안된다.
351고지 전투: 불모고지, 백석산, 백마고지, 저격능선, 피의 능선, 수도고지 등과 함께 한국전쟁 중반 이후 가장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금강산 남쪽 바로 앞에 위치한 월비산의 고지를 말하며 이곳을 북한군과 한국군 (수도사단·보병 제5사단·보병 제11사단 등) 사이에는 피비린내 나는 처절한 공방전이 수시로 벌어졌고 고지의 주인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한국군은 당시 351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우세한 항공지원과 지상 화력(대구경 야포, 전차 등), 동해상에 배치된 미해군 제7함대의 함포 지원까지 받으면서 공격했으며, 이에 따라 351고지는 풀 뿌리 하나 남지 않는 폐허로 변했다. 아래 글은 351고지에 대한 좀더 상세한 설명이다.
351고지는 동해안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북쪽 수동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351고지 서쪽 2㎞지점에는 459고지인 월비산이 있습니다. 부산에서 시작된 7번 국도를 따라 월비산으로 부터 18㎞ 북쪽에는 금강산의 주봉인 1638m의 비로봉이 있습니다. 이처럼 월비산과 351고지는 금강산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측이 월비산과 351고지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월비산 북쪽 12㎞ 지점에 있는 남강입니다. 향로봉과 두무산에서 발원한 남강은 하류에서 금강산에서 발원한 신계천과 합해져 강폭이 60~80m나 되기 때문에 월비산과 351고지를 차지할 경우 남강까지 진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지형적 특성에 따라 양측은 월비산과 351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인명손실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남조선에서는 월비산전투 또는 월비산·351고지 전투라고 부릅니다. 월비산전투는 강원도 양구에서 1211고지전투가 끝날 때쯤인 1951년 10월 12일 남조선군 수도사단이 북조선 제19사단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0월 15일까지 4일 동안 계속된 작전에서 수 차례의 공방전을 거듭한 끝에 남조선 수도사단은 월비산과 351고지를 차지했습니다. 북조선 제19사단은 남강 북쪽으로 물러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북조선군 역시 그냥 쉽사리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북조선군은 제19사단을 제9사단과 교대시켜 결전하게 했습니다.
때마침 남조선 수도사단이 지리산지구 무장공비 토벌을 위해 11월 16일 호남지방으로 이동하고 제11사단이 작전지역을 인수했습니다. 북조선 제9사단은 그 틈을 노렸습니다. 남조선 제11사단이 진지를 인수한지 이틀째 되는 날인 11월 18일 저녁, 북조선 제9사단의 1개 대대는 야간의 어둠을 이용한 기습공격으로 월비산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습니다. 다음날인 19일의 공격은 월비산을 3개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했습니다. 남조선군은 견디지 못하고 후퇴했습니다. 북조선군은 여세를 몰아 351고지까지 점령했습니다.
그 후 남조선군은 제11사단이 제5사단으로 다시 제15사단으로 교체되면서 전투를 계속했습니다. 그때부터 전투는 월비산보다는 351고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351고지를 목표로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무수히 반복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1952년 11월 10일 남조선군 제5사단이 351고지를 점령해 제15사단에게 인계하고 제15사단은 351고지에 난공불락의 요새진지를 구축했습니다. 그 사이에 북조선군은 7사단이 진지를 인수했습니다.
북조선군 제7사단의 최종공세는 휴전 직전인 1953년 6월 2일 1시 30분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오후 8시까지 혈전을 반복한 끝에 북조선 제7사단이 351고지를 차지했습니다. 이 지역에서 전투는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7월 27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남조선군이 351고지를 다시 차지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공격작전이 불가피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은 다른 곳보다 휴전선이 80㎞ 정도 북상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351고지를 차지하더라도 차후 유지하는데 부담이 될 것으로 판단해 공격을 자제하기로 했습니다. 결국 351고지는 최종적으로 북조선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 전쟁과평화연구소장 최용호씨 글
그때 북한군은 외금강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후방으로부터 군수물자를 지원받을 수 없게 되자 눈보라 치는 언동설한에 폭격을 받으면서 북한군과 고성군 주민들이 불과 두 달 만에 이 온정령 고갯길을 뚫고 후방 공급선을 마련했다. 그 결과 금강산은 결국 북쪽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이 고개를‘영웅고개’라고 부른다.
-유홍준 저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하’
내금강으로 들어가기 전 만물상 지역의 귀면암을 잠시 보았다. 만물상 입맛만 본 것이다. 이 만물상에는 사찰도 없고 불교유적도 없기 때문에 불교신자들은 일반적으로 만물상을 가지 않는다. 대신 등산객들은 이 만물상 지역을 좋아한다고 한다.
표훈사 기념사진
표훈사, 정양사를 방문하다
귀면암 본 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내금강으로 들어가는 터널이 나온다. 이 터널이름이‘금강터널’으로 기억하는데 확실하지가 않다. 이 터널을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왕복 1차선의 좁은 터널이다. 터널을 지나면 바로 군인들의 검문소가 나온다. 검문소를 통과하여 조금만 지나면 마을들이 나오고 학교도 나오는데 9월이라 나무 잎이 시야를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10여분 지나면 산 속에 평야가 나온다. 몇 개의 군인 검문소를 통과하면서 가야 한다. 어느 검문에서는 여군이 검문을 하였다. 외지인 출입이 별로 없어 보였다. 검문소에서 통과 절차를 위해 잠시 지체 하기도 하지만 표훈사까지 대략 2시간 미만 걸린다. 이 기간 동안에 상점은 딱 한 개의 식당만 볼 수 있었다. 이곳은 다른 곳에 비해 차량 통행이 아주 적었다. 길가에서 유유히 풀을 뜯는 소떼도 가끔 보였고, 양떼를 몰고 가는 사람도 보였다. 우마차 몰고 가는 사람, 자전거를 끌고 가는 여인들도 드문 드문 보였다. 가뭄으로 2년 전에 비해 냇가에 물이 매우 적었다.
표훈사까지 가는 길에 장연사 터와 장안서 터가 있다. 이 곳에 금강산 3고탑의 하나인 장연사 3층탑이 있다. 이 탑은 달리는 차 안에서 저 멀리 보였다. 나는 이 탑을 꼭 보고 싶었지만 우리 여행단 대부분이 불교신자가 아니어서 그냥 갈 수 밖에 없었다. 장연사 터에서 장안사 터 까지는 차로 10여분 걸린다. 장안사 터에서는 잠시 내려 저 멀리 있는 부도 탑을 사진기에 담았다. 장안사 터에 잡초가 너무 많아 부도 탑까지 갈 수가 없었다. 사실 금강산은 산 이름부터가 불교 경전 이름이고 가장 높은 봉우리가 비로봉이고 곳곳에 불교와 관련이 없는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산이다. 사찰들도 다 고려시대, 조선시대 역사가 깃들어있다. 장안사, 표훈사 모두 고려시대 왕조 조선시대 왕조와 관련이 있다. 서산대사 등 한국역사에 등장하는 고승들을 기념하는 부도와 비석이 즐비하다. 남북 분단 전에는 한국불교계는 금강산 사찰의 스님들이 주도했다고 한다. 지금은 터만 남은 마하연은 한국불교계의 대표하는 수도처였다. 그러므로 내금강은 불교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큰 의미가 없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교신자로 금강산을 찾는 사람들은 이곳이 가장 의미있는 방문지이다.
2013년 2차 순례에는 장안사터 →표훈사→만폭동→보덕암→묘길상, 그리고 내려오면서 삼불암과 부도 밭을 보았다. 이번 방문에는 표훈사에 들어섰으나 주지 스님은 멀리 출타중이라 만날 수가 없었다. 대웅전은 열쇠로 잠겨있어 들어갈 수도 없었다. 수 백 년 고찰에 스님도 없고 찾는 신도가 없어 표훈사에 들어서는 순간 그 적막하고 황량한 모습을 보면서 금강산에서 불교가 신음하면서 앓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무척 아프고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미주에서 사찰순례를 매년 와서 이 금강산에 목탁소리와 독경 소리가 끊이지 않고 불교로 장식되도록 해야 할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방문에서 필자는 기필코 정양사를 방문하고 싶었다. 평양에서부터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직원으로 우리 안내를 맡은 이용호 안내인에게 그 사실을 몇 번이고 말해주었다.
“난 이번에 정양사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가야 합니다.”
“단장 선생님, 알겠습니다. 제가 금강산에 근무하는 사람에게 일러서 오늘 그 사람이 정양사를 직접 가보도록 하였습니다.”
“ 이 동무, 감사합니다. 이번에 정양사를 못 가면 이번 순례는 저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난 이번 순례에는 정양사와 칠보산 개심사를 보기 위해 왔어요. 칠보산을 갈 수 없게 되었으니 정양사를 못가면 난 여기서 못 갑니다.”
이런 대화를 필자와 이 용호 안내인은 몇 번이고 했다.
표훈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필자와 정감록씨 그리고 금강산 안내인 국 동무, 이렇게 4명이 정양사를 향해 갔다. 표훈사 대웅전 오른 쪽으로 나가자 마자 바로 정양사라는 간판이 있다. 하지만 글씨는 다 지워져 있다. 다음에 다시 가게 되면 표지판을 만들어가고 싶다. 내금강 가장 중앙에 위치한 6백년 고찰을 가는 길을 알리는 표지판의 형색이 너무 초라하였다. 표훈사 뒤로 산 길을 따라 올라 빠른 걸음으로 가면 30분 정도 걸린다, 하지만 이 곳을 찾는 사람이 없어서 길은 엉망이었다. 김 금순 안내인도 몇 년 만에 가본다고 한다. 길가에 나무가 쓰러져 있는 곳도 몇 군데 있었고 길이 많이 훼손된 곳도 있어 보수가 필요했다. 다행이 나무다리는 최근에 나무를 교체한 것처럼 보였다.
정양사 가는길
힘들게 도착한 정양사의 모습은 그러나 너무 안타까웠다. 유홍준은 ‘나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길이 무너져 이 정양사를 오를 수 없게 된 것을 한탄하였다. 수 많은 전설과 설화의 무대인 정양사는 스님도 신도도 없고 풍경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오직 우리들만 있었다. 이곳도 표훈사와 마찬가지로 반야전과 약사전에 열쇠가 걸려있어 법당을 볼 수가 없었다. 정양사에 왔지만 온 것이 아닌 셈이다. 문을 부수고 들어갈 수도 없고 참 난감하였다. 이러한 것이 남북분단으로 인한 한계라고 생각하며 씁쓰레한 마음을 달랬다. 사람이 살지 않는 건물은 쉽게 망가진다고 하는데 비바람을 이기고 있는 2채의 건물이 탑과 석등을 벗삼아 덩그래 서 있었다. 전에 혈성루, 나한전 등이 있었던 주변은 온통 밭으로 여러 가지 작물을 자라고 있었다. 작물 재배 때문에 잡초가 없어 주변이 보기에 좋다고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였다. 우리 일행이 도착했을 때 작물을 재배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노인이 한 사람 보였는데 우리가 도착하지 산 속으로 들어갔다. 노인이 간 쪽으로 저 멀리 군인들이 몇 명 보였다. 이 정양사를 지키는 군인들 같았다. 우리 일행은 기념사진도 찍고 탑에 절도 하고 반야전과 약사전을 잘 둘러보았다. 이 곳은 오고 싶다고 쉽게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더 머물고 싶었지만 흐린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길도 좋지 않았고 하산을 서두를 수 밖에 없었다.
표훈사 뒤쪽으로 1km 정도 우거진 산길을 오르면, 방광대(放光臺, 1062m) 허리에 위 치한 정양사(正陽寺)가 나타난다. 이 절은 표훈사의 말사(末寺)로, 금강산 정맥(正脈)의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하여 정양(正陽)이란 이름을 얻었다. 지대가 높고 탁 트여 있어 금강산 내외의 뭇 봉우리들을 하나하나 다 볼 수 있기 때문에 전망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표훈사와 더불어 600년에 창건된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다시 짓거나 중수(重 修)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정조 15년(1791)에 중창되었지만 한국전쟁 때 심하 게 파괴된 후 일부만이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양사의 가람배치는 반야전, 약사전, 3층 석탑과 석등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전(般若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법기보살을 주불 로 봉안하고 있으며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기둥을 세운 것이다. 반야전 앞의 약사전(藥師殿)은 약사여래석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들 보를 하나도 쓰지 않고 기둥 위 안팎으로 공포 (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를 여러 겹 짜 올려 천장을 대신한 점이다. 육각 평면이라는 건축적 기교와 더불어 지붕 꼭대기의 화강암을 연꽃 모양으로 다듬어 올린 것이 이채를 띠고 있다. 약사전 앞에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세워진 3층 석탑과 6각 석등이 남아 있는데, 그 구조의 정교함과 그윽한 모습은 산중 명물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절간의 문에 해당하는 헐성루와 영산전, 명부전, 승방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정양사가 자리한 곳은 해발 800m 정도밖에 안 되지만, 동쪽이 탁 트여서 크고 작은 봉 우리들을 볼 수 있다. 사악한 마음을 없애고 자성에 드는 문이란 뜻인 헐성루(歇性樓) 때문에 더욱 유명한데, 특별히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내금강의 47개에 달하는 크고 작 은 봉우리들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이 문의 난간에 서면 내금강의 수많은 봉우리들 이 일렬로 늘어서는데, 오직 색채의 농담(濃淡)과 윤곽의 정밀하고 거친 정도로만 그 거 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더욱이 헐성루에는 지봉대(指峰臺: 봉우리를 가리키는 대)라는 전망 장치가 있어 정양사의 명물로 이름이 높다. 지봉대는 헐성루에서 볼 수 있는 각 봉우리의 이름을 새겨놓은 원추형 모형돌들로, 미리 고정시킨 줄을 당겨 모형 끝에 맞추어 방향을 잡고 바라보면 누구나 봉우리의 이름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만든 기발한 장치이다. 하지만 현재는 지봉대도 헐성루와 함께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또한 정양사 부근에는 옛날부터 개심대, 천일대, 진헐대 등으로 불리는 전망대들이 있 다. 이곳은 높이 800여 m밖에 안 되는 산중턱이지만 사방이 탁 트여서 크고 작은 봉우 리들을 환히 볼 수 있고 높은 곳으로 오를수록 전망은 더욱 좋아진다. 하지만 정양사 앞 뜰에서만 보아도 온갖 기묘하고 수려한 봉우리들을 한데 모아 진열해 놓은 듯한 장관이 연출되기 때문에 헐성루에 올라서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경관에 도취되기 쉽다. 그래서 예로부터 문인(文人)들이 헐성루에 올라 그 감회를 토로하는 많은 명작들을 남겨 놓은 듯하다. 정선의 진경산수화 중 백미로 꼽히는 를 비롯한 는 거의 다 정양사 헐성루에서 바라본 경치를 부감법(俯瞰法: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사물을 그리는 화법)으로 그려 놓은 것이다.
또 이중환은『택리지』에서 이곳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금강산 한복판에 정양사가 있고 절 안에 헐성루가 있다. 가장 요긴한 곳에 위치하여 그 위에 올라앉으면 온 산의 참모습과 참 정기를 볼 수 있다. 마치 구슬 굴속에 앉은 듯 맑 은 기운이 상쾌하여 사람 뱃속 티끌까지 어느 틈에 씻어 버렸는지 깨닫지 못한다.
한편 고려 태조 왕건이 금강산에 왔을 때 산 위에서 찬란한 빛이 사방으로 퍼지며 법기보살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엎드려 절을 했다고 한다. 방광대(放光臺: 빛을 놓은 대)는 법기보살이 나타난 곳이고, 그때 왕건이 절한 자리가 장안사 터에서 정양사로 넘어가는 고개인 배점(拜岾) 또는 배재령(일명 절고개)이다. 그 전설의 구체적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정양사는 본래 동쪽을 향하여 세운 절이었다. 그런데 그 뒤 절은 없어지고 돌부처 하나 만이 동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돌부처 주변에는 잡초와 관목만이 무성해졌고 부처 위에는 담장이풀과 머루, 다래 넝쿨 등이 가득 씌워졌다. 그런데 밤이면 이 따금씩 이 불상에서 신비스러운 빛이 뿜어져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한 늙은 중이 이 근방에 와서 초막을 짓고 홀로 살았는데 어느 날 밤 돌부처가 꿈에 나타나 그 중에게 말하였다. “내일 임금이 남쪽 언덕으로 넘어올 것이니, 나를 남쪽을 향해 돌려놓아 마중하는 모습이 되게 하라.” 꿈에서 깨어난 중은 ‘참 이상한 꿈도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돌부처의 말대로 불상을 그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고려 태조(太祖)가 금강산에 들어오기 위해 앞산 고개를 넘고 있었다. 고개를 넘던 왕건은 심신이 피로하여 혼잣말로, “금강산의 주불인 법기보살(法起 菩薩)이 현현하여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낸다면 내가 이 길을 따라 금강산으로 들어가겠 노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곧 법기보살이 황금빛을 발하며 하늘에 나타났고 그가 뿌리는 광명으로 온 천지가 밝아졌다. 태조는 즉시 여러 신하들과 함께 그 자리에 엎드려 법기보살의 발밑에 절을 하였다. 이때부터 법기보살이 출현한 곳을 방광대라 이르고 왕이 절한 자리는 배재령(절고개)이라 불렀다. 이후 태조가 고개를 넘어 암자에 이르자 늙은 중이 나타나 꿈에서 본 사실을 아뢰었다. 사실 태조가 본 것은 법기보살이 아니라 늙은 중이 돌려놓은 돌부처가 햇빛에 반사된 것 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이상하게 여긴 태조는 돌부처가 있던 자리에 정양사를 재건토록 하면서, 그 불상을 금상의 법기보살로 만들어 반야전에 안치하고 약사여래상 위에는 6각전을 지어 보호하도록 하였다. 이후 정양사는 남쪽을 향해 앉은 절간이 되었다고 한다.
아래 글들은 정양사를 잘 표현한 글이다.
정양사는 내금강의 절 가운데서도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어서 예로부터 금강산 탑승을 하는 이들에게 필수적인 탐방처였다. 정양사의 중심인 반야보전은 정면 3칸(11.13m), 측면 3칸(8.7m)정도의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1] 건물 전면에 걸쳐 화려한 금단청을 장식한 조선 후기 건축양식의 전형이다. 그 앞에는 약사전[2]이 있는데, 약사전은 6각형 건물로, 한국에서는 유일한 것이다. 다각형 전각 자체가 한국에서는 흔하지 않지만, 보통은 일본에는 호류지 몽전처럼 8각형의 형태를 취한다. 아무튼 이 약사전은 6각 평면에 6모 지붕을 얹은 전각형식의 희귀한 건물이다.[3]약사전 앞에는 3층 석탑과 석등이 있는데, 이 석등은 신계사, 장연사의 탑돌과 모습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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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