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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퇴양란, 곤경의 길
평소와 달리 새벽 잠마저 오지 않았다.
먼동이 트기를 기다리며 궁리한 것은 남쪽으로 뻗은 아무 길로라도 다운 타운(Santarem)을 벗어나는 것이
우선의 과제라는 것.
전일의 석양에 했던 것 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길들을 찾아다니며 확인하는 것보다 이 길 지역을 벗어
나서 남행하는 길을 압축하면 까미노를 찾기가 수월할 것이니까.
이같은 생각으로 타원형 대형 로터리의 서남단인 SCMS 건물(albergue)을 나와 도로에 들어섰다.
남행하는 N3 도로다.
한데, 200m도 안되는 지점에서 길 이름, 아베니다 동 아폰수 엔리케스(Av. Dom Afonso Henriques)만
남하하고 N3 도로는 서쪽으로 달아나고 있지 않은가.
막연히 일 망정 생각은 잘못된 시작일 것이라면서도 몸은 N3 도로를 따라 가고 있었다.
어느 새 아침 출근 시간이 되었는가.
왕래 차량이 급증하여 갔다.
다운 타운을 벗어나는 지점부터는 좁은 보행자 길이 좌우 도로가(邊)로 번갈아 가며 편도에만 있다 없다를
반복하기 때문에 노변의 인도(人道)를 찾아 무단 횡단을 계속해야 하는 위험 천만한 길이 되었다.
곧 편도에나마 있던 보행자 도로마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사고의 위험이 도처에 널려 있는 길(N3).
2번의 까미노에서 최초로 느끼는 공포감이었다.
(2015년 7월 1일, 그 때까지 뿐 아니라 까미노 걷기를 모두 마치고 이베리아 반도를 떠날 때까지 통틀어서
유일한 공포감이었으니까)
이 알량한 길을 걸으려고, 그래서 걷다가 죽기라도 하면 누군가 간략한 인적사항이 적힌 허름한 비석 또는
비목 하나 노변에 세워주리라고 믿고 이베리아 반도까지 거듭 왔단 말인가.
까미노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마저 난망 사항일 것 아닌가.
나는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앉은뱅이(坐客)로 살았다.
극악으로 치닫던 일본의 식민압제를 벗어난 광복의 환희도 잠시였을 뿐 민족 동란의 참극을 겪어야 했을 때
제대로 걷지 못하는 한(恨)을 품은 몸이었기 때문에 훗날, 남달리 걷고 또 걷기에 몰입되어 있었을 것이다.
앉은뱅이에서 자유로운 몸이 된 후로는 걷기 위해 먹고 마시고, 걷기 위해서 일하고, 사는 것(생존이 아닌
생활) 자체가 걷기 위해서 인 것처럼 한사코 걸었다.
이렇게 되어, 내가 걸은 총 거리는 아마도 15만여km, 지구의 3.5바퀴 이상이 될 것이다.
지금(2026년)도 비록 휠체어의 도움을 받기는 해도 매일 1만보 이상 2만보 내외를 걷고 있다.
그러므로, 그 많은 거리에 노출되어 있다면 각종 사고 또한 많은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그 사고의 위험으로 부터 자유롭다는 이베리아 반도의 까미노에 왔다.
지구의 극동에서 서쪽 끝, 멀고 먼 이 곳까지 온 것이 무수한 국내의 산과 길에서 당하는 잦은 사고(특히 대
소 교통사고)의 위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걷기 위함이었다.
한데, 걷기가 두렵다면 수만리 먼 곳까지의 왕복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 걷기는 이처럼 한(恨)풀이로 시작했다.
늘 나홀로인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직면하게 되는 의외의 난관(위기)에는 복수(複數)의 동행(四國遍路에서는 同行二人)이 절대적인데도.
걷고 또 걸으면, 걸을수록 바윗덩이 처럼 크고 단단한 한(恨) 덩어리는 풀리고 부드러워 가는 듯 했다.
그리고, 걷는 길에서 무언가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길에서 길을 찾는 사람을 구도자(求道者)라고 한다.
보이는(有形) 길에서 보이지 않는(無形) 길을 찾으려고 걷고 또 걷는 사람.
종교가 사용하는 단어는 순례자(巡禮者/pilgrim)지만 종교와 무관하게 자기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을 말한다.
까미노에서는 '뻬레그리노스'(Peregrinos/Peregrina 女와 Peregrino 男의 복수형 명사)라는 단어가 함축
하고 있는데 어느 때부턴가, 어디에선가 나는 뻬레그리노(Peregrino)로 불리고 싶어졌다.
그럼에도, 바야흐로 나는 진퇴 양란의 곤경에 처한 꼴이 되고 멀었다.
어려울 때 친구기 진짜 친구다(a friend in need, a friend indeed)
이베리아 반도의 볼런티어들(volunteers)
다행히도 서쪽으로 달아나기는 1km 미만에서 끝나고 남남서로 하행하는 N3 도로.
달리는 차량과 마주 보고, 차량을 피하기 위해 좌측통행을 했다.
맞은편에서 차량이 달려올 때마다 곡예하듯 길을 비키며 걷기가 한계에 이른 듯 하여 우측통행으로 바꿨다.
등 뒤에서 달려오는 차량에 목숨을 맡기고 걷는 것인가.
그 정도로 내 목숨이 하찮은가.
그보다, 이 위기의 탈출에는 편승(hitch-hiking) 외에 대안이 없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그(편승) 요행
(기회)을 기대할 수 없겠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다른 이유도 있다.
국내에서 노견(路肩/road shoulder)이 없거나 빈약한 차도를 걸을 때는 늘 차량과 같은 방향(우측 통행)을
택했는데 잦은 사고가 가르쳐 준 걷기 방식이다.
걷다가 차량의 가격을 받은 몸의 2차 사고를 막으려면 신체 역학을 동원해야 한다.
사람이 차량과 동일 방향으로 걸으면 뒤에서 달려온 차량은 사람 몸의 좌측 뒷부분을 가격하게 된다.
그 순간, 몸은 차량 밖으로 돌며 원심력에 의해 차량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므로 2차 충돌을 면하게 된다.
그러나, 차량과 마주 보고 걷다가 충돌하면 차량의 죄측 부분이 몸의 우측 앞 부분을 가격하게 되기 때문에
몸이 차량 쪽으로 돌며 구심력에 의해서 차량과 신체의 2차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차량과 동일한 우측 통행을 해야 한다.
이같은 이유로, 우리나라의 한(李某) 대통령이 사람의 우측 통행 실천에 엄청난 홍보비를 쏟아 붓기 오래 전
부터 나는 우측통행을 했다.
가로수가 그늘을 먼드는 곳 땅바닥에 앉아 망연히 쉬고 있는 내 앞에 대형 검은 승용차 1대가 와서 멎었다.
잠시 뜸들이는 듯한 후 20대 안팎의 청년을 대동하고 차에서 내린 초로남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행색은 뻬레그리노인데 엉뚱한 곳에 있으니까 궁금했는가.
길을 잘못 들었을 것이라는 자기 예감이 맞느냐고 물었으니까.
경위를 대강 들은 그는 까미노에 들게 해주겠다며 자기 차에 나를 태웠다.
오이뗀따 에 웅(oitenta e um anos/81세)이라는 내 나이가 그를 볼런티어(volunteer)로 만들었을 것이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으니까.
90이 넘은 지금은 휠 체어에 의존하는 몸이 되었지만 까미노는 물론, 시코쿠 헨로와 국내외 모든 길에서 80
대 나이라면 예외 없이 모두 그랬다.
더구나, 국내에서도 염주(불교), 로사리오(rosário/뽀르뚜갈語:호사리우/默珠/가톨릭), 십자가(개신교)가
걸려 있는 차가 편승 서비스를 잘 하는데, 여기는 거톨릭이 절대적인 이베리아 반도다.
산따렝에서 호스텔을 운영하고 있다는 건장한 체구의 그.
아들과 둘이 노변에 설치한 홍보(안내)판들을 점검하는 중이라며 안내판 사진을 내게 보여주었다.
내 긍정적인 대꾸를 기대하며 보여준 듯 한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본 적이 없다.
이정표와 홍보판들을 비롯해서 길 주변에 널려 있는 것들을 꼼꼼히 살펴보며 걷는 편인 나인데도 보지 못한
까닭은 역(逆) 방향자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 지적과 내 부정적인 반응에 수긍하며 시정하겠다면서도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는 또 이 확인 작업을 리스보아까지 하겠는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조금 전에는 까미노에 데려다 주겠다 했고, 지금은 리스보아까지 가자고 하는 그의 말 어느 쪽이 진짜인가.
"정말, 나를 도와주고 싶으면 let me arrive at the Camino Portugues"(까미노에 당도하게 해주시오)
미적거리는 듯이 느껴진 그에게
"right now"(당장에),
"by the shortest route"(최단 경로로).
단호한 내 말에 당황하는 듯이 보였던 이 부자(父子)를 결행하게 한 것은 세요(sello/stamp)가 빼곡히 찍혀
있는 내 뻬레그리노스 여권(Credencial del Peregrino)과 대학관계인 순례자 여권(Credencial Jacobea
Universitaria)이었는가.
한 뭉치가 되는 이 문서들을 본 그들은 비로소 나를 정확히 이해하게 되었는가.
여러 장의 사진을 요모조모로 핸드폰에 담으며 감탄을 연발한 그들은 아마도 자기네의 길을 잠시 중단하고
서(西)에서 남남동으로 까미노 뽀르뚜게스를 찾아가는 듯 했다.
그 과정을 산따렝 지도에 표시해 달라는 내 요구를 아들이 흔쾌히 들어주었으며 복기하듯 돌아다보는 중에
내가 놓친 까미노가 밝혀졌고, 그들의 도움이 얼마나 컸는지도 알게 되었다.
타원형 대형 로터리의 동쪽 중앙부에서 남행하는 산따렝의 뻬드로 길(R. Pedro de Santarem).
역방향 까미노 뽀르뚜게스에서 산따렝 시점인데, 까미노 마크를 발견하지 못하였을 뿐 어제 석양에 뒤지고
다녔으나 낙담으로 끝난 길들 중 하나다.
이 실패로 인해 33km 되는 산따렝~ 아잠부자(Azambuja)의 까미노에서 반에 가까운 전반부 15km 남짓을
까미노 외의 길을 헤매게 된 것이다.
그러나, N3 도로 7.5km를 걷거나 차로 달렸고 광대한 농경지를 지나는 10km가 넘는 농로도 비록 차를 타
고 통과하였지만 까미노에서는 할 수 없는 귀중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미 말한 대로, N3 도로에서는 목숨이 걸린, 아주 심각한 교통사고의 위험을 느꼈는가 하면 이베리아 반도
에서는 드물게 보는 농장 지대를 거치기도 하는 두 극단적인 체험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으며 사방으로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 광대한 농장 지대를 달렸는데, ' 원더풀'(wonderful)을
연발하는 나를 위해 시속 10km 미만으로 서행하는 듯 했으며 내게 설명하느라 도중에 서기를 반복했다.
내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지만.
거룩한 책이라는 기독교 성서는 구약 39권, 신약 27권 도합 66권이다
(99단 3 9는 27이다. 39권 + 27권 = 66권. 우연이기는 해도 신묘한 숫자다)
이 성서도 무오설이나 축자적 접근에서 벗어난 시대에 까미노의 오리지널을 고집할 수 있는가.
39권의 구약성서가 완성되는데 1개의 밀레니엄(millennium/BC900년~AD100년)이 걸렸다.
문자가 없던 시기에는 구전(oral tradition)으로 전승되다가 문자화 되었고, 시대마다 각양 문서들이 첨삭
되며 내려오다가 마침내 39권의 정전으로 완성된 것.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인 신약 27권도 AD 50년에 시작해 397년 까르따고 공의회(스페인어 Concilios
de Cartago/영어Councils of Carthage)에서 정전으로 확인되었으므로 그 기간이 447년이다.
지금은 고고학(聖書考古學)의 발달과 기여로 옛 문서들(기록물)과 유적, 유물들이 발견, 발굴됨으로서 정경
(正經/正典)도 첨삭의 위협을 받고 있는 시대다.
하물며, 누누이 언급하고 있지만, 무수이 이전하고 개폐(改廢/開閉)를 거듭하고 있는 까미노다.
심자어 차량용(auto)과 자전거용(bicicleta), 도보용(a pie)과 관광용(turismo) 까미노로 구분되고 대체
까미노(alternativo)도 무수하다.
하루 걷기 분량의 까미노가 행정 구역이 전혀 다른 지역으로 통째로 바뀌어버린 곳도 있다.
뻬레그리노스를 위하여 신축하였으나 건물의 신축 냄새가 가시기도 전에 이전해버린 까미노로 인해 폐가로
전락되고 있는 알베르게도 있다.
농장지역을 관통하며 내가 한 짓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직시하고 있는 현실을 말하는 것일 뿐.
선진국과 후진국,
지자체 산따렝의 프레게지아(Vale de Santarem)에서 N3 도로를 떠나 남하하기(R. 25 de Abril~R. Hum
berto Delgado) 800m 지점에서 N3 - 4 도로(R. Marques da Ribeira)에 합류했다.
곧 철길을 건넜는데, 이베리아 반도에서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처럼 되어 있는 것은 건널목 관리다.
스페인과 뽀르뚜갈은 중세의 강대국들이며 식민제국이었던 나라들이다.
여진히 선진국인데 건널목 관리는 빈곤 후진국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4분의 3년(8개월) 동안의 뻬레그리노 생활에서 많은 건널목을 횡단하였으나 어떤 류의 건널목
사고도 보거나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건널목들에는 온갖 안전 장치를 다 하였는데도 대소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건널목들에는 화장하지 않은 민낯처럼 아무 장치도 하지 않고 방치상태인데도
아무 사고도 없다.
내 눈괴 귀에 문제가 있기 때문인가(내게는 複視 장애가 있으며 지체와 청력에서 등록된 장애인이다)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안전장치를 했단 말인가.
꼬레아(Corea)는 수출에 명운이 걸려 있는 나라다.
그러므로, 거국적으로 수출에 올인하고 있으며 무수한 법이 이를 뒷받침하고(support) 있다.
수출이 잘 되어 국가적 수익이 올라가면 일부 층이 부자가 된다.
그러나, 졸부는 될 지언정 선진국 대열에 드는 것은 아니다.
법으로 보호와 제재를 하고 인위적 관리를 하는 나라는 후진국이고, 그리할 필요가 없는 나라가 선진국이며
고급 문화인의 나라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 내려오던 신분 평가의 기준이 바뀌었다.
꼴찌(最下位)였던 장사(士農工商)가 선두(最上位)로 부상한 것.
선두에 올랐다 해서 상류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품위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면 된다(살면 된다)"
고래로 회자되고 있는 속담이다.
벌기는 쉬우나 품위있게 쓰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품위는 법의 영역이 아니고 윤리와 도덕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이 이에서 갈린다.
"꼬레아노 무초 모니"(Coreano mucho money/한국인 돈 많다)
까미노에서 종종 들었는데, 스페인어와 영어 단어로 된(동사가 생략되어) 품위 없는 말이다.
비비 꼬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때마다 주체하기 힘겨운 울분을 달래야 했다.
돈을 휴지 쓰듯, 돈지랄을 하면서도 이처럼 비꾀고 천대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마구 뿌리지만 품위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네(까미노의 商人)에게 가장 많은 수익을 안겨주는 데도 오죽이나 경우 없고 눈꼴이 사나웠으면 그같은
표현이 나오게 되었을까.
분개하거나 원망에 앞선 자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데올로기에 묶여서 참혹하게 고생했으며 그 후유증을 앓으면서도 평생의 소원이라는 뻬레그리노스
의 길을 걷고 있는 동유럽권의 가톨릭 순례자들.
찢어지고 터져서 하얀 뼈를 드러내고 있는 발과 다리를 싸메고, 돈이 없기 때문에 병원에 가거나 대중교통의
이용은 상상도 못하는 목불인견의 참상인데 그들의 눈에 돈지랄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보일까.
까미노들에서는 만난을 극복하고 있는 뻬레그리노스에게 수익을 목적으로 하거나 작은 이해에 얽매이는 일
없이 도움되는 일이 우선인 개인과 집단(volunteers)이 선행을 베풀고 있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겨우 어렵사리 극복하고 있는 순례자들에게 잠자리와 먹거리에 불만을 쏟아내고
돈지랄로 뻬레그리노스의 윤리를 마구 짓밟고 흔들어 놓는 사람들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그들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는 없다.
호감을 유도하는 어떤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해도, 까미노라는 공동의 길을 걷고, 알베르게라는 공동의 집에서 잠자는 뻬레그리노스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은 국가와 민족, 사상과 종교에 무관한 공동체의 일원이다.
각자에게는 법의 제재나 보호와 무관하면서도 지켜야 하는 나름의 윤리와 도덕이 있다는 뜻이다.
준수하여야 하는 윤리와 도억의 기준을 이탈하였기 때문에 받게 되는 비난과 비판이라면 본인이야 자업자득
이라 하겠지만 그의 국가와 국민이 싸잡혀서 받게 되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아킬레스건 때문에 쉬는 시간이 걷는 시간보다 더 많은데도 프랑스 길에 이어 피스뗄라 길을 포기하지 않고
완주한 내 손녀 에디나(Edina)도 내 동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함께 까미노 피스뗄라 길을 걷는 중에 祖孫 관계가 된 헝가리 처녀다.
"저도 까미노(프랑스 길)에서 그같은 한국인들을 더러 보았어요. 우리에게는 그렇게 쓸 돈이 없지만 돈이 있
다 해도 그럴 수 없어요.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처럼 함부로 쓸 수 있겠어요?"
돈지랄과 수전노는 상통(相通)하는 양극이며 어처구니 없게도 법의 보호는 받고 있으나 윤리와 도덕의 인정
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일거수일투족, 언행에 조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르떼 길의 비야비씨오사(Villaviciosa)에서 61회 생일(환갑)을 맞은 알랭(Alain/Canada Quebec 거주)
일행은 나를 자기네의 롤 모델(role model)로 삼겠다고 했다.
특히 기독교와 무관한 라마교(티베트 불교) 신도라는 그(알랭)는 더욱 적극적이었다.
"This is an honor for me Kim. You are an example for me".
나와 둘이 1박할 때의 내 충언에 대한 그의 답장이다.(續까미노이야기 21번 글 참조)
서양의 많은 뻬레그리노스가 그러했으며, 특히 알레만들(독일인)은 마치 인터뷰하듯이 질문내용을 적은 메
모책을 들고 접근해 왔다.
2002년의 월드컵 축구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다분히 비꼬는) 한국.
부정적인 나라지만 킴 할아버지(abuelo)만은 자기의 롤 모델이라고 말했을 때, 어찌 흐뭇하지 않았겠는가.
나는 공짜에 길이 들었나(한국 막걸리와 이베리아 반도 와인의 공짜 시음)
건널목 이후 남동과 남서~남동~정남~남서~정남/R. Marques da Ribeira Grande)으로 하행하기 4km쯤.
N3 도로에서 산따렝 ~ 아잠부자 사이의 까미노 뽀르뚜게스에 들려면 가로질러 가야 하는 광대한 농장 지대
의 반(半)쯤 되는 거리의 위치다.
프레게지아 발리 지 산따렝에서 빌라 상 지 오리케(Vila Chã de Ourique / 지자체 Cartaxo의 freguesia)
에 들어섰으며 와인 양조장(DFJ Vinhos)의 킨따 다 폰찌 벨라(QUITA DA FONTE BELA) 앞이다.
이 건물군(群) 앞에서 잠시 멈췄다.
고백하건대, 와이너리(winery/포도주 양조장)를 지날 때마다 공짜 시음 버릇이 고개를 들기 때문이었다.
국내의 옛 10대로와 전국적인 도로들에서 막걸리 주조장을 지나게 될 때, 상거가 제법 되는 지점에서도 발효
중에 나오는 막걸리 특유의 냄새를 맡게 되었다.
이 때마다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을 거저 마실 수 있게 되겠거니. . ."
기대가 예외 없이 곧 이뤄졌는데,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에서도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대형 와이너리 앞에서는 휴식과 와인 시음을 권하는 플래카드(placard)와 입간판을 보게 되었으니까.
와이너리 안에서 진행 중인 일들 중 하나는 와인의 양조 과정을 목전에서 직접 보고 안주까지 준비되어 있는
별도의 시음 응접실에서 공짜 와인을 마시고 구매도 이뤄지는 일석이조의 행사다.
다만, 빼레그리노스는 백팩의 중량 때문에 구매가 곤란하지만 시음만은 충분히 한다.
오스삐딸레로스(hospitaleros)가 친절한 서비스를 일반 고객(customer/관광객)과 뻬레그리노스를 차별하
지 않고 공정하고 공평하게 하니까.
이 무료 시음에 대한 기대는 부지불식 중에 관행으로 굳어졌는가.
초기에는 고마웠으나 되풀이 되는 동안에 당연히 받는 서비스처럼 느껴졌으니까.
한데, 뽀르뚜갈의 와이너리에도 무료 시음 서비스가 더러 있기는 하나 어떤 조건이나 재한이 없는 스페인과
달리 요일과 시간이 제한적이다.
같은 이베리아 반도 땅인데도.
와이너리 'DFJ 비뉴스'(Vinhos) 앞에서 멈추기는 했으나 시음실까지는 약간의 상거가 있는 듯 했다.
와인 애호가는 아니지만 뽀르뚜갈에서는 아직 무료 시음 경험이 없는 나는 마셔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말타면 경마잡히고 싶다" 해도 나를 까미노에 들게 하려고 자기의 일을 중단한 사람에게 그
같은 의중을 내보일 수 있는가.
아쉽지만 몇개의 팸플릿만 구해 들고 떠날 수 밖에.
설립 연도가 일천한(1998년) 이 와이너리의 창업자는 뽀르뚜갈의 유명 양조학자(oenologist) '주제 네이바
꼬헤이아'(José Neiva Correia/스페인어 발음은 호세 네이바 꼬레이아)란다.
1980년대 ~ 90년대에 이미 뽀르뚜갈에서 이름난 와인메이커(winemaker)였고 여러 와인 회사의 컨설턴트
(consultant)로 일한 경력의 소유자.
당시, 영국 최대의 포르투갈산 와인 수입업체로 자기의 고객 중 하나인 'D&F Wine Shippers'의 두 소유주
(Dino Ventura, Fausto Ferraz)와 파트너십(partnership)을 맺음으로서 'DFJ Vinhos'가 탄생했다는 겻.
'DFJ'는 'D&F Wine Shippers'의 디누 벤뚜라(Dino Ventura)와 파우스뚜 페하스(Fausto Ferraz), 주제
네이바 꼬헤이아(José Neiva Correia) 등 3인의 이니셜(initial)이고.
(2005년에 파트너 중 한 명이 사망한 후 José는 회사 전체 자본을 매수함으로서 유일한 소유자가 되었단다)
설립한지 17년(2015년 기준)에 불과하지만 뽀르뚜갈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수상(受賞)경력이 많은 와인생산
자 중 하나라는 DFJ Vinhos.
30개 브랜드(brand), 100개가 넘는 다양한 와인을 소비자의 취향에 맞게 생산하고 가격과 품질 또한 세계
최고 중 하나(AA등급)가 되었으며 연산 1.000만병을 넘어섰단다.
뽀르뚜갈의 연간 총 생산량이 8억 9,300만병(750ml기준)이므로 전체 생산량의 1.1198%다.
뽀르뚜갈은 와인 생산국 순위에서 세계 9위인데 세계 시장 점유율은 2.6%란다.
8억9,300만병이 2.6%라면 DFJ Vinhos의 1000만병은 뽀르뚜갈에서는 1% 이상(1.1198%)의 비중이지만
100%에 343억4,615만3900병인 세계 시장에서는 0.03% 미만(0.0291153%)이다.
99%를 50개 이상의 나라에 수출한다지만 아직은 미미하고 무명시대를 탈피하지 못한 상태라는 말이다.
그렇다 해도 세계의 10대 와인 생산국 순위에서 최하위권인 자국(뽀르뚜갈)에서는 놀라운 약진이다.
이름 있는 상들을 싹쓸이 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인 듯이.
뽀르뚜갈인들의 포트와인(vinho de Porto) 사랑은 대단하다.
자국의 생산품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납득되지 않을 만큼 포트와인의 품질에 강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까미노에서 인연이 된 뽀르뚜갈인 친구들의 와인 대접을 더러 받았는데 그 때마다 확인할 수 있었다.
단지 애국심의 발로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미구에 내가 잘못 짚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국토 면적의 절대적 협소로 생산량과 점유율은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품질에서는 최상위권의
와인임을 알게 된 것.
최고를 자랑하는 우수한 인적 자원이 토양, 지형과 수분, 바람, 기온, 기타 기후 조건 등 천혜의 자연 조건을
통해 만들어 내는 최상, 최고의 와인이라는 것을.
포트와인에 대한 이같은 상념들이 시음해 보고 싶은 마음을 더욱 채근하는 듯 하였으나,
"벼룩도 낯짝이 있다"잖은가.
하물며, 상대가 볼런티어라 해서 오래 붙들고 있는 염치 없거나 경우 없는 사람이 된대서야?
천금에 다름아닌 귀중한 시간을 내어 나를 도와주고 있는 이 부자를 빨리 자기네 일터로 돌려보내야 겠기에
킨따 다 폰치 벨라(Quinta da fonte bela) 떠나기를 서두르려 한 것이다.
와인의 주교좌 교회(A Catedral do Vinho/아 까떼드랄 두 비뉴)
리스보아(Lisboa/Lisbon)에서 북쪽으로 80km, 따구스 강(Tagus/뽀르뚜갈어 Tejo:떼주, 스페인어 Tajo:
따호)에서 서쪽으로 5km 되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킨따 다 폰치 벨라.
이 지역에서는 '아 까떼드랄 두 비뉴'(A Catedral do Vinho/ 와인의 주교좌 교회)로도 알려져 있단다.
DFJ 사무실 본부, 와인제조센터, 병입 라인, 실험실 및 방문객 시음실을 포함한 여러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
킨따 다 폰치 벨라에 "와인의 까떼드랄"이라는 별칭이 왜 붙게 되었는가.
한자(漢字) 사용국에서는 대성당(大聖堂)으로 번역되고 있는 까떼드랄(Catedral스페인語,뽀르뚜갈語/영어
Cathedral)은 가톨릭교회에서 주교좌(座) 교회를 말한다.
일반 신부(神父)가 맡고 있는 교회(Church/Iglesia/Igreja)를 성당(聖堂)이라 하므로 큰 교회라는 의미다.
교회의 상위 개념이며, 가시적으로는 교회에 비해서 크고 엄숙한 건물인 것이 당연하다.
까떼드랄과 동일한 주교좌 교회의 호칭에는 바실리까(Basilica)도 있다.
주교좌 교회의 상이(相異)한 두 건축 양식에 따라서 사용하게 된 각기 다른 호칭일 뿐이란다.
로마 교황청의 베드로 대성당도 '까떼드랄'이 아니고 '바실리까'다.
한데, 와인의 생산과 까떼드랄은 어떤 관계인가.
직역하면 와인의 주교좌 교회, 포도주의 대성당이지만 혹여, 단어 '까떼드랄'에 다른 뜻이 있는가?
나홀로 걷는 중이라면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 내력을 알아내려 하였겠지만 내 곁에는 극동의 늙은이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두(父子) 볼런티어가 있지 않은가.
숙제거리를 싸들고 차에 오르는 기분이었다.
1.5km쯤 남하해 N3-3 도로에 합류한 후 올리브와 포도 농원을 거치는 남하와 남남서 농로를 따라 2km쯤
의 남행에 이어서 1.5km의 남남동과 남하를 했다.
농로가 끝나는 킨따 다스 빨메이라스 - 발라다(Quinta das Palmeiras-Valada)농장 앞에서 마을(Porto
de Muge/Cartaxo의 프레게지아 Valada의 마을) 길(Rua do Morgado)을 따라 남하하기 0.5km.
하이냐 도나 아멜리아 다리(Pte. Rainha Dona Amelia)의 서단에 당도했다.
따구스 강가의 '뽀르뚜 지 무지의 메렌다스 공원'(Parque de Merendas de Porto de Muge) 옆이다.
하루 치(거리) 까미노인 산따렝(Santarem) ~ 아잠부자(Azambuja) 사이의 중간 지점이다.
양쪽이 각각 16km 남짓 되는 지점.
여기까지 걷고 달려 온 까미노 외의 길 역시 16km 남짓이다.
아무 의도 없이, 애오라지 최단 경로(the shortest route)를 따라서 까미노 뽀르뚜게스에 진입하게 되기를
원했을 뿐인데도.
우연이었을 뿐인데, 우연 치고는 너무 정교해서 마치 세심하게 꾸민 각본을 따른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따구스 강(River Tagus)과 지근 거리를 유지하며 남하하는 단조로운 까미노와 달리
공포의 길을 걷고 와인의 까떼드랄을 통과하는 농원 길을 서비스 받는 등 다채로운 체험의 대체로였다.
지금껏 잠시라도 까미노에서 이탈하는 것을 직무의 유기 또는 과오처럼 여기며 까미노 걷기에 축자적었던
내 뻬레그리노 생활에 어떤 변화의 계기가 될 듯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작게나마 나를 흥분하게 하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매듭짓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 부자의 공로였다.
그들은 무례하고 과도한 내 바람을 토 달지 않고 다 이뤄주게 된 것을 나 보다 더 흐뭇해 하는 듯 했다.
우리는 2개(열차용과차도와인도용)로 나뉜 다리(Pte.Rainha Dona Amelia) 밑, 그늘진 휴게 벤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철도교는 발리 다 뻬드라(Vale da Pedra /지자체Cartaxo의프레게지아)의 세띨역(Setil)과 따구스 강 건너
동남쪽 벤다스 노바스(Vendas Novas) 사이(69.6km)를 운행하는 열차의 휴업으로 현재 휴면 상태다.
벤다스 노바스는 스페인과 국경지대인 에보라 현(Evora縣)의 14개 지자체 중 하나인데 이용 승객과 화물의
격감으로 운행과 중단을 반복하고 있단다.
세띨에서 수도 리스보아를 경유하는 138.5km 노선이 배(倍)나 멀지만 되레 더 활성적이라고.
쉬고 있는 동안에 아들은 시원한 음료수(Coca-Cola)를 사들고 왔다.
콜라를 마시며 고마움을 표시했으나 입으로 하는 것 외에는 가시적인 어떤 사례도 할 수 없음이 이보다 더
안타까운 때가 있었던가.
내 몸에 지닌 것 중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1천원권, 5천원권, 1만원권 각 2매씩의 지폐가 전부였다.
우리 화폐가 외국에서 사장(死葬)되는 경우가 될 수 있지만 전번의 경험에 따라 준비한 빳빳한 새 지폐인데
헤어질 때 1천원권과 1만원권 1매씩을 선물로 주었다.
유로(Euro)로 환산하면 실망스럽겠지만 꼬레아 고유의 화폐임을 강조하며.
따구스 강 유감(有感)
기념으로 잘 보관하겠다며 무척 고마워하는 그들이 떠난 후에도 나는 다리 밑 벤치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파띠마에서 여기(Camino Portugues/Parque de Merendas de Porto de Muge)까지 온 과정이 흥분을
일으킬 만큼 드라마틱(dramatic)하여 진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아잠부자까지 남은 반(半)의 까미노 노정을 살펴 보아야 했고 이탈하는 일 없이 마치려면 진정은 물론 산란
해진 마음의 정리와 다짐도 필요하였으니까.
다리 밑에서 따구스 강을 거슬러 잠시 북상했다.
순방향 까미노 뽀르뚜게스의 강뚝 길이다.
스페인어는 따호(Tajo), 뽀르뚜갈어는 떼주(Tejo)인 따구스(라틴어) 강.
발원지는 스페인의 북동부(Aragon 지방) 알바라신 산맥(Sierra de Albarracín)이란다.
길이가 1.007km로 스페인과 뽀르뚜갈의 국경을 이루기도 하며(47km) 리스보아(Lisboa) 지근의 대서양
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스페인의 일부와 뽀르뚜갈의 대부분 지역이 사용하는 에너지의 공급원으로, 이 에너지의 생산(수력발전)을
위한 많은 댐이 건설되어 있으며 이베리아 반도의 농업용 관개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강이란다.
와이너리 킨따 다 폰치 벨라를 비롯해 내가 지나온 광대한 농업단지도 이 강(Tagus)의 혜택으로 존재하며
아름다운 풍경과 풍부한 자원으로 인하여 고대부터 스페인과 포르뚜갈의 역사 형성에 중요했다는 강.
내가 태어난 곳(現 全北 井邑市 七寶面)에도 수력발전소가 있다.
섬진강의 발원지인 댐의 물 일부를 산허리를 뚫은 터널을 통해 반대편(칠보) 저지대로 떨어지게 하는 유역
변경식(流域變更式)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공군의 폭격 목표가 되었을 만큼 비중있는 발전소다.
우리의 관계 당국자들은 이 발전소(유역변경식)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 라며 최초에 힘을 주고 있으나 실
은, 매우 유감스럽게도 자랑할 일이 되지 못한다.
우리 부형들의 노동력으로 건설은 되었으나 일제 식민시기에 저들(일제)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일제는 양질의 식량을 보다 더 많이 수탈하기 위해 김제와 부안의 서해에서 대규모 간척사업을 벌렸다.
현대의 토목 건설 장비가 전무한 시기였기 때문에 강제 동원된 우리 부모들의 피땀으로 반죽된 제방이다.
또한, 이 광대한 곡창(간척지)에 필요한 농업 용수 때문에 고심을 거듭하던 저들은 일거양득(一擧兩得), 일
석이조(一石二鳥)의 묘수를 찾아냈다.
유역을 변경하여 형성된 낙차로 터빈(turbine)을 돌려 전기를 생산한 후, 그 물을 수로를 통해 곡창지대의
농업용수로 재사용하는 것.
이 발전소가 내 고향(七寶)에 있으며 이 수로는 곡창지의 덪줄인 동진강(東津江)이다.
(현대의 댐은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되었다.
전기의 생산과 농 공업 용수뿐 아니라 상수원도 되며 홍수 조절 기능까지 하는 '다목적 댐'이니까.
일제 당시 우리는 미개하였지만 이 시대에는 우리가 직접 만든 다목적 댐이 무수하거니와 저들을 추월해서
세계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척화비(斥和碑)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충분히 개화되었을 것이므로
질곡의 식민 시기가 없었음은 물론 보릿고개도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므로 공해와 맞바꿀 일도 없었을 것이
기에 오호 통재로다.)
저들은 이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조선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조선의 영구 통치를 목적으로 내세운 '나이센잇타이'(ないせんいったい /內鮮一
體/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다)라는 슬로건 아래에서 무자비한 탄압과 착취를 더해갔다.
동진강의 지류 확장사업이라는 미명이 나를 죽음 직전에서 소생시켰으며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득차 있는
정든 집을 수장하고 우리를 이주민의 쓰라림에 잠기게 하였으니까.
해방과 더불어, 내 집을 삼킨 이 사업(지류 확장)은 없었던 일이 되었으나 우리 가족은 되돌아 가지 않았다.
이미 파헤쳐진 터에 재건축하는 것이 용이한 일이 아니었거니와 다른 지역 마을의 보다 큰 집을 매입, 우리
생활에 편하게 개수하여 정착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소학교 3년생/現 초등학교)에 수시로 목도된 것이 터널에서 터빈에 이르는, 노출된 대형 수로관 위
에서 어떤 작업을 하는 일군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사라지면 이전과 다른 색깔의 수로관이 놓여있거나 긴 수로관은 사라지고 푸른 숲만 보였는데 위장
페인팅을 하거나 생나무로 숲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저들은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부터 수로관을 보호(은폐)하기 위한 위장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