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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김인선(우리문화연구)
중국 당나라의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 등 8명의 산문작가의 총칭하는 말이다. 한유·유종원은 육조 이후 산문의 내용이 공소(空疎)하며 화려한 사륙변려체(四六騈驪體)의 문장인 데 대하여, 진한(秦漢) 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 유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간결하며 뜻의 전달을 지향하는 새로운 산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고문운동(古文運動)이다.
이 운동은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지만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점차 기세가 약해졌다. 그것은 새로운 표현과 착상의 연구가 뜻의 전달성을 희박하게 하였고, 또한 도덕지향(道德指向)의 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도학 냄새가 짙은 것이 원인이었으며, 그 반동으로 당나라 말기에서 5대에 걸쳐 육조식(六朝式) 탐미적 산문(耽美的散文)이 부활하였고, 북송(北宋)의 천성기(天聖期)가 되자 구양수가 한유의 문집을 규범으로 하여, 알기 쉽고 유창한 산문을 만드는 혁신운동에 앞장서, 이 운동으로부터 소순·소식·소철·증공·왕안석 등 우수한 문학자가 배출되었다.
당송팔대가라는 병칭(竝稱)은 송나라의 진서산(眞西山)이 처음으로 주창하였고, 뒤이어 당순지(唐順之)가 당나라·송나라의 우수한 작가를 이 8명으로 묶어 산문선집 《문편(文編)》에 수록하였으며, 다시 명(明)나라의 모곤(茅坤)이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160권)를 편집하여 보급하였다. / 네이버 백과사전
① 한유(韓愈, 768∼824)
중국 산문의 대가이며 탁월한 시인이다. 자(字)는 퇴지(退之). 한문공(韓文公)이라고도 한다. 중국과 일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후대 성리학(性理學)의 원조이다. 어려서 고아였고, 처음 과거에 응시했을 때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문체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낙방했다. 그후 25세에 진사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지냈다. 사후에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되었고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유학이 침체되어가던 시기에 유학을 옹호했던 그는 헌종(憲宗)이 불사리(佛舍利)에 참배한 데 대해 끝까지 간(諫)한 일로 인하여 1년 동안 차오저우[潮州] 자사(刺史)로 밀려나 있었고, 평생을 불우하게 지내야 했다. 유학을 옹호하기 위해 그때까지 유학자들이 다소 소홀히 하던 〈맹자〉·〈대학 大學〉·〈중용 中庸〉·〈주역 周易〉을 광범위하게 인용했다. 후대의 성리학자들은 기초개념을 이 책들에서 취했고 한유는 성리학의 기초를 놓은 셈이었다. 한유는 당시에 유행하던 규칙적인 운율과 고사성어로 가득 찬 변려문(騈儷文)을 배격했고, 위의 책들을 만든 옛 학자들처럼 자유롭고 간결한 문체의 사용을 주장했다. 그가 쓴 〈원도 原道〉·〈원성 原性〉 등은 중국문학의 백미이며 그가 주장한 고문체 문장의 대표작이 되었다. 시문학에서도 그는 기존의 문학적 형식을 뛰어넘으려고 했다. 그러나 문학에서 그가 기울인 노력의 많은 부분은 실패로 끝났다
중국 당(唐)의 유학자, 문장가. 자는 퇴지(退之), 당시 당나라는 지배계급 내부에서 보수파의 족벌 호족과 개혁파의 신흥 서족(庶族) 사이에 격렬한 '당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의 문필 활동은 이 당쟁 하에서 전개되었다. 문장가로서 유종원(柳宗元) 등과 고문(古文) 부흥에 힘써,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라 일컬어진다.
유학자로서 석가, 노자를 배척하여 유교정신을 명확히 하고, '도통'(道統)의 관념을 주창하여 송학(宋學)의 선구가 되었다. 즉 석가와 노자의 비판을 통하여 유교의 목적을 인간의 '상생상량'(相生相養)에 두고 유가의 도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군신ㆍ부자의 의를 지켜 널리 대중을 사랑하는 길이라 하였다. 이 도는 요(堯)대에 시작하여 순(舜)에 전해지고, 맹자(孟子)에게까지 이어졌지만, 이후 단절되어 전해지지 않고 석가와 노자의 사상에 빠져 버렸던 것을 그가 명확히 했다고 한다. 이것이 '도통'의 관념이다. 또한 사람의 성(性)에 상ㆍ중ㆍ하의 삼품(三品)이 있다는 주장은 당시의 품급(신분) 질서 하에서의 인간성에 대한 고찰이다.
② 유종원(柳宗元, 773∼819)
중국 당대의 문학자·철학자이다. 이명은 유하동(柳河東) 자는 자후(子厚). 하동해(河東解:지금의 산시 성 윈청[運城]) 사람이다. 일찍이 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왕숙문(王叔文)의 혁신단체에 참가했으나, 실패하여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 후에 유주자사(柳州刺史)를 지내 유유주(柳柳州)라고도 한다. 한유(韓愈)와 함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제창하여 거의 1,000년 동안 귀족 출신의 문인들에게 애용된 변려문(騈儷文)에서 작가들을 해방시키려고 했다. 한유와 함께 당송8대가에 속하여 '한·유'(韓柳)라고 병칭된다. 그러나 철학상으로는 한유와 큰 견해 차이를 보여, 천(天)의 의지유무(意志有無)에 관해 논쟁을 벌였다. 유종원은 천지가 생기기 전에는 오직 원기(元氣)만이 존재했으며, 천지가 나누어진 뒤에도 원기는 천지중에 있다고 생각했다. 원기 위에 천이라는 최상위 개념이 있는 것을 부정하여 천이 상과 벌을 내린다는 천명론에 반대했다. 잡문(雜文)에서 전형적인 사물을 예로 들어 심오한 철리(哲理)를 제시했다. 〈포사자설 捕蛇者說〉·〈종수곽탁타전(種樹郭駝傳)〉·〈영주철로보지(永州鐵爐步誌)〉·〈삼계(三戒)〉·〈부판전(蝜蝂傳)〉 등은 모두 정론(政論)과 철리를 예술적인 형상과 융합시킨 것으로, 구상이 참신하며 문체가 생동감 있다. 그의 산수유기(山水遊記)는 널리 알려져 있는데, 특히 경물(景物)의 특징을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 유명한 〈영주팔기(永州八記)〉 가운데 〈고무담서소구기(潭西小丘記)〉는 돌을, 〈소석담기(小石潭記)〉는 담수어를, 〈원가갈기(袁家渴記)〉는 초목을 묘사했는데, 서로 다른 각각의 사물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또한 세상에 대한 울분을 자연풍경에 이입하고, 속세와 떨어져 있는 기이한 산수에 마음의 울분을 기탁하여 작품에 반영했다. 시의 내용은 담백하며, 유배생활을 반영한 작품과 경치를 묘사한 소시(小詩)는 매우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그밖에 〈유하동집(柳河東集)〉이 있다.
중국 당나라의 문인이며 정치가이자 학자. 한유 등과 고문(古文) 부흥에 종사한 문인으로 알려져 있고, 또 문벌호족파에 대한 서민족파의 정치가, 동시에 무신론적인 전투적 사상가이다. 한유의 유신론에 의한 '천형'(天刑 :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는 관념에 반대하고, '천'(天)은 '생식과 재황'(災荒)에만 관계할 뿐, '법률과 패란'(悖亂)은 모두 '인'(人)에 속하며(여기에서는 순자의 천인天人을 나누는 관점이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사람이 특별시하는 '천지', '원기'(元氣), '음양' 등도 단지 규모가 클 뿐, 과일이나 씨앗이나, 초목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하면서 이들의 비인격적이고 자연적인 물질성을 강조하였다.
이 무신론은 '원기'(元氣)일원의 유물론 철학을 이루고 그 원칙은 사회ㆍ역사의 영역에 두루 일관되게 적용되어 인간의 능동성과 평등성을 표방하는 '생인(生人)의 의'(意)라는 개념을 낳았고, 이것에 기초하여 현실에 나타나는 빈부의 차의 불합리나 미신적인 천인상관적(天人相關的) 설명을 공격하였다.
③ 구양수(歐陽脩, 1007∼1072)
중국 북송(北宋) 때의 시인·사학자·정치가이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시호는 문충(文忠). 송대 문학에 '고문'(古文)을 다시 도입했고 유교원리를 통해 정계(政界)를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구양수는 쓰촨 성 몐양의 지방관이었던 아버지 구양관(歐陽觀)을 3세에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후베이[湖北]에 살고 있던 숙부 구양엽(歐陽曄)의 집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자랐다. 집안이 너무나 가난해서 모래 위에 갈대로 글씨쓰는 연습을 했다는 이야기는 과장된 것인지 모르지만 집안이 궁색한 형편에 놓여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1030년 진사(進士)시험에 장원급제하여 서쪽의 수도였던 뤄양[洛陽]의 유수추관(留守推官)을 제수 받았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문인으로 일찍부터 명성이 높았던 구양수는 뤄양에서 유명한 시인 매요신(梅堯臣) 등과 사귀었다. 이들과의 친분으로 인해 구양수의 문학적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이를 계기로 고문의 간결성·명료성에 더욱 열중하게 되었다. 구양수는 몇 해 전 당대(唐代)의 대문장가인 한유(韓愈)의 작품을 읽고 케케묵은 은유와 고전문구의 인용을 일절 배제한, 평이하고 간결한 고문체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후 고문체 부흥의 지지자·지도자로 활약하면서 새로운 문학운동의 전기를 마련했다.
1034년 수도 카이펑[開封]에 있는 황실도서관 사서직을 맡게 되었다. 2년 뒤 고위관리인 범중엄(范仲淹)이 조정의 제도와 정책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재상(宰相) 여이간(呂夷簡)에 의해 좌천되었을 때 구양수는 서슴지 않고 여이간을 공격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결과 그도 후베이 성, 후난 성[湖南省]의 하급관리직으로 강등·좌천되었다. 이곳에서 거의 1,000년에 이르는 정치적 혼란시대를 다룬 역사서인 〈오대사기(五代史記)〉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엄격하고 공정한 사관(史觀)에 입각하여 정치적 소외세력인 순교자·반란자·매국노 등에 대해서도 별도의 지면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그 전대(前代)의 역사가들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수도 카이펑으로 다시 돌아온 범중엄과 다른 고관들의 추천을 받은 구양수는 1043년에 카이펑으로 소환되어 지간원정(知諫院正)이 되었다. 범중엄과 기타 정치개혁가들이 사사로운 파당을 조직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자 구양수는 유명한 〈붕당론(朋黨論)〉을 써서 사대부들의 개인적인 모임이 정치적으로 유익하다는 주장을 폈다. 그의 용기와 직언에 감복한 인종(仁宗)은 구양수를 황제의 일상생활을 기록하고 조칙(詔勅)의 초안을 작성하는 직책에 임명했다. 그는 직언과 엄정한 비평 때문에 적이 많았는데 1045년에는 여러 해 전에 조카딸과 불륜관계를 맺었다는 탄핵을 받아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가 뤄양 시절에 여자관계가 문란했던 점을 미루어볼 때 이 탄핵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어 보인다. 비록 무죄로 방면이 되기는 했지만 그의 명성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구양수는 다시 강등되어 안후이 성[安徽省]의 추저우[州] 지사(知事)로 좌천되었으나 이 고장의 아름다운 전원풍경에 매혹되어 더욱 술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스스로 호를 취옹(醉翁)이라 지은 뒤, 취옹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취옹정기〉라는 수필을 썼다. 이 글은 중국문학에서 가장 이름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1050년 남쪽 수도인 허난 성 구이더[貴德]의 자사(刺史)를 거쳐 1054년에는 수도로 소환되어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가 되었다.
좌천된 지 거의 9년 만에 수도로 돌아와서 맡게 된 이 새로운 보직은 승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역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강직함과 직설적인 태도 때문에 동료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의 첫번째 임무는 〈신당서(新唐書)〉를 저술하는 것이었다. 1년 뒤 이 작업이 막 시작되던 때 구양수는 중국 북부의 대부분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만주 거란족에 송의 사절로 파견되었다. 1057년 지공거(知貢擧:과거시험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 해의 과거시험에서 고문체로 답안을 작성한 사람들은 합격시키는 한편, 문학적 수사를 많이 사용하는 태학체(太學體)로 답안을 작성한 사람은 모두 불합격시켰다. 이렇게 하여 합격된 사람들 가운데는 후에 '당송 8대가'로 칭송되는 소식(蘇軾:蘇東坡)·소철(蘇轍) 형제와 증공(曾鞏)이 끼어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자기 자신의 문학관을 전통적인 과거시험에 적용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은 낙방생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변려문(騈儷文)보다 고문(古文)을 더 중시하는 결정적이고 획기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중국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는 왕안석(王安石)과 소식 같은 유능한 젊은 문인들을 칭찬하고 독려했다.
〈신당서〉가 완성된 1060년 그는 사회·재정·군사 등의 각 분야에서 많은 공적을 남기면서, 군정(軍政)을 담당하는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승진했고 그다음 해에는 부재상(副宰相)에 해당하는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그러나 궁중에서 더이상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운 사태가 발생하여 60세에 그의 관운(官運)은 끝이 났다. 그는 며느리와 불륜관계를 맺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고 그로 인해 명성에 타격을 받아 수도에서 점점 더 고립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거듭하여 퇴관시켜줄 것을 건의했으나 새로 등극한 신종(神宗)은 이를 거부하고 그를 안후이·산둥·허난 등지의 지방관으로 내보냈다.
산둥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그는 전에 자신이 키워 준 왕안석이 제정한 신법(新法) 가운데 농민에게 낮은 이자로 대출해주는 청묘법(靑苗法)에 특히 반대하여, 그의 관할 지역에서 그 제도를 실시하지 않았다. 이무렵 그는 분명 신법의 시행에 실망을 느낀 보수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1071년 그는 태자소사(太子小師)가 되어 은퇴했다. 그는 취옹정이 있는 아름다운 안후이성의 영주(潁州:지금의 푸양 현[阜陽縣])에서 은퇴 후의 생활을 보낼 작정이었으나 그곳에서 몇 달 살지 못하고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구양수의 개인적 영향력과 여러 방면에 걸친 업적은 그가 죽은 후에도 지속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정치가로서는 유교원리를 통해 당시의 정계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유능한 인재들을 적극 추천했다. 추천받은 사람들 중에는 나중에 그와 반대편에 선 사람들도 있었다. 구양수는 일찍이 한유의 작품에 심취하여 한유의 억불정책(抑佛政策)을 지지했으나, 한유보다는 온건한 입장이었다. 그는 맹자의 글처럼 간결명료한 한유의 고문체 문장을 좋아하여 당시 유행하던,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고 운율을 맞춘 태학체 문장을 멀리하고 고문체 문장을 즐겨 썼다. 고문체로 쓰여진 그의 문장은 이후 많은 문인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는 산문시인 부(賦)의 형태를 여러 가지 제약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했고, 부와 사(詞)를 비롯한 다른 문학형태에서 모범이 되는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오대사기〉와 〈신당서〉에서는 전통 역사서의 형태와 범위를 확충했고 간결하지만 정확한 기술과 도덕적 판단을 통하여 그당시의 인물과 제도를 평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공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의식했으리라고 생각된다. 학자로서는 후대의 주석들을 무시하고 원전(原典)을 새롭게, 그리고 직감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고고학연구에도 일조했고, 화가로서는 새로운 문인화(文人畵)화법을 창안했다. 그가 남긴 저서로 전해져 오는 것은 역사서 이외에도 시·정부문서·편지, 기타 소품들을 합쳐 150권이 넘는다. 그의 서재는 1만 권이 넘는 책과 고대로부터의 문학적 유품 및 고고학적 기록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사후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④ 소순(蘇洵, 1009∼1066)
중국 북송(北宋) 때의 문학가이다. 자는 명윤(明允), 호는 노천(老泉). 쓰촨 성[四川省] 메이산 현[眉山縣] 출신으로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며, 시인 소동파(蘇東坡:蘇軾)의 아버지이다. 28세 때 과거에 낙제하자 그때까지 지은 글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두문불출하며 오로지 독서에 전념했다. 그결과 6경(六經)에서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두루 꿰뚫게 되었고, 단시간 내에 수천 언(言)의 글을 지을 수 있는 대문장가가 되었다. 인종(仁宗) 말기에 두 아들인 소동파·소철(蘇轍)을 데리고 상경하여 당시 한림학사(翰林學士) 구양수(歐陽修)에게 인정받았다. 구양수가 천자(天子)에게 그의 저서 22편을 바치자 학자들이 입을 모아 그의 글들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후 비서성(書省) 교서랑(校書郞), 원안 현[文安縣] 주부(主簿)를 지냈다.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북송 이래 예(禮)에 관한 책들을 요벽(姚闢) 등과 함께 편집한 〈태상인혁례 太常因革禮〉 100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