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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부재명야 득부득시야 (才不才命也。得不得時也)
〚재주가 있고 없음은 명(命)에 달렸고, 얻고 얻지 못함은 시기(時)에 관계되니, 모두 억지로 이룰 수 없는 것이다(然才不才命也。得不得時也。皆不可強而致者).〛
육은시(六隱詩) ~ 서하 이민서 선생
육은시 병서〔六隱詩 幷序〕<출처 : 서하집(西河集) 제1권 / 오언고시(五言古詩)>
전(傳)에 이르기를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고 그 뜻을 고상히 한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천지가 닫히면 현자가 은둔한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이 글의 의미를 찾아보니, 선비 중에 더러 훌륭한 재능을 지니고서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고 만물의 밖에서 홀로 서 있는 이가 있으니, 이는 진실로 시명(時命)에 매이지 않은 것이다. 말세에 암우한 군주가 위에 있어서 명철(明哲)한 이들이 나날이 멀어지거나 혹은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도탄에 빠지면 지혜로운 자들이 기미를 보고 떠나고 현명한 이들이 종적을 멀리 감추나니, 이와 같은 부류는 또한 부지기수이다. 사람의 무리를 떠나 새나 짐승과 어울리면서, 쓸쓸하게 지내며 어울리는 벗이 없고 곤궁한 생활에도 멀리 숨는 것을 어찌 사람이 좋아하는 바이겠는가. 또한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요(堯)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도 허유(許由)는 은둔했는가 하면, 광무제(光武帝)를 벗으로 둔 엄릉(嚴陵)은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이를 통해 본다면, 또한 저마다 뜻한 바가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인간 세상을 벗어나 초야(草野)에 뜻을 두어, 지극한 도에 빠져들고 적송자(赤松子)와 왕자교(王子喬)를 자나 깨나 갈망하면서 다만 조물주와 함께 하고 세속의 기운을 받지 않는다면,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 어찌 그저 헌면(軒冕)과 종정(鍾鼎)이겠는가. 그렇다면 성군(聖君)도 피할 수 있을 것인데 하물며 혼란한 세상이겠으며, 종정도 사양할 수 있는데 하물며 치욕스럽게 형벌을 당하는 데 있어서랴. 이것이 장주(莊周)가 초(楚)나라 재상을 사양한 이유이고 한자(韓子)가 이원(李愿)을 장하게 여긴 까닭이다. 무릇 지혜와 용기, 언변과 힘은 천하에서 훌륭하게 여기는 것이고 영광과 화려함, 세력과 이익은 천하에서 사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주가 있고 없음은 명(命)에 달렸고, 얻고 얻지 못함은 시기[時]에 관계되니, 모두 억지로 이룰 수 없는 것이다(然才不才命也。得不得時也。皆不可強而致者). 만약 일에 종사하지 않고 한갓 뜻만을 고상히 한다면, 비록 평범한 사람이라도 백이(伯夷)나 허유와 구별될 수 없을 것이다. 의리는 힘쓸 수 있지만 재주는 요행으로 바랄 수 없다. 더구나 일을 주고 성과를 평가할 때에는 성패가 있기 마련이어서 상벌이 뒤따르게 된다. 종사하는 바가 없으면 하는 일이 없고, 하는 일이 없으면 성공과 실패도 없어진다. 게다가 나아가는 자는 동적이고 가만히 머무는 자는 고요하여, 동적인 자는 수고로운 데 비해 고요한 자는 편안하고, 동적인 자는 위태로운 데 비해 고요한 자는 안정되니, 안정되고 편안함을 버리고 수고롭고 위태로운 상황으로 나가는 것을 지혜로운 이는 하지 않는다. 나는 이에 은둔한 여섯 선비에 대하여 각각 시를 지어 이들의 지취(志趣)를 완상(玩賞)하노라.
[주-1] 전(傳)에 …… 은둔한다 :
《주역》 〈고괘(蠱卦) 상구(上九)〉에 “왕후를 섬기지 않고 그 일을 고상하게 한다.[不事王侯, 高尙其事.]” 하였는데, 정이(程頤)의 전에 “이는 현인(賢人)과 군자(君子)가 세상을 만나지 못하여 고결함으로 스스로 지켜서 세상의 일에 얽매이지 않는 자이다.” 하였다. 또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천지가 변화하면 초목이 무성하고 천지가 닫히면 현인이 은둔한다.[天地變化, 草木蕃, 天地閉, 賢人隱.]” 하였는데, 정이의 전에 “하늘과 땅이 서로 감동하면 만물이 변화하여 초목이 번성하고 임금과 신하가 서로 사귀어 도가 형통하며, 천지가 막히고 닫히면 만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군신의 도가 끊기어 현자가 은둔한다.” 하였다.
[주-2] 요(堯) 임금이 …… 않았다 :
‘허유’는 중국 상고(上古) 시대의 고사(高士)로, 요 임금이 천하를 양보하려 하자 거절하고 기산(箕山)에 숨었으며, 또 그를 불러 구주(九州)의 장(長)으로 삼으려 하자 영수(潁水) 물가에 가서 귀를 씻었다 한다. ‘엄릉’은 본디 후한(後漢)의 광무제와는 학창 시절의 친구 사이로, 광무제가 등극한 뒤에는 성명을 바꾸고 은거하다가, 광무제의 간절한 초빙에 의해 대궐에 들어가서 광무제를 한 번 만나만 보았을 뿐, 광무제의 간절한 요청을 뿌리치고 끝내 부춘산 아래로 돌아가 은거하여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莊子 逍遙遊》 《後漢書 卷113 逸民列傳 嚴光》
[주-3] 적송자(赤松子)와 왕자교(王子喬) :
‘적송자’는 고대 전설상의 선인(仙人)이다. 적송자는 장량(張良)이 유방(劉邦)을 도와 한(漢)나라를 세운 뒤에 권세에 미련을 두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왕자교’는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 진(晉)이다. 태자 시절에 왕에게 직간하다가 폐해져 서인이 되었다. 젓대를 잘 불어 봉황새 소리를 냈으며 도사(道士) 부구공(浮丘公)을 만나 흰 학을 타고 산꼭대기에서 살았다 한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列仙傳 王子喬》
[주-4] 장주(莊周)가 …… 까닭 :
‘장주’는 전국 시대 몽(蒙) 지방 사람으로, 일찍이 칠원(漆園)에서 관리를 지냈다. 장주가 현인이라는 말을 들은 초 위왕(楚威王)이 사신을 보내 후한 예물로 그를 맞아들여 재상으로 삼으려 하자, 장주는 웃으면서 “천금(千金)이라면 막대한 돈이며 재상이라면 존귀한 지위이지만, 그대는 교(郊)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하였는가? 그 소는 몇 년 동안 사육되다 수놓은 옷이 입혀진 채 태묘(太廟)로 끌려 들어가는데, 그때 가서 하찮은 돼지가 되겠다고 해서 그렇게 될 수가 있겠소? 그대는 빨리 돌아가 나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마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즐거워할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구속당하지는 않겠소.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아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자 하오.”라고 말하며 거절하였다. 《史記 卷63 莊子列傳》 ‘이원’은 당(唐)나라에서 무령 절도사(武寧節度使)가 되었다가 죄를 얻어 파직당하자, 벼슬에 나가기를 즐거워하지 않고 처음 살았던 반곡에 돌아가 은거하였다. 이에 벗인 한유(韓愈)가 그의 처신을 장하게 여기며 전송하는 글을 지었던 것이다. 《五百家注昌黎文集 卷19 送李愿歸盤谷序》
[주-5] 백이(伯夷) :
은나라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할 때 신하로서 임금을 정벌하는 것은 아니라고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 하고 동생 숙제(叔齊)와 함께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었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성인이 백성을 근심하여 / 聖人憂元元
요 임금이 인재를 등용하니 / 明揚乃堯心
이실에 순을 얻지 못한 상태였으나 / 貳室未得舜
두 사람이 담당할 일 아니라네 / 二子非其任
영수의 북쪽으로 돌아가니 / 歸去潁水陽
영수는 맑고 깊어라 / 潁水淸且深
물 맑아 귀를 씻을 만하고 / 水淸可洗耳
기산엔 높은 봉우리 있구려 / 箕山有高岑
명성을 피한 자취 절로 높아 / 逃名迹自高
요의 말 듣고 마음 변치 않았네 / 入耳心匪淫
추념해 보매 따를 수 없구나 / 緬懷不可追
맑은 풍도 지금까지 전해 오네 / 淸風灑至今
(이상은 허유(許由)가 귀를 씻고 소부(巢父)가 피한 것에 대해 읊었다.)
[주-6] 등용 :
원문의 ‘명양(明揚)’은 귀천(貴賤)에 구애받지 않고 덕 있는 자를 기용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 〈요전(堯典)〉에 “이미 현위(顯位)에 있는 자를 드러내어 밝히고 미천한 사람도 올려서 쓴다.[明明, 揚側陋.]”라고 하였다.
[주-7] 이실(貳室)에 …… 상태였으나 :
요(堯) 임금이 순(舜)을 아직 사위로 맞이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 것이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순이 올라가서 제요(帝堯)를 뵈니, 제요가 순을 이실에 관사를 정해 주고 사위로 삼았다.”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注)에 “이실은 부궁(副宮)이니, 요 임금이 순을 부궁에 거처하게 하고 찾아가서 그 음식을 드신 것이다.” 하였다.
[주-8] 두 사람 :
허유(許由)와 소부(巢父)를 가리킨다. 허유와 소부가 기산 영수(潁水)에 숨어 살았는데, 요 임금이 제위(帝位)를 맡기려 하자 허유가 이를 거절하고서 더러운 말을 들었다면서 귀를 씻으니, 이 말을 들은 소부가 “그대가 만약 높은 산 깊은 골에 살면서 세상과 통하지 않았다면 누가 그대를 알아볼 수 있었겠는가.[子若處高岸深谷, 人道不通, 誰能見子?]”라고 꾸짖고는,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자기 소에게 마시게 할 수 없다고 하며 소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서 물을 먹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高士傳 許由》
성인의 수레 편히 머물지 못하고 / 聖轍靡安稅
봄에 또 긴긴 노정에 오르셨네 / 方春又長途
성난 얼굴로 공자를 뵀던 자로가 / 咄彼慍見子
수레 멈추고 길가에 섰다오 / 停車立道隅
함께 밭 가는 자는 누구인가 / 耦耕者誰歟
이들의 도는 진실로 다르다네 / 此子道固殊
어느 농부가 나루터를 아는가 / 田翁孰知津
내 지금 수레 모는 일 멈췄다오 / 我今免馳驅
걱정스러운 건 게을리 김매다가 / 但恐荷鋤倦
곡식 황폐해지는 것일 뿐이니 / 嘉穀坐荒蕪
나루는 묻지 말고 가게나 / 去矣莫問津
공자는 우리 무리 아니로세 / 孔氏非吾徒
(이상은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 함께 밭을 간 것에 대해 읊었다.)
[주-9] 긴긴 노정 :
공자(孔子)는 50대 이후 14년 동안 열국(列國)을 주유(周遊)하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기원전 497년(55세)부터 기원전 484년(68세)까지 14년간 천하를 돌아다녔는데, 갈 때는 노(魯) → 위(衛) → 조(曹) → 송(宋) → 정(鄭) → 진(陳) → 채(蔡) → 초(楚)의 순서이고, 돌아올 때는 초 → 진 → 위 → 노의 순서였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駱承烈, 孔子歷史地圖集, 中國地圖出版社, 2003, 70쪽》
[주-10] 성난 …… 자로(子路) :
공자가 진나라에 있을 적에 양식이 떨어져 종자(從者)들이 일어나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자, 자로가 성난 기색으로 공자에게 따졌던 일이 있었다. 《論語 衛靈公》
[주-11] 수레 …… 섰다오 :
공자가 가던 길에, 마침 은자(隱者)인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 김매기를 하는 것을 보고 자로를 시켜 나루터를 묻게 했는데, 이들은 공자가 천하를 돌아다니는 쓸데없는 노고를 한다고 비난할 뿐, 나루터는 알려 주지 않았다. 《論語 微子》 한편 김학주(金學主)는, 《논어》에 등장하는 은자(隱者)로 ‘장저’와 ‘걸닉’을 비롯하여, ‘하조 장인(荷蓧丈人)’, ‘접여(接輿)’ 등이 있다고 하면서, 이들은 비록 그 하는 일이 미천하지만, ‘장저’의 경우 ‘공구(孔丘)’라는 이름만 듣고도 그가 노(魯)나라의 공자임을 알았고, ‘걸닉’과 ‘접여’의 경우에는 공자의 학문과 노력이 당시의 세상에 맞지 않는 것임을 꼬집어내고 있는 것을 볼 때, 그 지식과 소양으로 미루어 이들이 영락한 귀족의 후예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동시에 초기(初期) 도가(道家)의 사상가일 것으로 보았다. 《金學主, 老子와 道家思想, 太陽文化社, 1978, 59~64쪽》
[주-12] 이들의 …… 다르다네 :
장저와 걸닉이 바라보는 세계관은 공자를 위시한 유학적 세계관과 다르다는 말이다.
종남산 곁의 네 노인 / 四老南山側
솔과 눈 사이로 은둔하니 / 沈冥松雪間
흰머리에 양쪽 귀 덮였는데 / 白髮被兩耳
위태로운 시대이건만 안색이 좋구나 / 時危帶好顔
산 깊어 풀에는 이슬 많고요 / 山深草露多
해거름이면 영지 캐다 돌아오는데 / 日暮採芝還
내와 골짝엔 영지로 그득하여 / 芝生滿川谷
편안히 지내며 산을 나오지 않네 / 偃仰不出山
진나라 학정 피한 자취 훌륭했고 / 逃秦迹已奇
한나라 설득함도 대수롭지 않았지 / 說漢亦等閑
진퇴는 진실로 내게 달렸나니 / 卷舒固在我
고상한 자취 누가 따를 수 있을까 / 高躅誰能攀
(이상은 상산(商山)에서 영지 캐는 것을 읊었다.)
[주-13] 종남산(終南山) …… 노인 :
진(秦)나라 말기에 전란을 피해 상산(商山)에 들어가서 은거했던 4인의 백발노인, 즉 동원공(東園公)ㆍ기리계(綺里季)ㆍ하황공(夏黃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으로 일명 ‘상산사호(商山四皓)’라고 불린다. 이들은 한 고조(漢高祖)가 초빙하였으나 세상으로 나오지 않고 종남산에 은둔하였다. 《高士傳 卷中 四皓》
[주-14] 한(漢)나라 …… 않았지 :
한 고조(漢高祖)가 태자를 폐하려 할 때 여후(呂后)가 장량(張良)의 말을 듣고 상산사호를 불러와 태자를 보좌하게 하였는데, 고조가 그들이 태자를 모시고 있는 것을 보고 “우익(羽翼)이 이미 형성되었다.” 하고, 마음을 바꿨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동방에 있는 한 선비를 / 東方有一士
한나라 궁궐에서 찾으니 / 物色自漢宮
벗이 어찌 나를 알아주랴 하면서 / 故人豈知我
청명한 시대에 되레 연못가로 숨었네 / 時淸猶澤中
비록 공동산을 방문한 은혜 입었지만 / 雖被崆峒訪
본디 기산의 자취를 좋아했다오 / 素悅箕山蹤
광무제는 어진 보좌 잃었지만 / 興王缺良佐
혼탁한 세상에 청풍을 드날렸네 / 濁世激淸風
백 척 높이 낚시터 / 釣臺高百尺
그 위에 한 늙은 낚시꾼이 / 其上一釣翁
평지 사람을 굽어보나니 / 俯視平地人
초연하여 함께 어울리기 어렵구나 / 超然難與同
(이상은 동강(桐江)에서 낚시하는 것에 대해 읊었다.)
[주-15] 동방(東方)에 …… 찾으니 :
후한(後漢)의 엄광(嚴光)은 광무제(光武帝)가 황제가 되기 전에 함께 공부한 친구였는데, 광무제가 제위에 오르자 이름을 바꾸고 몸을 숨겼다. 제(齊) 지역에 은신했던 엄광을 찾아내어 조정에 나오게 하니 엄광이 대궐에 이르러 며칠간 광무제와 술자리에서 회포를 풀고는 끝내 제수하는 벼슬을 받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에 은둔하여 밭 갈고 낚시하며 여생을 마쳤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嚴光》 조선(朝鮮)의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엄광론(嚴光論)〉에서 엄광은 광무제가 하(夏)ㆍ은(殷)ㆍ주(周) 시대의 도로 다스릴 수 없음을 깨닫고 떠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南冥集 卷2 雜著 嚴光論》 한편 근년의 연구 중에, 광무제는 자신이 집권하는 동안 참위(讖緯)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정치 현장에서 강력히 반영하여, 모든 정치 행위를 도참(圖讖)에 근거하여 시행하였고, 도참을 비난하는 학자들은 성인(聖人)의 법도를 무시한다고 억압하였으며, 나아가 거병(擧兵)과 즉위(卽位), 신하 임명 등에까지도 참위를 맹신했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는데, 이런 견해 역시 엄광의 출처관과 연계해 볼 여지가 있어 보인다. 《김동민, 後漢時代 讖緯의 정치 및 사상사적 고찰, 유교사상연구 제35집, 한국유교학회, 2009, 185~186쪽》
[주-16] 공동산(崆峒山)을 …… 입었지만 :
공동산은 황제(黃帝)가 광성자(廣成子)에게 도(道)를 물은 곳으로, 여기서는 광무제가 엄광이 있는 곳을 방문한 것에 비유하였다.
[주-17] 기산(箕山)의 자취를 좋아했다오 :
기산의 자취는 요(堯) 임금 때 허유(許由)가 기산으로 은둔했던 일을 가리키니, 엄광이 본래 은둔에 뜻이 있었다는 말이다.
[주-18] 동강(桐江) :
엄광이 부춘산으로 들어가 은거하면서 노닐었던 강이다.
방공이 녹문산에 들어가니 / 龐公入鹿門
온 세상이 그의 자취 모르네 / 擧世昧其蹤
약초 캐며 마침내 돌아오지 않나니 / 採藥遂不返
구름과 산이 천 겹으로 막혔구나 / 雲山隔千重
가족 데리고 세상 피할 제 / 避世携家室
홀로 가서 따르는 무리 끊었거늘 / 獨往絶所從
매복은 성문 지키며 더럽혀지고 / 梅福監門汚
관녕은 요동으로 떠났구려 / 管寧遼海東
선생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 / 先生不出鄕
도가 높아 절로 느긋하였나니 / 道高自從容
세상에 알아주는 이 없었지만 / 世人莫我知
평상 아래에선 와룡이 절을 했지 / 牀下拜臥龍
(이상은 녹문(鹿門)에서 약초를 캐는 것에 대해 읊었다.)
[주-19] 방공(龐公)이 녹문산(鹿門山)에 들어가니 :
후한(後漢)의 방공은 방덕공(龐德公) 또는 방거사(龐居士)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래는 남군(南郡)의 양양(襄陽)에 살았는데,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가 초빙하자 나아가지 않고 가솔을 거느리고 녹문산에 들어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後漢書 卷113 逸民列傳 龐公》
[주-20] 매복(梅福)은 …… 더럽혀지고 :
전한(前漢) 말기 왕망(王莽)이 정권을 독단하는 것을 보고 매복은 처자식을 버리고 은둔하였는데, 후에 회계(會稽) 지방에서 시문(市門)을 지키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漢書 卷67 梅福傳》
[주-21] 관녕(管寧)은 요동(遼東)으로 떠났구려 :
관녕은 후한 말의 고사(高士)로, 황건적의 난리를 피해 요동 땅으로 건너간 뒤, 조정의 거듭된 부름에도 일절 응하지 않은 채 37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며 청빈하게 살면서 언제나 ‘검은 모자[皂帽]’를 쓰고 유유자적하였다. 《三國志 卷11 魏書 管寧傳》
[주-22] 선생은 …… 않고 :
방공이 은둔한 녹문산 역시 그가 살던 양양 지역에 있던 산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23] 평상 …… 했지 :
와룡은 제갈량(諸葛亮)을 가리킨다. 제갈량이 방덕공을 찾아가면 반드시 방덕공이 앉은 상(牀) 아래서 공경히 절하였고 방덕공은 제지하지 않고 태연히 절을 받았다고 한다. 《三國志 卷37 蜀書 龐統傳 注》
깊은 골짝에 볏모 심으나 / 種苗深谷底
모가 자랄 농토 부족하니 / 苗生無阡陌
몇 이랑 애써 일궈 보지만 / 辛勤數畝間
연말 수확량 적기만 하여라 / 歲晏少所穫
호미 메고 때때로 피곤해지면 / 荷鋤有時倦
지팡이 짚고 하루를 보낸다오 / 倚杖終日夕
지극한 도는 이름 없음을 높이 여기니 / 至道貴無名
도 닦는 공부 담박함에 맡겼다네 / 玄功寄淡泊
은거하여 혼탁한 세속 사절하매 / 沈冥謝世氛
암석엔 적막이 감돌지만 / 寂寞在巖石
다행히 세금 거두는 아전 없으니 / 幸免吏索租
어찌 한 해 수확량 적다 하리 / 豈云歲功薄
(이상은 곡구(谷口)에서 밭 가는 것에 대해 읊었다.)
[주-24] 지극한 …… 여기니 :
《노자(老子)》에 “도는 언제나 이름이 없는 통나무이다.[道常無名, 樸.]” 하였는데, 오상무는 이에 대해 “도는 통나무에 비유된다. 통나무는 각종 기물로 제작되기 이전의 원목이다. 이 통나무는 아직 어떠한 기물로도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밥그릇, 국자, 도마 등과 같은 구체적 사물의 이름으로 불릴 수 없다. 그래서 이름이 없다. 이 통나무가 제재되면 밥그릇, 국자, 도마 등의 각종 기물로 만들어지고 거기에 따라서 이름들도 생기게 된다. 도와 만물 간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도는 애초에 혼돈 상태의 그 무엇이다. 그것은 이름이 없다. 그런데 그러한 도가 스스로 운동하여 갖가지 사물들을 생성해 낸다. 갖가지 사물들이 생겨나면, 거기에 따라서 그것들의 이름들, 예를 들어 하늘, 땅, 강, 산, 보리, 벼 등의 이름들이 생겨난다. 이처럼 도는 명명 불가능하지만 구체적 사물들은 명명 가능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老子 32章》 《오상무, 老子 無名論 新探, 철학연구 제91집, 철학연구회, 2010, 16쪽》
[주-25] 암석(巖石)엔 적막이 감돌지만 :
한(漢)나라 때에 정박(鄭樸)이라는 고사(高士)가 곡구(谷口)에 은둔하여, 권세가인 왕봉(王鳳)의 초빙에도 일절 응하지 않고 청고(淸高)하게 살았는데, 그 후 곡구는 은자(隱者)가 사는 곳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으며, 지조를 지키며 청렴하게 은둔해 생활하는 사람을 비유할 때에 ‘곡구자진(谷口子眞)’ 또는 ‘곡구진(谷口眞)’이라 하였다. 자진은 정박의 자이다. 《高士傳 卷中 鄭樸》 《법언(法言)》 권5 〈문신(問神)〉에 “곡구의 정자진이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암석 아래에서 농사짓고 살았는데, 그 명성이 서울에 자자하였다.[谷口鄭子真耕於巖石之下, 名振京師.]” 하였다.
출처 : 서하집(西河集) 제1권 / 오언고시(五言古詩)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황교은 유영봉 장성덕 (공역) | 2018
六隱詩 幷序
傳曰不事王侯。高尙其志。又曰天地閉而賢人隱。蓋嘗以是求之。士或有懷寶蘊奇。窅然不以天下爲意而獨立於萬物之表。是固不繫於時命矣。至若叔季之世。昏君在上而明哲日遠。或干戈爭奪而生靈塗炭。智者色擧。明者遠跡。若此類者亦不可勝數。夫離人群混鳥獸。寂寥而無朋。枯槁而遐遁。豈人之所樂哉。蓋亦有不得已焉。雖然以堯爲君而許由逃之。以光武爲故人而嚴陵不就。由是觀之。亦各其志。方其脫屣人間。寄意煙霞。沈冥至道。寤寐松喬。獨與造物者俱而不獲世之滋氛。此其樂豈直軒冕鍾鼎哉。然則聖君可避。況昏亂哉。鍾鼎可辭。況有刀鋸之辱哉。此莊周所以辭楚相而韓子所以壯李愿也。夫智勇辯力。天下之所賢也。榮華勢利。天下之所慕也。然才不才命也。得不得時也。皆不可強而致者。若不事事而徒尙志則雖庸人。與夷由無辨矣。義可勉而才不可幸者也。況授事試功者。有成有敗而賞罰隨之。無所事則無所爲。無所爲則無成與毀矣。且出者動處者靜。動者勞靜者逸。動者危靜者安。去安逸而就勞危。智者所不爲也。余於是得隱遁之士六人。各爲之詩。以賞其趣云。
聖人憂元元。明敭乃堯心。貳室未得舜。二子非其任。歸去潁水陽。潁水淸且深。水淸可洗耳。箕山有高岑。逃名跡自高。入耳心匪淫。緬懷不可追。淸風洒至今。
右巢父洗耳
聖轍靡安稅。方春又長途。咄彼慍見子。停車立道隅。耦耕者誰歟。此子道固殊。田翁孰知津。我今免馳驅。但恐荷鋤倦。嘉穀坐荒蕪。去矣莫問津。孔氏非吾徒。
右沮溺耦耕
四老南山側。沈冥松雪間。白髮被兩耳。時危帶好顏。山深草露多。日暮採芝還。芝生滿川谷。偃仰不出山。逃秦迹已奇。說漢亦等閑。卷舒固在我。高躅誰能攀。
右商山採芝
東方有一士。物色自漢宮。故人豈知我。時淸猶澤中。雖被崆峒訪。素悅箕山蹤。興王缺良佐。濁世激淸風。釣臺高百尺。其上一釣翁。俯視平地人。超然難與同。
右桐江垂釣
龐公入鹿門。擧世昧其蹤。採藥遂不返。雲山隔千重。避世携家室。獨往絶所從。梅福監門汚。管寧遼海東。先生不出鄕。道高自從容。世人莫我知。床下拜臥龍。
右鹿門採藥
種苗深谷底。苗生無阡陌。辛勤數畝間。歲晏少所穫。荷鋤有時倦。倚杖終日夕。至道貴無名。玄功寄淡泊。沈冥謝世氛。寂寞在巖石。幸免吏索租。豈云歲功薄。
右谷口耕田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5
출처 : 서하집(西河集) 제1권 / 오언고시(五言古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