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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자 수필은 진지한 인생의 관조, 소박한 일상의 흔적이다. 색깔을 말하라면 담채색이 아닐까? 화려하지 않으나 윤기가 흐르는 소박한 그런 빛깔이 그의 수필에 어울리지 않나 싶다.' ....권대근 교수....정문자 수필 작품연구에서 |
연극 같은 인생
정문자
(아호: 英隱, 수필가, 부산문인협회 회원, 화잠초등학교 교장 역임)
바지랑대 만한 목련나무에 꽃봉오리가 달린다. 옮겨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태어 나는 새 생명이 신기하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로 시작하는 사월의 노래가 입 안에서 저절로 나온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전화벨이 요란스럽다. 오래 전 내 마음에서 잊혀진 서 여사가 안부를 전한다. 자기 남편이 작년에 세상 버렸다고 울먹이며, 손자가 내가 맡고 있는 학교에 다닌다고 하는 게 아닌가. 칡넝쿨 같이 질긴 그녀와의 인연은 한편의 연극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막이 오르면 나는 주연 배우로 등장한다. 눈이 빛나고, 양 볼의 보조개가 인상적인 혜경이는 초등학교 삼 학년이다. 나는 혜경이의 담임이고, 서 여사는 이복 언니다. 유난히 동생을 아끼는 그녀는 천사 같은 얼굴로 시간이 나면 꽃을 들고 학교에 찾아온다. 서 여사와 나는 말똥만 보아도 웃는 이 십대 초반으로 격의 없이 자주 어울린다.
나는 그녀에게 남자를 소개한다. 남자는 당시 상업 고등학교 교사인 강 선생님이다. 사촌 여동생을 통해 알게 된 그는 사범학교 선배이고, 사촌을 좋아하는 사람의 친구다. 그 시절에는 십일 월부터 크리스마스 캐롤송이 거리를 메우면, 젊은이들은 성탄절을 큰 행사 날로 잡는다. 그 해 성탄절 날, 해운대에서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 서 여사와 강 선생님을 초대한다. 나는 다른 사정으로 불참하여, 두 사람을 잘 아는 사촌이 그들의 만남을 주선한다.
내가 낄 틈도 없이 그들의 결혼은 급 물살을 탄다. 청첩장을 받고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했으나 내가 중매쟁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강 선생님과 남편은 학교는 다르지만 중등학교에서 근무하여 서로 아는 사이다. 얼마 후부터 내왕이 끊어지고, 십여 년이 흐른 후 미화당백화점에서 서 여사와 잠시 만난 후 헤어진다. 막이 내린다.
어느 해 가족들이 시골에 다녀오는 길이다. 우리 집 일을 돌봐주던 순이가 대문을 열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언니 처녀 때 피닉스호텔에 갔던 사람한테서 전화 왔던데예' 라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방망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장난 전화일까. 잘못된 전화일까. 감이 잡히지 않는다. 순이는 나에게 살짝 말해도 될 것을 왜 외고 폈을까. 임금의 당나귀 귀를 본 이발사만큼이나 말하고 싶었을까. 묻지도 않는 남편에게 변명하는 것도 어색하여, 눈치만 보고 지낸다. 남편의 화살을 받아낼 갑옷을 몇 겹으로 껴입는다. 누가, 왜 그런 전화를 했을까.
사흘 후 그는 또 전화를 한다. 순이가 '엊그제 전화한 사람'이라며 수화기를 건넨다. 나는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만난 것처럼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는 강 교수다. 이외의 인물이어서 어이가 없고, 맥이 탁 풀린다. 그들 부부는 결혼 후 싸움이 잦고, 싸울 때는 내 때문에 만났다고 내 욕을 한다. 자기들만 싸우는 것이 억울하여, 우리 집에도 불을 질렀다는 요지의 변명이 늘어진다. 세 살 먹는 아이보다 못한 대학 교수라는 사람과 싸울 마음도 나지 않는다. 선생이어서 양심은 있어서 다시 전화를 했을까.
전화기를 빼앗았다는 서 여사는 사과를 하면서 하소연을 한다. 결혼하게 된 동기에서부터 갈등, 이야기는 끝이 없다. 듣고 있어도 공감이 가지 않는다. 대학 교수가 된 남편, 시댁, 경제적인 여유도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싸울 이유가 없는 가정이다. 강 교수가 전화했다는 것을 알게된 남편은 침묵을 지키던 때와는 달리 펄펄 뛴다. 명예 훼손으로 고발한다고 야단이다. 기가 죽은 강 교수와는 달리 토끼 같던 서 여사는 사나운 늑대로 변한다. 강 교수는 때리는 시어머니이고, 서 여사는 말리는 시누이다. 뺨 석 대로 제 이 막은 끝난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 서 여사를 만난다. 혜경이가 다니던 초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할 때다. 신입생 가입학식 날 혜경이가 내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한다. 목소리를 듣고 알았다며 옛날 이야기를 한다. '전봇대로 이를 쑤신다. 아 주사는 점심 먹으러 간다'고 했다며 웃기는 말을 잘했다고 기억한다. 까맣게 잊었던 속어들을 혜경이를 통해서 들으니 부끄럽다. 한 달 후 입학식 날 혜경이가 서 여사와 함께 교무실에 찾아온다. 재산관계로 강 교수와는 사이가 좋지 않지만 언니와는 잘 지낸다. 서 여사의 곱던 얼굴이 갈참나무 낙엽처럼 까칠하고, 고단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세월이 약인지 다시는 보고 싶지 않던 그녀지만 만나보니 마음이 누그러진다. 삼 막은 내린다.
학부모 회의가 있던 날 그녀가 사무실에 찾아온다. 십 년 만에 보는 그녀는 얼굴에 윤기가 흘러 여유가 있어 보인다. 아들과 며느리가 의사라서 자기가 집안 일을 돌본다며, 이야기 중간중간 강 교수가 마지막에 모든 것을 회개했다고 강조한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리 미웠던 감정도 아름다운 추억거리로 남는 모양이다. 서 여사는 자기 남편이 마지막으로 참회한 다섯 사람 중 내가 포함된다고 한다. 얼마나 내 욕을 많이 했으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을까. 앞으로 내가 오래 산다면 욕 덕택일 것이다.
이야기를 끝내지 못하고 그녀는 자리를 뜬다. 책상 서랍 속에 무엇을 넣는 것 같았으나 손님 때문에 모르는 체한다. 집으로 돌아간 서 여사는 책상 속에 상품권을 넣어두었다고 알리며, 며느리가 마련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옷을 해주고 싶지만 부담스러워 할 것이고, 신발을 하려고 해도 그렇다'는 말을 듣고 보니 집히는 것이 있다. 그들의 싸움이 내 탓이라기에 중매했다고 양말 한 짝이라도 사 주었느냐'고 따진 것이 생각난다. 며느리한테 중매 채를 받는 것이 쑥스럽다. 강 교수가 별세했다는 것은 더 걸린다.
인생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시기는 나쁜 날씨가 계속될 때가 아니라 구름 한 점 없는 날이 계속될 때다. 서 여사는 강 교수와 이별 후 처음 맞는 봄을 견디기가 힘든 모양이다. 산과 들에는 온갖 새 싹들이 작년과 똑 같은 모습으로 우리들 곁에 찾아온다. 찬바람 속에서도 목련은 작년과 똑 같은 꽃을 피우지만, 한 번 가면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사람이기에
안타깝다. 그러나 목련은 채 열흘도 버티지 못한다. 한 번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 진리다. 내게 준 상품권으로 서 여사 마음이 편안해 진다면 고맙게 받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사십 년 만에 술 석 잔으로 마지막 막은 끝난다.
인생에 있어서 어려운 것은 선택이 아닌가. 부부 생활은 불충분한 전제에서 출발한 것인 만큼 충분한 결론을 내는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장미에도 가시가 있듯 인생에도 슬픔이 따른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그것대로 정당한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훌륭한 배우가 걸인도 되고 삼류 배우가 대감이 될 수 있는 인생사, 작은 인연으로 내 뜻과는 달리 연극의 주연 배우가 된다. 극본 없이 펼쳐지는 공연이 인생살이인가 보다. '인생은 연극 같다'고 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말이 진리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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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자 계간<문예시대>로 등단, 부산문인협회 회원, 부산수필학회 회원, <다삼> 동인, 화
잠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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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자 수필 작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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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자의 수필 작품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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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여성수필 작품 연구 - "정문자의 수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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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연구 : 정문자의 수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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