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한 가을 맞이
최경주, 양용은의 플레이오프 진출 감회 새로워
다양한 분야서 두각 보이는 한인들 자부심 공유
요즘 처럼 각박한 시기에 어울리지 않는 한가한 소재다. 골프 얘기다. 짙은 녹색 가로수가 아주 조금씩 노란 색깔을 띠기 시작하는 걸 출근 길에 얼핏 보고는 그렇구나 했다. 추석을 지나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가을이 모르는 사이에 곳곳에 스며들고 있었다. 주말이면 NFL과 대학 풋볼이 한창이다. 미국의 겨울을 녹이는 대표적인 스포츠가 안방에 들이 닥쳤는데도 가을이라기 보다는 달력의 바뀌는 숫자만 염두에 두었었다. 삶이 팍팍해 진건가, 상념에 젖어들 계절을 적어도 2, 3주는 놓친 것 같다.
반겨 맞을 겨를도 없이 가을이 왔음을 알아차렸을 때 프로골프도 올 시즌을 마감하는 이벤트로 9월을 채우고 있다. 붐 조성을 위해 다른 프로 스포츠 처럼 골프도 플레이 오프제를 도입했다. 5년 전 부터다. 시즌 중 선수 개개인의 성적이 포인트로 쌓이면 그 포인트를 바탕으로 125명, 100명, 70명, 30명으로 경쟁구도를 압축시킨다. 그렇게 모두 4차례의 플레이오프 토너먼트를 치러 최종 우승자를 가리게 되는데 최종 30명 명단에 한국선수 최경주, 양용은 2명이 이름을 올렸다.
세계 골프계에서 한국 국적 선수의 활약이 새삼스러울 건 없다. 구옥희가 80년대말 LPGA에서 첫 우승을 한 이후 한동안 뜸했다가 박세리가 우승을 끌어 모았고 상대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던 남자들도 최경주를 앞세워 우승을 챙기기 시작했다. 양용은이 타이거 우즈를 꺾고 동양인 최초로 PGA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한 사건은 한국 골프의 발전사에 방점을 찍었다.
이제 잊을 만 하면 우승 소식이 들린다. 최종 30명만 출전하는 대회에 한국선수 2명이 올랐다는 사실도 골프를 좋아 하는 사람들만의 뉴스거리 일 수 있다. 그러나 30명의 국적구성을 보면 느낌이 달라진다. 30명 중 외국 선수는 11명 뿐이다. 호주가 5명으로 가장 많고, 잉글랜드 2명, 한국 2명, 피지 1명, 스웨덴 1명이다.
11월(14~20일) 호주의 멜버른에서 열릴 예정인 미국과 인터내셔널(비유럽 국가) 대항 단체전 골프대회인 프레지던츠 컵의 선수 구성을 보면 한국선수들이 차지하는 골프계의 비중을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최, 양 2선수 외에 김경태 선수까지 3명이 인터내셔널 대표에 포함됐다. 국가별 안배가 아닌, 세계 랭킹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각 팀 대표선수는 12명씩으로 구성된다. 10명은 랭킹, 또는 상금 순(미국)으로 정하고 나머지 2명은 팀 캡틴이 정한다. 올 대회 인터내셔널 캡틴은 그레그 노먼이, 미국팀 캡틴은 프레드 커플스가 맡았다.
세계 골프계는 젊은 선수들의 각축장으로 바뀌었다. 타이거 우즈가 잦은 부상과 스캔들로 독주 시대를 마감하면서 제2의 우즈를 꿈꾸는 10대, 20대 골퍼들이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메이저 대회 우승자는 대회 마다, 해마다 바뀌었다. PGA 일반 대회를 포함해 1년에 2승을 올리기가 힘들다. 작년과 올 시즌 2승 선수는 6명에 불과 했다. 우즈가 활약하던 2009년 혼자 6승을 쓸어 담던 때와는 달라진 것이다.
지금 페덱스컵 1위 자리에는 웹 심슨이 올라 있다. 올해 26세. 별로 알려지지 않은 선수다. 2위 더스틴 존슨도 27세. 타이거 우즈는 아예 순위에서 밀려났고 필 미클슨은 14위다. 지난해 우승자 짐 퓨릭도 30위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페덱스컵 순위는 골프계가 지금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다는 반증이다.
한국 선수들의 활약이 반가운 이유는 그들이 마치 물갈이 처럼 리더보드의 이름이 바뀌는 무한 경쟁의 시대에 꾸준히 성적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최경주는 올해로 41세, 양용은은 39세다. 쇠퇴기로 접어들 나이에 여전히 정상의 기량을 보이고 있다. 그 뒤를 25세의 김경태가 잇고 있으니 이만하면 한국 골프가 세계 정상급에 오래 머물 것 같은 예감이 충만하다.
한민족의 활동영역이 세계화 한 지는 오래 된 일이다. 이제 수준도 높아졌다. 선진국들의 각축장으로만 여겨졌던 피겨스케이팅, 골프에서 우승을 다투고 대중문화의 한류는 유럽까지 번졌다. 오바마는 걸핏하면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을 모범사례로 꼽는다. 마치 내가 올해 맞은 가을처럼 느끼기 바쁘게 발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의 우리는 이럴 때 묘한 감상에 젖는다. 마음 정하기 나름이겠지만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자부심으로 으쓱할 수도 있다.
시카고는 전국에서 반경 30마일 이내에 골프장이 가장 많은 도시다. 골프칠 기회도 그만큼 많고 다양한 코스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도 시카고 출신의 유명 골프선수는 찾기 힘들다. 한국의 두 선수는 완도와 제주, 섬 출신이다. 골프 칠 환경으로는 척박했던 곳에서 세계적 선수로 컸다. 그리 보면 환경은 성공의 필수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닌 듯 싶다.
고난의 시대를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성취를 보이고 있는 한민족을 생각했다. 그러자 이 계절이 갑자기 넉넉해 지고 여유를 준다. 이번 주말은 조금은 쌀쌀하다는 예보다. 하지만 비만 세차게 퍼붓지 않는다면 여전히 야외활동 하기에 좋은 때다. 제 철을 맞은 애플피킹도 좋고 산책도 좋다. 골프 아우팅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한가지 더 선택거리는 골프 중계를 시청하는 일이다. 두 한국선수의 선전을 기대하면서. 이 잡념도 한가한가. <2011. 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