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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전백과 독립운동”
Ⅰ. 독립투사의 일대기 및 역사적 의의
양전백(梁甸伯, 1870-1933)의 일생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목회자’, ‘교육자’, ‘독립운동가’로 그릴 수 있다. 그는 1919년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 해 2월에 그는 정주에 사는 이승훈(李昇薰)으로부터 운동계획을 전해 듣고 여기에 가담하기로 하였다. 유여대(劉如大), 이명룡(李明龍), 김병조(金秉祚) 등 평안북도 장로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그는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참석한 그는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3년 동안(미결수 1년 6개월, 기결수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격헌(格軒) 양전백은 1870년 3월 10일에 압록강 근처에 있는 의주(義州)군 고관(古舘)면 상고(上古)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9세였을 때 집안의 경제사정이 어려워져서 파산하기 직전에 이르자, 집과 논밭을 다 팔아서 온 식구가 이웃 마을 관동(舘洞)리로 이사하였다. 그 이후에도 집안형편이 계속 어려워지면서, 1884년에 부친이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다시 정리하여 구성(龜城)군 천마(天磨)면 조림(照林)동의 산골로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양전백은 타고난 출중한 재주를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었다. 한학을 배운 그는 이미 15세 때에 시부(詩賦)에 능통하였고, 구성군에 이사한 뒤에는 서당의 훈장노릇을 하였다. 그렇지만 자신의 공부가 부족하다는 점에 늘 아쉬워했다. 좀 더 큰 학문을 배우고자 18세에 그는 집을 떠나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의주군 송장(松長)면에 사는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 이정로(李挺魯)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그의 가르침아래 경의학(經義學)을 배우고 익히며 높은 수준의 학문을 닦았다. 집으로 돌아온 양전백은 다시 서당의 훈장으로 일하였다. 그는 박영신(朴永信)을 아내로 맞아 결혼하였다.
이렇게 살아가는 양전백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다. 1892년의 어느 날이었다. 의주에 사는 친구 김관근(金灌根)이 그를 찾아와서 전도하였다. 그는 전도를 냉담하게 뿌리쳤다. 그런데, 그의 차가운 대응이 김관근의 뜨거운 복음열정을 식히지 못하였다. 몇 달 뒤에 김관근이 그를 다시 찾아와 서울로 동행하도록 권하였는데, 김관근은 그를 사경회에 데리고 갈 속셈이었다. 친구 따라 구경삼아 서울로 온 양전백은 정동교회에서 열린 전국 도사경회(都査經會)에 참석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는 기독교 신앙의 길로 들어섰다. 고향으로 돌아 온 그는 이제부터 서당에서 글과 성경을 겸하여 가르쳤다. 당시에 이미 동네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 믿는 사람이 여럿이었는데, 이들이 예배드릴 마땅한 처소가 없었다. 그래서 김관근의 아버지 김이련(金利鍊)이 동네 사람들과 함께 학당(學堂)을 창설하여서 이곳에서 예배드렸다(1893). 이것이 의주 신시(新市)교회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김이연은 양전백을 이 학교의 교사로 모셨다.
당시의 양전백은 엄밀한 뜻에서 아직도 신앙의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다. 겉으로는 기독교 신앙인 이었으나 속으로는 여전히 유생(儒生)이었다. 이러한 그에게 또 한 번의 계기가 찾아왔다. 동학혁명이 청일전쟁(1894)으로 발전되는 과정에서 그가 일하던 학당이 파손되었고, 이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그가 생계가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이 상황에서 그는 선교사 마포삼열(馬布三悅, S. A. Moffett)을 만났다. 이 만남에서 그는 비로소 깊은 신앙의 세계로 인도되었다. 그는 마포삼열에게 세례를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양전백은 난리 통에 없어진 교회를 다시 세우고자 자기 집을 팔아서 그 돈 400량을 헌금하였다. 다른 교인들도 헌금하였다. 이들은 초가 6칸 규모의 집을 사 들여서 이것을 수리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이리하여 의주(義州)의 신시교회(1895)가 다시 시작되었다. 양전백은 이 교회에서 교사로 일하였다. 얼마 후에, 그는 평양으로 가서 마포삼열을 만나 북 장로교회의 권서직(勸書職)을 받아 일하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에, 그는 조사직을 받아 평안북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1896). 대체로 선교사 위대모(魏大模, N.C. Whittemore)의 조사로 일하였다. 그렇게 하다가, 위대모가 선천에 정착하게 되자 그도 함께 선천으로 이주하였다(1898). 이와 함께 그는 일년 전에 설립된 선천 읍교회(나중에 선천의 북교회)를 돌보게 되었다.
조사 양전백이 전도하면서 여러 마을에 교회를 세운 행적을 살펴보면. 삭주군(朔州郡)에 읍내(邑內)교회가 설립되는 과정에서, 양전백 등이 이 마을 주민 백유계(白留溪) 등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백유계는 동네사람들에게 기독교서적을 나누어주며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 결실이 맺혀져서 읍내교회가 설립되었다(1896). 철산군(鐵山郡)에 읍내(邑內)교회가 설립되었다(1897). 이 교회의 설립은 마을 주민 김경일(金敬一)의 가족신앙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의주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집으로 돌아와서 자신과 가족들이 예수를 잘 믿고자 애썼다. 그러나 그는 예배와 신앙의 질서를 전혀 몰랐으므로 매우 난감하였다. 이 때 조사 양전백이 이 동네에 들렸다가 이 집을 방문하여서 신앙의 길이 무엇이며 예배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나서, 선교사 배위량(裵魏兩)이 이 동네에 와서 읍내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또한, 철산에서 학암(鶴岩)교회가 설립되었다 (1897).
이 마을에 사는 정기정(鄭基定)이 의주에서 복음을 자세하게 듣고 나서 신앙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이제부터 그는 이제까지 즐겨 읽던 술서(術書)를 없애 버리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도하였다. 이러한 때에, 양전백과 선교사 배위량이 이 마을에 와서 교회를 설립하였고 정기정은 집사로 피택되었다. 같은 고장인 철산군에 평서(西平)교회가 설립되었다(1898). 이 마을에 사는 방원태(方元泰)가 선천에서 복음을 듣고 돌아 와서 전도하지 시작했다. 그 이후에 양전백과 선교사 위대모가 이 마을로 와서 교회를 세웠다. 선천군에 동림(東林)교회가 설립되었다(1901). 선천읍에서 복음의 진리를 깨달으며 예수를 믿게 된 김봉헌(金鳳憲), 유정백(劉貞伯), 한석조(韓錫祚), 최기준(崔基俊), 장득곤(張得坤) 등 5명이 마을로 돌아와서 전도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 양전백과 선교사 위대모가 이 마을로 와서 교회를 설립하였다. 정주(定州)군에 청정(淸亭)교회가 설립되었다(1901). 이 마을에 사는 이준영(李俊英)이 평양에 있는 정익로(鄭益魯)에게 전도를 받고 양전백에게 그리스도의 진리를 배우면서 믿음이 자라났다. 그는 마을에 돌아가서 전도하였다. 이에 이 마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양전백과 선교사 위대모가 이 마을에 순방하여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렇게 일하는 동안에 양전백은 지역교회의 토착인 지도자가 되었다. 선천읍교회에서 평북 도사경회가 개최되었을 때(1900), 그는 관서전도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에 그는 교인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명신(明信)학교를 설립하여서 교장으로 일하였다. 그는 선천읍교회(북교회)의 초대장로로 장립되었다(1902.1). 장로가 된 이후에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그는 선천의 동쪽 지역을 자신의 전도구역으로 맡았다. 이 무렵에 그는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서 본격적으로 신학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선천군의 신미도(身彌島)에 신미도교회가 설립되었다(1904). 이 교회의 설립은 의주에 사는 최응하(崔應河)가 이 섬에 와서 전도한 결실이었다. 그의 집에서 여러 성도들이 예배드리고 있었는데, 선교사 위대모와 조사 양전백이 이 섬에 찾아와 정식으로 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그는 김석창(金錫昌), 노정관(魯晶琯) 등과 함께 신성중학교를 설립하였다(1906.7).
1907년에 양전백은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제 1회로 졸업하였다. 그 해 9월에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독(립)노회에서 그는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 때 안수받아 목사로 장립한 한석진, 길선주, 방기창, 이기풍, 송인서, 서경조, 양전백은 한국 장로교회의 첫 일곱 목사였다. 독노회는 양전백에게 평북의 선천, 정주, 박천 등지의 교회에서 순행목사(巡行牧師)로 일하도록 명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가 맡은 목회구역이 점차 확대되었는데, 그는 초산, 위원, 강계, 자성 등지의 압록강부근 뿐만이 아니라 만주의 즙안, 통화, 회인현까지 맡게 되었다. 1909년에 그는 선천에 있는 선천읍교회(북교회) 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 교회에서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1933) 일생동안 일하였다. 목회자 양전백은 한결같이 학교교육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으므로 보성여학교의 설립을 적극 후원하였다. 또한 그는 교회의 사회봉사에도 열정을 쏟아 부었는데, 그는 선천의 대동고아원을 설립하였다.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1년이 지난 1911년에 양전백은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일제가 국내 반일민족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합법성을 가장한 제판제도를 채용하여 조작한 대규모 한민족탄압사건이었다(윤경로, 『105인사건 공판참관기』, 7쪽). 당시에 이 사건의 이름은 “데라우치총독모살미수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조작한 총독부의 주장에 따르면, 1910년 음력 8월에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개통식의 축하를 위해 서북지방 시찰에 나선다는 풍설이 나돌았다는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서울 신민회의 간부들은 여러 차례 비밀 모임을 갖고 총독암살계획을 모의하였다는 것이다.
이 거사의 실행방법은 서북지역에 사는 주민들 가운데서 일본에 대한 반감이 강한 사람들을 모아 총독이 방문하는 경의선 주변의 8개 도시의 역전에서 환영객으로 가장하여 총독을 암살케 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이 거사의 배후에는 외국 선교사들이 사주하고 지휘하였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요약하면, 서북지역의 반일(反日) 인물들 가운데서 특별히 개신교회 지도자들이 선교사들의 사주를 받아 총독 암살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이 사건의 조작을 위해 1911년 음력 9월 3일부터 피의자를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오전에 선천 신성중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아침 기도회를 마치고 각자 교실로 들어가려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일경이 나타나서 교사 7명과 학생 20명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그리고 나서 대대적으로 피의자 검거가 진행되었다. 목사 양전백도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피의자들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일제는 짜놓은 각본에 따라 심문관이 일방적으로 사건내용을 열거하고 피의자가 “예”라고 대답할 때까지 무지비한 고문을 가하였다. 고문을 견뎌내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심문과정에서 사망하였다(김근형, 정희순 등). 결국, 피의자 가운데서 몇몇(선우훈, 홍성린 등)을 제외한 기소자 모두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여 허위로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에 휘말려 체포되어서 법정에 기소된 사람의 수는 123명이었다. 이들 가운데서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래서 오늘날 이 사건을 ‘105인 사건’이라 부른다.
양전백은 제 1심에서 6년형을 선고받았고, 제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1913년 3월에 석방되었다. 선천으로 돌아온 그를 맞이하는 환영인파가 기차역 광장을 가득히 메웠다. 3년만에 다시 강단에서 설교하려던 그는 맨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나는 이제 교직(敎職)을 사(辭)하여야 되겠습니다. 연약한 육신을 가진 나는 재감중통초(在監中痛楚)에 이기지 못하여 하지 않은 일을 하였다고 이 입으로 거짓말을 하였으니 주의 교단에 설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신학지남』(1933.3), 31쪽). 이 고백을 듣는 성도들이 모두 다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이들은 마치 ‘목자 잃은 양처럼’ 남쪽(서울) 하늘만 바라보며 목사님이 석방되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에 양전백은 장로교회 평북노회의 회장이 되었고, 1916년에는 장로교회 총회(제5회 총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온화한 인품과 특유한 감화력으로 교계를 이끌어 갔다. 그러한 그가 민족의 지도자로 나서게 되었는데, 1919년 ‘3·1운동’에 그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22년 1월에 양전백은 선천 북교회의 담임목회자로 다시 돌아왔다. 또한 그는 3·1운동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명신학교를 재건하였고, 이 학교의 교사(校舍)를 새로 지어서 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았다(1926). 이 무렵에 그는 장로교회의 역사를 편찬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는 교회사 자료를 수집하며 집필하기 시작하였고, 서울의 피어선 성경학원에 머물면서 『조선장로교회사기』를 썼다(1927).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병을 얻어서 선천으로 돌아와야 했다. 약한 몸으로 계속 선천 북교회를 목회하던 그는 1933년 1월 17일에 64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족으로 부인 박영신과 2남(윤모, 윤직) 4녀(윤성, 윤정, 윤숙, 윤도) 가 있었고, 장례는 선천 기독교사회장으로 치러졌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정부는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40년 동안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긴 양전백은 목회자로서 3천명 이상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일평생동안 전도여행한 거리를 합하면 12만 여 리에 달하였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추모의 글을 실은 잡지 『신학지남』(1933.3)은 일평생 성실하게 목회하면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품성을 보여준 그를 흠모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선생(先生)은 웅변(雄辯)의 인(人)도 아니오 문장(文章)의 인(人)도 아니며 팔면윤달(八面潤達)한 사교(社交)의 인(人)도 아니오 기책종횡(奇策縱橫)한 지략(智略)의 사(士)도 아니다. 다만 강직(剛直)한 의(義)의 인(人)이며 자애(慈愛) 깊은 정열(情熱)의 인(人)이다. 비리(非理) 와 불의(不義) 앞에는 추호(秋毫)도 굴(屈)치 않는 마음 빈천(貧賤)과 약자(弱子)를 보고는 동정(同情)의 눈물을 흘리는 마음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31-32쪽)
- 3.1운동 100주년기념 주간말씀묵상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