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개울에서 친구들과 멱을 감기도 하고 가재와 게를 잡기도 했다.
개울에는 미꾸라지도 살았고 자라와 붕어와 메기도 살았다.
개울을 따라 가면 진흙이 나오는 곳이 있었다.
갈대가 많은 개울가 둔덕 아래 손을 깊숙이 넣으면 찰진 진흙이 있었다.
우리는 진흙은 떠내어 집도 만들고 배도 만들었다.
넓은 개울에는 웅덩이를 깊게 파 사람들은 물을 퍼올려 논에다 대었다.
어른들이 개울물을 퍼올리면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가 파닥거리는 물고기를 잡았다.
형들을 따라다니다 보면 괴로운 일을 겪을 때도 종종 있다.
형들이 키가 비슷한 애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것이다.
동네 애들이 둘러싸서 지켜보는 가운데 나도 가끔 친구들과 주먹으로 싸워야만 했다.
코피가 나거나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면 싸움은 끝났다.
그렇게 싸우기 싫으면 ‘내가 졌다’라고 말하면 되는데 다들 그말 하기를 아주 꺼려했다.
개울을 계속 따라가면 황새골이 나왔다.
그곳에는 논에 우렁이, 고동, 개구리들이 많아 황새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큰 정자나무와 그 주위에 수백마리의 황새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란...
우리는 황새들이 모여있는 곳에 조약돌을 던지곤 했다.
그러면 황새들이 모두 날아올라 날아갔다.
어떤 때는 철새 수만마리가 온 하늘을 새카맣게 덮으며 날아가는 때도 있었다.
철새 수만마리가 날아갈 때면 우리들은 아주 무서워 집안으로 황급히 들어갔다.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강을 따라 언덕에 이어져 있었는데 저녁때에는 집집마다
굴뚝에서 올라가는 연기가 장관이었다.
개울을 따라 숲이 우거져 있었고 숲속엔 연못이 있었다.
연못속에는 개구리들이 많이 살았는데 뱀도 많이 있었다.
뱀을 보면 애들이 뛰어가 뱀의 꼬리를 잡고 쥐불놀이 하듯이 크게 마구 돌렸다.
뱀을 몇바퀴 크게 돌리면 대개 의식을 잃고 축 늘어져 버린다.
친구들은 가시덤불을 모아와 뱀을 그위에 걸쳐놓고 불을 지폈다.
불타는 가시덤불 위에서 뱀이 꿈틀거리면 우리들은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뱀이 다 익으면 우리는 뱀을 손으로 떼어 나누어먹었다.
...
숲속엔 소나무가 대부분이었다.
가을이 되면 소나무의 잎들이 다 떨어져 노랗게 물들었다.
어머니와 나와 형은 갈비(솔가리: 단풍이 들어 떨어진 소나무 잎새. 동네사람들은
이것을 갈비라고 불렀다)를 까꾸리로 긁어모으고 솔방울과 솔가지를 쳐서
나무를 한짐하여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집으로 오곤 했다.
그 나무로 아궁이에 불을 때고 겨울을 났다.
개울가 밭에는 삼나무가 자랐다.
가을이 되면 삼나무를 베어다 개울가에 땅을 파 큰 가마를 만들고
삼나무를 차곡차곡 넣어 흙으로 덮고 불을 지펴 삼나무를 삶았다.
삼나무가 익으면 동네사람들이 모두 나와 삼나무의 껍질을 벗겼다.
나도 엄마를 도와 삼나무 껍질을 열심히 벗겼다. 삶은 삼나무는 껍질이 쉽게 벗겨졌다.
껍질은 벗겨 주인에게 주고 삼나무의 줄기는 동네사람들이 가져가 불쏘시개로 썼다.
개울가 넓은 백사장은 가끔 들어오는 가설극장의 무대가 되었다.
가설극장이 들어오면 몇사람이 북을 치면서 동네를 다니며 선전을 했다.
우리들은 그 사람들을 따라 다녔다. 끝까지 따라가면 공짜 초대장을 얻기도 했다.
가설극장이 들어오면 백사장에 크게 원형으로 나무를 세우고 천을 둘러 극장을 만들었다.
밤이 되어 깜깜해지면 동네사람들에게 5원씩, 10원씩 입장료를 받고 입장을 시켰다.
어떤 애는 입장료를 내지 않으려고 할머니 등에 업혀서 들어가기도 했다.
종종 친구들이 돈을 안내고 들어가려고 잽싸게 천을 밑에서 들어올리고 개구멍을 만들어
가설극장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가끔 지키고 있던 극장사람에게 잡혀 쫓겨나기도 했다.
영화가 거의 끝나가면 천을 모두 걷어올려, 돈이 없어 바깥에서 소리만 듣고 애타게
기다리는 동네사람들에게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당시 본 영화중에 기억나는 것은 <안시성> <열풍아 불어라>
<돌아오지 않는 해병> <지옥문> <한 많은 대동강> 등등이다.
영사기를 사람이 직접 돌렸는데 말 달리는 장면에는 빨리 돌리고,
걸어가는 장면에는 천천히 돌렸다.
그당시 나온 배우로는 신영균, 허장강, 김지미, 김희갑, 신성일, 최무룡, 황해, 이대엽 등이었다.
영화가 끝나면 입장권 중에서 몇 개를 뽑아 경품도 주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었던 그 개울과 그 강.
그런데 우리들은 하루아침에 그곳 (경남 진양군)대평마을에서 쫓겨나야 했다.
하류에 큰 댐이 만들어진 것이다. 진양호 다목적댐이 생긴 것이다.
그 댐으로 어른들은 모두 보상을 받고 좋아했지만 우리들은 영문도 모르고
정든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그곳엔 이젠 물이 가득찬 호수 진양호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릴 때 놀던 고향에 가곤 하지만
우리들은 고향이 모두 수몰이 되어, 가고 싶어도 돌아갈 고향이 없어져 버렸다.
눈을 감으면 그곳 고향 대평마을이 뚜렷하게 보인다.
그 개울가가 눈앞에 선히 보인다.
첫댓글 푸른 솔잎이 붙은 솔가지로 김에 참기름을 발라 갈비 불에 구워 밥 한 숟갈과 김치 한 조각을 얹어 먹거나 김치 대신 깨소금간장을 조금 쳐서 먹으면 최고로 맛있지요
삼은 大麻草로 나무가 아니고 1년생 풀입니다
삼을 벗긴 대를 제릅(겨릅의 경상도 사투리)이라고 하지요
진양호 건너에 아시아호텔이 보이는 군요
진양호 주변은 그래도 난개발이 되지않아
옛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 듯 합니다. 조현두.
고향에 대한 생생한 글이군요. 그냥 잘 다듬은 수필보다 공감 갑니다.
김현거사님. 건강하시지요?
격려 감사합니다. 조현두.
조현두 님이 쓴 이 글이 내 어릴때 뛰놀던 바로 그 곳입니다
' 이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가시내가 개울에서 고동을 잡던
그 곳'이랍니다 언제 만나 고향 이야기 좀 합시다 / 성종화
천성산님 고향은 대평면 마동이었지요?
마동 삼거리에서 진주행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린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진수대교가 놓여져 진주와 연결되어 있지요. 조현두.
평거에 언니가 살고 있어서
종종 놀러가고 했는데 ............
수몰 되는 바람에
나도 고향 처럼 정든 곳인데
많이 섭섭합니다
현두님 모처럼의 나들이
축하합니다
자주 만나요
안병남
봉화님 감사합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요.조현두.
선생님 뒤 편으로 빼초롬히 보이는 산자락이 제 고향 까꼬실 입구 꽃동실이라는 곳입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있으니 엊그제 아버지산소에 성묘하고 돌아오면서
물박물관에서 바라본 고향 땅 까꼬실이 눈에 어리네요.
까꼬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진양호 속의 작은 섬이었지요. 조현두.
조현두원장님 좋은 글을 읽었어요.대평마을이 수몰되어 진양호로 변해버린 뒤 진주향우회 대평지역회장이 취임식에서 눈물을 흘린 일을 기억합니다.
남강댐으로 인해 수몰의 고통을 받은 사람이 의외로 많아 놀랐습니다. 조현두.
조현두원장 대평이 수몰지역이 된 것을 바라보는 심정을 이해합니다.
약5년전 재부진주향우회 대평향우회장으로 취임한 부산태권도협회 부회장인 박가서씨가
수몰지구인 대평을 말하면서 실향민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조현두후배와 나이 차이는 있어도 비슷한 경험담을 읽고 공감하였다
남강에서 친구들과 멱을 감기도 하고 진주시 옥봉동 또랑의 새카만 진흙 속에서
미꾸라지를 잡았다.
옥봉북동에 사는 껄렁패 형들이 심심하면 싸움을 붙이는 바람에 코피가 터질 때까지
싸우다가 숙부님이 발견하고 그들을 혼내준 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