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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녀 닷컴
소공녀를 만났다. 세라를 만났다. 20여 년만의 일이다. 처음엔 그녀인 줄 모르고 지나쳐 버릴 뻔했다. 생각만큼 화려한 집이 아니었기에 다른 배너를 클릭하려던 참이었다. 그 때 마우스의 볼이 뻑뻑해 신경질적으로 컴퓨터의 자판을 꾹꾹 눌렀고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세라는 추억 저편에서 지하에 매설된 케이블을 타고 내게로 건너왔다.
소공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라 크루. 다이아몬드광산을 소유한 크루대령의 외동딸. 동화 속의 인물인줄로만 알았던 소공녀가 가까운 곳에 버젓이 살아있었다니. 왜 아무도 내게 소공녀 그 이후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을까. 나는 놀라움과 흥분을 억누르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았다. 소공녀, 작은 마님. 결혼을 했고 아들도 낳았다. 소공녀 세라는 H라는 이름으로 내게 돌아왔다. 어른이 되어 돌아온 H는 예전부터 그랬듯이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갖고 싶은 세 가지, 집과 남편과 아이가 있었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그녀 집의 내부는 널찍하고 풍족하고 고급스러웠다. 의사인 남편과는 다정했으며 아기는 매우 귀엽고 건강해 보였다.
H의 홈페이지에는 그녀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출근을 위해 고른 의상, 점심때 먹는 메뉴, 퇴근 후 들른 식당, 아이의 재롱과 남편의 서비스. 삼 십분 만에 나는 그녀에 대한 거의 대부분을 알게 되었다. 남편과 첫 입맞춤의 장소, 날짜, 시간. 그녀가 남편에게 처음 받은 선물은 꽃이나 향수가 아니라 내 월급의 두 배가 넘는 가격의 핸드백이었다. 역시 소공녀다운 부분이었다. 나는 일기의 이 대목을 몇 번이고 읽었다.
집 주소와 전화번호, 그녀의 직업과 남편의 직업, 남편의 이름과 아기의 이름, 나는 그들의 몸무게를 합쳐 모두 얼마인지도 알게 되었다. 세라, H는 예쁘고 세련되었으며, 부지런하고 명랑했다. 가족을 위한 배려가 세심했고 남에게도 친절했다. 남편의 생일엔 손수 만든 케이크를 선물했으며 직장 동료의 생일엔 직접 그린 카드를 보냈다,고 했다.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녀의 홈페이지 구석구석을 뜯어보았다. 얼마 전에 그녀의 시부모는 남미로 여행을 다녀왔고 친정부모는 현재 유럽을 여행중이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며느리와 손자의 선물을 사기 위해 일부러 일본을 경유한 너그럽고도 감각이 뛰어난 시부모는 길 건너편에, 호사스러운 여행을 즐기는 낭만적인 친정부모는 그녀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돈이 많다고 아무나 살 수 있는 아파트가 아니다.
그녀의 홈페이지에서는 명품이야기가 단연 눈에 띄었다. H는 명품이야기라는 페이지를 만들어 옷이나 가방, 구두 등의 사진을 올려놓았다. 값비싼 가구나 식기 세트도 있었다. 한 벌에 만 달러를 호가한다는 그녀의 수트는 평범해 보이면서도 고상한 품위가 느껴졌다. 가늘고 날렵한 굽이 인상적인 구두는 도도한 자태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물 컵 하나를 고르는 것에서도 감각이 돋보였다. 그녀의 고상하고 고급스러운 취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소공녀를 읽고 가슴 뛰던 그 시절처럼, 그녀의 이야기에 나는 쏙 빠져버리고 말았다. 세라를 다시 만났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그녀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H의 홈페이지를 즐겨 찾기에 추가했다. 그녀의 집을 구경한 후, 인터넷 서점에서 소공녀를 주문했다. 국내에서 최초로 완역했다는 출판사의 책으로. 카드 한도액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세라가 민친 선생의 명문 여학교에서 귀빈 대접을 받으며 생일잔치를 치르는 대목에서 나는 잠시 책장을 덮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원장의 남자가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서다. 별다른 직업이 없어 보이는 남자는 아무 때나 종종 들었다. 요사이는 자주, 원장이 자리를 비운 시간에 들렀다. 원장의 외출이 부쩍 잦아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원장의 부재를 알리는 내게 등을 돌린 채 남자는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쌓인 신문을 뒤적거렸다. 남자는 은은한 향수냄새를 풍겼다. 신문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 나는 남자가 건성으로 읽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육이 잘 발달한, 적당히 그을린, 운동과 선탠으로 만들어낸 어깨를 외투 속에 감추고 남자는 상체를 숙이고 있다. 한참을 바라보아도 남자는 뒤돌아보지 않아 나는 덮어두었던 책을 문제집 위로 올렸다.
책장을 펼치자 감탕나무로 장식한 교실에서 세라는 비단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파티를 하고 있다. 화려한 시절의 마지막 파티다. 곧 크루대령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민친 선생은 세라를 다락으로 좇아버릴 것이다. 세라는 작고 낡은 검정 옷으로 갈아입고 하루아침에 공주에서 하녀로 전락한다. 이제부터 세라는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척척해낼 것이다. 비가 오고 바람불고 눈이 내리는 계절이 여러 번 지나도록. 결국에는 다이아몬드 광산의 상속녀가 되겠지만 말이다.
남자가 일어섰다. 나는 재빨리 소공녀를 덮고 문제집을 펼쳤다. 남자가 기지개를 켰다. 화창한 날이다. 오후가 되면 외출했던 원장이 돌아 올 것이고 아이들도 들이닥칠 것이다. 원장은 아침 일찍 출근한 나를 보더니 환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 성적이 올라가면 두둑한 보너스도 받게 되겠지만 그보다 내가 일찍 나온 이유는 일과 아이들에 대한 열의가 아니다. 문제집을 들여다보니 하품이 절로 났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남자도 어지간히 졸린 표정이다. 나는 재빨리 남자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남자가 내게 무어라 말을 건네는 동시에 문이 열리고 원장이 들어왔다. 원장의 손에는 일 층 분식집 비닐봉투가 들려있다. 원장은 남자를 보고는 아침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김밥이 담긴 봉투와 핸드백을 던지듯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원장은 남자와 점심을 먹으러 다시 나갔다.
원장의 가방에서 검은 가죽 지갑이 혓바닥을 내밀 듯 삐죽 나와있다. 지갑 속에는 원장의 운전면허증과 주유 할인카드, 반짝이는 은색 플래티늄 신용카드 두 장, 그리고 빳빳한 푸른 지폐가 수 십장 들어있다. 나는 지폐 몇 장을 빼내 소공녀 갈피 사이에 끼워 넣었다. 원장의 핸드백 속에는 동전과 열쇠, 화장품 파우치 등 잡다한 물건들이 굴러다녔다. 나는 립스틱을 꺼내 입술에 발랐다. 부드럽고 촉촉하게 그려지는 느낌이 좋았다. 싸구려 립스틱과 다른 달콤한 냄새가 나는 자줏빛 립스틱이다. 남자와 찍은 사진도 여러 장 들어있다. 나는 사진 한 장과 립스틱을 내 가방에 담았다.
H는 지금쯤 무엇을 할까. 딱딱한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는 동안 나는 H가 궁금했다. 그녀는 결혼기념일 선물로 무엇을 받았을까. 보석이 촘촘히 박힌 시계를 그녀는 갖고 싶어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나는 아이들에게 급히 만든 예상문제를 내주었다. 그 중에서 몇 개가 출제될지는 예상할 수 없는 일이다. 아이들이 문제를 푸는 동안 나는 소공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간간이 질문을 하려고 손을 드는 아이가 있어 나는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아이들을 바라봤다. 원장이 흡족한 표정으로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원장은 나보다 겨우 세 살 위다. 혼자 힘으로 보습학원을 꾸려나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어쨌든 원장도 나와 부류가 다른 사람인 것은 확실하다.
내 몸에 닿지 마, 나는 너희들과 부류가 달라.
거무튀튀한 사내 너 댓이 옷깃을 스치듯 지나갔다. 나는 그들과 닿지 않기 위해 멀찍이 떨어져 걷지만 또 다른 무리들이 앞에서 걸어오고 있다. 건너편의 사내 하나가 허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불쾌해. 남의 나라에 와서 멋대로 까부는 꼴이라니.
붉은 간판이 다닥다닥 붙은 거리를 지나노라면 어디선가 느끼하고 매캐한 냄새가 났다. 값싼 노동자들을 따라 이 거리에도 그들의 주머니를 털기 위해 몰려든 여자들이 있다. 싸구려 향수를 잔뜩 뿌리고 시뻘건 루즈를 바른 그네들은 대부분 연변이나 몽고, 파키스탄 등지에서 건너왔다.
꾸냥의 거리. 거리에서 그녀들을 발견한 날부터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지하철역에서 빠져나와 꾸냥의 거리를 지날 때 나는 걸음을 빨리 걷는다. 이 거리는 국적을 알 수 없는 갖가지 글자들로 도배한 상점이 많다. 그 중에서도 한자로 크게 쓴 붉은 글씨가 유난히 눈에 띤다. 국제 식품관에서는 개구리 다리를 팔고 중국 식품점에서는 국제 화상전화를 사용할 수 있다.
염색이 조잡한 작업복을 입은 남자들이 식당에서 몰려나왔다. 신나게 떠들어대는 그들의 말을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 언제부터 이 거리를 외국인 노동자들이 점령했을까. 그들의 얼굴에서 처음의 수줍어하고 낯설어하던 기색이 사라진 지는 오래다. 그들에게서는 지저분한 냄새가 났다. 그들은 늘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한 번도 내게 위협을 가한 적은 없지만 나는 그들의 냄새와 소란에 위협을 느꼈다. 공단에서 쏟아져 나온 외국인 노동자들로 메운 이 거리에 서면 나는 이방인이다.
악취가 진동한다. 나는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었다. 유정이 미안한 기색으로 끙, 힘겹게 허리를 들려고 애쓰는 모습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치마를 걷어올려 유정의 속옷을 가느다란 다리 아래로 내렸다. 기저귀를 벗은 유정이 눈을 꼭 감았다. 유정의 축축한 사타구니를 젖은 수건으로 닦으며 나는 또 괜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내가 너 기저귀 값 벌려고 얼마나 뼈가 빠지는 줄 알아, 못된 년.
유정은 욕을 먹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신문지를 들춰보니 유정이 밥을 절반도 먹지 않았다. 나는 밥상을 내가며 유정을 노려보지만 유정이 눈을 꼭 감고 있다. 열린 창 틈으로 현란한 붉은 네온이 방안에 비친다. 누워있는 유정의 얼굴도 붉게 물들어 있다. 나는 유정의 얼굴을 밟아 짓뭉개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유정이 시위하듯 딱딱하게 구는데 이미 익숙해 졌지만 아직도 마음속에 무언가 불끈 솟아오르는 것이 있다. 유정은 몇 년 째 이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방안에 누워 유정은 온종일 레이스를 짠다. 하지만 유정의 레이스는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다시 유정이 기계적으로 팔과 손을 움직였다. 레이스는 눈에 띠지 않지만 조금씩 그 길이가 늘어 날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유정과 나는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유정은 몸이 굳어가면서 말수가 줄었다. 아니 레이스를 짜면서 말을 아꼈다.
쥐가 돌아다녀.
마지막으로 말을 했던 적이 벌써 한 달 전이다. 부엌에 쥐가 다녀간 흔적이 있었다. 흔적은 화장실에도 있었다. 쥐는 나의 둥그런 비누를 갉아먹고 당근을 갉아먹었다. 쥐가 벽을 긁는 소리는 내 심장을 갉아먹는다. 쥐는 어딘가에 숨어 우리를 조금씩 갉아먹는다. 비누를 들어 쥐가 갉아놓은 부분을 손톱으로 긁어냈다. 비누가 닳아지는 게 보였다.
H의 홈페이지에는 일기가 업 데이트 되어있다.
오늘은 바쁜 날이었어요. 결혼기념일이었거든요. 낮에 남편이 배달시킨 꽃바구니와 카드가 하루 종일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어요. 저녁엔 근사한 식당에서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했지요. 식사 중에 남편은 내 목에 직접 목걸이도 걸어주었어요. 프랑스에서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의 모임이 있어 저녁을 빨리 먹어야했기에 아쉬웠지요. 자리를 옮겨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어요. 프랑스에서 살던 얘기를 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지요. 아름다운 거리, 멋있는 건물과 상점. 다들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어요. 오늘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어요. 앞으로 많이 베풀고 살아야겠어요.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주는 우리아기. 집에 돌아오니 우리 아들이 천사처럼 잠들어 있었어요. 난 참 행복하답니다.
코바늘로 레이스를 뜨던 유정이 잠들었다. 나는 유정의 배 위에 헝클어진 실을 돌돌 말아 상자에 담았다. 유정의 레이스는 날이 갈수록 섬세하고 화려해진다. 나는 유정의 곁에 누워 가만 손을 뻗었다. 숨결에 따라 유정의 배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널 버릴 거야.
세상모르고 잠든 유정의 얼굴을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천장에 창으로 들어온 불빛이 어른거린다. 불빛은 유정의 얼굴 위에서도 흔들린다. 두 평 남짓한 방. 머리맡에 들여놓은 앉은뱅이 책상과 발 아래쪽 옷장이 우리가 가진 가구의 전부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다리를 뻗고 눕는다. 몸 뉘일 자리가 우리 자매에겐 각각 한 평씩이다.
3층에 파키스탄 남자가 이사왔다. 어쩌면 인도네시아에서 왔을지도 모르고 방글라데시에서 온 사람일수도 있다. 세라가 다락에서 지내는 동안 마법을 부린 람다스의 고향, 인도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나를 위해 부려줄 마법은 없으므로. 남자는 쥐덫을 사러 나가는 나를 불러 인사를 한다. 유정이 보았다는 쥐가 멜키세덱이 될 수 없듯 그 또한 내가 찾는 신사가 될 수는 없다. 꾸냥의 거리에는 신사가 없다.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모든 것을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결혼이다, 라는 영화의 대사처럼 나 또한 내 모든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방법으로 결혼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 또한 쉽지 않다. 제 아무리 멋진 신사라 해도 커다란 혹을 달고 있는 여자를 좋아할 리 만무하다.
유정을 버릴 장소를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나는 굳어 가는 유정의 몸을 지켜보고만 있다. 유정의 몸을 내버려두는 것은 내 상황을 방치하는 것과 같으나 내겐 더 이상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다. 하지만 쥐가 집안을 돌아다니게 내버려두지는 않으리라. 쥐덫을 사려면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하다. 요새 세상에 쥐덫이란 물건을 팔기나 할는지.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드물다. 여러 개로 쪼개고 나누어도 감당하기 힘든 몫들이 우리 자매에겐 부지기수다. 한번에 해결은 힘들겠지만 천천히 고민을 해보자던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 덕에 유정이 몇 년 만에 바깥바람을 쐬기도 했으니 우리에겐 한동안 고마운 사람이었다. 우리와 그 남자는 여러 날 고민을 했다. 그러나 머리를 쥐어짠다고 해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날 고민을 관두기로 했는지 그에게선 연락이 끊겼다. 남자가 사라졌어도 내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나의 고민과 걱정은 눈덩이처럼 불어 지금도 계속 구르고 있다.
바람에 낙엽이 구른다. 노랗게 물든 버즘나무 아래서 서걱거리는 낙엽을 자분자분 밟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독기가 온몸에 버즘처럼 피어났다. 나는 발아래 수북한 낙엽을 구둣발로 짓이겼다. 군데군데 벗겨진 낡은 구두다. 나는 재래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장을 한바퀴 다 돌아도 쥐덫을 파는 곳은 없다. 대신 쥐 끈끈이라는 것을 샀다. 쥐는 분간 없이 돌아다니다 끈적한 것에 산채로 붙어 버릴 것이다.
다락으로 쫓겨난 뒤, 소공녀 세라는 하녀처럼 생활하면서도 고상한 품위와 착한 마음씨를 잃지 않는다. 여전히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상냥하다. 세라는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꿋꿋이 버텨내고 만다. 무엇이 그 어린 소녀에게 힘을 실어주었을까.
세라는 많은 소녀들에게 꿈과 환상을 심어주었다. 그렇지만 꿈과 환상이 힘든 시절을 이겨내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아니다. 꿈은 그저 꿈일 뿐이고 환상은 저 멀리에서 팔락거리는 푸른 깃발 같은 것이다. 지금 내 눈앞에 각종 고지서들이 날개를 달고 팔락거린다. 나는 날개를 접듯 책을 접었다. 원장은 나의 독서를 의심하지 않는다.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책상을 정리하며 가방을 챙기느라 부산하다. 그들은 무어가 그리 바쁜지 수업이 끝나자마자 득달같이 나갔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그들을 못 본체 한다. 그들이 빠져나간 문으로 원장의 남자가 들어왔다. 다른 선생들처럼, 수업이 끝나도 곧장 퇴근하지 않는 이유는 여기 있다. 나는 그제 서야 슬슬 가방을 챙겼다. 원장의 시선을 피해 끈적한 미소를 보내던 남자는 내 책상 앞을 지나며 슬며시 자신의 명함을 떨구었다. 남자의 명함이 쥐가 득시글대는 집에서 나를 데리고 나와 줄 수 있을까. 유정을 치워 담을 봉투가 되어줄 수 있을까. 남자의 명함이 꾸냥의 거리를 떠나 강남으로 가는 티켓이 되어줄 수 있을까. 나는 남자의 명함을 책갈피에 끼웠다. 내게 꿈이나 환상, 아니면 자유를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두 팔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유정에게 다행한 일이지 모르나 내겐 그렇지 않다. 유정은 무서운 속도로 레이스를 짜냈다. 그러나 유정이 만들어내는 커튼이나 식탁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것들은 이 집에, 우리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아름다운 레이스는 곱게 개켜져 상자에 담겨있다. 상자가 쌓이기 시작할 때 나는 문득 겁이 났다. 유정이 만들어내는 레이스가 언젠가는 붕대처럼 내 몸을 친친 감아버릴 것만 같았다.
유정이 아무런 말없이 레이스를 짜는 동안 나는 H의 홈페이지를 열어보았다. 늘 바쁘게 산다는 그녀가 요즈음 정말 바쁜지 새로 올라온 일기가 없었다.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나는 그녀의 구두와 비슷한 디자인을 주문했다.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어쩐다? 나는 내 발을 만져보았다. 발바닥은 거칠고 뒤꿈치는 갈라졌다. 유정의 발은 몇 년 동안 신발을 신지 않아 희고 곱다. 검정구두는 걸을 수 없는 유정의 발에 더 잘 어울릴 것이다. 유정이 신경질적으로 애써 짠 레이스를 풀고 있다. 유정은 한 코라도 빠지면 죄다 풀어 처음부터 다시 짰다. 어차피 쓸데도 없는데 그냥 두라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유정이 풀어놓은 실의 끝을 찾아 감기 시작했다. 유정이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쥐가 나왔어. 쥐새끼도 내가 걷지 못하는 걸 알았나봐.
유정이 태연하게 얘기해 처음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약삭빠른 쥐새끼가 유정의 이불로 올라올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실 뭉치를 내려놓고 싱크대를 열어보았다. 끈끈이에는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았다. 나는 들어오면서 방문을 꼭 닫았다. 유정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할 만큼 했으니 날 내다버려도 누가 욕 안 할 거야, 이 정도면 됐어.
쓰레기도 돈을 줘야 수거해 가는 거 몰라? 넌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애물단지란 걸 잊었니?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방문 밖에서 쥐가 찍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정이 이불을 머리위로 끌어올렸다. 가냘픈 유정의 발이 드러났다. 그 위로 자작나무 등걸처럼 앙상한 발목이 이어졌다. 분을 바른 듯 하얗게 말라 가는 유정의 다리. 이불을 걷어 유정의 다리에 손을 뻗는 순간 어느새 유정이 내 머리채를 쥐어 잡았다.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며 이죽거렸다. 유정이 씩씩거리다 슬그머니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쥐는 계속해서 찍찍, 울었다.
밤새도록 쥐 울음에 잠을 설친 나는 원장의 립스틱을 바르고 일찍 집을 나섰다. 계단아래서 3층 남자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남자의 옆을 지나쳐갔다.
너는 부지런하지만 불쌍하고 가난한 노동자일 뿐이야. 너의 검은 피부가 그것을 증명하지. 하지만 난 아냐.
나는 뒤돌아 남자를 쏘아보았다. 남자는 잠시 주춤하다 이내 걸음을 떼며 씨익, 웃었다. 어둠 속에 감춰져있던 온갖 쓰레기와 악취가 드러나 꾸냥의 거리는 아침이면 더욱 지저분해 보였다. 나는 누군가 전봇대 아래 쏟아놓은 토사물을 피해 보폭을 넓힌다. 빌어먹을. 어느새 꾸냥의 거리에 작업복을 입은 인파가 그득하다. 그들이 나를 자꾸만 벽 쪽으로 몰아냈다.
원장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집은 강남에 얻었어. 학원은 부동산에 내놓았는데 연락이 없네. 결혼하면 그만둬야지, 뭐 하러 사서 고생하겠니.
요즈음 원장이 자주 자리를 비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곧 또 하나의 세라, 또 다른 H가 탄생하는 것이다. 갑자기 H를, 세라를, 원장을 놀려주고 싶었다. 착하고 아름다운 그녀들을 꼬집어 주고 싶어졌다.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았는가. 쥐가 고양이를 물어야하는 그 마음이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는 쥐가 고양이를 무는 심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학원으로 가는 지하철과 반대방향 노선의 출입구에서 나는 주머니 속의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남자에게 이른 시각인줄 알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남자는 웃었다. 약속장소를 정하고 나는 무작정 걸었다. 많은 사람들이 어딘가를 향해 바삐 걸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꾸냥의 귀걸이처럼 마냥 한들한들 걸었다. H는 오늘 무엇을 할까. 문득 H가 자주 찾는다는 호텔로 약속장소를 잡을 걸 했나하는 후회가 생겼다. 오후가 되면 원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올 것이다. 다급한 목소리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냐고 묻든지 화를 내든지, 이젠 내가 알 바 아니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즐겁고 쉬운 일을 그 동안 미뤄왔던 자신을 가볍게 질책하며 사뿐사뿐 걸었다. 신나게 놀다가 저녁에 돌아가면 예쁜 구두가 도착해 있을 것이다. 유정에게 구두를 보여주며 잘 어울리는지 물어봐야지. 유정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다.
약속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은행에서 통장의 잔고를 확인했다. 당분간 유정을 치워버릴 수 있는 금액이다. 시간이 더디게 느껴져 나는 은행 로비에 앉아 책을 꺼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고운 마음씨를 잃지 않는 사랑스러운 소녀, 세라가 다락으로 좇겨가 멜키세덱을 친구 삼아 지낼 때 이웃의 신사는 가여운 소녀를 위해 마법을 부린다. 추운 방에 불을 지펴주고 맛있는 음식과 푹신한 이불도 들여 준다. 곧 우연한 기회에 신사가 애타게 찾던 소녀가 세라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식당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남자와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딘가에 H가 앉아있을 것만 같았다. H가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해 줄 것 같았다. 나는 H를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식당에 앉아있는 모든 여자들이 그녀처럼 보였다. 모든 여자들이 H를 닮았고, H가 그 많은 여자들을 닮았다. 남자는 내 앞에 놓인 술잔에 와인을 가득 따라 주었다. 나는 술잔을 단박에 비웠다. 남자가 웃으며 다시 술잔을 채웠다. 남자의 웃는 모습이 좋아 나는 또 술잔을 비웠다. 남자는 계속 술잔을 채우며 물었다.
그만 두기로 한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하긴 곧 학원 주인도 바뀔 텐데 다른 델 알아보는 게 낫겠지.
원장이 결혼을 앞두고 다른 사람에게 학원을 넘길 거라고 남자는 전했다. 원장의 결혼 상대가 남자라는 것을 나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술잔을 비웠다. 더 따를 술도 마실 술도 떨어져 우리는 식당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는 아주 높이 올라갔다. 호텔 방안에서 시내 야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저 불빛 어디쯤에 유정이 누워있고, 원장이 다리를 꼬고 앉아있으며, H가 활짝 웃고 있을까. 불빛들이 흔들렸다. 남자가 거칠게 내 몸을 쓰러뜨렸다. 나는 저항하지 않고 한껏 다리를 벌렸다. 파도를 만난 배처럼 온몸이 흔들렸다. 나는 신음을 내뱉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내 몸은 난파선처럼 표류되어 멀리 떠내려가고 있었다. 소공녀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되찾게 된 세라는 민친 선생의 여학교를 떠난다.
절대로 그곳으로는 돌아가지 않겠어요.
세라는 아주 단호하게 말한다. 그 후로 세라는 행복했을까. 그 다음 이야기는 왜 아무도 들려주지 않는 걸까. 나는 이쯤에서 흘러흘러 어디로 떠내려갈까. 유정이 짠 레이스가 눈앞에 너울거렸다. 하늘거리는 레이스가 방안을 가득 덮었다.
꿈을 꿀 수 있는 자유 정도는 내게도 있다. 원장의 남자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가끔 만나자는 제안을 거절하고 돌아서는 내게 남자는 지갑에서 돈 뭉치를 꺼냈다.
화대는 당신의 아내가 될 사람에게서 미리 받았어.
남자의 명함이 나는 융단이 되어 나를 저 먼 곳으로 데려다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갑에서 꺼내가도 표시 안 나는 몇 장의 지폐처럼 립스틱처럼 원장의 것을 조금 더 훔치고 싶었을 뿐이다.
돌아가려면 올라온 만큼 내려가야 한다. 나는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빠르게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속이 울렁거렸다. 술의 취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호텔 로비 입구에는 회전문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옆에는 반짝이는 자동문이 거대한 아가리처럼 열렸다가 닫혔다. 나는 천천히 걸어 문을 통과했다. 뒤돌아보니 언뜻 그 사이로 H가 보이는 것 같았다. 신문을 넘기는 남자 앞에 다리를 꼰 원장이 앉아 있었다. 머리에 빨간 리본을 맨 세라도 보였다. 검정 새 구두를 신은 유정이 또각또각 걷고 있었다.
집 안에 유정이 보이질 않았다. 항상 누워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배달된 구두 상자도 비었다. 나는 방 한 구석에 쌓아두었던 상자에서 유정의 레이스를 꺼냈다. 어디선가 찍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싱크대를 열어보았다. 쥐가 잡혔다. 끈끈이에 걸려든 쥐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지 낑낑거렸다. 쥐는 파르르 떨다가도 기력을 다해 버둥거리기를 반복했다.
너를 버리고 싶어도 네 숨이 붙어있는 동안은 안 돼.
나는 싱크대의 문을 닫았다. 유정이 없는 방안에 붉은 네온 조명이 가득하다. 나는 유정의 레이스를 창에 걸었다. 유정이 누워있던 자리에 레이스의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H의 홈페이지가 열렸다. 그녀는 조만간 이민을 갈 거라고 했다.
아이의 교육을 생각해도 그렇고, 여기서 계속 사는 것은 좀 힘들 것 같아요. 넓은 곳에서 살아야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죠. 좋은 환경에서 살고 싶어요.
그녀가 바라는 넓고 좋은 환경에서의 많은 기회를 생각했다. 공기 좋은 드넓은 초원 위의 저택, 그녀의 아이가 입게 될 사립학교의 교복, 주말에는 자상한 남편이 요리를 하겠지. 등이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칵테일파티에 참석한 H의 모습도 떠올랐다. 나는 H가 남긴 마지막 일기를 읽었다. 숨이 다했는지 쥐는 울음소리를 멈췄다. 나는 소공녀를 꺼냈다. 내가 읽고 싶은 부분은 세라가 다이아몬드 광산을 상속받은 다음부터다. 그렇지만 그 부분은 책에 실리지 않았다. 왜 아무도 이야기 해 주지 않는 것일까. 나의 세라, H는 대체 어디로 떠난다는 것일까. H의 홈페이지가 열리지 않아도 세상에 세라는 많다. 사람들이 가르쳐 주지 않는 세라의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다.
유정이 내 검정 구두와 함께 사라졌다. 유정은 어디로 갔을까. 하나쯤 사라져도 다른 유정이 세상엔 얼마든지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버리고 싶은 유정은 하나였다. 유정이 검정구두를 신고 어디로 떠났을까. 유정이 하늘거리는 흰 레이스를 두르고 사뿐사뿐 어디로 떠났을까. 나는 유정의 빈 이부자리 옆에 누워본다. 손을 뻗어도 유정이 만져지지 않는다. 저기 유정이 누워 있었구나. 다시 유정이 누웠던 자리에 가만 누워본다. 여기 유정이 누워 있었구나. 유정이 여기 누워 무엇을 보았을까. 쥐 오줌이 번진 천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소공녀: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지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