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장에는 예수님의 설교와, 설교를 들은 유대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진 설전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양의 목자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무엇이다’ 라는 형식으로 말하기를 즐겨하십니다. 10장에서는 ‘나는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다’ 라는 말씀과 ‘나는 선한 목자다’ 라는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본문의 예수님은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모두 도둑이요 강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이외에 메시아로 자처했던 당시 사람들, 그러니까 서기 90년대까지 메시아를 자처했던 사람들은 모두 거짓 그리스도라고 요한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고 하십니다. 십자가 사건이 수동적으로 당한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예수께서 능동적으로 선택한 것이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은 예수께서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이야기와, 그로 인해 민심이 요동을 치면 로마의 개입을 불러들여 나라가 망할게 될 지도 모른다며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로 본문에 등장합니다. 두 자매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는데, 언니인 마르다는 예수님을 접대하기 위해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 집중했다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마르다와 마리아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의 그 이야기에서는 나사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이 본문에는 나사로가 두 자매의 오라버니로 등장합니다. 또한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여자였고, 예수님은 그들 남매를 사랑하셨다고 본문은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았지만,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며 방문을 미룹니다. 그리고는 이틀이 지난 후에야 제자들과 함께 그들이 살고 있는 베다니로 출발하십니다. 마침내 예수께서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는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 지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합니다. 20~27절을 보겠습니다.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서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나는 지금이라도 주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나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23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 오라버니가 살아날 것이다."
24 마르다가 말하였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
25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26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습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버니가 살아날 것’이라고 하시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공관복음서에 보면, 열두 제자들조차도 예수께서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아니, 돌아가신 다음에도 얼마 동안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마리아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 라고 확신에 찬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아직은 믿는 자의 부활은커녕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 못했는데, 마르다는 자기 오라버니가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라는 조건절이 붙어있습니다. 마지막 때 신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신앙이 교회 내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신도들의 부활로 이어진다는 부활신앙으로 자리 잡은 이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부활신앙을 신도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그가 교회에 보낸 서신들에서 수없이 이 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들은 거의 서기 50~60년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거의 20년 이상 지난 그때까지도, 예수님만이 아니라 신도들도 부활할 것이라는 부활신앙은 교회 내에서 확고히 자리 잡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살아계실 당시에는 열두 제자들조차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는데,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나사로라는 한 신자의 부활을 지금 마르다가 고백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열두 제자들도 베드로도 인식조차 할 수 없었던 신도들의 부활신앙을 마르다가 그때 이미 갖고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부활신앙이 교회에서 보편화된 서기 90년대 요한공동체의 신앙이 본문에 반영된 것일까요? 복음서의 기록은 예수님 당시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기록 당시의 신앙이 예수님 시대에 투영된 것이 많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쨌든 본문의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든 무덤으로 가셔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시고 하나님께 기도하신 다음에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외치셨는데, 나사로가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진 상태로 걸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죽은 지 사흘 동안은 영혼이 시신 부근에 머물렀다가 사흘이 지나면 영원히 떠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본문의 기록은 완전히 죽어서 소생할 가능성이 사라진 사람을 예수께서 살리셨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이런 기록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담은 신앙고백의 기록으로 읽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여전히 ‘성서는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나는 기록된 그대로 믿겠다’는 분들에게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11장 후반부에는, 나사로와 관련된 사건을 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위기를 느낀 유대지도자들이 ‘이러다간 모든 백성이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염려하면서,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하며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다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