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유심} 2월호
힘/ 박시교
꽃 같은 시절이야 누구나 가진 추억
그러나 내게는 상처도 보석이다
살면서 부대끼고 베인 아픈 흉터 몇 개
밑줄 쳐 새겨둔 듯한 어제의 그 흔적들이
어쩌면 오늘을 사는 힘인지도 모른다
몇 군데 옹이를 박은 소나무의 푸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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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우공양. 3- 적신(赤身)/ 박지현
막달의 달력처럼 벌거벗은 겨울나무
잎과 마음 다 비우고 깃털처럼 가볍다
멈췄다,
고르는 숨이
생의 볕에 환하다
무성했던 초록 잎은 새들에게 내어주고
등, 허리며 무릎 발등 개미 떼에 거저주고
꼿꼿이
중심을 세워
그마저도 지웠다
격정의 붉은 생애 허공 떠돈 탁발 속
서릿바람 죽비삼아 몸속 깊이 새겼다
적신(赤身)에
남겨놓은 꿈
가지 끝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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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윤진화
바람아,
너
집으로 가는 거지?
나무야,
왜 멈춰 있니
어디로 갈 거니?
달님아,
무서워하지 마
우리가 멀리 침을 뱉잖아
붉은 달을
보러 나갔다가
붉은 뺨만 갖고 돌아왔어
마흔아
너
곧 집으로 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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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 위로/ 이수명
눈이 내린다. 눈은 잘 걷지 못한다.
온몸을 눈에 기대고 걷는다.
생각할 수 없도록
누가 눈을 이렇게 하얗게 칠하고 있을까
하양이 나를 스친다.
하양을 잡으려 하면
하양은 하늘에 얼어붙어 있다.
네가 다리에 붕대를 감고 왔을 때도 그랬다. 그 붕대를 어디선가 보았는데 기억은 나
지 않았지 하얀 붕대 그걸 언제 풀 건데 물어보고 싶었지
다리를 언제 꺼낼 건데
하양은 땅에 얼어붙어 있다.
하양은 아주 긴 옷이어서
하양 위에서는 자꾸 넘어진다.
그럴 때마다 하양 위로 나를 들어올려야 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을 치운다. 하늘을 치운다.
너는 오래전에 죽었는데 죽기 위해 왔구나
하양이 자꾸
나를 내쉰다.
생각할 수 없도록
누가 나를 이렇게 어른거리게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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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 오전에/ 문태준
나목이 한 그루 이따금씩 나와 마주하고 있다
그이는 잘 생략된 문장처럼 있다
그이의 둘레에는 겨울이 차갑게 있고
그이의 저 뒤쪽으로는 밋밋한 능선이 있다
나는 온갖 일을 하느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한 번은 나목을 본다
또 한 번은 먼 능선까지를 본다
그나마 이때가 내겐 조용한 때이다
나는 이 조용한 칸에 시를 쓰고 싶다
그러나 오전의 시간은
언덕을 넘어 평지 쪽으로 퍼져 금세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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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의 집- 미황사 시편5/ 김경윤
웅진당 그늘진 귀퉁이에
허공을 붙들고 있는 거미 한 마리
며칠째 집을 짓고 있다
고층빌딩에 매달려 유리창을 닦는 사내처럼
생을 허공에 매달고 오르락내리락
일생의 업(業)인 양 그물의 집을 짓고 있다
어두운 골방에 가부좌로 앉아
밤새 영혼의 실을 뽑아 말(言)의 집을 짓는 시인처럼
제 몸 안에서 핏줄 같은 실을 뽑아
그물을 엮고 있는 직공(織工)이여!
너는 알고 있니?
밤낮으로 피를 토하듯 엮어놓은 집이
한갓 이슬의 안식처인 것을,
웅진당 귀퉁이 거미집에
대롱대롱 매달린 이슬방울들
인드라의 구슬처럼 눈이 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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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 고형렬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모든 꽃은 자신이 정말 죽는 줄로 안답니다
꽃씨는 꽃에서 땅으로 떨어져
자신이 다른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몰랐답니다
꽃들은 그것을 모르고 죽는답니다
그래서 앎대로 꽃은 사라지고 꽃씨는
또다시 죽는답니다
모진 추위에 꽃씨는 얼어붙는답니다
얼어붙는 꽃씨들은 또 한 번 자신들이 죽는 줄로 안답니다
다시는 깨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약속과 숙지가 없었습니다
오직 죽음만 있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꽃씨들은
꽃을 피웠지만 다시 살아난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꽃들은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작년의 꽃을 모릅니다
그 마지막 얼었던 꽃씨들만 소란한 꽃을 피운답니다
돌아온다는데 꽃이 소란하지 않고 어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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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의 뇌/ 최은묵
나는 모노타입의 유전자로 태어났다
왜곡된 데이터는 톱니바퀴에 낀 녹 때문이다 태엽은 풀렸고 노이즈는 발생하지 않
을 거라 믿었다
전원을 끄고 잠든 당신의 숨소리는 연속적 신호다 오류에 둔감한 나는 시계바늘처
럼 겉에서 적당히 돈다
디지털은 눈물이 없다
눈물은 아날로그의 오류
좌표를 지운 섬에서 살았다
0과 1이 두려워 세상의 모든 질문에 아날로그로 대답했다
점심을 굶고 구입한 건전지 두 개로는 뇌를 작동할 수 없어
지금 얻은 데이터는 불편하다
초기화는 배우지 못한 기술이다
덮어쓸 수 없으니 밀어내기로 한다
디지털의 위장을 지닌 당신에게 아날로그로 체온을 전송했다
상처를 노이즈로 읽는 건 오해다
다시 태엽을 감은 이유는 가슴 때문이다 내 유전자는 여전히 노노타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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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유심} 1월호
꿈/ 문무학
죽음과
악수를 해도
버릴 수는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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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울음/ 진순분
그리운 건
우리 서로
바람 속에 누워 있음이다
풀잎처럼 흔들리며
칠흑 같은 어둠에서
다시금
새벽을 향해
일어서고 싶음이다
서러운 건
이제 그만
나의 아픔 너에게도
나눠주고 싶음이다
첫눈이 날리는 날
살 섞고
뼈 마르도록
환히 울고 싶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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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천국/ 김영주
오토바이 총알배달 편의점 야간근무
학비를 벌기 위해 십 대부터 몸을 던진
서른 살 김 씨 직업은 아직까지 알바에요
간은 씻어 널어놓고 밸은 털어 묶어놓고
불쑥불쑥 솟구치는 불덩이 꿀꺽 삼키고
짊어진 등짐 덕분에 꽃잠 한번 못 들어요
세상은 넓디넓고 할 일은 많다는데
알바 마치면 알바하고
알바 끝나면 알바하고
젊음은 이리 채이고
꿈은 저리 밟히고
새들도 집을 짓고 벌레도 짝 있는데
요람에서 무덤까지
계약직
비정규직
알뜰히 피를 빨지요
아름다운 알바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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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오선(五線)/ 정용국
겨울비 한 소절도 수굿이 받아 적고
날벼락 우레마저 품 안에 삭여내는
신열로 들끓는 계단
아슴푸레 오른다
선마다 아득하게 모셔 온 울림으로
봇도랑 그늘에도 한 움큼 볕이 들고
꽃피는
반올림 곁에
밭은 숨도 풀리네
행마다 넘쳐나는 오선 밖 아우성과
외마디 앙다무는 쉼표의 침묵까지
하늘을
받아 적느라
애틋한 숨 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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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어쓰기에 맞게 쓴 시/ 박해석
서로가 이만큼씩 떨어져 살아
이 세상이라고 띄어 쓰는가
그런 것들이 비로소 한데 모여
저세상이라고 붙여 쓰는가
더는 춥지 말자고
더는 외롭지 말자고
더는 헤어지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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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너머의 잠/ 유정이
티베트 북부 샹그릴라에서는 어디를 딛어도 변방이다 수요일을 종일 걸어 수요일에
도착하는 히말라야 설산 아래, 기원을 알 수 없는 기침처럼 눈발 뿔뿔이 날린다 왜
하필 여기인가 무지의 끝은 무죄인가 정상은 언제나 조금씩 비껴 있다 높낮이가 따
로 없는 곳에서는 정상이 어디냐고 묻기 어렵다 무한정 짐을 지겠다는 포터는 제 몸
을 가장 무거워한다 마른 줄기 같은 다리를 씻어 바위 위에 널어 두고 피로한 발걸음
을 말린다
바로 앞줄에서 낮이 끊기면 캄캄함 어둠을 이어 붙이고 걸어야 한다 한 발씩 걸으면
한 발씩 어두워지는 길, 앞서간 시간은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다 혀를 대보면 사지로
뻗어오는 시큼한 별빛들이 이국의 밤을 맛있게 구워 놓는다 더는 갈 수 없을 때 거기
가 정상이다 이불도 없이 누워 낱개 분양받은 한 평 하늘에 플러그드, 서울에서 잠들
면 북안까지가 국경이고 네 옆에 누우면 너 이전이 국경이다 오늘 밤 나는 너 이후에
서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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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톤의 질문/ 서안나
뒤돌아보면
가을이었다
소주가 달았다
내가 버린 구름들
생강나무 꽃처럼 눈이 매웠다
고백이란 나와 부딪치는 것
심장 근처에 불이 켜질 때
그렇게 인간의 저녁이 온다
불탄 씨앗 같은 나를 흙 속에 파묻던 밤
죄 많은 손을 씻으면
거품 속으로 사라지는 두 손은 슬프다
어떤 생(生)은 어떤 눈빛으로
커튼을 닫고 밥을 먹고 슬픔을 물리치나
깨진 중국 인형의 눈동자 속에서
울고 싶은 자들이 운다
죽은 꽃이 죽은 꽃을 밀고 나오는
부딪치는 밤이었다
돌아누우면
물결이던
애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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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날들의 기억/ 박민수
아픈 날들의 기억은
기쁜 날들을 위해 아름답다.
오늘 아침 깨어나
집 앞 가까이 흐르는 긴 강줄기 바라보다가 문득
젊은 날 가슴을 얼싸안고
온몸으로 눈물을 흘리던 때가 기억났다.
사는 것이 모두 아픔이던 시절 나의 눈물은
걷잡을 수 없는 긴 강물이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울게 했는지 모르지만
이 아침 문득 그 눈물의 기억이
내 생명의 파도가 되어 봄날처럼 따듯하다.
아픈 날 눈물이 있었기에
그 눈물로 슬픔의 벽을 넘을 수 있었으리.
아픈 날들의 기억은 진정
기쁜 날들을 위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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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거나 작거나/ 이진우
우리 우주가 우주의 우주만큼 커진다면
지구는 이슬 한 방울보다 작아지겠지
이슬방울보다 작은 지구에 사는
우리 몸을 쪼개고 쪼개서
더는 쪼갤 수 없는 조각이 되면
그 조각 하나하나는 생명의 씨앗이 되겠지
크거나 작거나 같이 일상적인 말은
생각보다
너무 너무 크거나
너무 너무 너무 작거나 같이
상상할 줄 아는 말을 이해 못하지
더 쪼갤 수 없이 작거나
더 키울 수 없이 크거나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쪼개지 못할 정도로
작게 쪼개거나
더 키우지 못할 정도로
크게 키울 수 있다는 게
돈과 권력에 눈먼 과학자들의 주장인데
일할수록 쓸 게 많아지고
쓸수록 적게 벌어지는
공상과학적인 우리 살림에 비하면
참과 거짓을 알려준다는 세상의 말들은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어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크거나 작거나
보잘것없거나 잘났거나 기준을 만들고
이익에 따라 나누거나 갈라놓든 말든
가만 상상해 보면
우리 하나하나는
맨 처음 우주에서 온 별의 조각이거나
지구에 모여 사는 별빛,
어두울수록 빛나고
어려울수록 빛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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