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사역연합(소장 이진섭 교수ㆍ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은 '그리스도인들의 리더십과 의사소통에 관한 성경적 원리'를 주제로 1월 7일 오후 2시 서울영동교회 교육관 1층에서 '겨울콘서트'를 가졌다. 이날 전택보 목사(세움교회)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성경적 원리와 모두를 존중하는 의사소통 방법', 김온양 대표(아하가족성장연구소)가 '변화하는 시대 교회의 새로운 관계 맺기 목회코칭 리더십'을 주제로 강의했다.
다음은 전택보 목사의 발제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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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갈등이 공존하는 장소, 가정
가정은 인생의 기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정은 출생의 장소이며, 성장의 장소이며, 이별의 장소이다. 누구도 자신의 가정을 선택하여 태어나지 않는다. 가정은 우리보다 먼저 있는 것이며 인식하기 전부터 이미 우리를 품고 있었다. 또한 우리는 인생의 전반부에 가정을 통해서 모든 것을 배운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무엇을 먹고 먹지 말아야 하는지, 어떤 곳에서 살아야 하는지, 사랑과 행복이란 무엇인지, 슬픔과 분노는 무엇인지,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가정 속에서 배운다. 가정은 우리가 힘들 때 쉴 수 있는 안식처이며, 사회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근거가 되는 화수분이며,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자리이다.
그러나 가정이 항상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만약 가정이 단지 낭만적인 사랑만 존재해야 하는 곳이라면 가정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가정에서 가장 깊은 갈등을 경험하고, 때로는 원치 않는 언어적 또는 물리적 폭력을 경험하며, 굉장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헌신해야 하는 상황을 만난다.
만약 가정이 아닌 곳에서 이런 어려움을 만나면 우리는 즉시 그곳 또는 그 사람들과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정은 우리가 벗어날 수 없기에 더 많은 인내를 요구하며, 그 인내가 우리의 인격을 향상시키는 일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에서 성장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행복한 일과 괴로운 일을 모두 경험하게 된다. 가정이 항상 낭만적인 것은 아니지만, 낭만적이지 않은 것이 곧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때로는 낭만적인 상황이 우리의 성장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어려움을 겪지 못한다면 더 큰 성장을 기대하는 것도 어렵다. 가정은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포구가 되어주는 사랑의 공간으로서 우리의 성장을 돕고, 때로는 여러 가지 갈등의 발생을 통하여 우리의 성장을 돕는 곳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믿든 믿지 않든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정이란?
만약 가정이 이처럼 중요한 공간이라면, 우리의 신앙이 가정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가정에 대하여 생각할 때 어떻게 다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해보려고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그가 성경적인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음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교회의 직분이 행복한 가정을 보증하지도 않는다. 교회공동체에서 봉사를 잘 한다고 해서 집에서 좋은 아빠인 것도 아니다. 새벽예배에 빠지지 않고 출석한다고 해서 가정에서 모범적인 엄마가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가정이 성경이 원하는 모습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가정의 의미와, 한 사람의 인격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성경이 말하는 가정에 대한 학문적 체계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이 글은 성경이 말하는 가정의 원리를 우리가 속한 가정에서 의사소통을 활용하여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가정에 대하여 말하는 모든 성경을 찾아 주해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초의 가정인 아담과 하와의 첫 만남에 집중하여 성경의 원리를 살펴보는 것으로 성경적 원리를 찾는 일을 제한할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가정의 원리를 아담과 하와의 부부의 관계로 제한하는 것은 가정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관계가 부부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불행한 부부가 꾸려가는 행복한 가정이 있을까? 단기적으로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중장기적으로 불행한 부부가 만들어가는 행복한 가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부부 관계가 단절되면 그 영향이 자녀에게도 미칠 수밖에 없고 자녀의 성장에는 크게 방해가 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창세기 2장에서 시작된 첫 번째 공동체였던 아담과 하와의 타락 전 관계에서 부부 또는 가정이 가져야 할 성경적 원리를 발견하고, 그 원리를 실천하기 위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을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보고자 한다.
아담과 하와가 보여준 가정의 원리
창세기 2장에는 아담과 하와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주겠다”(창 2:18)고 작정하시고 아담을 잠들게 하신 후 아담에게서 갈빗대를 취하여 하와를 창조하신다.
잠에서 깨어난 아담은 하와를 보자마자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 2:23)라고 감탄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마무리하며 해설자는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 2:24)고 의미를 부여한다.
창세기 2장에서 보여주는 부부의 첫 만남은 우리에게 최소한 세 가지 원리를 보여준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시고 협력자를 만들어 주신다. 우리는 본문에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협력자’가 되기 위하여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부 또는 공동체가 함께하다보면 상대방의 연약한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많은 경우 그 연약함은 상대방과 관계를 끊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그 연약함 때문에 서로 돕게 하는 제도가 부부 또는 가정 공동체임을 밝힌다. 부부 또는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는 서로에게 협력자가 되어주는 것이다.
두 번째 원리는 아담의 반응에서 찾을 수 있다. 아담은 하와를 보자마자 대단한 친밀감을 느끼며 자신의 뼈와 살이라고 감탄한다. 이는 아담이 하와를 만나 다른 곳에서는 누릴 수 없는 친밀감을 누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부부는 다른 어떤 대상으로부터도 누릴 수 없는 대화, 즐김, 사랑의 관계를 누려야 한다.
대화를 통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여가시간을 함께 보내며 즐거워하고, 불편하고 아픈 부분을 서로 공유하며 위로하는 관계가 부부간에 이루어진다. 또한 결혼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는 서로에게 다른 사람과는 느낄 수 없는 안정과 소통의 시간이 된다. 성경은 최고의 친밀감이 부부관계 혹은 가정 속에서 주어진다고 말한다.
세 번째 원리는 성경 저자가 본 사건에 대한 해설을 덧붙이는 장면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 저자는 결혼한 부부와 새롭게 창조된 가정 공동체가 원가족을 떠나서 남편과 아내가 결합하는 한 몸 공동체임을 강조한다. 아담과 하와 당시에 그들이 속했던 가정이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창세기의 기록자가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본 사건을 통하여 가정의 원리를 설명하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새로운 부부와 가정이 탄생했다는 것은 이전 가정으로부터의 떠남과 함께 새로운 한 몸 공동체로서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제 그들은 하나인 공동체이다.
연약함과 다름을 인정하기
창세기 2장은 부부와 가정이 서로를 돕는 공동체이며, 가장 친밀한 관계이며, 원 가족을 떠나 새롭게 하나 된 공동체라는 원리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런데 현실의 부부와 가정공동체에서 이런 원리들이 실현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서로 돕는 협력자의 관계로 살아가야 할 부부가 마치 경쟁이나 하듯이 자기주장을 하고, 가장 친밀해야 할 관계가 서로 각방을 사용하며 대화조차 하지 않고, 원 가족을 떠나 새롭게 하나 된 공동체가 다시 원 가족에게로 돌아가거나 단지 성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둘로 쪼개진다.
성경의 원리와는 달리 현실의 부부와 가정이 어려움을 겪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죄의 영향력 아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그는 죄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그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도 연약한 존재이고, 그 아이를 둘러싼 사회도 모두 온전할 수 없다.
따라서 부모와 사회가 가진 한계가 아이들의 성장과정에서 여과 없이 인격에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는 아이들은 그 속에서 생존하는 방식을 전수받는다. 이런 과정 속에서 성장되는 아이들은 부모나 사회로부터 배운 생존방식을 자기 나름대로 습득하고 해석하여 살아가는 새로운 생존방식을 터득한다.
문제는 이렇게 형성되는 생존방식이 부적절하다는 것이고, 부적절한 생존방식들의 만남이 더욱 역기능적으로 서로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를 대하며 스스로 자신과 상대방의 역기능적인 모습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관계를 맺어간다. 모두가 연약하다는 사실과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관계는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 기반하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고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관계는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거나 문제를 인정하지 않기에 변화하고 발전하는 일이 더욱 어렵다. 죄의 영향력 아래서 성경이 원하는 부부와 가정으로 회복하기 위해서 가정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과 서로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버지니아 사티어의 의사소통 유형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이슈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현실적으로 가장 먼저 다뤄야 할 내용은 ‘소통’이다. 그리고 소통을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내용은 상대방이 이미 형성하고 있는 의사소통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와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
특히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연약하고 다르기에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습득된 의사소통 방법도 역기능적인 모습이 있고 서로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 이런 이유로 의사소통은 생각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경험한다.
경험주의 방법론으로 널리 알려진 버지니아 사티어는 사람이 각기 생존방식으로서 의사소통을 배워온 과정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일치적으로 표현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한다. 아이가 자라면서 형성하는 의사소통 방식은 부모의 의사소통 방식을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모가 가진 비일치적 의사소통을 전수받게 된다. 사티어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거나, 지나치게 비판하려고 하거나, 혼란한 상황에 무관심한 척 하거나, 상황과 맞지 않는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것은 부모의 의사소통 방식의 모방이거나 반동일 가능성이 높다.
많은 사람들이 일치적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며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에 익숙한 비난형의 의사소통을 한다. 비난형의 사람은 자신과 상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타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에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다른 사람은 자기주장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회유형의 의사소통을 한다. 회유형은 비난형과 반대로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타인과 상황만 돌보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와 감정을 무시한다.
또 다른 사람은 감정을 모두 억압한 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야기만 하려고 하는 초이성형의 의사소통을 한다. 초이성형은 자신과 타인을 돌보지 않고 오직 상황에만 몰두하여 지나친 합리성에 함몰된다. 마지막 유형의 사람은 모든 상황으로부터 감정을 회피하며 부적절하고 산만한 의사소통을 한다. 산만형의 사람은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산만한 행동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하며 자신과 타인과 상황 모두를 무시하고 살아간다.
사이터가 생각하는 일치적인 사람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상황을 모두 존중하는 사람이며, 일치적인 의사소통은 현재 상황을 정직하게 자각하고, 그 상황에서 자신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을 존중하며 대화에 임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과 타인과 상황을 모두 존중하며 의사소통에 참여한다.
일치적 의사소통을 위해서 가장 기반이 되는 것이 높은 자존감으로 심리적 안정을 유지하는 것인데, 높은 자존감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없는 수용과 안전을 경험한 사람들로서 가질 수 있는 높은 자존감을 바탕으로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정직히 반응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말하고, 상황을 돌보며 의사소통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사티어가 말하는 일치적 의사소통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나의 진실을 솔직하게, 너의 진심을 공감하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의사소통의 방법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최근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마샬 로젠버그가 주창한 비폭력대화에 초점을 맞춰보려고 한다. 비폭력대화의 특징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를 돌보는 동시에 타인을 돌보는 효과적이고 구체적인 방법론이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비폭력대화의 프로세스는 “관찰-느낌-욕구-부탁”의 순서로 비교적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 비폭력대화에서 대화의 목적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을 연결하는 것이며, 이 연결을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을 모두 존중해야 한다.
첫 번째 단계인 관찰은 어떤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는 들은 것 그대로, 본 것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상황에 대해 보고 들은 대로 말하는 것을 특별한 대화의 첫 번째 단계라는 것에 의아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상황을 만나도 서로 다른 경험을 그 상황에 투사함으로 각자의 해석을 하며 살아간다. 같은 상황을 경험을 했으나 서로 다른 의미부여를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관계의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하는 해석과 의미부여는 자신과 상대방과 상황에 대한 ‘판단’이 되어 관계를 깨뜨리는 이유가 된다.
두 번째 단계인 느낌은 그 행동을 보고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의 느낌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어린 시절부터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거나 표현하면 비난을 받는 경험들을 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느낌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발견하고 수용하며 자신과 타인을 탐색하는 것에 일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느낌은 자동차의 계기판이나 도로의 신호등과 같다. 계기판이 고장났다고 자동차의 멈추는 것은 아니고, 신호등이 없다고 해서 도로의 주행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기판을 통해서 차의 상태를 알 수 있고, 신호등을 통해서 지금 내가 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에 계기판과 신호등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처럼 우리는 느낌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충족되었는지, 충족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세 번째 단계인 욕구는 그 느낌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어떤 욕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욕구는 자신이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필요하고 원하는 것 그 자체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어 한다. 그런데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어떤 사람은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누군가와 소통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은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행복하다는 것은 욕구인 반면, 무엇을 성취하고 소통하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은 수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욕구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고 수단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단계인 부탁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타인에게 필요한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탁과 강요를 혼돈 하며 살아간다. 부탁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타인을 존중한다. 그러나 강요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방식으로 상대방을 억압한다. 때로는 부탁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상대방을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 상대방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자존심이 상하고 상대방을 비난하게 된다.
부탁은 연결부탁과 행동부탁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연결부탁은 자신이 관찰하고 느끼고 원하는 것을 말한 후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렸는지를 물어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행동부탁은 자신이 원하는 상대방의 변화를 요청하는 것이다. 부탁은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요청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고, 그 부탁에 대한 상대방의 결정을 존중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나가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원리가 옳다고 생각하고 따르기를 결심한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원리를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알지 못하거나, 실천하기 어렵다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는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머물 수 없으며 결국 우리의 삶에 뿌리를 내려 인격과 관계에서 열매를 맺어나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성경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성경의 원리를 반영하여 삶을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뿐만 아니라 성경으로부터 해석을 당하며 살아야 한다. 인간관계와 의사소통은 우리 삶의 가장 기초를 형성하는 토대이기에, 우리의 관계와 의사소통이 성경의 원리를 따라갈 때 우리의 삶은 성경적 원리를 실천하는데 크게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비록 일반은총가운데 발견된 여러 가지 이론들이 성경적 세계관에 의해서 재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할지라도 무조건 배척만 하기 보다는 성경적 원리와 함께 상호 보완하고 상호 비판하는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에 사용할 수 있다면 성경의 원리가 우리 삶에 뿌리내리는 일에 긍정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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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택보 목사는 서울시 은평구에 위치한 세움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가평에서 대안교육, 농촌유학, 마을학교를 운여하며 청소년들과 함께 복음 안에서 삶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또한 이진섭교수(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성경삶사역연구소)와 함게 성격사역연합의 사역위원으로 동역하고 있다.
출처 : 성경과삶이야기 <울림> (http://www.woolrimstor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