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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지금은 수행시대.mp3
[BBS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2012.12.14
지금은 수행시대-위빠사나 11
진행 : 이명학 아나운서
대담 : 상좌불교 한국 명상원 묘원 법사님
-지난 시간에 말씀하시기를 수행자들이 자신이 열반에 이르렀다는 말이나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과를 얻었다는 말을 금기시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깨달음의 지혜는 있어도 깨달음을 얻는 자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스승과 수행자 사이에 열반에 대한 대화를 하는 것조차도 삼가고 있는지요?
그렇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열반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도과를 얻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없는 무아를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간략하게 말씀드린 것처럼 열반이라는 것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소멸한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마음이 몸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 지속적인 알아차림에 의해 몸의 느낌이 사라지고 다음에 호흡도 사라집니다.
그러면 남아있는 것이 아는 마음만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가 되면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이것을 ‘아는 마음’이라고 하거나 또 ‘앎’이라고도 말합니다. 앎이란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앎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아는 마음도 사라집니다. 이때 의식이 끊어진 상태가 열반입니다.
이때 스승과 수행자 사이의 대화는 앎이 사라졌는가? 아니면 앎이 있었는가? 하는 간접적인 말로 열반을 표현합니다. 만약 이때 다른 수행자들은 이 말을 들어도 이것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아직 이러한 정신적 상태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내용은 오직 스승과 이것을 경험한 수행자들만이 주고 받습니다.
만약 내가 열반을 성취했다고 하면 자신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이르러도 그 말을 못하게 하셨는데, 하물며 열반에 들지 못하고도 열반에 들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큰 허물이 됩니다. 출세간에서는 이것을 거의 범죄 수준으로 봅니다. 사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은 결코 열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자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일부의 위빠사나 수행자들이 지나치게 도과를 성취한 것을 집착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수다원이라는 도과가 무슨 자격증이 아닙니다. 진정한 수행자라면 열반을 성취한 것을 집착할 것이 아니고 자신이 얼마나 괴로움에서 해방되었는가 하는 것으로 판단하면 됩니다.
-열반을 성취했다고 하는 것과 앎이 사라졌다는 것은 다릅니까?
열반이라는 말은 입에 못 붙이게 되어있습니다. 앎(의식)이 끊어진 상태가 열반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아는 마음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면 본인이 의식이 끊어졌는데, 그런 앎이 사라졌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스승이 판단해주죠.
-의식이 끊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마음이 끊어진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을 텐데...
의식은 아는 마음입니다.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물을 볼 때는 마음이 사물을 대상으로 일어납니다. 소리를 들을 때는 마음이 소리를 대상으로 일어나고 잠을 잘 때는 마음이 잠을 대상으로 일어납니다. 열반의 상태에서는 마음이 열반을 대상으로 한다고 주석서에서는 말합니다. 그러니까 열반이란 죽어서 의식이 끊어진 상태와는 다릅니다. 이때 생명은 살아 있지만 아는 마음의 기능이 정지된 상태를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열반의 특수성입니다.
이때의 열반은 졸음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처음에 열반을 경험하는 수행자는 자신이 졸았는지 아니면 열반의 상태인지를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 스승이 판단을 합니다. 어떻게 스승이 판단할 수 있는가하면 이 단계에 오기까지 스승은 수행자의 지혜가 성숙되는 과정을 면밀하게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과를 성취할 단계가 되었다고 판단하면 여러 가지 지시하거나 리드하는 사항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날 느닷없이 열반에 드는 것이 아니고 일련의 지혜가 성숙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수행지도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열반에 이르렀다고 해도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수행과정을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승은 이때 졸았는가, 졸지 않았는가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 앎이 사라지기 전에 뭘 보았는가, 또 깨어나서는 무엇을 보았는가 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종합하는 검증과정이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스승이 간접적으로 말해줍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열반을 체험했는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열반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경험하는 열반일 때는 모르지만 거듭 경험이 쌓이면 열반의 상태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의식이 끊어질 때 무얼 보았는가, 깨어나서는 무얼 보았는가 하는 것이 매우 비밀스러운 검증과정입니다. 이렇게 객관적인 검증을 거쳐 스승은 다음 수행 주제를 줍니다. 수행이 주제거든요. 그러면 있는 것이 소멸하고 새로운 것이 옵니다. 그런 일련의 과정만 있어요.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되는 경우는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개인에 따라 열반의 상태가 빨리 오는 경우도 있고, 10년 20년 늦게 오는 경우도 있을 텐데요.
그렇습니다. 미얀마의 순룽 사야도 같은 분은 글을 모르시는 분인데, 아라한이 됐다는 소문이 났어요. 그래서 여러 큰 스승들이 가서 검증을 해보니까, 아라한의 경지에 이미 올라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본인이 직접 지도한 수행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나누다 보면 단계를 알 수 있군요.
네,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과정들이 있습니다. 육조 혜능도 다른 사람들이 검증했잖아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일반적인 과정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과정도 있을 수 있겠지요.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어떤 변화가 생기는가요?
네, 수다원의 도과가 깨달음이란 무엇인지를 밝히는 내용입니다. 처음에 열반을 성취한 수행자를 수다원이라고 합니다. 아난다 존자도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실 때 수다원이었습니다. 그러다 3개월 뒤에 1차 경전결집을 할 때 밤새도록 경행을 하다 피곤해서 자리에 누우면서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바로 되었습니다.
-그러면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것이 깨달음의 경지인가요?
네, 과정입니다. 어떤 사람은 빨리 이를 수도 있고, 오랜 기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에서 어떤 사람은 빨리 뛰어넘는데, 어떤 사람은 어느 단계의 지혜에서 오랫동안 지체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근기에 따라 다릅니다. 그래서 열반을 성취하면 수다원이 되는데, 이때 바로 성자라고 합니다. 성자라는 것은 고집멸도 사성제를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괴로움이 있는 것을 알고 괴로움의 원인이 집착이란 것을 알고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을 체험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팔정도 위빠사나의 지혜가 완성된 것이 사성제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의 일반적인 특성을 무상, 고, 무아를 알아 집착이 끊어져야 열반에 이릅니다. 그러나 수다원의 상태에서는 완전한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이 아니고, 수다원 수준의 무상, 고, 무아를 압니다. 사다함이 아는 무상, 고, 무아와 아라한이 아는 무상, 고, 무아가 모두 다릅니다.
이렇게 무상, 고, 무아를 알면 집착이 끊어진 상태에서 열반에 들어갑니다. 수다원을 다른 말로 예류과라고 하는데, 이 말은 윤회가 끝나는 열반의 흐름에 들었다는 뜻입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이 됩니다. 아라한이 예약된 사람입니다. 물론 계속해서 정진을 하면 금생에 아라한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최대한 일곱 생 이내에는 반드시 아라한이 되어서 윤회가 끝납니다.
-수다원이 되면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이 된다고 하셨는데, 만약 그 사이에 지옥에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까?
한 번 수다원이 되면 다음 생에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과거에 나쁜 짓을 했더라도 이미 지혜가 나서 열반을 성취하면 더 이상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특성입니다. 그런데 이때 누가 사악도에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신의 업이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수다원을 성취하면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정신적 상태를 유지합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욕망의 세계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열 가지 족쇄 중에서 세 가지가 사라집니다. 이때 족쇄를 속박이라고도 하고 한문으로는 결이라고도 합니다. 욕망의 세계에 존재를 붙들어 맨다는 것은 이것을 집착하여 이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첫째가 유신견입니다. 유신견은 내 몸, 내 마음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말합니다. 유신견이 있으면 결코 열반에 이를 수 없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죠. 그러니까 진아나 자아, 주인공이라는 견해가 있는 한 결코 열반에 이를 수 없습니다.
둘째가 회의적 의심이 사라집니다. 위빠사나의 지혜가 성숙되면 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생기는데, 이때 회의적 의심이 사라집니다. 원인과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내가 일으킨 원인이라고 알아서 의심이 사라집니다.
셋째가 계율이나 금지 조항에 대한 집착이 사라집니다. 부처님 당시에 자이나교가 굉장히 계율에 집착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당시 사회적으로 큰 문제였습니다. 자기 업을 극복하기 위해서 개처럼 짖고, 소처럼 기면서 고행을 하는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인 줄 알았습니다. 수다원이 되면 이런 계율에 대한 금지조항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그래서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에 안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한 수행자가 하는 수행의 방법이나 내용과 아직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지 않은 일반 수행자가 하는 수행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
똑같습니다. 모두 몸과 마음을 보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무상· 고· 무아를 보아서 수다원이 되고 또 사다함이 되기 위해서 똑같이 위빠사나 수행을 합니다. 그러니까 도과가 다른 것이라 해서 다른 수행을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똑같이 무상· 고· 무아를 보는 수행입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했다고 해도 아직 아라한이 되어서 완전한 지혜가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다 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수다원이 되면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를 모두 경험했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을 큰 틀에서 한번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수행자는 아직 자신의 단계에 대한 확신도 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높은 단계의 지혜에 대해서는 더욱 모르므로 수행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도과를 얻지 않은 수행자가 남을 지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미얀마에서는 수행자들끼리 수행에 대한 얘기를 나누지 못하게 합니다. 저도 수행을 하면서 잘못된 지도를 받고 몇 번이나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이 뭔가 좀 아는 채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자기도 모르고 지도를 하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이걸 금기시합니다. 잘못 지도 받아서 수행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경우에,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가 되돌아오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면 다음 단계인 사다함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수행을 하는가요? 더 높은 도과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한 수행이 아닌 전혀 새로운 수행을 해야 하는가요?
수다원이나 사다함이나 아라한이나 똑 같이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합니다. 수다원이 된 뒤에 일정기간 수행을 하면 다음 단계인 사다함을 위한 수행을 하라고 스승이 지도해 주십니다.
그러면 수다원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얻은 모든 지혜를 버리겠다는 서원을 세웁니다. 왜냐하면 내가 수다원이라는 자만심을 버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똑 같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수행을 시작합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단계부터 시작하는 방법과 바로 수행이 연속되었을 경우에는 16단계의 지혜 중에서 5단계인 소멸의 지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소멸의 지혜를 빨리어로 방가냐나라고 합니다. 스승이 이것을 일러 줍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사두~사두~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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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내가 열반을 성취했다고 하면 자신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이르러도 그 말을 못하게 하셨는데, 하물며 열반에 들지 못하고도 열반에 들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큰 허물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