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저 본 글은 오직 제 개인적으로 호암 삼성가의 풍수학적인 사실만을 고찰하고자 하는 의도일뿐이며 어떠한 비방이나
폄훼하려는 의도가 없음에 혹여 본의 아닌 내용이 당사자를 비방 폄훼하려는 의도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혜량해 주실것과 함께 사과드리는 바입니다.
우선해서 서두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최첨단의 과학을 실용하고 있는 삼성 家에서 호암 포함 그 선대들의
풍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호남의 인촌 김성수 家와 쌍벽을 이룰정도로 그 지대함을 느끼게합니다.
먼저 호암의 조부 홍석은 당신이 지역 유력 유학자였음에 先考 재봉의 의령 묘소를 求山하기 위하여
10여년을 공 드렸다는 내용의 글들은 조금의 노력만으로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호암의 父께서는 당신의 父 홍석의 자리를 求山하고져
무려 7~8회를 遷葬하셨다고 후대들이 볼 수 있겠큼 묘소 비문에까지 重하게 새겼을 정도임에
그의 풍수적 노력과 정성은 가히 조선시대 남사고의 9遷10葬과 도 같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호암 역시 수원 이목동 선영과 현재의 에버랜드 자리를 여느분 도움이라고 하지만
그 결정은 호암께서 주도적으로 하였을 것 임에 역학을 위시해서 풍수 또한 윗 선고 처럼 신봉했음이
분명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에 제가 바라본 湖巖의 풍수적 행보는 수원 이목동 선영이 명백하고 분명하게 지손 발복지로 작국되어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고 또한 그러함으로 흘려가고 있음도 느꼈으며 따라서 풍수적으로 작국된 뜻에 맞게
자신의 후계까지도 작정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에버랜드에 있는 자신의 묘소 또한 더욱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놀랍게도 지금의 상황은 이목동 선영 그리고 에버랜드의 풍수적 예언들이 오늘날의 삼성가의
결과물들과 비슷하다 할 수 있음에 풍수를 연구하고 있는 저 자신도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풍수적으로 에버랜드 그리고 이목동 선영은 대명당으로써 장손의 발복도 크지만 종국에는 支孫 발복지 입니다.
호암 그리고 이건희 현 회장은 장손이 아닌 모두 支孫입니다.
어쩌튼 저의 풍수적 시각으로 바라본 삼성의 앞선 발전은 많은 풍수가들이 말하는 의령쪽의
현 증조부의 묘소가 아닌 그곳의 양택지 포함 고조부모등의 또 다른 묘의 발복으로 보이며
작금의 국부로 우뚝 올라서게 한 발음은 수원 이목동 호암의 선친 述山 纘雨의 묘소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호암 묘소입니다.
또한 남양주 별내동으로 이장해서 모신 증조모 진양강씨 묘소가 같은 반열로 있습니다.
위와 관련해서 그 풍수학적 논거들을 제시해 볼까 합니다.
1.먼저 10년 이상을 구산한 호암의 증조부 이 재봉 묘소는 과연 소문처럼 명당인가? 입니다.
저의 답은 흉지입니다.
삼성가의 凶事 거개는 이 묘소의 소응이다 라는 생각 입니다.
의령 마두리 호암 증조부 묘소입니다.
이곳은 주산의 모습이 불분명하고 또한 심하게 비탈진 곳 입니다.
이러한 비탈진 곳에서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임두수입니다.
안타깝게도 이곳은 임두수를 피할 방도가 없습니다.
附壁명당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위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당판이 백호쪽로 많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물론 좌우에 박힌 돌 모습들이 선익으로 귀한 해목혈이라고도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그저 전순의 여기일 뿐 입니다.
즉슨 이 묘소가 감히 대명당이라고 주장된 그간의 하단의 인장석포함 전순 바위들은 모두 위 묘소 전순과는
전혀 관련없는 지각일 뿐 입니다. 본래에 脊이 되어 있었던 자리가 아니라는 판단입니다.
그 모습들은 아래의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간에 전순이라 해왔던 암석들은 지각 여기가 분명함에 이곳에는 통상 와겸의 혈이 맺혀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괴혈의 모습도 전혀 없으며 혹자의 유혈이다 라는 주장은
乳穴에서 필수적인 좌우 선익을 굳이 해목처럼 밖힌 바위의 모습이다 라고 하더라도
혈의 본신이라 할 수 있는 입수뇌두와 전순여기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연유로 이곳은 혈을 맺지못한 흉지일 뿐입니다.
기실 위 사항들을 충족시키는 곳은 묘소 윗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사진 하단 묘소는 조선8대 명당으로 회자되고있는 남양주 덕소읍 안동김씨 선영으로
형제 영의정 김수홍 김수항의 父 金光燦 묘소입니다.
사진에서 보듯 地理 人子須知 서책에서 선사들이 극도로 꺼려야 한다는 임두수로
골까지 패여 直射로 맞고 있습니다.
서책의 논거에 의하면 이 묘소는 大凶地입니다.
해서 遷葬해 온 이 묫바람으로 인해 자신의 아들 영의정 김수항, 손자 김창집 포함 長孫 4代가 연이어 당쟁으로
임금의 사약등으로 요절되어진 그 凶事의 씨앗이라는 판단입니다.
위 아래 사진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호암 증조부 묘소는 아래의 김광찬 묘소와도 비슷한 형태입니다.
다행히 김광찬 묘소처럼 하단 끝은 아니여서 그 정도는 약하겠지만 결코 凶事을 피해 갈 방도가 없어 보입니다.
더욱이 아래 위성사진에서 보듯 호암 증조부 묘소는 래룡의 중심에서 현저하게 약해진 모습의 지각일 뿐
大地 명당에서 비교적 쉽게 확인되는 호종을 받는 어떠한 형세나 물형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청룡방으로 있는 호암 증조부의 係室 묘소로 호암과는 풍수적 관련이 없기에 감평을 생략합니다.
아래 역시 호암의 부친 纘雨의 配 안동권씨 구광터로 소지소혈에 불과한 곳입니다.
용맥의 흐름은 차치하고 문산정을 조선 왕릉의 정자각으로 가상해 본다면 쉽게 알 수 있는 곳입니다.
위쪽으로 큰 곳이 있어보이나 일대의 부실한 토질로 마음이 썩 가질 않은 곳입니다.
이곳 역시도 호암가와 관련해서는 생략해도 될 성 싶다 라는 저 개인의 생각을 붙입니다.
2. 수원시 이목동 선영
호암 조부모 묘소입니다.
호암 부모 묘소입니다.
호암 부모 묘소의 입수룡 모습입니다. 3중으로 결인속기를 했네요...
혹여 인작이라 할지라도 근간을 鶴膝로 作한 대단히 힘있는 래룡입니다.
地理 人子須知에서는 鶴膝蜂腰眞吉地, 鶴膝蜂腰最爲奇라 했음에
이곳이 근동의 주혈로써 천하 대지입니다.
여기까지 만으로는 호암의 의중을 쉽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이든 우선적으로 선영만은 보호하고저 사진처럼 묘소들 만 또다시 묶어서 번지를 분할하였습니다.
기실 일대가 삼성문화재단 땅입니다.
아래 처럼 이곳은 장손 역시도 만만치 않은 대 발복지이지만 지손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큰 발복지입니다.
白虎 本身案을 이룬 極品地입니다.
인자수지에서 발췌한 아래 그림은 極吉의 本身案山 설명으로 좌측 청룡이 혈처를 감싸고 있어
長孫 발복지 입니다.
위의 사진모습은 아래 그림과는 반대 형태로써 支孫 발복지 입니다.
아래의 사진들 역시도 위 그림과는 반대 국세임에 지손발복지로 長孫慘禍 형태입니다.
위의 사진은 조선시대 단종을 낳고 3일만에 숨진 현덕왕후 초장지로 청룡 극미약과 본신 안산을 이룬 백호 極强의 부조화로 長孫인 단종의 참화는 필연으로 예견된 곳입니다.
청룡 백호 끝이 도로로 잘렸습니다.
자손들에게 사단이 일어날 것임이 예견되는 대목입니다.
아래는 금호그룹 선대묘소 조안으로써 오래전부터 그룹의 어려움들을 이야기할 때 풍수적 凶事의 징조로
곧 잘 지적해 온 곳 이기도 합니다.
아래는 에버랜드 호암 묘소로 국세가 매우 큰 대명당이지만 청룡이 산만하게 비주하고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의 예에서 처럼 백호의 偏强龍 本身案山으로 작국함으로써 支孫 대 발복지입니다.
그리고 종결로써 백미는 호암이 꿈꾸고 이루고저했던 삼성의 정신이
호암관의 朝案으로 있는 아래의 天柱 三台이였을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三台 뜻은 最上의 合을 의미하며 三星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풍수가로써도 실력을 유감없이 닦은 湖巖이 비록 支孫이라 할지라도 누구든 앞산 天柱 三台의 모습처럼
後代에서도 三星이 지존으로써 우뚝 존재해주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求山 했으며 더불어 그 소망했던 꿈들이
작금의 현실에서 일구어내 준 곳이기에 감히 삼성가의 영원한 축복의 땅 everland 이다 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아래 묘소는 약 400여년전 위 朝案의 三台 모습 처럼 재치찬란하게 묘소를 썼지만 안타깝게도 失穴하였습니다.
풍수는 정확한 사실적 행위에 대한 그 결과물 입니다.
막연한 요행에 혹여하며 따라오는 행운이 결코 아님을 새삼 일깨어 줍니다.
위의 사진에서 처럼 호암관 뒤쪽의 앞서 三台 형태 묘소를 중심으로 靑龍 方에는 조선 세종때 전라도 관찰사 李伯持 묘소가
그리고 白虎 方에는 湖岩의 묘소가 각기 위치하고 있습니다.
에버랜드의 전체적 모습은 연화이지만 이곳은 芙
얼핏 이 3곳외에는 거개가 凶地라는 저의 개인적 소견도 피력해 봅니다.
물론 선사들의 말씀처럼 神明을 밝힐 수 있는 능력은 노력과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지만
가히 천하대지는 지금껏 生地로 근동에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아울러 이곳은 燕巢穴이 아닌 교과서적인 鵲巢穴인 바 혹여라도 미련이 있으시다면
아래 內臟山 대혈 연소혈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번외이지만 이 연소혈을 이해하시게되면 화순의 적벽 연소혈은 쉽게 구별해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3.끝으로 아래는 호암의 증조모 묘소입니다.
우선해서 이곳 혈장은 地理 人子須知의 저자 중국 明代 서씨 형제 曰
누구나 龍를 찾는 妙訣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峽의 隱微함을 窮究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여 峽裏決을 전수시킬 때 傾囊倒篋한면 능히 天機를 누설시킬 수 있으리라 하였습니다.
아래는 해당 서책에서 인용한 發微論의 저자로도 알려진 蔡西山의 峽缺 그림으로써
위의 위성사진과 모두 일치하고 있습니다.
해설에서는 가장貴한 吉地라고 했음입니다.
또한 이곳은 불암산으로 기봉해 가는 오봉이 台屛하고있고 소조가 帳蓋하고 있으며
穴後 束氣로 飛龍入穴한 上聚 혈장 뒤로 倉庫를 帶同하였으니 그 富는 가히 如天地 同行이라 할 것입니다
이곳은 구광터입이다.
파묘 자리가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는 가늠할 수는 없으나 파묘된 이유 몇가지는 유추해 볼 수 있다 하겠습니다.
첫째는 上聚穴이기에 지금처럼 뇌두입수에 가깝게 재혈했어야 함에도 흉지인 앞쪽으로 葬했을 경우입니다.
두번째는 이곳은 아래 그림처럼 외양불견 명당입니다.
즉, 용맥이 穴前을 가로 막아 먼 朝案을 볼 수가 없는 모습입니다.
外 陽 不 見
해서 구광터는 좌향에서 문제가 있었던 듯 합니다.
즉슨 向空할 줄 모르고 偏僻지게 一峰으로만 向을 하였을 성 싶습니다.
따라서 主山과 을진방 峰우리에 向을 맞추었든, 래룡에 집착해서 간인방 봉우리에 向을 맞췄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外陽不見을 하고 있는 이 대명당이 온전치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자수지 서책에 거재된 吳公口訣에서는 三奉은 對中하고,兩奉은 對空하라 하였으니
好對空兮却對峰, 他年莫道地無功 이라...
葬後에 公主를 妻로 맞이하였는데 眼下無人이 되더니 朝廷의 衆臣들로부터 彈劾을 받아 斬首를 당하였다
라고 그 凶禍까지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곳 역시도 금호그룹 선영처럼 언제부터인가 안산이 파헤쳐져가고 있었습니다.
긴글 읽으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감사드림니다.
첫댓글 여러곳을 조사 하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더.
잘봤읍니다 감사합니다
三星家 風水에 대해서 깊은 연구하셨읍니다.
수고 많으셨읍니다.기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