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형무소 집단처형
-"미군측도 책임 크다"
미군비밀문서에 의해 드러난 대전형무소 재소자 집단학살 사건은 1951년 7월 4~6일 발생, 재소자 전원이 처형됐던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이 사건에 대해서는 미군은 책임이 없다고 미국방부 고위 관계자가 5일 주장했다.
미국 육군성의 한 고위관계자는 『한국전쟁때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도 유엔군사령관이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 사건에 대해서는 미군은 책임이 없다』면서 『조만간 공식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 최고의 한국전쟁 사학자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시카고대)는 『노근리 사태 처럼 대전형무소 집단처형 사건도 미군은 책임이 있다』면서 『이 사건은 노근리 사태 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미군은 이 사건에 대해서도 조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커밍스 교수는 『미군과 한국군은 똑 같이 유엔군의 일원이었고, 미군 고급장교가 포함된 참관단이 현장에 있었으며, 한국군의 처형을 저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커다란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처형 일자는 51년 7월 4~6일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미군비밀문서에 학살사건이 『51년7월 첫째 주 3일간 진행됐다』고 적혀 있고, 커밍스 교수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프린스턴대학출판부, 1990년) 제2권 699쪽에 인용된 1951년 8월 9일자 「런던 데일리 워커」지 기사에 따르면 『학살은 7월 2~6일 있었으며 첫 이틀 간은 처형장소를 준비하고 처형은 사흘째 시작돼 3일간 계속됐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런던데일리워커는 당시 영국에서 발행된 공산주의 계열 신문으로 기사를 쓴 앨런 윌밍턴 기자는 이 신문의 종군기자로서 한국전쟁에 종군, 북한군을 따라 전선을 다니며 대전형무소 재소자 처형현장도 방문했던 인물이다.
윌밍턴 기자는 목격자 20명을 인용, 『2일 한국 경찰이 트럭 여러 대를 타고 나타나 현지 주민들에게 각각 200야드 길이의 구덩이 6개를 파도록 했다. 재소자들은 총살되거나 칼로 머리가 잘려 구덩이속에 던져졌다. 미군 장교들이 짚차 두 대에 나눠 타고 현장에 나타나 처형장면을 참관했다』고 보도했다.
처형장소는 윌밍턴 기자는 대전 인근 양월(?, Yangwul)이라고 보도했으나 커밍스 교수는 이 지점이 미육군 군사지도에는 낭월(?, Nangwul)로 쓰여 있다고 밝혔다.
단두에 의한 처형와 관련, 커밍스 교수는 『한국군 장교들 가운데 옛 일본군 출신이 있어 이 때도 칼로 머리를 잘랐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개전 초기 한국군 장교들이 북한군 포로 약 50명의 머리를 자른 적이 있다』고 설명하고 『연대 설립자 호래이스 언더우드 박사의 후손인 선교사 J. 언더우드가 당시 대전교도소 재소자가 약 2,000명 수준이라고 했던 것으로 봐서 재소자 전원이 처형됐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커밍스 교수는 미국은 한국전쟁 때 유엔군에 의해 이같은 만행이 자행됐다는 사실을 한사코 부인해 왔으며 대전형무소 집단학살 사건에 대한 사진까지 찍었으면서도 로이 애플먼 수석미군역사가가 펴낸 공식 미군사에서 조차 한국전쟁 때의 만행은 전부 공산군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역사를 은폐했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