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I 폴 바네트
(고후 4:16-18)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이 구절들의 형태를 인식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16절에서 바울은 “겉사람은 후패하며 속은…새롭도다”라고 쓴다. 그럼으로써 부정/긍정의 대조 유형을 확립하는데, 그 다음 구절에서도 계속 그러한 유형이 나올 것이다. 더구나 그 구절들에 나오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살펴보면, 그것들이 상호관계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긍정적인 요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것들 역시 연관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의 ‘외적’ 자아(16절)는 ‘보이는’(18절) 현세에 속해 있으며 ‘환난’(17절)으로 인해 ‘후패하고’ 있다(16절). 그와 대조적으로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17절)은 아직 “보이지 않는”(18절) 새 창조에 속한 “속사람이 날로 새롭게”(16절) 된 것의 최고점이다.
‘영광’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4)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내시는 것 그리고 사람이 보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 혹은 ‘광채’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낮에는 해 안에서, 밤에는 달과 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하신다.5) 하나님은 자기 종 모세에게6)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기적들에서7) 그리고 그 아들의 죽으심을 통해8)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셨다. 변화산에서 세 제자는 그 때에만 특별히 다시 나타난 모세 및 엘리야와 함께 영화롭게 되신 예수님을 목격했다.9)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10)
‘영광’은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자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은 어두운 우리 마음에 그분의 빛을 비추신다(4:6). 그러고 나면 성령님이 신자의 삶 안에 점차 더 큰 영광을 가져다주신다(3:18). 이것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의 눈은 우리가 외적으로 부패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우리의 양심은 내적으로 우리의 죄를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칼빈은 “부패하는 것은 눈에 보이며, 쇄신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부패하는 인간의 몸이 분해될 날이 다가옴에 따라 새 창조의 작업이 마무리되고 있다고 추론하게 된다. 죽을 때 우리 외적 몸의 발판과 틀은 벗겨질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드러내 주실 것이다(5:1).
전에 바울은 그의 문제가 얼마나 심한 것인지를 표현하기 위해 ‘하이퍼볼레’(hyperbol)라는 헬라어를 사용했다. “우리가 심한 고생을 받아”라고 말했는데, 마지막에 나오는 고생이라는 단어는 ‘짓눌리다’(weighed down)라는 의미다. 여기에서 바울은 ‘무게’(baros)라는 단어와 ‘하이퍼볼레’라는 단어를 취하는데, 이번에는 ‘하이퍼볼레’를 고난이 아니라 영광에 대해 적용하면서 절대적 강조를 나타내기 위해 두 번 사용한다(참고.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영원한 무게’, RSV).
바울은 멋지고도 역설적인 진술에서 이 실존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과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대조시킨다(17절). 참된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외적 본성이 겪는 ‘환난’은 무게가 ‘경하며’ ‘잠시’ 지속되는 반면, 우리 내적 본성이 겪는 ‘영광’은 무게가 ‘중하고’ ‘영원히’ 지속된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이 비교는 이전에 중하게 보였던 것을 경하게 하며, 무한히 지속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을 짧고 순간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우리가 일단 우리 마음을 하늘을 향해 올려 드리면 몇 천 년의 시간이 한 순간처럼 보일 것이다.”
바울에 따르면, 우리의 ‘환난’은 그가 쓰고 있는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다. 그가 고난을 ‘선한 일’ 혹은 그 자체로 미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은 아니다. 고난이 자동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영광’을 더해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환난은 우리로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을 돌아보도록” 하는 것이다(18절). ‘환난’은 이 천박하고 시들어 가는 이생의 삶에서는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에게 점차 초점을 맞춘다(4:4-6, 14). 육체적 필요는 분명 중요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간절히 바라야 하는 것은 언론 매체를 통해 광고 회사들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쾌락과 소유가 아니라, 성경에 나와 있는 복음의 약속이다.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으로나 공동체 안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것, 기도, 예배와 봉사 등은 ‘보이지 않는 것’에 주의를 고정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차에 녹이 슬기 시작하면 나는 새 차를 구입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왔음을 안다. 옛 차는 수명이 다했으며, 조만간 새 차가 필요하다. 내 몸에서 세월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 나는 대체로 내 몸의 수명이 다해 간다는 것을 안다. 이제 시간 문제일 뿐이다. 우리의 몸은 세월과 함께 삐걱거리고 탄식하고 있는 이 세상 구조에 속해 있으면서 새롭게 되기를 기다린다.11) 몸을 단련하는 운동과 건강한 식생활은 하나님이 맡기신 우리 몸을 적절히 관리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의사들의 장기 이식 기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수명 연장이라는 거대한 소망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의 권세는 궁극적으로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나 자신의 안에서나 밖에서나 궁극적인 의미에서, 나의 생명을 새롭게 하거나 연장할 수 있는 힘이 나에게는 전혀 없다. 나의 한 가지 소망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내게 주실 새 ‘처소’(5:2)이다. 그것은 좋은 소식이지만 또한 우리를 매우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영적 슈퍼맨이었다면-고린도에 새로 도착한 일꾼들은 분명 자신들이 그렇다고 주장했을 것이다(11:5; 12:6, 11)-우리는 우리 미래가 우리 육신과 더불어 이 세상 속에 달려 있다는 망상을 계속 믿었을 것이다. 쇠퇴의 표시들이 나타날 때, 그리고 분명 그렇게 될 것인데,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고 있는 장막(5:1)에 대한 소망으로 되돌아간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에, 보이는 것보다 더 실재한다. 우리가 장차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실존은 참 실존이다. 이생에서의 삶은 앞으로 다가올 실재에 대한 그림자일 뿐이다. 그 예로 큰 날곤충인 호주산 매미를 생각해 보라. 그 매미는 해마다 한여름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나타난다. 그 생명 주기를 보면 땅 속에 있는 겉껍질 곧 외골격 시기가 있으며, 그 안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매미가 형성된다. 외골격 시기가 끝나는 바로 그 때, 아름다운 곤충이 되어 자유롭게 날아간다. 외골격은 그것의 참 목적, 곧 거기서 나올 새 생명을 만들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환난’이 뒤따르는 이생은 우리의 참된 운명-‘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위한 준비다.
준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신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가 받는 ‘환난’을 이용하사 ‘우리’를 위해(17절) ‘영원한 영광’,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죽을 때 우리의 것이 될 새로운 거처(5:1-2)-을 준비하신다. 둘째로, 우리가 영적으로 혹은 정서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우리가 그것을 받을 수 있도록 새로운 실존을 준비하신다(5:5). 우리의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준비는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완벽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것을,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신다. -계속-
첫댓글 겨울 난방도 못하도록 생활이 아렵습니다
통신료도 못내고 생활고로 카페도 운영을 못할 지경
공과금을 내야 합니다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카페지기가 드리는 부탁의 말씀.....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작은 나눔으로 카페지기에게 용기를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한분이라도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카페를 계속해서 운영하려면 회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통신료 공과금 30만원과,치료비,임대료,난방비.먹을것을 마련해야합니다...
카페지기는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자동이체 정기후원 회원님이 계셔야 카페를 운영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이체 회원이 없습니다 후원도 한달내내 두세분에 불과하니
카페도 생활도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카페후원계좌-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카페후원계좌-농협 233012-51-024388 예금주.황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