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 정치- 아리스토텔레스, 맹자, 조소앙
며칠 맹자로 흥분하고 있다. 대학교 때 문고판으로 한번 읽고, 2000년 2008년 그리고 올해 네 번째로 읽는데 읽을 때마다 점점 더 생생해짐을 느낀다. 우선 맹자의 도발적 문답법이 재미있다. 특히 절대 권력인 왕의 권위에 대해 질문하고 만인 평등과 바른 정치의 실행자가 곧 왕이라는 주장은 맹자를 맹자이게 하는 소리이다. 왕도정치 안에 이미 민주정치적 요소를 배태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맹자는 2300년 전의 과거인에 머물지 않고 문득 현실로 다가온다. 더불어 현대 경제와 정치 담론에서 잃어버린 도덕의 효용을 다시 맹자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현대사회의 정치와 경제를 보면 시장자유주의의 자본주의와 마키아벨리즘식의 권력획득을 위한 정치 외에 남은 것이 없어 보인다. 하나는 부의 쟁취에 매몰되고 다른 하나는 권력의 쟁취에 매몰되어 있다. 여기서 발견되는 인간은 합리적 이기심으로 충만한 개인들이고, 행복은 이기적 욕망의 실현이다. 이기주의자들의 경쟁과 허식 외에 무엇이 남는가?
그럴 때 우리가 참조할 가장 좋은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인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우리는 경제와 정치의 근본개념을 성찰할 수 있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의 목적을 무한한 부의 축적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자급자족임을 밝힌다. 또한 인간이 추구할만한 삶은 미덕을 실천하며 공공정치에 참여하고 기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경제는 사적 영역이고 정치는 공적 영역이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중요한 것은 미덕을 갖춘 시민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돈에 의한 무한한 사익추구 게임이 경제를 휩쓸었다. 곧 건강한 자급자족 경제가 파괴되고, 마키아벨리즘으로 왜곡된 정치가 더욱 비틀어지게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해결해야 할 두 가지 과제가 있었다. 첫째 공공정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사익으로부터 초연해야 한다는 것, 둘째 사익으로부터 초연하기 위해 시민은 경제적으로 자급자족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판단에 그러한 경제적 능력은 모두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민주주의는 제한적 민주주의였다. 농장을 꾸리는 가부장남성이 시민이 될 수 있고, 그러한 시민은 사익을 초월하는 미덕을 갖추기 위해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렇다면 공공의 정치를 위해 경제와 교육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시민적 덕성과 사유력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시민 정치가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적 평등 문제와 도덕, 그리고 교육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맹자가 도움이 된다.
맹자는 우리가 속한 동북아시아가 유교문화의 중추다. 왜냐하면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풍부하게 심화시켰다. 관념철학에 해당하는 성리학과 실천철학에 해당하는 양명학이 모두 맹자의 철학이 모두 맹자의 중계 덕분이기 때문이다. 맹자는 꽤나 혁명적이고 근본적인 정치학자이기도 하였다. 유교는 왕도정치를 표방하지만 민생을 제일 중요한 요소로 바라본다. 맹자는 그것을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고 말했다. 백성의 항산이 공평한 경제에 의해 실현되기 때문에, 평등한 경제는 왕도정치를 펴기 위한 수단이자 목적이었다. 그러기 위해 맹자는 도시의 건물세를 제외하고 각종 세금을 없애 교역을 활성화할 것, 토지를 가구당 분배해 백성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킬 것, 그리고 교육에 힘쓸 것을 제안한다. 물론 교육 내용은 도덕의 실천인데, 맹자는 그것을 인의(仁義)로 압축하고 있다. 유교의 정치는 서양의 정치와 다르다. 그것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도덕적 삶의 외화 내지 확장이다. 한 마디로 내성외왕(內聖外王)의 길을 걷는 것을 삶의 이상으로 삼았다. 즉 위로부터의 통치가 아니라 각자로부터의 감화와 확대인 것이다. 물론 맹자의 주체도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들의 정치는 단순히 남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 인의를 실현시키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스보다 정치의 도덕성을 더 중시하였다. 반복하지만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달성되는데 하나는 개인적 실천이고 다른 하나는 정책적 실천이다. 개인적 실천은 교육에 의해서 자기가 꾸준히 길러가야 할 것이고, 정책적 실천은 개인적 실천이 가능한 여건이 되록 세금 및 토지 기타 제도를 마련하고 백성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쯤 와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다시 비교해 보니, 맹자의 주체는 도시의 시민이 아닌 농촌의 백성이고, 이상적 삶이 자급자족을 하며 도덕을 실천하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점에서는 같다. 행복의 목표가 부와 권력이 아니라 도덕을 완성하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처럼 맹자는 경제의 평등을 바탕으로 도덕의 실천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정치는 도덕을 큰 범위로 확대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큰 흐름으로 보면 서양의 정치가 이기적 합리를 이상으로 삼았다면 동양의 정치는 도덕적 합리를 이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한 사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로 조소앙이다. 조소앙은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초안인 ‘건국강령’을 자신의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작성한다. 파시즘 국가들의 도발로 발단이 된 제국주의 전쟁인 2차 대전의 포화 속에서 소련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은 임시정부 내에서도 첨예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내분을 수습하고 새롭게 건국한 대한민국은 좌우의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제 3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목숨을 내건 치열한 고민으로 낳은 결과가 바로 삼균주의이다. 이는 독립전쟁을 치르며 만들어진 ‘독립 선언서’나 프랑스 혁명의 전쟁을 겪으며 탄생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과 마찬가지의 치열한 역사의 산물이다. 근본적이며 동시에 혁명적이다. 친일친미파들에 의해 구색만 갖춘 지금의 ‘대한민국 헌법’과는 태생 자체가 다른 것이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이다. 이 세 가지를 긴밀한 하나의 관계로 통찰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나 맹자와 일치한다. 하지만 이후 냉전구도로 이어질 미국/소련의 동서의 갈등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하면서 동시에, 서양과 동양의 정치를 융합시킨 놀라운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냉전과 대미종속으로 끌려들어가면서 정통이 되었어야 할 조소항이 잊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요즘처럼 도덕 상실의 시대도 없는 것 같다. 우리가 지나치게 이기심 원리로 살다보니 개인은 물론 국가도 말할 수 없이 위험한 상태에 직면했다. 그야말로 극단의 시대이다. 요즘 알카에다를 이은 IS의 테러를 보면 전술적 잔인함이 극에 달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IS를 만든 것도 결국 미국과 서방의 대중동정책 아닌가? 중동에 대한 에너지와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독재정권을 만들고 경제적으로 무력하게 만듦으로써 이슬람의 극단적 측면만을 강화시키게 되었다. 점점 세계가 공각기동대 수준의 테러로 점철되는 것 같다. 모두 도덕을 상실한 경제와 정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유교야말로 전제정치의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해왔다. 하지만 맹자가 가진 문제의식, 즉 지금의 패도정치의 시대를 비판하고 도덕정치를 강변했던 맹자와 그것을 가장 한국의 상황에 맞게 구현한 조송앙의 삼균주의에서 도덕이 살아 있는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모습을 발견한다.
만약 당신의 인간의 존엄성에 공감한다면 우리는 이 시대를 인간을 모독하는 시대라 규정할 것이다. 평등! 그것이 자유의 요건이다. 경제, 교육, 그리고 정치의 평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