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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포와화왕 원문보기 글쓴이: 비사벌
글쓴이 | 강병훈 | 이메일 | foundry@netian.com |
작성일 | 2004-07-29 15:56 | 조회수 | 261 |
파일명 | 파일크기 | 0byte | |
창녕 인근지역, 진주에 살고 있는 해군의장대 출신 강병훈입니다. (1980~1983. 해군의장대근무) /*서두에 출신 군과 특기를 쓰는 이유는 아래에 나옵니다.*/ 어제(2004.07.28) 진주에서 창원으로 출장을 갔다가, 다시 합천으로 가는 출장길에 나섰습니다. 구마고속도로의 부곡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합천쪽으로 길을 잡고 가는데요, "박진전쟁기념관 18KM" 라는 안내표지판이 보였습니다. '이런 한적한 곳에 무슨 전쟁기념관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고, 누군가 개인이 세운 무기 박물관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평소 박물관이나 기념관 구경을 일삼아 하는 저로서는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수가 없더군요. 합천에서 있을 약속시간을 계산해 보고, 박진전쟁기념관까지 들렀다가 갈 시간을 계산해보니, 제 차의 속도를 조금만 더 올리면 되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도 썰렁한 기념관 하나 있을 것이고, 가 보나 마나 문도 닫혔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갔더랬지요. 아담한 시골분교 자리에 신축한 기념관 앞에 "박진전쟁기념관 2004.6.25 개관"이란 플래카드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습니다. 신축건물이라 깨끗하게 단장된 건물은 아담하고 정겹게 보였습니다. 마당의 전시물을 대충 둘러보고 기념관내부에 들어서서 근무하시는 분의 안내로 방명록에 간단히 인적사항을 적은 후, 기념관 전시실로 들어서서 몇 발자국을 걷다가.. 저는 거기에 게시된 사진 하나를 보고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흑백사진 속의 젊은 미국인 한 사람이.. 외팔이 젊은 미국인 한사람이.. 사진속에서 저를 쳐다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분을 20여년 전에 만났고.. 어제 저는 그 분을 사진속에서 다시 만남으로 해서 우리의 이름없던 영웅이, 창녕군민의 전쟁기념관 속에서 저에게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역할을 뚜렷이 제게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그 분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의장대 후배들에게 추억의 글로 쓴 글이라 단어가 좀 거친 부분이 있습니다.*/ ============================================================== 제목: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해병의장대 시범(2001.08.18) ============================================================== 영어회화공부를 위해 VOA (Voice of America : 미국의 소리)라는 단파방송을 매일 인터넷으로 듣고 있다. 오늘 오후, 집의 애들도 교회로 다 가서, 한적한 일요일 오후에 VOA방송을 헤드폰으로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으니 문득, 15~6년 전에 만난 외팔이 외국인이 한사람 생각이 났다. 당시, 나는 결혼하기 전이었고, 지방의 중소기업을 다니면서 저녁에는 학원을 한 군데 다녔다. /*굳이 공부를 목표로 했다기 보다는 혹시 눈이 조금 먼(?) 여학생이나 하나 건져 볼까 하는 목적이 더 컸다.*/ 요즘이야 어느 영어학원을 가더라도 외국인 회화선생 한 사람 없는 영어학원이 없지마는 그 때는 지방중소도시에서 금발의 외국인이 한 사람 지나가면 멀리서도 돌아다 볼 정도로 외국인이 귀한 시기였다. 그런 어느 날에, 한국인 영어선생이 수업시간에 들어 오면서 같이 데리고 온 외국인 남자를 소개했다. 50대 초로의 금발신사. 외팔이! 왼팔이 어깨 부분에서 완전 절단된 외팔이.. 가까이서 보는 금발 외국인도 신기할 판에, 외팔이 외국인은 더욱 신기할 따름이었다. 더욱이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 것은 그가 걸치고 있던 상의였는데, 그 상의의 왼쪽 부분이 텅 비어 있던 것이 참 선명히도 기억이 난다. 그 상의는 우리가 군생활하면서 입던 민무늬해병대 상의였다. 참으로 궁금한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한적한 지방중소도시 영어학원에 그가 나타났으며, 어떻게 해서 외팔이며, 또 지금 입고 있는 저 민무늬의 해병대 상의는 뭐란 말인가... 그 궁금증을 한국인 영어선생이 상황설명을 해 주면서 해소되었다. 그 초로의 외국인은 미국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6.25전쟁에 참가한 미국해병대원이었다. 자기의 소속부대가 한국동란 당시, 처음 부산에 상륙해서 육로로..육로로 걸어서 행군을 해 갔는데, 대구 구미 어디에선가 북한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궤멸되었다고 했다. 자기는 그 부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라는 것이다. 얼마나 치열한 전투였는지는.. 그리고 얼마나 험한 고비고비를 넘겼는지는.. 설명을 하고 있는 한국인 선생의 이야기를 뒤에서 조용히 쳐다 보고 있는 그의 쓸쓸한 한 쪽 팔이 대변해 주고도 남았다. 자기는 그 전투에서 왼팔을 잃었고, 오직 홀로 살아 남어서, 매년 그 때가 돌아오면 자기 부대원을 기리기 위해, 매년 여름 혼자 한국으로 들어 와 해병대 복장을 하고 부산에서 대구까지 성조기와 태극기를 어깨에 걸고 도보행진을 한다고 했다. 여기 까지가 한국인 선생이 소개해 준 그 분의 소개였다. 우리는 한국인선생의 설명을 듣고 난 뒤, 그 초로의 미국인 신사가 보여 준, 6. 25 당시 미국해병대 복장에 AR 자동소총을 든 젊은 날의 자기 사진과 한국신문에 소개된 그 분의 사진을 보았다. 그러면서 우리는 되지도 않은 영어로 이렇쿵, 저렇쿵 여러 가지를 물어 보기도 했다. 또한 그 분은 자기가 6.25에 참전한 미국해병대원이었다는 것과 , 매년 한국을 방문하여 부산에서 대구까지 행진한다는 것을 안 포항 1사단 해병대에서 그를 초청했으며, 사령관도 예방을 하고, 해병의장대의 멋진 환영식도 받았는데, 엑셀렌트, 베리 굿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내밀고 눈가를 반짝반짝거리며 감격에 겨워했다. 그렇게 기억에 남을 만한 한 시간 동안의 영어회화시간은 끝났고, 그 이후로 몇 번 더 영어회화 시간에 그 분을 만났고, 나는 눈 먼(?) 처녀들 꼬시기 작전이 제대로 진척이 되지 않고, 영어회화 다닐 시간동안 한 잔이라도 더 마셔야 할 술 때문에 그 학원과의 인연은 끝났다. 그러구러, 바삐 술도 먹어서 몸도 축을 내어야되고 눈 먼(?) 처녀도 꼬셔야할 공사가 다망한 중에 해병의장대를 제대한 친구의 친구의 후배쯤 되는 녀석을 하나 만났다. 지방 중소도시는 웬만히 호구조사하면 다 아는 사람들로 엮어지게 되어있다. 너 해병 의장대? 나 해군 의장대. 몇 기? 나 통합기수 358기! 우리 때는 훈련소에서 훈련만 따로 받았다 뿐이지, 해군해병 신병훈련소가 같았기 때문에 통합기수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통합기수로 그 해병의장대 출신보다는 상당한 고참이 되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위의 외팔이 외국인을 만난 이야기와 포항 1사단에서 해병대 방문한 이야기도 들었다고 했더니.. 어~~~? 하면서 그 후배가 이야기 하기를 자기가 해병의장대 현역으로 근무할 때 그 행사를 참가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들려준 이야기는, 갑자기 사령부에서 연락이 오기를 미국에서 미국 해병예비역이 오는데 의장대에서 시범을 한번 해 주라고 하더란 것이다. 미국사람이면 미국사람이지 무슨 해병의장대가 일일히 미국 민간인 오는데, 행사까지 뛰어야 하는가 하고 궁시렁 궁시렁 말이 많았다고 한다. 사단장의 직접적인 명령이라 거역을 못하고 정말 힘들게 준비를 하고, 사열대 앞에 가서 행사준비를 하고 도열을 했는데, 넓은 단상위에는 의자하나 달랑 있더라고 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해병대 상의를 걸치고 나타난 그 외팔이 미국인 해병아저씨. 적지않은 시간동안 들려 준 정훈장교의 설명을 차렷자세로 듣던 포항 1사단 해병의장대원들은 누구도 아무 소리를 하지 않았지만, 가슴 속에 뜨거운 무엇이 올라 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잠시 후 해병의장대원들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해병의장대 그네 들이 바칠 수 있는 최고의 경의를 담아, 그 외팔이 해병선배에게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아~ 안 있심니꺼..단상위에 대통령이 있다케도 그리는 못 했을 낍니더.. 마~ 머시 가슴속에서 물컹 올라 오는데... 다른 때는 행사마치고, 들어 가모, 고참들 한테 행사찜빠냈다고 집합하는기 겁나던데.. 그 때는 아무도 말 안하는기라예.. 지금 생각해도 멋진 행사였지 싶습니더.." 우리는 이름없는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그가 영웅이었으며, 우리의 존경을 받기에 한치의 부끄럼이 없는 사람임을 알려 줄 수 있는 것이다. ======================================================================= 기억을 더듬어 썼던 글인데, 어제 박물관에서 확인한 바는 그 분의 오른쪽 팔이 없으셨습니다. 대구지역 쯤이이라고 했는데 비슷하지만, 창녕지역 방어에 투입되셨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의 이름 없는 영웅은 러스터(한국명 나성도) 씨이며 한국 방문중인 2002년 한국에서 사망 하셨고, 그 분은 자기의 주검을 한국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셨지만 지금 미국 워싱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고 기념관 안내문에 써 있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창녕지구 방어선의 중요성과 러스터씨를 기념할 수 있도록 기념관을 만들어 주신 창녕군민과 친절한 안내와 도움주신 기념관 근무자님께 감사 말씀드립니다.*/ |
첫댓글 러스터씨는 박진전쟁의 증이이며, 전쟁이 끝나고도 오랬동안 남지와 인연을 맺으며 살았기 때문에 고곡(칠현)에서는 러스터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